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과 수호사찰 선석사를 찾아... 본문
성주 세종대왕자 태실, 선석사
지난 여름 성주 독용산 산행을 마치고 성주읍내의 성밖숲까지 돌아보며 강한 인상을 남겼던 참외의 고장 경북 성주.
수십년 전 대구에 살면서 직장을 다닐 적에는 참으로 많이 지나쳤던 고장인데 나이 들어 예전 기억 더듬으며 산행을 겸한 주변 유적지도 구경해보니 모든 게 낯설게 다가와 못 가본 곳을 돌아보기로 마음먹고 대구에 용무가 있어 가는 길에 다녀오기로 한다.
항상 낯선 곳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그 묘한 설레임은 마치 내가 살아보지 않은 먼 옛적 과거의 깊은 우물에서 차갑게 길어 올려진 두레박 속의 미지의 맛같은 감동이었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217번지. 성주 선석사의 현주소다.
'월항'이라는 지명은 과거부터 들어왔지만 방문은 난생 처음이라 입력한 네비게이션은 친절하게 절 입구 주차장까지 깔끔하게 안내를 해주어 문명의 이기의 혜택을 톡톡히 누려본다.
참외의 고장답게 비닐하우스가 즐비한 마을을 지나 너른 주차장에 도착하면 낮은 산자락이라서 그런지 동네 뒷산에 온 듯하다.
곧게 뻗은 나무보다 휘어 자란 소나무가 더 멋있다는 듯이 선석사로 들어오는 길엔 온통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고, 절집 옆 휴식 공간엔 200년이 넘어 보호수로 지정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멀리서 달려온 방문객을 맞이한다.
이 느티나무 그늘 아래 서면 절집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은 마치 저 아래 세상에서 번잡했던 마음을 한번쯤 가다듬고 부처님께 나가라고 미리 마련한 야외 법당인 듯하다.
부처님을 뵈러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이 한 가족같이 앉아 있다. 세 전각 모두 맞배지붕으로 휜 나무를 자연스럽게 대들보 삼아 단아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앞산에 있는 세종대왕 태실을 바라보며, 아랫마을의 살림살이를 궁금해 하며 내려다보고 있고, 소나무, 느티나무, 대나무가 절집보다 오래된 듯 터줏대감 노릇을 하며 건물들과도 어울려 절집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사찰을 찾을 때마다 느꼈던 보편적인 풍경하고는 자뭇 다른 위엄이 서린 신장(神將)의 수호를 받는 듯 그러나 선석사는 정작 안온한 느낌으로 저 만치서 나그네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의 서진산(선석산) 기슭에 있는 선석사는 성주군에서는 가장 큰 사찰이며, 세종대왕의 왕자태실이 있는 태봉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다.
경내로 이어지는 길엔 아름드리 소나무가
유연하면서도 우아한 자태로 사열하듯 서 있습니다.
‘入此門內莫存知解’
이 문 안에 들어오면 모든 알음알이를 버리라는 뜻으로
마음을 비우고 무념 속으로 돌아가라는 깨달음에 이르는 가르침입니다.
신라의 의상대사는 전국에 10개의 사찰을 짓는다.
팔공산 미리사(美里寺),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영주 부석사(浮石寺), 웅주 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 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 국신사(國神寺) 등이 화엄 10찰이다.
그 중 하나가 신라 효소왕 1년 (692년) 성주 월항면 서진산(棲鎭山) 기슭에 세운 신광사(神光寺)이다.
신광사는 1361년 (고려 공민왕 10년) 나옹대사가 주지로 부임한 이래 선석사(禪石寺)로 그 이름이 바뀌게 된다.
터 닦을 선(禪)에 돌 석(石)이 붙어 이루어진 이름이니 절터를 닦을 때 돌과 관련되는 사건이 벌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내린 비에 촉촉히 젖은 고혹적인 모습으로 반겨준 '지면패랭이'
선석사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 까치마(鵲村)라고 한다.
까치 작(鵲)에 마을 촌(村)이 붙어 작촌이 된 것인데, 작곡촌(鵲谷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이름 역시 나옹화상과 관련이 있다.
선석사 대웅전(좌)과 명부전
나옹화상이 신광사로 갈때 화를 피해 도망 중인 충신 노(盧)씨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이 신광사에 거의 당도했을 무렵 까치들이 하늘을 덮으며 깍깍 울어대고 있었다.
대사는 까치가 우는 것은 손님을 부르는 일이라며 노씨에게 이곳에 살며 마을을 이루라고 조언하였다.
대웅전 부처님
신광사에 도착한 나옹화상은 신라 고찰 신광사가 비바람과 세월에 부대껴 어느 덧 쓰러져가는 형세가 된 것을 보고 사찰을 새로 중건하기로 결심하였다.
대사는 절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신광사보다 조금 오른쪽 산비탈에 절터를 닦으라고 말했다.
소식을 들은 불자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풍요(신라 향가 중 한 수)를 부르면서 일을 하기 시작하였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감파눌라'
'꽃마리'
종각(원음각·圓音閣)
이렇게 노래를 불러가며 한창 일을 하는 중에 스님 한 분이 대사에게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고했다.
"스님! 큰일났습니다. 금당(金堂)을 지을 터에 커다란 바위가 박혀 있어 땅을 닦을 수가 없습니다. 너무 큰 바위라 파낼 수도 없는 지경입니다."
(金堂 :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시는 대웅전. 금당이라고 부른 것은 금빛 본존불을 모시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건물 안을 금빛으로 칠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른 건물들은 이 금당을 중심으로 배치한다.)
태실법당(胎室法堂)
2009년 국내 최초로 세워진 법당으로,
보존처리한 태아의 태실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명부전, 칠성각이 차례로 서있는 선석사의 정경입니다.
'선석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바위가 절 마당 좌측 땅바닥에 박혀있네요.
숨이 넘어갈듯 급박하게 말하던 스님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대사가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그게 무슨 일인가. 금당 터에 커다란 바위가 박혀 있다는 것은 이 신광사가 영원무궁 바위처럼 세세손손 이어지며 이 땅의 중생들에게 불법을 전파하고 그들을 구제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야. 바위는 그대로 두고 금당 터를 뒤로 물리게. 바위를 마당 한복판에 우뚝 솟아있게 배치하고 그 앞에 일주문을 세우고 뒤에 금당을 지으란 말일세."
지금도 선석사에는 커다란 바위 하나가 몸체는 그냥 땅 속에 묻은 채 머리만 불쑥 지상에 내밀고서 대웅전 좌측 앞마당에 똑바로 서 있다.
선석사가 완공되니 까치마 사람들의 왕래가 이전보다 더욱 잦아졌다.
좀더 세월이 흐르자 이번에는 나옹화상의 예언대로 영원무궁 선석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겨났는데, 그로 인해 선석사를 찾는 사람들의 수가 예전과는 견줄 수도 없으리만치 많아지게 되었다.
이 일대가 이 땅 최고의 명당지로 드러나자 세종대왕이 자신의 아들들의 태(胎)를 절 바로 옆 산봉우리에 묻는 일대 사건이 벌어진다.
세종대왕의 열여덟 왕자와 단종의 태실이 묻힌 이곳이 전국 최대의 태실 집합지가 된 것이다.
어쨌든 대왕의 왕자들 태실이 이곳에 집단적으로 안치되었으니 조선 왕실이 그냥 방치할 리가 만무하다.
선석사는 태실을 수호하는 사찰로 지정이 되었고, 영조로부터 어필(御筆)을 받기도 했는데, 이 어필은 지금도 선석사의 종무소 건물인 정법료(正法寮)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세종대왕자태실 주차장에 주차한 후
관광안내소 앞 돌계단을 오르며 태실 구경에 나섭니다.
차를 몰고 선석사를 빠져나와 바로 20여 미터 앞에 이정표와 다시 만난다.
'세종대왕자 태실'이라는 팻말이 나의 심장을 뒤흔들어 놓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재작년 크리스마스 이브날 칠곡 영암산-선석산-비룡산 산행 때 내려다보기만 하고 들르지 못하고 그냥 갔었던 아쉬움이 남아 있었는데 이곳 세종대왕자태실을 오늘에야 찾았으니 감개가 무량함은 당연지사인 것이다.
이정표를 떠나 잠시 오르니 세종대왕자태실 주차장이다.
풍수에서는 태실을 두고 새끼를 잉태한 어미의 자궁과도 같아서 사시사철 좋은 기(氣)가 흐른다고 했다.
이곳 태실은 선석산 봉우리에서 즉, 한 줄 명당 형이 내려와 자궁 안에서 태아가 자라는 기세여서 오래 머무를수록 좋은 기(氣)를 많이 받는다고...
그리고 선석사 입구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위용을 자랑하며 줄을 지어 서 있듯이 세종대왕자 태실들도 태봉(胎峰)의 소나무 숲 한복판에서 창공을 바라보며 줄지어 안치되어 있다.
세종대왕자태실은 사방천지가 우거진 숲으로 둘러싸여 비바람에도 영혼의 안식처로서 평온함을 유지할 수 있는 곳인 듯하다.
태실이 그야말로 어머니 뱃속이던가!
주변 솔숲과 돌계단이 어우러져 널따린 길이 더욱 상쾌하다. 발걸음도 가볍고 경쾌하다.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출산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몽긋몽긋하게 태운 뒤에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이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또한 태봉(胎封)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에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加封碑)를 세운 것으로 임금의 태실을 말한다.
세종대왕의 원손이자 문종의 아들인 단종의 태실입니다.
세종대왕자태실(사적 제444호, 경북 성주군 월항면 인촌리 산8번지)
세종 20~24년(1438~1442년) 사이에 조성된 전국 최대 규모의 태실지로,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형태이며 수양대군(세조)을 비롯한 세종의 17왕자와 왕손(원손) 단종의 태실 등 19기가 안장되어 있다.
세종대왕의 적서 18왕자 중 장자 문종을 제외한 17왕자 태실 18기.
세종대왕의 손자 단종이 태어났을 때 조성한 태실 1기.
(단종의 태실은 세자로 책봉된 후 성주 법림산에 새롭게 이전 조성함)
전체 19기 중 14기는 조성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왕위에서 밀어낸 뒤 이를 반대한 동생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및 계유정란 때 죽은 동생 안평대군의 태와 장태비 등은 세조 3년(1457년) 파져서 산 아래로 던져졌으나, 1975년 흩어진 기단석을 찾아 복원했다.
(다섯왕자의 태실은 연꽃잎이 새겨진 대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훼손되었다고 한다.)
조카인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했던
세조(수양대군)의 태실과 가봉비 옆에는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의 태는 파괴되고
기단석만 복원되어 그 옆에 놓여져 있습니다.
화강암으로 만든 19기의 태실은 조선왕조 태실의 의궤를 따랐고 지상에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분청사기로 된 태호가 들어있고, 그 위에 기단석, 중동석, 개첨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세종 20년(1438)에서 24년(1442)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태봉은 당초 성주이씨의 중시조(中始祖) 이장경(李長庚)의 묘가 있었는데 왕실에서 이곳에 태실을 쓰면서 그의 묘를 옮기고 태를 안치하였다고 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토기의 태호(항아리)로는 분청인화문의 대접, 분청상감연화문의 뚜껑과 명기가 있는 지석 2점은 각각 국립 대구ㆍ경주박물관과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태실 앞에 태비가 있는데, 특별히 수양대군의 태실 앞에는 가봉비가 있다.
'병꽃풀'
세종대왕자태실은 조선초기 태실형태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며 우리나라에서 왕자태실이 완전하게 군집을 이룬 유일한 예라는 점, 그리고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왕조교체와 함께 왕실 태실 조성방식의 변화 양상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조팝나무'
'명자나무꽃'
'산괴불주머니'
마치 보물지도를 쥐고 찾아나선 낯선 곳에서 반짝이는 보석도, 빛나는 골동품을 손에 쥐지는 못했지만 먼 옛적 나라잃은 설움을 가슴에 숨기고 오로지 회한의 나날을 이곳 선석사 터에서 서까래를 세우고 단청을 입히며, 기와를 올리며 보냈을 민초들의 긴 한숨소리와 향수어린 눈길을 적막에 싸인 도량 곳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인디아나 존스 박사도 그랬을까...
갖은 고생을 다하고 손에 쥔 유물이 그에겐 값으로 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돈의 가치보다는 깊은 잠과도 같은 무구한 세월과 시간 속에서 비로소 깨어난 감히 근접할 수 없는 먼 선대의 역사를 마주하고 서서 만지고 느끼고 공감할 수 있다는 그 소중한 행복에 가치를 두고 있지는 않을까...
비록 모든 방문객들을 반겨 까치가 울지는 않고 스산하게 비가 내렸지만 우리도 인생의 어느 길에서 나옹화상과 만날 수 있다면 이 같은 명당지에서 새로운 생애를 구가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돌아서는 길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내리던 비는 그치고 환한 햇살이 온누리를 비추고 있었다. 천하 명당의 따뜻한 기운을 가득 품고 돌아가는 길손을 축복이라도 하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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