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팔공산 왕건길... 역사의 현장을 따라 걸어본 마무리 산행(5~8구간) 본문
♧ 산행일자 : 2014. 06. 29 (일) 날씨 - 맑음
♧ 산행장소 :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 평광동, 매여동, 내동, 송정동 일원
♧ 산행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 백안삼거리-돼지코-평광지-첨백당-옻골재-요령봉-매여동 버스종점-초례봉-동곡지-첨단의료복합단지-지하철안심역
♧ 산행시간 및 거리 : 6시간40분, 19.01km(휴식 및 식사, 알바 2회 포함. GPS 기준)
★ 팔공산 왕건길
팔공산 왕건길은 2010년 국토해양부 누리길 조성사업 공모에 선정되어 총 35km, 8개 테마길로 만들어진 탐방로로서 2012년 5월 8일 개통되었다.
927년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의 동수전투 설화를 배경으로 조성된 "팔공산 왕건 길"은 역사적 사실을 스토리텔링하여 용호상박길(왕건과 견원의 동수전투장), 열린하늘길(10명 이상이 험한 고개를 넘음), 묵연체험길(비탈길을 걸으며 자아성찰), 문화예술길(옛길과 과거길, 방짜유기박물관, 물 그리고 시인의 길), 고진감래길(거친 숨으로 주능선에 오름), 호연지기길(정상에 서면 호연지기를 느낌), 가팔환초길(하늘에 제를 올림, 가산산성, 팔공산,환성상, 초례산이 한 눈에), 구사일생길(적의 추격을 도피하여 구사일생으로 생환)이라 명명하고, 왕건의 가상행적을 픽토그램으로 덧붙여 역사 현장학습이 되도록 구성되었다.
◈ 산행기
주말 당직근무를 마치고 변함없이 이어지는 산으로의 나들이...
오늘은 자꾸 미뤄두면 안될 것 같아 하나라도 마무리하자는 의미로 보름 전 첫번 째 걸음을 마친 팔공산 왕건길의 나머지 구간을 찾아보기로 하고 대구를 향해 달려간다.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 4호선을 따라 영천방면으로 차를 몰아 하양읍을 지나 대구광역시 동쪽 끝자락의 지하철 안심역 부근에 도착하여 적당한 곳을 찾아 주차를 해놓고 스마트폰으로 대구시내버스 노선을 검색해본다. 808번 시내버스를 타고 아양교 입구 정류장에서 하차를 하여 길을 건넌 후 팔공1번 버스를 갈아타는 방법인데 잠시 후 도착한 808번 버스에 승차를 하고 안내대로 아양교 입구에서 하차를 하여 도로를 건너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백안삼거리행 팔공1번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다시 검색을 해보니 45분 가량 기다려야 한다고 되어있어 가뜩이나 늦게 출발한데다 어두워지기 전에 하산을 해야 하는 관계로 하는 수없이 백안삼거리까지 택시를 이용하기로 한다.
미터요금으로 정확히 만원을 지불하고 도착한 백안삼거리에서 도로 가운데 설치되어 있는 왕건길 빗돌을 사진에 담고 백안모텔 방향으로 길을 건너 산행준비를 시작한다.
출발준비를 다 마치고 GPS를 가동하며 모텔 옆 대나무한의원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며 왕건길 두번 째 탐방을 시작한다.
산행궤적
구글어스
백안삼거리에 있는 왕건길 빗돌
★ 제5구간 고진감래길(백안삼거리-평광종점 : 5.2 ㎞)
말 그대로 처음 걸을 때에는 깔딱재를 오르며
거친 숨을 들이쉬게 되는 힘든(苦) 길이 지나면(盡)
주능선인 환성산 방향으로 편안한(甘) 길이 이어진다(來)고 하여
고진감래(苦盡甘來) 길로 명명되었다 합니다.
이곳에서 등산채비를 마치고
표시목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진행을 하여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나서니
사각정자인 백안쉼터가 나타나고
좌측의 동화천을 가로지르는 시멘트다리를 건너게 됩니다.
안내도 뒤로 보이는 다리를 건너 맞은편 포장길을 따라 진행해 나가면
등로 좌측으로 왕건길 표시목을 만나게 되고
본격적인 산길로 들어가게 됩니다.
녹음이 우거진 호젓한 산길을 휘적휘적 걸어가면
통나무를 잘라 만든 쉼터도 간간히 보이고
한동안은 걷기좋은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등로를 이어갑니다.
고압선 철탑 한 곳을 지나서
폭닥한 소나무 숲길을 한참 올라가면
묘 1기가 있는 322.3봉에 올라서게 되고
이정표를 지나 잠시 걷다보면
'돼지코'라는 곳에 도착하게 됩니다.
숲길 한가운데 "돼지코"라 씌어진 안내판이 있지만
그 의미를 몰라 낯설게 느껴집니다.
집에 와서 검색을 해보니
하늘에서 본 지형이 돼지코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돼지코 능선을 지나 10분여 진행하면
NO.35 송전철탑을 만나게 되고,
소나무 숲길 따라 평탄한 길을 내려서면
새터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마을로 들어서는 길목에 있는 왕건길 표지석을 확인하고
좌측으로 진행해 나갑니다.
'홑왕원추리'
도로를 따라 마을길로 진행하면 이내 평광지가 보이고
저수지엔 낚시꾼 서너 명이 한가로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네요.
평광지에서는 우측 첨백당 방향으로 도로를 따라 진행하게 됩니다.
이정표의 '신숭겸 영각 유허비' 방향으로 시량리 가는 길이 있는데,
이 길이 실제 왕건이 도주했던 길이라고 합니다.
참고로 왕건과 관련된 대구의 지명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공산전투는 서기 927년에 현재의 대구광역시에 속해있는 팔공산 일대에서 벌어진 후백제와 고려 사이에 있었던 커다란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은 대패하여 장군이었던 신숭겸, 김락 등을 비롯한 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고, 왕건도 일반 병사들의 복장으로 변복하고, 신숭겸이 목숨을 바친 결과로 겨우 몸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은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과정에서 왕건의 일거수일투족이 반영된 대구지역의 지명들입니다.
★ 팔공산 : 김유신 장군이 통일구상을 하면서 수행했던 곳이며, 고려태조 왕건이 견훤과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원래의 명칭은 공산이었는데 신숭겸을 포함한 고려 개국공신 8명을 기리기 위해 팔공산이 됨.
★ 초례봉 : 왕건이 영천 태조지에서 패해 다음 전투에서 이기게 해달라고 제를 지냈다고 하는 전설이 있음. 왕건의 도피로가 시량이마을에서 초례봉, 안심으로 이어졌다면 지금의 왕건길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시량이마을에서 초례봉, 안심으로 이어지는 길은 새미기재를 거처 낙타봉, 초례봉, 안심으로 가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길이기 때문이다.
★ 무태 : 현재 대구시 북구 동·서변동을 일컫는 지명으로 왕건이 병사들에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며 태만하지 말라고 독려한 데서 생긴 이름.
★ 나팔고개 : 이 고개는 무태·연경과 지묘동 사이, 동구 지묘1동과 지묘3동 사이에 있는 고개로 후백제 군사들이 신숭겸을 왕건 대장인 줄 알고 목을 베어 전승 기념 나팔을 불며 넘어온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
★ 살내(전탄) : 동화천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두 물머리 부근으로 왕건군과 견훤군이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이니 화살이 물속에 쌓였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김. 현재 살내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다.
★ 미리사 : 지묘동에 있었던 절로 태조가 원군 5천을 이끌고 미리사 앞에서 견훤군과 싸워 대패하자, 장군 신숭겸이 왕의 전복으로 바꿔 입고 견훤군을 유인했다가 전사했던 곳.
★ 안심 : 왕건이 파군재 부근에서 대패하여 쫓기던 중, 이 지역에 도달하여 환성산 줄기의 초례봉 쪽으로 피신하여 날도 새고 적의 추격이 없으므로 숨을 돌리게 되니 이 곳을 안심으로 부르게 됨.
★ 반야월 : 왕건이 견훤군사에 패하고 이곳을 지나다가 하늘을 보니 중천에 반달이 떠 있어서 반야월이라 했다고 함.
★ 돈지봉 : 현재 조일로봇고와 정동고교가 이 산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돈지봉은 ‘숨은 터가 있는 봉우리’란 뜻으로 팔공산에서 도피한 왕건이 잠시 몸을 숨겨 '돈지’라는 이름이 전해옴.
★ 연경 : 현 대구시 동구 연경동 지역으로 무태에서 동화천을 따라 북동쪽으로 나아간 곳에 위치한 촌락 명칭인데, 왕건이 이 곳을 지날 때 마을 선비들이 글을 읽는 소리를 듣고 지은 이름.
★ 왕산 : 고려 태조가 견훤에게 패배하여 이 산에 숨었던 데서 왕산이라는 이름이 유래. 대구지묘초등학교 서편에 있는 산으로 표기된 지도도 있고 신숭겸장군유적지 뒷산으로 표기된 지도도 있어 헷갈린다. 개인 생각으로는 후자가 맞는 것 같다.
★ 파군재 : 신숭겸의 군사가 제1차로 파해서 흩어진 곳을 아래 파군재라 하고, 2차로 파한 곳을 윗 파군재라 부르게 됨. 동화사와 파계사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곳이다. 파군재에는 신숭겸 장군 동상이 세워져 있음.
★ 지묘동 : 신숭겸과 김락이 왕건을 구하기 위해 옷을 바꿔 입어 왕건을 무사히 도망가게 한 묘한 지혜를 짜낸 곳이라 하여 지묘동이 됨, 지묘동에는 신숭겸 장군 유적이 있음.
★ 독좌암 : 봉무동 토성 기슭에 있는 바위로 도주하던 왕건이 파군재를 넘어 지금의 마을 입구 큰 바위가 있고 옆에 옹달샘이 있어 물을 마시고 그 바위에 홀로 잠시 앉았다가 해안방향으로 탈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음.
★ 시량이마을 : 평광동의 한 자연촌락의 이름. 왕건이 나무꾼에게 주먹밥을 걸식하고 사라졌기에 실왕리라는 지명이 되어 내려옴. 지금은 시량이마을로 불리고 있음.
★ 은적사 : 앞산의 사찰 이름. 왕건이 도망치면서 몸을 숨겼다는 데서 유래하며, 이곳에 태조 18년(936) 영조스님이 절을 세워 은적사로 불렸다고 함.
★ 안일사 : 현 대구시 남구 쪽에 있는 앞산의 사찰 이름. 도주하던 왕건이 이곳에서 편히 쉬었다 갔던 데서 유래.
★ 왕정과 장군수 : 왕정은 '안지랑골'에 남아 있는 우물로서 왕건이 이 물을 마셨던 데서 유래한다고 하며, 이 왕정의 물을 장군수로 부름.
★ 임휴사 : 달서구 상인동의 앞산 기슭에 있는 사찰로 왕건이 쉬어갔던 데서 유래.
★ 해안 : 왕건이 견훤의 포위망을 벗어난 뒤 이제 살았다 싶어 얼굴을 펴고 웃음을 띠기 시작했다는 데서 유래.
★ 불로동 : 왕건이 파군재에서 참패하여 후퇴하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노인과 부녀자들은 모두 피난 가고 어린아이 등 젊은 사람만 살고 있는 동네라 하여 붙여진 이름.
★ 왕굴 : 안일사에서 약 500m 정도 떨어진 앞산 기슭에 있는 자연 동굴로 왕건이 며칠간 숨어 지내던 동굴.
★ 도원동 : 앞산에 숨어 있던 왕건이 현재 대구 달서구 도원동 일대에 오니 복숭아꽃이 만개했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
★ 일인석 : 왕건이 왕산을 거쳐 동화사 뒤의 염불암에 피신하여 앉았던 바위.
★ 탑들 : 지금의 지묘 1동 앞들을 탑들이라고 하는데, 옛날 공산대전에 전사한 신숭겸장군의 원찰인 지묘사의 탑이 남아 있던 곳이라는 데서 연유.
★ 대비사 : 왕건이 시량이에서 신숭겸의 죽음을 알고 크게 울어서 대비가 됐고, 후에 대비사란 절이 이곳에 세워졌다 함.
★ 여희골 : 남구 대명 7동의 자연부락. 왕건이 전쟁으로 앞산까지 왔다가 군사들이 종지골에서 승리를 거두고 난 뒤 왕과 재회하고 축하연회를 가진 곳이라 하여 처음에는 연회골이라 하였는데 변음 되어 여희골로 불리어 전해지고 있다 .
★ 복현동 :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워 신라의 왕으로 삼고 돌아가는 길에 군사를 이곳에 매복 시켰다가 추격해 오는 고려 왕건의 군대를 맞아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이곳은 ‘견훤덤’ 또는 ‘복현암’, ‘복현리’라 불리어졌다고 한다.
★ '가는봉', ‘가느봉’ : 연경동 앞의 동화천을 건너 갈봉산을 말한다. 이곳에는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 패한 뒤 신숭겸 장군과 헤어져 달아나다가 다급한 나머지 말채찍을 떨어뜨린 것이 거꾸로 꽂혀 나무가 되어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왕건이 갔다고 하여 ‘가는봉’이라는 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 달비골 : 팔공산대전에서 대패한 왕건이 이곳저곳을 거쳐 현재의 임휴사 자리까지 와 잠시 쉬고 있을 때, 당시 마침 보름쯤이었던지 크고 둥근 달이 떠올라 앞을 바라보는 자신의 등 뒤에서 달이 비추는 골짜기라 하여 ‘달배골’이라 칭하였는데, 경상도식 호칭이 가미되어 ‘달비골’이 되었다는 설이다.
평광지 앞의 표지석.
우측은 지나온 길이고 가야할 방향은 좌측입니다.
아스팔트 포장길 따라 가다보면
집짓골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울창한 노거수가 시원한 그늘 쉼터를 만들어 주고 있는
평광동 버스종점에 도착하면서 왕건길 5구간을 마치게 됩니다.
5구간의 종점이자 6구간의 출발점인
평광동 버스종점에 있는 왕건길 빗돌.
★ 제6구간 호연지기길(평광종점 - 매여종점 : 5.0 ㎞)
요령봉으로 이어지는 힘든 길을 올라 멋진 조망을 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느낄 수 있는 길입니다.
가야할 방향은 안내판 뒤쪽의 첨백당 방향입니다.
첨백당 가는 길목에 있는 와룡정 입구인 향양문(向陽門)
와룡정(臥龍亭)
이 재실은 丹陽人(단양인) 禹翊臣(우익신)이 壬亂時(임란시)경 南下(남하)하여 東區(동구) 坪廣洞(평광동)을 世居地(세거지)로 삼은 이래 그의 8세손인 龍齋(용재) 禹命載(우명재)를 奉享(봉향)하기 위해 1879년(高宗, 고종 16) 亭閣(정각)으로 건립한 것인데 원래는 건너편 산속 후미진 곳에 세웠으나 너무 외딴 곳이어서 관리에 불편을 느낀 후손들이 1966년 현재의 위치로 移建(이건)하였던 것이다.
동네 어귀 냇가에 臥龍之處(와룡지처)가 있다 하여 골안 이름과 아울러 와룡정이라 이름하였다는데 정열 쌓기로 한 기단 위 둘근 화강석 주춧돌에 圖柱(도주)를 세우고 5樑(량) 홑처마 팔작지붕에 대청위 대공은 판대공이다.
와룡정 옆에 위치한 경희정의 입구인 '광거문(廣居門)'
경희정(景喜亭)
이 재실은 丹陽(단양) 禹氏(우씨) 坪廣洞(평광동) 世居祖(세거조)인 禹翊臣(우익신)의 10세손인 晩喜齋(만희재) 暎錫(영석), 11세손인 丹峰 圭煥(단봉 규환), 12세손인 雲齋 孝鳳(운제 효봉)을 위하여 三代(삼대)의 追遠亭(추원정)으로 후손들이 1970년에 건립한 것이다.
晩喜齋(만희재)는 經史(경사)에 博涉(박섭)하고 爲先事(위선사)에 有誠(유성)하였으며 後進(후진) 교육에도 힘써 壽通政大夫(수통정대부)가 되었다.
한편 丹峰(단봉)은 官委員(관위원)으로 識見(식견)이 豊단(풍단) 하고 時文(시문)에 능통하여 京鄕士友(경향사우)가 推重(추중)하였고 文集(문집)을 남기고 있다.
雲劑(운재)는 稟性(품성)이 剛明(강명)하고 規度(규도)가 엄정하며 덕망이 높았으니 畿湖同志(기호동지)와 같이 樂育齋(낙육재)에 居(거)하였으며 1913-1914년에 獨立軍資金事件(독립군자금사건)으로 日警(일경)에 被逮(피체) 되기도 하였다.
마을 골목안 담벼락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상사화'가 눈길을 끄네요.
와룡정 재실 앞을 지나서 만나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꺾어 첨백당과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홍옥 사과나무를 구경하고
되돌아 나와서 좌측의 왕건길을 따르기로 합니다.
첨백당 앞 마당에 있는<광복송>.
광복소나무
대구시 보호수로도 지정되어 있는 이 소나무는 평광동 단양 우씨 문중 재실인 ‘첨백당’ 앞에 있답니다.
높이 7m, 둘레 90cm가 넘는 이 소나무는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뒤 얼마 되지 않아 우채정씨를 비롯해 단양 우씨 문중의 청년 5명이 조국 해방을 기념해 마을 인근의 산에서 옮겨와 심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광복송'인데 해방을 기념해서 심은 나무로는 전국에서 유일하다고 하네요.
첨백당(瞻栢堂 : 대구시문화재자료 제13호)
첨백당(瞻栢堂)
단양우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효자로 이름난 우효중(禹孝重)과 우명식(禹命植) 선비의 절의를 기리고 단양우씨 집안의 자녀 교육을 위해 1896년(고종 33년) 후손들이 세운 재실이다.
첨백당이란 당호는 우명식의 묘소가 있는 백밭골을 우러러보는 집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건물은 평면 일자형이다. 왼쪽과 오른쪽으로 난간을 돌려 마루를 한 칸씩 달아낸 정자의 기능을 겸한 형식이 독특하다. 그리고 앞쪽의 바깥마당에는 이 건물을 지을 때 같이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서 있다.
방 이름이 '경지재(敬止齋)'라는데
마땅히 공경하는 방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겠지요.
재바우농원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홍옥" 사과나무.
첨백당에서 100m를 올라가면 재바우농원이 나옵니다.
입구에 들어서니 주인장이신 듯한 분이 있어 인사를 건네고
사과나무를 사진에 담아도 될런지 허락을 득하고 카메라를 꺼내 담아봅니다.
1935년 우채정씨의 선친이 심은 5년생 홍옥·국광 등
100여 그루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홍옥 나무로,
우리나라 사과 재배사(史)에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고 하네요.
2009년 5월 보호수로 지정됐다고 합니다.
사과나무의 원산지는 발칸반도로 알려져 있으며, 사과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 기록은 고려 의종때 "계림유사(1103년)"에 '임금', '내'로 처음 등장하며, 신품종 사과나무가 처음 들어온 것은 인평대군이 1654년 중국 연경에 갔다가 수레에 싣고 가져온 것으로 "남강만록"에 기록되어 있다.
서양사과의 도입은 개항(1876) 이후의 일로 대구지역은 미국 선교사이자 대구동산기독병원 초대 원장인 존슨박사가 1899년 10월 미국 미조리주에 주문하여 남산동 자택(구, 제일교회 부지) 정원에 재배한 것이 처음이라고 한다.
이곳 평광지역에는 1917년경 과원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 사과나무는 1935년 우채정씨의 선친이 심은 5년생 홍옥, 국광 등 100여그루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홍옥나무이며, 매년 많은 열매를 맺고 있어 유전자원으로도 그 가치가 크고 우리나라 사과 재배사를 살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나무이다.
대구(평광)사과는 팔공산 자락의 사과재배에 알맞은 자연조건이 잘 갖춰진 청정지역에서 재배되어 당도가 높고 과육이 단단하며, 과즙이 많아 달고 시원한 것이 특징이다.
원예종인 '틈나리'
'메꽃'
'등나무꽃'
첨백당과 재바우 농원을 둘러본 후 되돌아나와
다시 왕건길을 따라 진행을 하니 삼거리가 나오네요.
이곳에서 1차 알바를 하게 됩니다.
그 사연은
처음엔 이정목을 따라 좌측길로 진행하다가
준비해간 궤적을 확인해보니 우측으로 길 안내를 하네요.
그래서 되돌아와 우측 과수원길로 진행을 합니다.
궤적을 따라 부지런히 과수원길을 따라 걷다가
자두를 따고 있는 농군에게 인사를 건네니
자두 맛 보라고 하시는 말씀에
빛깔좋은 자두 3개를 감사한 마음으로 움켜쥐고
걸으면서 맛을 보니 물기 가득 머금은 그 맛...
아직도 남은 그 여운에 입안 가득 군침이 감돕니다.
개망초가 밭을 이루는 멋진 풍광과 함께
등 뒤로 멀리 팔공산 주능선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카메라를 꺼내 촬영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집으로 식사를 하러 가는 노부부의 말씀 왈...
예전에는 이 길이 맞았지만 지금은 막혀 있고
되돌아 나가야 왕건길이 나온다고 하네요.
에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조금 전 삼거리까지
'알바'라는 이름으로 발품을 팔기 시작합니다.
다시 돌아온 삼거리에서 처음처럼
포장길을 따라 진행해 나갑니다.
마을을 벗어나 간간이 나타나는
왕건길 시그널을 벗삼아 진행하다 보면
도로 우측으로 왕건길 이정표가 나타나고
계단을 따라 등로는 이어집니다.
아무래도 조금 전 과수원길을 막아놓은 이유는
개인 사유재산 보호를 위해 골짜기 길이 아닌
산길로 우회로를 만들어 놓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잠시 가파르게 나무 계단길을 올라서면
쉬어가게끔 의자가 마련되어 있는
258.7봉에 당도하게 되고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합니다.
느긋하게 점심을 챙겨먹고
나선 길에 만난 갈림길로
알바를 했던 과수원길에서 올라오는
예전 왕건길 인듯 합니다.
참나무를 잘라 만든 목계단을 따라 한고비 힘들게 올라서면
능선상에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대암봉갈림길입니다.
우측 대암봉을 다시 찾아보고 싶었지만
가야할 길이 멀기에 다음을 기약하고
좌측의 내림길로 진행을 합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옻골재'입니다.
우측 내림길은 둔산동 옻골로 가는 길이지요.
등로 좌측으로 조망이 약간 트이는 곳에서 바라본 환성산과 낙타봉입니다.
다소 가파른 오름길을 오르면 등로 오름길에 위치한
마치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깨어진
'깨진계란바위'를 지나게 됩니다.
숲 사이로 간간이 보이던 대암봉을
이제야 온전히 눈에 담을 수 있네요.
정상 아래로 대암봉의 명물인 '거북바위'도 보이는군요.
능선을 따라 둔산동(옻골)으로 내려갈 수 있는 삼거리 갈림길인데
왕건길은 좌측 내림길입니다.
좌측으로 급하게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서면 '거북바위'도 지나게 되고,
거북바위를 지나 약 5분 후 능천산갈림길을 만나게 되지요.
좌측은 새미기재(성령) 방향으로
환성산이나 낙타봉, 초례봉으로 가는 길이라
요령봉을 오르기 위해서는 능천산 방향으로 올라야 합니다.
요령봉 오름길의 바위군락을 에돌아 진행하니
시원스런 풍광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요령봉 입구 암봉 위에서 바라본
환성산, 낙타봉, 초례봉 능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령봉 정상 직전입니다.
오늘 산행중 처음 만난 부부산님에게 부탁하여 한장 남겨봅니다.
대구 반야월 방향의 시가지 풍광으로
한 눈에 다 들어오는 멋진 모습이지만
흐린 날씨 탓에 오늘은 희미하기만 하네요.
요령봉에 올라서서 북쪽을 바라보니
장쾌한 팔공산 주능선이 한 눈에 다 들어오고
환성산, 낙타봉, 초례봉으로 이어지는
가팔환초 능선 또한 파노라마처럼 다가옵니다.
요령봉에서 다시 좌측으로 내려서 내림길을 잇다가
살짝 등로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진행을 해봅니다.
가보고 싶은 곳이 있기 때문이지요.
전망좋은 커다란 바위 위에서
능천산 자락 너머로 가야할 매여동을 가늠해보고
바위를 내려와 옆으로 돌아 내려가면
몇번을 찾다가 오늘에야 만나게 되는
이른바 '요령봉 석굴'입니다.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 사시는 어느 분이
조성한 석굴로 지금은 비어있네요.
조난을 당했거나 비를 피해야 할 경우가 생겼을 때
철문 입구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를 이용하면
요긴하겠다 싶은 생각이 듭니다.
석굴을 돌아보고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내려서니 삼거리를 만나게 되고,
진행은 좌측 매여종점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뚜렷한 등로를 따라 산허리를 타고
돌아가는 발걸음은 바삐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아직도 가야할 초례봉과
안심역까지의 거리가 만만찮게 남은 때문이지요.
산길을 빠져나오니 매여동과 좌측으로 초례봉이 보이고
마을 초입의 자그마한 다리를 만나게 되는데,
왕건길 표시목의 화살표 방향을 제대로 못 읽어
또다시 짧은 알바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정목 뒤쪽의 밭 뒤로 왕건길이 이어지는데
그만 우측으로 진행하고 말았네요.
그대로 진행하다가 매여동버스종점으로 되올라가도 되겠지만
궤적을 따르기로 하고 왔던 길을 되돌아 올라와
마주보이는 전봇대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을 따라 진행합니다.
마을 안길을 따라 진행하여 나오니
좌측으로 매여동 버스종점이 있는 쉼터에 도착하게 됩니다.
매여종점의 왕건길 표지석.
★ 제7구간 가팔환초길(매여종점 - 초례봉 : 3.3 ㎞)
"태조 왕건이 하늘에 제를 올린 곳으로
가산산성, 팔공산, 환성산, 초례산이 한 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룹니다."
바람개비길을 따라 경북대학교 학술림을 향해 아스팔트 길을 따라가노라면
피서를 나온 사람들이 타고온 차량인듯
도로변을 메우고 있는 모습이 잡히고
경북대학교 대구학술림 건물 뒤 식당을 지나
왕건길 안내 표지석을 따라 우측으로 오르면
초례봉을 향한 왕건길 7구간이 이어집니다.
경북대학교 학술림 산림욕장 안내판을
한번 읽어보고 시멘트길을 따라 올라서니
초례봉 산림욕장이 잘 꾸며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네요.
가야할 등로는 목교를 건너 숲속으로 들어가면
오른쪽 산길로 진행하면 왕건길 이정표를 만날수 있답니다.
초례봉 산행코스는 숲속도서관 뒤쪽 임도에서
오른쪽 산줄기를 따라 올라가는 일반 산행코스가 있는데,
왕건길은 좌측 산줄기를 따라 오르게 되어 있네요.
완만한 등로를 따라 한발한발 옮겨가는 산꾼에게는
물을 찾는 횟수가 점점 늘어가기 시작하네요.
소나무 우거진 숲길을 따라 걸어가지만
당직근무의 피로감이 엄습해 오는지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져 옴을 느끼게 되네요.
하지만 힘들어도 늘 그래왔던 것처럼
무심보법으로 한걸음 한걸음 올라서니
아담한 평상이 두개 있는 쉼터를 지나게 되고
오늘 산행 중에 제일 힘이 드는 오르막이 시작되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오름을 극복하고 나니
가팔환초 쉼터에서 바라본 환성산과 낙타봉 능선.
커다란 평상이 있는 가팔환초 쉼터에 도착하게 되고
부부인 듯한 산님이 각자 편안한 자세로
눕거나 앉아서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네요.
방해하기 싫어서 조용히 주변 사진만 담고서
소리없이 그 자리를 떠나왔지요.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바라본 팔공산 주능선의 시원스런 모습입니다.
바위구간을 지나서 나무 계단길 올라서면
환성산, 낙타봉에서 넘어오는
649봉 삼거리 갈림길을 만나게 됩니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궁금했었는데
오늘에야 그 궁금증을 풀게 되었네요.
초례봉 방향으로 능선길을 잠시 따르면 만나는 헬기장으로
예전 가팔환초 역종주하던 그날이 생일날이라
미역국으로 아침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4분 뒤 만나게 되는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를 지나면
초례봉 정상 직전 바로 아래에 있는 바위문을 지나게 되고
잠시 후 바위 투성이인
초례봉(635.7m) 정상에 올라서게 됩니다.
★ 제8구간 구사일생길(초례봉 - 동곡지 : 4.0 ㎞)
"적의 추격으로부터 안심할 수 있는 곳에 도피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는..."
초례봉에서는 북쪽으로 팔공산의 주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겹겹이 포개어진 마루금이 한 폭의 수묵화로 되살아납니다.
왕건길 7구간이 끝나고
8구간이 시작되는 시점인
초례봉 정상에서의 인증샷...
'초례봉'은 고려 태조 왕건이 영천에서 일격을 당한 후 "다음 전투에서는 반드시 이기게 해 달라"며 제를 올린 곳이며 1500 여년 전, 이 곳에서 나무꾼과 선녀가 초례를 올리고 백년가약을 맺었다고 해서 '초례봉'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경산시 하양읍, 청천 다락원이 보이고,
대구광역시 숙천동이 아래로 조망이 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금호강은 유유히 흐르고 있네요.
남은 8구간이자 하산 루트인 마루금 뒤로
대구시 동구의 반야월, 안심 지역의 전경도 한 눈에 들어옵니다.
지나온 요령봉 능선이 건너보이고
아래로는 매여동이 자리잡고 있는 모습이 잡히네요.
오늘은 우측 능선을 따라 올라왔고
좌측 능선은 숲속도서관 뒤쪽의 일반 등산로를 따라 올라오는 능선입니다.
사통팔달 일망무제의 사방을 둘러보고 이제 하산을 시작합니다.
잠시 암릉지대를 조심스레 내려와 만나는
매여동으로 내려가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신서지, 나불지 방향으로 진행합니다.
걷기에 너무 좋은 길인데다
하산길이라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네요.
좌측 동곡지 방향으로 이정표를 따라 잠시 진행하면
초례봉이 한 눈에 보이는 포토존에서
초례봉을 사진틀 속에 담아놓고...
초례봉 포토존에서 약10m 정도 진행하면 만나는 삼거리.
직진길은 동내골 방향이라 왕건길은 오른쪽으로 가야하지요.
고도를 낮춰갈수록 눈높이 또한 행보를 같이합니다.
평상이 놓여있는 쉼터를 지나 평탄한 등로를 빠르게 진행하니
이정표가 서있는 나불지 갈림 삼거리에 당도하게 되고
능선길을 버리고 좌측 계곡길 (왕건길)로 내려섭니다.
산불의 흔적이 남아있는 솔숲길을 진행하니
계곡으로 내려서게 되는데
이른바 승방재 갈림 삼거리입니다.
이제부터는 계곡길을 따라 넓은 임도길이 이어지네요.
'남천(南天)'
널찍한 임도를 따라 털레털레 걸어오니
가뭄이라 보유수량이 많이 줄어든
동곡저수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실질적인 왕건길은 끝이 나지만
애마를 세워놓은 안심역까지 걸어가야 합니다.
이젠 제법 틀을 갖춰가고 있는
신서혁신도시의 대로를 따라 진행합니다.
큼직한 빗돌에 새겨진 글귀처럼
'첨단의료산업의 요람'으로 거듭나서
대구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와
첨단의료 복합단지 앞을 지나고
경부고속도로 아래의 굴다리인
안심지하도 앞 사거리에 서게 되고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걸어왔던 첨단복합단지를 사진에 담아봅니다.
안심역에 도착하면서 팔공산 왕건길 8개 구간 종주를 모두 마치게 됩니다.
이곳저곳 내키는대로, 발길이 닿는 대로 산을 찾아 헤메고 다니다보니 정작 주변에 널려있는 올레길, 둘레길은 그리 탐탁찮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중에 꼭 한번 걸어보고픈 곳이 있었으니 고향 대구의 팔공산왕건길이다.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동수전투 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친환경탐방로인 왕건길을 두 번에 걸쳐 마무리하였으니 뿌듯한 마음이 앞서지만 당직근무의 여파가 남아있어 힘든 걸음으로 남았던 산길에 나이 생각하고 몸 생각하라는 주변의 권유가 새삼 실감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또한 팔공산 왕건길을 출발할 때부터 종주를 끝내는 순간까지도 줄곧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게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왕건이 신라를 도와주려다 견훤에게 여덟 명의 공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병사들을 잃는 참패를 당하고 왕도인 송악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평지를 벗어나 험한 산길을 돌아 온갖 고초를 겪으며 줄행랑을 쳤던 그 길을 따라 걸어보니 참 힘든 여정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왕건이 겪었을 심적 고통과 큰 아픔이 새삼 와 닿는다.
훗날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 땅 일부를 정복한 형태의 '삼국통일'보다 훨씬 완전한 통일이었고, 외세의 힘과도 무관한 통일을 이루어 다시 하나로 뭉친 한반도는 20세기가 될 때까지 다시는 갈라지지 않았던 보기 드문 왕업을 이룬 배경에는 태조 왕건의 유일한 패배였던 팔공산 동수전투의 참담했던 아픔이 와신상담 분수령이 되어 3년 뒤 고창군(안동) 전투에서 승리를 하게 되고 주변 각 지역의 호족들이나 백성들의 민심을 얻어 결국엔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수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안심지하도를 지나 걷는 동안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고교시절 친구들과 이곳 안심역 부근인 송정리에서 초례봉으로 산행을 갔었던 추억을 생각하며 그때의 흔적을 찾아보려 했지만 너무나 달라져버린 주변 환경에 흘러가버린 세월이 야속하기도 하지만 마냥 지난 추억속에만 남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라 귀로의 정체를 생각해서 서둘러 차를 몰아 귀로에 오른다.
'◈ 산행이야기 > ☆ 2014년도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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