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해동 최초가람 태조산(냉산) 도리사와 아도화상의 흔적을 찾아서... 본문
해동 최초가람 태조산(냉산) 도리사
그동안 말로만 들어왔던 구미시 해평면에 있는 '도리사'를 찾았다. 천년이 훨씬 넘은 고찰이라는 사실만 알고 있었는데 얼마 전 직지사로의 성지순례 때 문화해설사로부터 전해들은 아도화상이 도리사를 창건하였는데 그곳에서 손을 뻗어 가리킨 터에 절을 지었으니 바로 직지사라는 설명에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무작정 도리사를 네비에 입력하고 안내하는 대로 도착한 도리사는 주변에 아름답고 푸르른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도리사 뒷편 태조산까지 내친 김에 올라보니 등산코스로도 아주 훌륭해 꼭 다시 찾아오고픈 매력을 지닌 멋진 절이었다.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팔작지붕을 올린 우람한 모양의 일주문.
여기서 도리사 본당까지 거리가 약4.5킬로미터에 이릅니다.
도로 좌우로 서있는 느티나무 가로수의 연두빛이 너무 시원스럽네요.
드라이브 코스로 멋진 길인 것 같습니다.
도리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올라선 절 입구의 계단길에서 바라본
도리사의 풍광은 첫 눈에도 범상치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도리사 안내도
도리사(桃李寺)
해동최초가람 태조산 성지 도리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 직지사의 말사로서, 선산과 구미의 남북을 꿰뚫고 흐르는 낙동강의 동쪽 구미시 해평면 송곡동 태조산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로 신라 19대 눌지왕 대(417)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이 불교가 없었던 신라에 포교를 위해 처음 세웠다는 해동불교의 발상지이다.
아도화상은 중국에서 현창화상에게 선도를 배워 19세에 자명을 받아 선산 도개부에 있는 모례의 집에서 굴실을 지어 거처하다가 시봉자가 늘어나게 되어 진기승지를 찻아 결암봉불 하던 중 이곳에 오색도화가 설중에 만개하여 사호를 도리사라 하니 해동 최초 가람으로 신라불법의 초전법륜지인 것이다.
신라 불교 초전법륜지로 성지화된 이곳은 1976년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려 올 때 모셔온 세존 진신사리가 세존사리탑 보수 공사중 금동육각사리함(金銅六角舍利函)에 봉안되어 발견되었다.
금동육각사리함은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이 되며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1968년 봄 아미타 좌상 도금시 불상 밑에서 1731년 영조 7년 때의 중수기가 발견되었으며, 극락전 뜰앞에 있는 보물 470호인 도리사 화엄석탑은 일반적인석탑과도 특이한 양식이다. 그 형태는 여러 개의 석주를 맞대어 기단부를 형성하였고 다시 그 상층부에 중층의 탑신부와 상륜을 배치한 특수형식으로 귀중한 문화재로서 옛 향기를 품고 있다.
그리고 아도화상이 도를 닦았다는 좌선대 옆에는 아도의 사적비겸 자운비가 있는데 앞면에는 인조 17년에, 뒷면에는 효종6년에 새긴 아도의 사적이 음각되어 있다. 현존 건물은 법당 극락전과 삼성각을 비롯하여 선원과 2동의 요사, 그리고 세존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다.(도리사 홈페이지 발췌)
울창한 아름드리 고목들이 연출해내는 푸르름이
신라 최초 가람의 위엄을 한껏 높여주고 있는 듯 합니다.
설선당(說禪堂)
어린이들을 위한 '소나무야 놀자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1박 2일의 템플스테이도 운용하고 있네요.
수선료(修善寮)
앞에서 보면 2층이고 뒷편에서 보면 단층구조로
아래층은 공양간, 윗층은 종무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천년 고찰이라 퇴색해진 단청의 색감이 더 정겨움을 느끼게 합니다.
極樂殿(극락전)
신라에 불교를 전하는 아도화상이 지었다는 원래의 도리사는 불에 타서 없어졌으나 "도리사 금당암 중창기"(1807)와 "선산 도리사 법당 중수(1876)에 따르면 도리사에는 금당암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전각은 조선시대 후기 말 건축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318호로 지정되었다.
극락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
도리사 목조 아미타여래좌상(桃李寺 木造 阿彌陀如來坐像)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아미타불은 무병장수하고 극락왕생을 보장하며 자비를 베푸는 분이다. '극락'이라는 말은 『미타3부경(彌陀三部經)』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도리사 극락전에 모셔진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은 1600년에 만들어 개금(改金)한 것으로 높이 129cm, 견폭 61cm, 슬폭 93cm이다.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평면적이고 네모진 넓은 얼굴이 당시 불상 조각의 양식을 엿보게 한다. 머리에는 낮은 나발(螺髮)에 작은 육계를 갖추었다.
이 불상은 도리사의 극락전(極樂殿)에 모셔진 아미타여래좌상으로 재질은 향나무이고 그 위에 금을 입힌 부처이다.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에 낮고 작은 살상투를 갖추었다. 얼굴 표정은 위엄과 자비를 잃지 않은 조선시대의 원만한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손 모양은 양손을 무릎 위에 얹고 왼손은 바닥을 위로 보게 하여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장지를 맞대었고, 오른손 역시 왼손과 같은 형태이나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법의는 두 어깨를 모두 가린 통견이며 두 무릎까지 덮여 있는데 균형과 단정함을 지니고 있다. 불상의 모습과 조각 수법 등으로 보아 17세기에서 18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목조건물로 내부 닫집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는데
실제 보기에도 화려하고 솜씨가 일품입니다.
포대화상(布袋和尙)
당나라 명주 봉화현 사람으로 법명은 契此(계차)이다.
뚱뚱한 몸집에 얼굴은 항상 웃으며 배는 풍선 처럼 늘어져 괴상한 모습으로 지팡이 끝에다 커다란 자루를 걸어 메고 다니는데, 그 자루 속에는 별별 것이 다 들어있어서 무엇이든 중생이 원하는대로 다 내어주어서 포대스님이라고 불렀다.
무엇이든 주는 대로 받아먹고 땅을 방바닥으로 삼고 구름을 이불 삼고서 어느 곳에서든지 벌렁 누워 태평하게 코를 골며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면서 세속사람들과 같이 차별없이 어울리면서 길을 가르치고 이끌었다.
연꽃과 같은 삶이었다. 그는 자연과 더불어 자고 깨었으며 자연과 더불어 행하였고 대자연으로 돌아간 걸림없는 대자유인이었다. "천백억으로 몸을 나누어도 낱낱이 참 미륵일세 항상 세인에게 나뉘어 보이건만 아무도 미륵임을 아는 이 없네"라는 게송을 남기고 반석 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하였다.
'아도화상사적비(阿度和尙事蹟碑) 및
도리사 불량답(佛糧畓) 시주질비(施主秩碑)'
(경북유형문화재 제291호)
'아도화상사적비'는 아도화상의 행적을 기록해 놓은 비로,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그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앞면에 이무기를 뒷면에 네 마리의 용을 조각하고 그 사이마다 구름, 용을 새겨 장식하였다.
비몸 앞면에는 위쪽에 가로로 전서체로 된 비의 이름을 새겨두고,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뒷면에는 '자운비(慈雲碑)'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그 끝에 건립연대를 밝혀두어 조선 효종 6년(1655)에 세운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리사 불량답시주질비'는 도리사에 논과 밭을 시주한 이의 이름과 논밭의 규모를 적어놓은 비이다.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꽂아두고, 머릿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머릿돌은 앞뒷면에 굵은 선으로 연꽃봉오리와 줄기를 조각하였고, 두 옆면에는 2중으로 된 원모양의 띠를 새겨 장식하였다.
꼭대기에는 꽃봉오리 모양을 한 머리장식이 우뚝 솟아있다.
앞뒷면에 세로로 새긴 비문은 앞면 첫 줄에 비의 이름을 적은 후, 그 아래에 논밭을 시주한 자와 그 규모를 밝혀두었다.
비문 끝에 남긴 기록을 통하여 숙종 38년(1712)에 비를 세웠음을 알게 되었다.
17세기 중엽~18세기 초에 세운 작품들로, 비문이 갖는 역사적 의미나 조각의 솜씨 등은 충분히 활용할 만한 가치를 지닌다.
아도화상 좌선대
아도화상이 도리사에 머물며 참선하였다고 전해지는 곳입니다.
좌선대에서 내려왔던 돌계단을 되올라 극락전을 향해 올라갑니다.
도리사 삼층석탑(보물 제470호)
도리사 화엄석탑(보물 제 470호)
이 탑은 도리사 극락전의 앞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 3.3m이다.
일반 석탑과는 전혀 다른 그 형태를 달리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지면 위에 10매의 길게 다듬은 돌을 놓고 그 위에 탑의 기단 부분을 세웠다. 기단은 사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의 각면에 직사각형의 판석 6~7매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고,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다.
탑신 부분은 3중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얽거나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벽돌탑을 모방한 계열에 가깝다.
조각 양식과 돌 다등은 수법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고려시대 중엽으로 추정된다.
태조선원(太祖禪院)
태조선원(太祖禪院) 앞면에는 두 개의 편액과 주련(柱聯)들이 있었는데,
'太祖禪院' 현판글씨는 3ㆍ1운동 민족대표의 한 분인
위창(韋滄) 오세창 선생의 필체라고 합니다.
태조 선원은 정면7칸 측면8칸의 ㄷ자형 건물로서 크기는 총50평이며,
내부에는 후불탱 (159 * 182cm. 1931년)을 봉안되어 있습니다.
근래 선지식인 전강과 영신 큰스님을 비롯하여
성철 큰스님도 이곳 도리사 태조선원에서 정진하셨다 합니다.
도리사 세존사리탑
도리사 내에 현존하는 당우는 그리 많지 않은데 가장 오래된 건물로는 극락전이 자리하고 있고, 나머지 당우들은 최근에 지어진 것들이다.
그러한 당우들 사이로 석종형 부도가 한 기 자리하고 있다.
'세존사리탑'이라고 불리는 석종형 부도는 조선 후기 어간에 만들어진 부도로 보이는데 그 제작에 공을 많이 들인 부도들 중 하나이다.
불기 2520년(서기 1977년) 부도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금동의 육각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그 안에서 발견된 사리가 아도화상이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라는 결과가 밝혀져 한때 국내를 떠들석하게 했다. 지금은 사리를 보관한 사리함이 국보 제208호로 지정되어 현재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사리의 크기는 직경 8mm이며 모양은 타원형으로 그 빛이 영롱하였다고 한다. 사리는 계정혜(戒定蕙) 삼학의 결정체로서 부처님의 불생불멸의 법신체를 의미하며 모든 중생에게 신앙의 대상이며 귀의처이다.
삼성각(三聖閣)
자연석으로 낮게 기단을 쌓아 정리하고 초석을 두어 원주(圓柱)를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구조로 겹처마이며, 주심포(柱心包) 형식에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이다. 천정(天井)은 연등천정이며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안에는 칠성탱(七星幀)을 중심으로 좌우로 산신탱(山神幀), 독성탱(獨聖幀) 그리고 아도대화상진영(阿道大和尙眞影)을 봉안하고 있다.
'박태기나무'
'라일락'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阿道和尙尊象(아도화상존상)
도리사의 전설
아직 겨울이라기엔 이른 늦가을이었다. 옷은 비록 남루했지만 용모가 예사롭지 않은 한 고구려인이 신라 땅 일선군(지금의 경상북도 선산)에 있는 부자 모례장자 집을 찾아왔다.
『어떻게 제 집엘 오시게 되었는지요?』
모례장자는 행색과는 달리 용모가 순수한 낯선 객에게 점잖고 융숭하게 대하면서도 일말의 경계를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묵호자라는 고구려 승려입니다.
인연이 있는 땅이라 찾아왔으니 나를 이곳에 묵을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십시오.』
당시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지 않은 때인지라(눌지왕 때) 모례장자는 묵호자의 불법에 관한 설명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전생부터의 인연이었는지 아무래도 낯선 객이 신비스럽고 큰 불도를 알고 있는 대인인 듯하여 지하에 밀실을 지어 편히 지내게 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의복과 함께 보내온 향의 이름과 쓰는 법을 몰라 사람을 시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알아보게 했다. 이 소문을 들은 묵호자는 사람을 불러 친히 일러줬다.
『이는 향이라는 것으로 태우면 그윽한 향기가 풍기지요. 만일 이를 태우면서 정성이 신성한 곳에 까지 이르게 되고 간곡히 축원하면 무슨 소원이든지 영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후. 얼마가 지난 뒤, 나라에서는 묵호자를 청하는 사신을 보내왔다.
『공주마마가 위독하옵니다. 백방으로 약을 쓰고 의원을 불러 치료를 했으나 전혀 효험이 없어 이렇게 모시러 왔사오니 어서 궁궐로 함께 가주시지요.』
불법을 펴기 위해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묵호자는 때가 온 듯 선뜻 승낙하고 서라벌로 향했다.
묵호자는 공주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렸다. 그윽한 향기가 방 안에 차츰 퍼져 가득하고 묵호자의 염불이 끝나자 공주는 감았던 눈을 스르르 뜨면서 제정신을 찾았다.
왕은 기뻐하며 묵호자에게 소원을 물었다.
『빈승에게는 아무것도 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널리 펴고 국가의 복을 비는 것을 바랄 뿐입니다.』
왕은 즉시 이를 허락하여 불사를 시작케 했다. 묵호자는 그때부터 숨겨둔 불명 아도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아도화상의 어머니 고도령은 중국에서 온 사신 아굴마와 연정이 깊어 아도를 낳게 되었다. 그 후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고도령은 아도를 출가시켰다. 총명하여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도가 16세가 되던 해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을 찾아와 모든 사연을 이야기하고는 아도를 중국으로 보냈다. 아도는 중국에 가서 아버지 아굴마를 만나고는 현창화상 문하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후 고구려로 돌아왔다.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을 만나 반가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다시 신라 땅으로 보냈다.
『신라 땅에는 천경림을 비롯하여 7곳의 큰 가람 터가 있으니 이는 모두 불전(佛前)의 인연지로서 앞으로 불법이 깊이 전해질 곳이다. 그곳에 가서 대교를 전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개조가 될 것이다.』
아도는 어머니의 이 같은 가르침을 잊지 않고 수행에 전력하며 불법을 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세상을 뜨고 새 임금이 등장하자 나라에서는 하루 아침에 아도화상을 해치려 했다. 아도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모례장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경을 가르치고 설법했다. 많은 신봉자가 따르는 가운데 낮에는 소와 양을 1천 마리씩 길렀다. 그렇게 5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아도화상은 행선지도 밝히지 않고 훌쩍 그곳을 떠났다. 모례장자가 가는 길을 물었으나 『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이 내려올 것이니 칡순을 따라오시오.』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 해 겨울.
과연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에 모례장자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왔다. 모례장자는 그 줄기를 따라갔다. 그곳엔 아도화상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신라불교의 초전지인 지금의 도리사 터였다.
『잘 오셨소.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우려 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말을 시주하시오.』
아도화상은 모례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놓고 시주를 권했다.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낙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 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무슨 일인지 망태기는 2말은 커녕 2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재산을 다 시주하여 도리사를 세웠다.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다 지은 아도화상이 잠시 서라벌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데 절이 세워진 태조산 밑에 때 아닌 복사꽃이 만개하여 눈이 부셨다.
아도화상은 이에 절 이름을 「도리사」라 칭했고 마을 이름을 도개마을이라 했다.
도리사에서는 지난 1976년 세존진신사리탑을 복원 하던 중 금동육각사리함(국보208호)과 그 속에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출현해 전국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친견하고 세인들에게 화제가 됐다.
지금도 도리사 인근 마을에 가면 양과 소 천 마리를 길렀던 곳이라 해서 「양천골」「우천골」이라 부르고, 도개동 윗마을에는 외양간이 있었다 해서 「우실」이라 부른다. 또 모례장자의 집터는 「모례장자터」 그리고 우물은 「모례장자샘」이라 하는데, 모례장자 샘에서는 지금도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긴 화강암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엇갈리게 짜 맞추어 놓았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계단 가운데는
천진난만한 아기 부처가 미소를 짓고 있네요.
'봄맞이꽃'
'씀바귀'
도리사 적멸보궁 내부에서 바라본 '석가세존사리탑'
寂 滅 寶 宮 (적멸보궁)
1977년 세존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사리탑을 세우고 불사리 예배소인 寂滅寶宮(적멸보궁)을 1982년에 주지 法燈和尙 (법등화상)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적멸보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에 총 19평이다.
8대 적멸보궁은...
양산 통도사,
강원도 오대산 중대에 있는 상원사 보궁,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이렇게 5대 적멸보궁은 다들~ 잘 아실테지요...^^*
그리고...추가로 3곳..
고성의 건봉사,
선산의 도리사,
대구 달성 비슬산의 용연사입니다...
적멸보궁에서 바라본 일망무제의 풍광으로
맨 왼쪽이 팔공산, 가운데가 칠곡 가산, 그 다음이 칠곡 유학산인것 같네요.
석가세존사리탑 (釋迦世尊舍利塔)
적멸보궁 뒤편에 있는 석가세존사리탑은 1977년 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1987년에 법등화상이 조성한 것이다.
높이 8m로 八角 圓堂形 浮屠(팔각원당형부도)를 본 따서 정방형 지석대 위에 팔각 석탑을 세웠는데 기단에는 용을 조각하고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의 귀꽃에는 여래상을 조각하는 등 전체적으로 화려한 모습을 보여준다.
부처님 오신 날이 머지않아 달아놓은 연등이 화려하고 예쁘네요.
'황새냉이'
보궁 옆에 돌에 새겨진 팔정도(八正道)
팔정도(八正道)
깨달음과 열반으로 이끄는수행의 올바른 여덟 가지 길. 정견(正見),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正定), 정사유(正思惟), 정정진(正精進). 팔성도(八聖道)를 이른다.
눈이 마르기 전에...
그대들의 말에 더 큰 상처 받기전에...
후회할 말, 뱉어버리기 전에...
눈감고, 귀막고, 입닫고 살지어다...
'아도스님 법음의 대종'
梵 鍾 閣 (범종각)
종각은 일반적으로 범종. 법고. 묵어. 운판을 걸어놓고 의식 때마다 소리를 내어 삼계의 미물들까지 고통에서 벗어날수 있도록 하는 전각이다.
도리사의 범종은 2005년에 건립 정면1칸, 측면 1칸 규모와 사모지붕 건물로 현재 사물 가운데 범종만 봉안되어 있다.
'해우소(解憂所)'
도리사 숲속 명상지(좌선대)
도리사의 가치는 이곳이 참선과 수행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도드라집니다.
초입 솔숲에는 참선을 위한 나무평상 수십여 개가 낙동강을 바라보고 듬성듬성 들어서 있는데, 평상에 걸터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으면 산자락 너머 속세에 두고온 티끌 같은 삶이 고요하게 씻겨나가는 것을 체감하게 됩다.
암자들 뒤쪽으로는 병풍처럼 소나무들이 에워싸고 있어 운치를 더하고 있답니다.
전망대로 가는 데크길입니다.
도리사가 태조산의 거의 정상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보니
그 아래로 너른 선산의 벌판과 줄지어선 연봉들이 한 눈에 들어오고,
멀리 좌측의 팔공산을 필두로 가산, 유학산이 차례로 늘어선 모습입니다.
남쪽방향의 풍광으로 낙동강이 보이는
탁 트인 풍광이 너무나 아름답게 다가오고
구미의 진산인 금오산과 그 뒤로 선석산이 시야에 들어오네요.
이번에는 남서쪽 구미방향의 조망으로 아득한 멀리
직지사가 있는 황악산이 눈에 들어오는데,
아도화상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절터를 지목하여
'직지사'라는 이름을 얻게 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해질녘 이곳에서 바라보는 낙조 또한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꼭 다시 찾아오고픈 마음 간절하기만 합니다.
'각시붓꽃'
좀 가파르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태조산 정상을 다녀오기로 합니다.
끝물인 진달래가 아직도 이곳에는 남아 있어 가풀막의 힘겨움에 큰 위안이 되네요.
가파른 오름을 땀을 뻘뻘 흘리며 정상인 줄 알고 올라왔더니 정작 정상은 건너편에 있네요.
정상석은 없고 삼각점과 자그마한 팻말만이 지키고 있는 냉산(태조산)의 정상부입니다.
냉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으로
도리사가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고,
멀리 낙동강 너머로 금오산이 다가옵니다.
산행을 마치고 도리사를 빠져나오며 꼭 다시 오리라는
무언의 약속을 연녹색 느티나무에게 남기면서 귀로에 오릅니다.
절이 모든 것을 갖추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을것 같다. 풍문으로만 들어왔던 도리사는 다른 사찰과 견줘도 결코 뒤지지 않을 수려한 풍광을 지녔다고 할수 있을 것 같다. 적멸보궁의 마지막 계단까지 올라 바라보는 전경은 순간 숨을 멎게 만드는데, 크고 작은 산들이 도열한 가운데 낙동강 물줄기가 유유히 가로지르고 있다.
아침녘 운무라도 피어오르는 날이면 지우지 못할 커다란 감동을 선사할 것 같은 생각에 꼭 다시 이곳을 찾아보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또한 이 사찰이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해진 곳이라는 뜻 깊은 유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오늘 물밀듯 밀려오는 그 감동은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귀로의 길이 결코 가깝지 않은데다 주말 정체로 혼잡해질 고속도로의 사정을 생각해서 서둘러 발걸음을 돌려야만 하지만 태조산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도리사의 청정한 기운을 맘껏 느낀 방문객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기만 해서 쉽사리 절집을 떠나지 못하고 괜스레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다.
옹기종기 배치된 가람에 시원스러운 명상숲이 인상 깊은 도리사에서 휴식형 템플스테이를 해보고 싶어 올 가을 계획되어 있는 1박 2일 템플스테이 체험 프로그램에 이곳 도리사도 넣을 수 있기를 법사님께 건의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 절집을 빠져나온다.
'★ 여행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옛정취 가득한 마비정 벽화마을을 찾아서... (0) | 2013.10.06 |
---|---|
성주의 명소 무흘구곡을 찾아서... (0) | 2013.08.11 |
2013년 춘계 성지순례(영동 반야사, 김천 직지사) (0) | 2013.04.27 |
기장 장안사와 외고산옹기마을 (0) | 2013.04.26 |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과 수호사찰 선석사를 찾아... (0) | 2013.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