해와달이 사는 집
2013년 춘계 성지순례(영동 반야사, 김천 직지사) 본문
★ 일 자 : 2013. 04. 21 (일) 날씨 - 맑음
★ 행 선 지 : 충북 영동 반야사, 경북 김천 직지사
★ 참가 인원 : 직장 동료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함께...(365명, 버스 9대)
◈ 순례기
봄이 무르익어가는 4월 하고도 셋째 주 일요일인 21일.
바쁜 직장생활로 인해 다소 소흘했던 가족과 함께 일상속에서 잠시 벗어나 매년 봄이면 전국의 이름난 사찰을 찾아 떠나는 성지순례길에 오른다.
이번에 찾아가는 순례길은 충북 영동의 반야사로 황간 계곡길을 따라 석천 물길을 오르면서 시작된다.
여행은 담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여럿이 약속된 여정을 따라 도는 여행길은 호젓함을 즐기며 "旅行"이란 이름표를 붙잡고, 추억의 부스러기를 줍거나, 소소한 기쁨을 찾아내는 것은 스스로가 돌아보는 안목과 발품, 눈품의 몫이고, 함께 하기에 충만해지는 기쁨과 여럿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 또한 쉽게 경험치 못하는 삶의 맛임을 알게 되는 단체여행.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를 어제 지나쳤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요즘의 날씨는 통 종잡을 수가 없다.
며칠 전 내린 비에 고산지대에는 때늦은 눈이 내려 반야사를 향한 고속도로변에서 바라본 팔공산과 구미 금오산, 그리고 이곳 영동 반야사를 품고 있는 백화산 또한 산정(山頂)에는 하얀 설탕가루를 뿌려놓은 듯 고깔모자를 뒤집어 쓰고 있다.
그 영향 탓인지 스치는 바람은 제법 차갑게 느껴지고 얇은 옷을 껴입은 몸속으로 파고드는 싸늘한 바람에 움츠르들곤 하지만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소리는 한결 밝고 경쾌하기만 하다.
당연지사가 아니겠는가.
물길도 시절을 따르기에 달려온 봄에 밀려 흐르는 겨울을 전송하느라 여울목 마다엔 곳곳이 물보라를 일으키고 있다.
오가는 시절이야 늘 정직하고 순리인 것을...
이곳이 반야호 인가 봅니다.
호수 너머로 멀리 백화산 산정에는 전날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찾아온 길손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네요.
길이 좁아 한동안 멈칫거리며 달리던 버스에서 내뱉어지는 황급한 발자국 소리에 계곡의 고요는 흔들리고 제 집을 찾아든 부산스런 방문객들에 놀란 산새들은 떼 지어 후두둑 나무 사이를 가른다.
석천과 어깨동무 해 오르는 반야사 가는 조붓한 길은 좁았다 넓어지고 격하게 꺾였다 부드럽게 풀어지는 변화무쌍한 물길로 내내 절경을 이룬다.
반야호 지근이라 넓어진 물길 탓인지 물결은 고요하고 물빛은 짙다.
반야사 경내 주차장이 비좁은 관계로 버스 3대만 진입을 하고,
나머지 6대는 절 입구의 널찍한 주차장에 파킹을 한 뒤
하차한 순례단은 일주문을 향해 걸음을 옮겨갑니다.
<白華山 반야사> 일주문을 지납니다.
일주문(一柱門)...
신성한 가람에 들어서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불법의 청량수로 말끔히 씻고 일심으로 진리의 세계로 향하라는 상징적인 가르침이 담겨있는 곳일게다.
이 문을 들어서면 부처님의 경지이다. 그냥 마음이 차분해진다.
"산사에 올라서면
잔물결처럼 밀려드는
청아한 풍경소리
번뇌로 얼룩진 가슴
맑은 선율에 잠겨
샘물처럼 흘러내린다.
인적 뜸한
불당에 들어서면
늦가을 햇살처럼
청량한 향 연기가
살며시 손 내밀어 눈시울을 쓸어 내린다."
-손정모님의 <산사풍경>에서-
반야사로 들어서는 입구, 종무소 앞에서
반야사 지킴이 삽살개인 '청산이'가 마중을 나왔네요.
북실한 털을 지닌 '청산이'의 모습에 반야사의 기운도 한결 부드럽게 다가옵니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가람의 중심이 되는 대웅전(大雄殿)을 가운데에 두고
좌측엔 극락전(極樂殿), 우측에는 새로 건축한 지장전(地藏殿)이 자리하고 있네요.
휘황하거나 거대한 사찰의 모습이 아닌,
정갈함과 경건함속에 기도 도량의 단아함이 깃든 반야사는
산사로의 올곧은 맥을 지켜내고 있는 듯 했답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 본존불을 중앙에 모시고
좌보처에 문수보살, 우보처에 보현보살을 봉안하였고,
모두 경주 옥석으로 제작되어 도금을 했습니다.
지혜의 도량 문수보살이 출현하셨다는 유서깊은 사찰 반야사는
백화산 줄기의 바위 파쇄석이 만든 호랑이 문양으로 더 유명한 사찰입니다.
반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며 신라 성덕왕 19년(720) 의상대사의 10대 제자중 수제자인 상원(相願)스님이 창건, 1325(충숙왕 12)년에 중건하였고 1464(세조 10)년에는 크게 중창된 지혜를 주관하는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사찰이다.
반야사에는 보물 제1371호인 3층석탑, 500살 먹은 배롱나무와 꼬리를 세운 호랑이 형상을 3경이라 부르며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전날 내린 눈이 채 녹지 않아 찾아온 순례객에게
뜻하지 않은 기쁨을 선사해주는 백화산의 모습입니다.
백제계 석탑양식의 삼층석탑(보물 제1371호).
원래 석천계곡 '탑벌'에 있던 것을 1950년에 이전한 것이라고 합니다.
고려 초기 석탑이라는 삼층석탑은 유유한 시간을 버텨온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고고한 자태다.
삼층석탐은 보물 제1371호로 지정된 성보로써, 원래 반야사 북쪽의 석천계곡 '탑벌'에 있던 것을 195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고 한다.
반야사에서 가장 좋았던 풍경은 탑을 둘러친 얕으막한 나무 울타리다.
그동안 여러 가람과 산사를 다니면서 항상 거슬렀던 것이 '보호'란 미명하에 탑신을 가린 쇠울타리에 갇힌 석탑들의 서글픈 모습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사찰들이 반야사의 저 낮은 울타리를 닮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낮은 돌담이 둘러쳐진 반야사 경내는 고요하기만 하고,
적목당을 뒷배경으로 하고 범종각을 바라보며
오롯이 서있는 삼층석탑이 정겨워 보입니다.
무학대사가 꽂아둔 지팡이가 둘로 쪼개졌다는 5백년 된 배롱나무.
극락전 앞의 500살이 된 쌍둥이 배롱나무의 나신이 아직도 떨궈내지 못한 산사의 겨울 자취를 전하고 있다.
저 배롱나무는 조선 건국 당시 무학대사의 주장자를 꽂아 둔 것이 둘로 쪼개져서 쌍배롱나무로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가까운 곳에 있으면 붉은 빛깔 아름다운 배롱나무꽃이 무성하게 피어 눈이 즐거움을 맛볼 텐데 하는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2000년에 제조되었다는 범종각.
범종과 운판만 걸려 있네요.
목어와 법고는 어디로 출타를 간 모양입니다.^^*
법당이 좁아 대웅전 앞 마당에 자리를 깔고 앉아
주지스님의 법문을 듣는 야단법석(野壇法席)이 열리고 있습니다.
백화산 기슭에서 흘러내린 돌무더기가 주변 수목과 경계를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졌다는 호랑이 형상이 맨 먼저 눈길을 끌고 있네요.
아쉽게도 주위의 나무에 잎이 아직은 없어 형상만이 자리잡고 있지만
여름철 푸른 나무들과 어우러지면 더욱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끼는 후배 동료와 함께...
석천을 끼고 나있는 오솔길을 따라 문수암을 향한 걸음에는
지난 밤 내린 비에 청류는 흐려져 있지만
물 속에 녹아드는 또 다른 계절을 만나게 됩니다.
위 좌측부터 시계 방향으로...
줄딸기꽃, 무스카리, 박태기나무, 하얀민들레
이 멋진 풍경의 주인공인 기암절벽은 망경대(望景臺)라 불리고
그 위에 절묘하게 들어선 문수전(文殊殿).
반야사 앞을 흐르는 석천을 따라 계곡으로 들어가면 기막힌 절경이 펼쳐지는 망경대(望景臺)라는 절벽이 기다리고, 절벽 위엔 문수전(文殊殿)이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한 폭의 동양화을 감상할 수 있다.
망경대 아래 개천가에 원형욕조 형태의 물에 잠긴 바위가 있는데, 세조가 목욕 후 피부병을 나았다는 영천(靈泉)이라고 전해온단다.
세조가 말년에 피부병으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는 기록도 있고, 이곳에서 병을 고쳤다는 설화는 어느 정도 신빙성도 있을 듯 하다.
강원도 오대산에 있는 상원사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온다고 한다. 세조와 문수동자의 설화가...
문수암 오름길에 내려다 본 석천의 풍광은
그냥 바라만 보아도 좋은 곳...
물 속의 또 다른 세상을 보며
더 즐거운 마음이 생기는 그런 곳이었네요.
두 갈래로 갈라진 계곡을 품고 있는 아름다운 모습을 한 장에 담지 못하는 아쉬움이 내내 발길을 잡는다.
항공촬영을 한다면 가능하겠지...
이 암자의 바람은 맑고 고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꽤 가파르게 올라온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 어떤 소원이든 하나 쯤은 들어 줄 듯... 인정스러워 보였다.
아니 소원이 이루어 지지 않아도 그냥 두줄기의 아름다운 강줄기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맞아들이는 그 시원하고 속을 확 뚫고 지나가는 짜릿한 쾌감을 선물하는 것만으로도 그냥... 소원만큼의 가치를 다 한다.
사찰에서는 호랑이를 만나고 산꼭대기 암자에서는 시원한 두 줄기의 흐르는 계곡의 장관을 만나고 그리고 상쾌함의 극치를 만난다.
문수암이 자리한 곳에서 내려다보면 석천 물줄기와
호랑이 모양의 돌무지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찾은 곳이었기에 더더욱 황홀하게 느껴졌던 풍경이었던 듯 싶다. 반야사 문수암에서 내려다보는 풍경 역시 우리나라에서 꼭꼭 숨겨져 있는 비경 중에 한 곳이라 말하고 싶다. 저 물길은 한천8경이라 불리는 곳곳을 적시며 금강으로 흘러든다.
가파르고 험난한 계단을 올라 문수암에 당도하니 어떻게 이렇게 가파르고 험준한 곳에 전각을 지었을까 의아스럽다.
그 안에 문수보살과 동자들이 모셔져 있다. 이처럼 힘들게 지은 전각에 이토록 찾아오는 길이 힘든 곳까지 와서...
그러한 노력과 정성으로 문수보살에게 기도를 드린다면 어찌 문수보살이 이들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문수보살이 사자을 타고 있는 모습의 문수전입니다.
조선 세조 10년 2월에 세조가 속리산 복천사에 9일 동안 머물며 법회를 열고는 신미대사의 청을 받아 중창을 마친 반야사를 들렀다고 한다.
절집을 둘러보던 세조 앞에 문득 사자를 탄 문수보살이 나타나서 왕을 이끌고 물이 솟는 영천(靈泉)으로 인도했다. 세조는 문수보살이 시키는 대로 영천의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한 뒤에 씻은 듯 피부병이 다 나아서 황홀한 기분으로 절에 들어와서 어필(御筆)을 하사했는데 이것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깊고 깊은 석천계곡이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풍경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문수암을 다녀온 후 '보물찾기' 시간이 주어지고...
보물을 찾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시간을 갖고서
아쉽지만 반야사를 빠져나와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며 바라본
반야호의 물 속에서 또 다른 계절을 봅니다.
그리고 내 마음도 함께 만납니다.
반야사를 떠난 버스는 경상도의 오랜 도시 '김천'하면 떠오르는 직지사를 향해 달려간다.
30여년 전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 처음 찾았던 직지사. 아련한 기억속의 추억을 되살려보려고 머리를 애써 굴려보지만 그때의 모습은 이미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희미한 옛기억조차 가물거린다. 그 후 한번인가 이곳을 찾았었지만 그 역시 오랜 시간이 흐른 터라 천불전 외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머리속도 고장이 나기 시작하나보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直指寺) 입구에 당도하니 주말 사찰을 찾은 수많은 참배객, 행락객들이 붐비고 있어 순례단은 후문을 통해 곧장 경내로 진입하여 성지순례단이라는 혜택을 톡톡히 누린다. 문화해설사의 친절한 설명을 듣기 위해 일주문을 들어서며 합장반배로 인사를 여쭙고 직지사 산문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는다.
황악산 직지사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일주문에는
조선 정조 때의 최고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의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직 지 사(直指寺)
경상북도 김천시 대항면 운수리 황악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이다. <사적기 事蹟記>에 의하면 신라시대인 418년(눌지마립간 2)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선산 도리사(桃李寺)를 개창할 때 함께 지었던 절이라고 한다.
절의 이름에 대해서는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한 후 멀리 황악산 직지사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저 산 아래도 절을 지을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다고 하였으므로 하여 직지사(直指寺)라 이름했다는 설과, 성주산문의 조사(祖師) 무염대사가 머물렀던 심묘사에 부속된 절로 남종선의 가르침인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直指人心見性成佛)을 표방한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한 고려시대에 능여대사(能如大師)가 이 절을 세울 때 자[尺]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자기 손으로 측량하여 지었다고 해서 직지사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 645년(선덕여왕 14) 자장율사가 중창한 이래로 930년(경순왕 4), 936년(태조 19)에 천묵대사(天默大師)와 능여대사가 각각 중창하여 대가람이 되었으며,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사명대사(四溟大師)가 본사(本寺)에 출가(出家)하여 신묵 대사(信默大師)의 제자가 된 것이 유명하거니와, 이로 인하여 직지사는 배불(排佛)의 그늘 속에서도 사운(寺運)을 유지할 수 있었다.
30세에 직지사 주지(主持)가 된 사명대사는 이후 임진왜란(任辰倭亂)이 발발(勃發)하자 구국제민(救國濟民)의 선봉(先鋒)에서 큰 공을 세웠음은 너무나 유명하다.
이렇게 구국(救國) 사명 대사의 공로로 인하여 직지사는 조선(朝鮮) 8대가람(八大伽藍)의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300여 소속사암(寺庵)을 거느리게 되었다.
현재는 국내 25본산(本山) 가운데 하나로서 제8교구(第八敎區) 본사(本寺)이며 소속 말사(末寺) 54개 사찰에 이르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1735 중건)을 비롯하여 천불이 모셔져 있는 비로전(1661 창건)·약사전·극락전·응진전·명부전·사명각(泗溟閣) 등이 남아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금동6각사리함(국보 제208호), 석조약사불좌상(보물 제319호), 대웅전앞3층석탑 2기(보물 제606호), 비로전앞3층석탑(보물 제607호), 대웅전삼존불탱화 3폭(보물 제670호), 청풍료앞삼층석탑(보물 제1186호) 등이 있다.
그 뒤로 대양문(大陽門)...
대양문은 일주문과 금강문 사이에 있으며 문 양쪽에 인왕이 그려져 있는데,
부처님의 큰 광명을 상징하기 위해 1990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천왕문(天王門)
금강문과 불이문 사이에 있는 문으로 임진왜란의 병화를 모면한 중요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근래 다시 채색되어 다소 고색을 잃었으나, 직지사의 귀중한 유품이며 천장의 판벽비천상(板璧飛天像) 역시 우아합니다.
사방 벽에는 용과 팔부신중 등이 그려져 있답니다.
만세루(萬歲樓)
황악루와 함께 직지사에 있는 두 개의 누각 중 하나입니다.
직지사 대웅전과 삼층석탑
문경 도천사 동․서 삼층석탑(聞慶 道川寺 東․西 三層石塔) 보물 제606호.
대웅전 넓은 앞마당에는 동서로 쌍둥이처럼 닮은 삼층석탑 2기가 서있습니다. 이 두 탑은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석탑이라고 하지만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조성한 것이라는 말이 전해질 뿐 정확한 조성 연대는 모른다고 합니다. 원래는 경북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에 있는 폐사지 도천사(道川寺) 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74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하네요.
한동안 ‘직지사 대웅전 삼층석탑(直指寺大雄殿三層石塔)’으로 불리다가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소재지도 바뀌고 이름마저 바뀐 이 석탑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지만 등을 대신해 세상을 밝혀 달라는 바람을 담은 작은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석등 안을 들여다보며 부처님 전에 108배라도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어 봅니다.
직지사 대웅전.
앞에는 좌우에 삼층석탑에 세워져 있는데 비로전(천불전)앞의 석탑과 함께 1974년 문경의 도천사터에 쓰러져 있는 것을 이곳으로 옮겨와 보수하여 다시 세운 것이라 합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라 하는데 상층부의 보수흔적이 아직 선명하네요.
문제는 대웅전 편액의 글씨...
저건 역적 이완용의 작품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1923년 66세의 이완용이 말년에 직지사의 현판 두 점을 써서 내려 보냈는데 바로 대웅전과 천왕문 글씨입니다.
이걸 확 뽀개서 내 버려야 한다는 이도 있고 그냥 둬야 된다는 이도 있는데 생각은 각자의 몫입니다.
직지사 대웅전 부처님과 삼존불탱화.
직지사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짜임새가 있으며 높은 천장에 화려하면서 절제된 장식은 종교적인 장엄을 더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수미단 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동쪽에 약사불과 서쪽에 아미타불이 모셔져 있고,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신 수미단은 효종 2년(1651)에 조성된 것으로 용, 물고기, 개구리, 연꽃 등 여러 무늬들을 소박하게 조각하였습니다.
불상 뒷벽에는 각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그린 삼존불탱화(석가모니 후불탱, 약사후불탱, 아미타후불탱)가 걸려 있는데, 보물 제670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비단 바탕에 그린 이 불화들은 모두 길이 6m가 넘는 거작으로, 영조 20년(1744)에 직지사의 세관스님을 비롯한 16명의 화승들이 그린 것이라 합니다.
포대화상
직지사의 역사와 유래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문화해설사.
해박한 지식에 모두들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관음전(觀音殿)
일명 '원통전'이라고도 하며, 관세음보살을 모신 이 불전은 1978년 당시 주지셨던 녹원스님이 중창한 건물로 팔작지붕에 정면과 측면 각 3칸씩의 규모를 하고 있습니다.
기둥에 붙은 패찰에는 '한국33관음성지(韓國三十三觀音聖地) 제20호 直指寺'라 적혀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비로전 좌측에 위치한 이 전각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에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 건물로서 '지장전(地裝殿)' 혹은 '시왕전(十王殿)'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능여대사에 의해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현종 9년(1668년) 팔상전(八相殿)으로 중건되었고, 그 후 다시 명부전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곳이 천불상을 모시고 있는 비로전(毘盧殿)입니다.
직지사에서는 대웅전 다음 두번째로 큰 전각 건물입니다.
도천사지 삼층석탑(道川寺址 三層石塔) 보물 제607호.
비로전 앞에는 대웅전 앞 '문경 도천사 동․서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1974년 문경의 도천사지에서 옮겨온 삼층석탑 1기가 서 있는데, 도천사지(道川寺址)는 문경 산북면 서중리(聞慶市 山北面 書中里)의 웅창(熊倉)마을에 있던 폐사지라 하네요.
본래 '금천'이라는 하천변에 3기가 나란히 서 있었는데, 일제시대 도굴꾼에 의해 훼손되어 주변에 흩어져 있었다 합니다.
비로전 내부의 천 개의 불상들.
김천 황악산자락 직지사(直指寺)에는 비로전이란 이름을 가진 천불전(千佛殿)이 유명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절집에는 천불전(千佛殿)이란 이름을 가진 전각이 꽤 많은데요. 이곳 김천 직지사와 해남의 두륜산 아래 대흥사, 지리산 코재 밑에 화엄사, 그리고 강화도의 보문사 천불전이 대체적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천불전이란 보통 현겁천불(賢劫千佛)을 모시는 곳으로서, 현겁(賢劫)이란 현인이 많이 나타나는 시기를 뜻합니다. 현겹의 시간은 현재 우리 시간으로 약 13억년을 뜻하며 이 시간속에서 1,000명의 부처님이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천불전 안에는 이렇게 나타날 부처님 천불(千佛)을 모시는 곳인데 직지사 천불전에는 삼신불 중에 한 분인 법신의 비로자나불을 중앙에 모시고 있고 그 주위에 천불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직지사의 천불전(千佛殿)은 전각현판에는 비로전(毘盧殿)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불상이 처음 조성되어진 시기는 조선 효종 때 경잠(景岑)스님에 의하여서입니다. 이후 임진왜란 때 절이 많이 소실되었지만 이곳 비로전은 그대로 살아 남았는데 왜놈들이 천불상 일부를 훔쳐가버려 오랫동안 숫자가 일치하지 않다가 정조 때 이를 다시 천불상으로 맞췄다고 합니다.
이곳 천불상은 나무로 된 14단에 모셔져 있는데 불상의 재료는 경주옥돌입니다. 천불이나 되지만 모양이 모두 다르게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고 이 중 특이하게 한 분의 부처님이 올 누드로 서 있습니다.
득남을 하지 못한 여성이 이곳에 들러서 한 눈에 옷을 입지 않은 동자상의 부처님을 발견하면 틀림없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이 있어 한때는 아들낳기를 소원하는 여성들로 붐볐던 곳입니다. 요즘이야 딸, 아들 구별이 없는 세상이었지만 이전만 하더라도 철거지악(七去之惡)이라 하여 사내아이 못낳는 것도 쫒겨나는 이유가 되었으니 아득한 이야기입니다.
약사전(藥師殿)
약사여래를 주불로 모신 전각으로 약사불(藥師佛)은 동방 정토의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약사전은 동쪽을 보고 있지요.
반면 아미타불이 서방 정토의 부처이며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은 서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통 서쪽에는 약사전이 있고 동쪽에는 극락전이 있어 서로 마주보게 되는 셈이지요.
황악루(黃岳樓)
이 건물은 비로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누각으로 대웅전 영역으로 들어가는 곳에 만세루가 서 있는 것과 마찬가지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원래 대웅전 앞에 있었으나 비로전 앞으로 이전하였다고 하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팔작지붕을 한 2층 누각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문 앞의 늙은 살구나무는 어린 시절의 박정희 대통령과 인연이 있다고 하네요.
직지사는 신라시대 때 지어진 건물들은 임진왜란 때 거의 소실되고,
그 이후 재건된 건물로 이루어진 사찰인데
지금도 새로운 건물들이 계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극락전(極樂殿)과 천불선원(千佛禪院)으로 들어가는
대문 격인 누각 '안양루(安養樓)' 뒤로 극락전(極樂殿)이 살짝 비치네요.
극락전(極樂殿)과 천불선원(千佛禪院)
황악루 앞을 지나 아마도 직지사 경내에서 가장 깊고 엄숙한 곳에 해당되는 듯한 곳으로 걸음을 옮겨봅니다. 능여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길 위로 걸린 짧은 돌다리를 건너니 직지사의 또 다른 영역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직지사 내에서는 서전(西殿)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천불선원(千佛禪院)’이며 출입을 금한다는 표식이 다리 끝에 세워져 있어 나머지는 안내서를 보며 상상력을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네요.
극락전은 중생이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신 전각이며, 그 좌우의 황경다실과 동상당은 참선을 하는 선원(禪院)이라고 합니다.
법화궁 앞마당의 장독대
법화궁(法華宮)
설법전(說法殿)으로도 불리는 법화궁은 식당을 포함한 복합기능 건물로 불자들의 수련시설이라고 하는데, 직장에 새로이 적을 두는 신입사원들은 이곳에 입소하여 템플스테이 체험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이 건물은 남다른 감회가 서려있을 겁니다. 이웃의 남월료(南月寮)는 직지사의 승가대학이며 승려의 교육기관인 강원(講院)이라고 합니다.
좌측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라일락 2종류, 만첩홍매화, 지면패랭이
현재 직지사의 규모를 알 수 있는 만덕전(萬德殿)
강당, 강의실, 회의실과 숙소를 갖춘 대형 건물로 최근에 세워진 것 같습니다.
직지사 전체를 한바퀴 돌아보고
지금쯤은 한적하리라 생각되어 만세루를 지나
먼저 대웅전을 찾았을 때 마음먹었던 108배를 올리기 위해
아내와 함께 큰법당을 찾아
아이들의 건강과 무운장구를 빌고 또 빌어봅니다.
위 좌측부터 시계방향으로...
종지꽃(미국제비꽃), 민둥뫼제비꽃, 조팝나무, 제비꽃
직지사를 내려오는 길은 맑은 햇살과 소나무로 우거진 참으로 아름다운 숲길입니다.
넓디 넓은 직지사 경내를 돌아다니며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은 당우들을 찾아보고서 두 세달 후에 태평양을 건너 장도에 오르는 아들의 앞날에 부처님의 크신 가피가 늘 함께 하며 돌보아 주시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공양물에 담아 부처님께 108배를 올리고 만세루를 지나 일주문을 빠져 나오며 합장 반배로 예를 표하고 매표소를 향한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고 오랜 세월 직지사를 지켜온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키재기라도 하는 듯 쭉쭉 뻗은 숲길은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는 멋진 산책로라 걷는 내내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
아주 운치있고 걷기에 좋아 등산로 입구가 있는 후문 입구까지 걸어보면서 오래 전 이곳을 찾았을 때를 생각해 보지만 머리속엔 온통 황악산 정상을 올라보고픈 생각으로 꽉 차있다. 언제 기회봐서 다시 찾아와 황악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에 올라 이곳 직지사를 내려다 보리라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하고 오늘은 여유롭게 성지순례의 참의미를 새기면서 맨날 산에 쫓아다니며 바쁜 걸음 치던 발걸음을 이 순간 만큼은 양반걸음으로 바꿔 뒷짐지고 느릿느릿 걸어가면서 모처럼의 한가로움을 만끽하는 망중한을 즐겨본다.
속세의 시름과 살이로 젖었던 마음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한결 정갈한 심사로 더욱 풍성하게 추억을 담은 오늘의 순례길이 훗날 미소를 머금으며 반추해 볼 수 있는 멋진 기억속의 나들이가 되리라 생각하며 귀가를 서두르라는 듯 시동을 걸고 기다리고 있는 버스에 몸을 싣고 인원점검을 마친 후에 곧장 경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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