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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산행 제1탄(통일전-금오산-용장골-고위봉-칠불암) 본문

◈ 산행이야기/☆ 2009년도 산행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산행 제1탄(통일전-금오산-용장골-고위봉-칠불암)

해와달^^* 2009. 2. 6. 22:00

♠ 산행일자 : 2009. 02. 06 (금)

♠ 산행장소 : 경주 남산 일원

♠ 참가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 통일전-남산순환도로-국사골-남산부석-사자봉-금오산-대연화대좌-용장골 삼층석탑-용장사지-설잠교-용장골-은적골 쌍봉-고위산-백운암-백운재-봉화대-칠불암-통일전

♠ 산행시간 : 5시간 45분(12:10 - 17:55, 점심, 휴식 포함)

 

▣ 산행기 

건강에 조그마한 이상이 생겨 격한 운동을 삼가하라는 의사의 권유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있다가 정확히 한달만에 재개한 산으로의 나들이가 갓 시집온 새색시가 첫날 밤을 맞이하는 양 가슴속엔 조그마한 흥분과 긴장감이 일어난다.

엊그제(2월4일) 경주남산을 맛보기로 4시간 가량 산행한 뒤 집으로 돌아오니 피곤함이 몰려와 그동안 부실했던 체력관리에 망연자실, 다시 행장을 챙겨 길을 나선다.

 

신라 건국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얽혀있는 '나정(蘿井)'을 들머리로 해목령을 거쳐 금오봉을 오른 뒤 용장골로 내려온 엊그제의 산행길이 그런대로 괜찮은 코스라 생각된데다 연무(煙霧)에 가려 제대로 된 조망을 즐기지 못하고 또한 사진에 담아내지 못한 아쉬움에 다시금 발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집을 나서며 당초 예정대로 등반하려 했으나 이번 참에 경주남산을 몇 구간의 코스로 나눠 유적답사를 겸한 산행을 제대로 해보자는 생각이 불현듯 일어나 머리속이 복잡하게 돌아간다. 동남산, 서남산의 각 코스를 머리속으로 그려가며 첫번 째 답사코스로 잡은 곳이 늘 애용하던 남산부석 코스부터 시작하자고 마음먹고 통일전으로 차를 몰아간다. 남산 구석구석 산재해 있는 문화유적을 찾아 기록으로 남기게 되면 블로그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경주남산을 소개하게 되는 것이고 그 중 몇분이라도 경주를 찾아오게 된다면 천년고도 경주시민으로서의 당연한 소임을 다하는 일이라 님도보고 뽕도 따는 격이 되는 일일 것이다.

 

경주시에서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 관리주체가 이관되어진 경주남산은 예전보다 훨씬 더 정비가 잘되어 안내표지판, 이정표, 화장실, 목제계단 등이 멋진 모습으로 설치되어 있어 탐방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있다. 아울러 80여 군데에 이르는 등산로를 정비하여 지정 등산로만 개방하여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훼손된 등산로를 복원하기 위해 입산통제를 하고 있어 남산의 황폐화를 예방하고 있어 무엇보다 기쁜 마음이 든다.

 

그동안 수없이 소개된 경주남산의 등산 코스라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거니와 몇군데는 인적이 드문 코스로 산행을 했기에 보호차원에서 들머리를 소개하지 않을 작정이라 읽으시는 분들의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신라 천년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인 '불국토' 경주남산으로 천년의 향기를 맞으러 저와 함께 떠나 보실까요?

 

⊙ 산행 흔적

▲ 순환도로에서 국사골 남산부석 방향으로 진입

▲ 굴바위 (굴 안에는 음식물들이 있는걸 보면 누군가 치성을 드렸나 봅니다)

▲ 오름길에서 건너다 본 상사바위

▲ 큰지바위에서 우측으로 남산부석까지 이어지는 '부석능선'의 암릉들

▲ 남산부석을 향하여 바로 치고 오르는 도중 올려다 본 부석

▼ 부석에서 늘 내려다보며 신기해 했던 기암괴석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네요

▲ 작은 남산부석이라 칭해도 무방할듯...

▲ 부석에서 바라본 상사바위와 팔각정 전망대 

 ▲ 남산부석에서 내려다 본 기암괴석(뭐 같애요? ^^*)

▲ 부석능선길(맨 좌측이 큰지바위, 맨 우측이 탁자바위)

▲ 남산부석 안내문

▲ 남산순환도로 준공비(바위에 '사자봉'이라 새겨져 있다)

▲ 예쁜 모습으로 새로이 단장된 공중화장실

▲ 역시 새롭게 정비된 이정표와 등산로

▲ 남산과 망산의 유래 설명문

▲ 국립공원 경주 남산(금오봉)

▲ 비파골 안내문

▲ 이영재 대연화대좌(大蓮花臺坐)

▲ 기암괴석이 마치 뭔가를 닮았는 것 같은데...

▲ 용장골 들머리입구에 있는 안내문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 보물 제186호

 

 이 塔(탑)은 下層基壇(하층기단)을 생략하고 岩石(암석)에 높이 6m의 괴임 1段(단)을 직접 마련하여 三層基壇(삼층기단) 中石(중석)을 받게 하였다. 中石(중석)의 一面(일면)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고, 다른 三面(삼면)은 두개의 돌로 되어있으며, 각면에서는 모서리기둥과 撑柱(당주) 한 개씩을 模刻(모각)하였다. 甲石(갑석)은 二段(이단) 板石(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밑에는 副緣(부록)이 있다. 甲石(갑석)의 上面(상면)은 약간 頃斜(경사)져 있고, 그 上面(상면) 중앙에는 모가 난 2단의 塔身(탑신)받침이 마련되었다. 塔身部(탑신부)의 각층 塔身(탑신)과 屋蓋石(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初層塔身(초층탑신)은 상당히 높은 편으로 네 귀에 모서리기둥이 있을 뿐이고, 2층 탑신은 급격히 줄어 들었다. 屋蓋石(옥개석)은 받침이 각층 4단이고 추녀는 直線(직선)이나 轉角(전각) 上面(상면)에는 경쾌한 反轉(반전)을 보인다. 옥개석은 상면에는 1단의 괴임이 있어 각각 塔身石(탑신석)을 받게 된 점은 일반 석탑에서와 다름없다. 上輪部(상륜부)는 전부 없어져 그 원래의 상태를 알수 없고 다만 3층 屋蓋石(옥개석) 頂部(정부)에 撑柱孔(당주공)만이 남아 있다.
각 부의 調和(조화)가 아름답고 경쾌하며 주위의 자연과 잘 어울리어 壯觀(장관)을 이루는 手法(수법) 樣式(양식)에서 新羅下代(신라하대)에 속하는 代表的(대표적)인 石塔(석탑)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 연혁(유래)
용장사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몇 군데의 석축(石築)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용장사(茸長寺) 법당터보다 높은 곳에 세워진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자연 암반을 다듬어 아랫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면마다 기둥새김 셋이 있는 윗기단을 설치하여 산 전체를 기단으로 여기도록 고안되었다.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 3층으로 쌓았는데, 지붕돌과 몸돌을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였다.
1층 몸돌은 상당히 높은 편이고 2층부터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층급받침이 4단이고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윗부분이 없어진 탑의 높이는 4.5m 밖에 되지 않지만, 하늘에 맞닿은 듯이 높게 보여 자연과의 조화미가 돋보인다. 바위 위에 세운 석탑으로서 통일신라 하대의 대표적인 우수작으로 꼽힌다.

▲ 건너 보이는 쌍봉 너머로 고위산이 보인다.

▲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 - 보물 제913호

 

이 磨崖如來坐像(마애여래좌상)은 8세기 후반에 製作(제작)된 우수한 작품으로 石佛坐像(석불좌상)의 뒤편 岩壁(암벽)에 造成(조성)하였으며 蓮華臺(연화대)위에 결가부좌한 자세에 二重(이중)으로 刻出(각출)한 頭·身光을 갖추고 있다. 머리는 螺髮(나발)에 육계가 뚜렷하고 얼굴은 원만, 온화하다. 양쪽의 귀는 길게 늘어졌으며 목에는 三道(삼도)가 뚜렷하다. 法衣(법의)는 通肩(통견)이면서 平行線(평행선)이 세밀한 옷무늬로 처리한 것은 印度佛像(인도불상)을 연상케한다. 양손은 降魔觸地印(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특히 여래좌상의 신광 왼쪽에는 造像銘(조상명)으로 보이는 銘文(명문)이 세줄로 10여자 새겨 있으나 現在(현재) 判讀(판독)은 어렵다.


* 연혁(유래)
용장사는 조선 세조(世祖) 때 김시습(金時習)이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지은 곳이다. 이곳 능선 위에 용장사터 3층석탑이 있고, 이 마애불 바로 앞에는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이 있다.
이 불상은 자연 암벽을 이용하여 조각되었는데, 머리 둘레의 두광(頭光)과 몸 둘레의 신광(身光)은 2줄의 선으로 표현하였다. 얼굴은 풍만하고 머리에는 나선형 머리카락을 표현하였으며, 귀는 눈에서 목까지 상당히 길게 표현하였다. 목에는 3개의 선으로 표현된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옷의 주름선은 얇고 촘촘한 평행선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는데 오른쪽 어깨와 왼쪽어깨를 동시에 걸치고 있다. 가슴부분에도 역시 속옷을 비스듬한 모양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다.
왼쪽 어깨 바깥부분에 글씨가 있는데 "태평 2년 8월(太平二年八月)"에 무엇인가를 하였다는 내용인데, 마멸이 심하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 - 보물 제187호

 

용장사 법당터 위쪽에 있는 용장사곡(茸長寺谷)에는 두리새김한 불상과 암벽에 돋을새김한 불상이 있다.
자연석 위에 3층으로 둥글넓적하게 만든 대좌를 얹고 그 위에 안치한 석불 좌상은 머리부분은 없어졌으나 옷자락이 길게 내려온 점이 특이하다.
마애불은 얼굴이 풍만하며 어깨와 무릎이 넓어 당당하면서 안정감이 있다.
조각 솜씨로 보아 두 불상은 통일 신라 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 연혁(유래)
이 불상은 용장사터에 있는 미륵장육상(彌勒丈六像)으로 추정되는 석불 좌상이다. 삼륜대좌 위에 모셔진 특이한 구조로 되어 있으며, 1932년 일본인들에 의해 복원된 것으로 머리 부분은 없어졌다.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목에는 3줄의 뚜렷한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는 넓지 않고 다소 좁은 편이나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으며, 좌측 어깨에는 매듭지어진 가사끈이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석불은 특이한 둥근 형태 대좌 뿐 아니라 석불 자체의 사실적 표현이 작품의 격을 높여준다. 제작시기는 조각양식으로 보아 8세기 중엽으로 추정된다.
용장사(茸長寺)는 신라 유가종(瑜伽宗)의 대덕 태현(太賢)이 주지로 있었으며, 조선시대 생육신의 한 사람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은거하며 {금오신화, 金鰲新話}를 집필한 곳으로도 유명한 사찰이다.

▲ 용장사터(茸長寺址) -산 위로 삼층석탑과 삼륜대좌불이 올려다 보인다.

 

삼륜대좌불이 있는 왼쪽 계곡에 축대를 쌓아 터를 마련한 용장사지터가 있다. 이곳에서 간혹 용장사(茸長寺) 명 기와편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계곡 이름 또한 용장곡으로 불려지고 있어 사찰명을 알 수 있는 신라의 많지 않은 절터중의 하나이다.

사찰이 유명한 것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삼륜대좌불이 있고, 경덕왕 때의 고승인 태현(太賢, 大賢)스님이 계셨던 곳이기도 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 생육신 중의 한 사람인 매월당 김시습선생이 젊은 시절 이곳에 은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저술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매월당 선생은 용장사 뜨락에 북향화(목련)을 심어 영월에 귀양가 있는 단종 임금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목련꽃은 꽃봉오리가 펴질때면 항상 북쪽을 향해 피어나기 때문에 북쪽에 계시는 임금을 그리워하는 꽃의 별칭으로 붙여졌다.

▲ 그 옛날 어느 사찰에서 사용했을 법한데...(혹시 절구?)

▲ 설잠교(雪岑橋)

 

신라시대 용장사가 있었다하여 골짜기를 용장골이라 불러 왔다.
용장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으며, 조선초(1465년~1470년) 매월당 김시습이 머물면서 금오산실을 짓고 "유금오록(遊金鰲錄)"에 155수의 시를 남겼고,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은 곳이며, 또 속세를 떠나서 산승(山僧)으로 있으면서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절로 북향화(北向花)를 심었던 곳이다.
이 유서 깊은 용장골에 다리를 놓으매 매월당 김시습을 기려 설잠교(雪岑橋)라 하였다.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 또는 동봉(東峯), 법호는 설잠(雪岑), 관향은 강릉이다.

▲ 은적골 쌍봉을 오르며 건너다 본 고위봉 애기공룡능선

▲ 쌍봉 제 1봉

▲ 쌍봉 제2봉 (멋진 소나무 뒤로 고위봉이 보인다.)

▲ 은적암 터 (뒤에는 쌍봉이 보인다)

▲ 거북을 닮은 멋진 기암괴석

▲ 애기공룡능선

▲ 애기공룡능선

▲ 지나온 쌍봉 너머로 금오산이 올려다 보인다.

▲ 경주 남산 고위봉(494m)

▲ 고위봉에서 백운암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만난 기암

▲ 기암에서 내려다 본 백운암

▲ 좌측에 마석산이 보이고 가운데 치술령 능선인 686봉이 희미하게 보인다.

▲ 천룡사지와 삼층석탑이 내려다 보인다.

▲ 고위산 백운암

▲ 백운재 갈림길(← : 고위봉, → : 칠불암,봉화대 ↑ 내림길:산정호수)

▲ 봉화대를 지나 등로를 이어가던 중 내려다 보이는 칠불암

▲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慶州南山神仙庵磨崖菩薩半跏像) - 보물 제199호

 

南面(남면)의 바위를 깍아 菩薩像(보살상)을 彫刻(조각)하였는데 木造前室(목조전실)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머리에는 三面寶冠(삼면보관)을 높이 쓰고 있으며 이마에는 띠를 두르고 있다. 體軀(체구)가 풍만하고 몸의 굴곡도 如實(여실)하다. 오른손은 한가지의 꽃을 잡고 있으며 왼손은 가슴에 들고 있다. 다리는 半跏趺座(결가부좌)인데 꽃을 잡고 있는 것과 함께 이 佛像(불상)이 觀世音菩薩(관세음보살)이라는 것을 立證(입증)한다. 天衣(천의)는 얇게 彫刻(조각)되었으며 옷자락이 유려하게 늘어지면서 臺座(대좌)를 덮고 있다. 光背(광배)는 舟形擧身光(주형거신광)에 三條線(삼조선)으로 頭光(두광)과 身光(신광)을 表現(표현)하였을 뿐이며 光背(광배)자체가 龕室(감실)을 만들었다. 발아래는 구름무늬가 용트림하였으며 구름 위에 둥실 떠가는 自有自在(자유자재)한 菩薩(보살)을 잘 묘사하고 있다.


* 연혁(유래)
이 불상은 칠불암(七佛庵) 위의 곧바로 선 절벽 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 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쓰고 있어 보살상(菩薩像)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 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臺座)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遊戱坐)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유희좌(遊戱坐)
결가부좌의 자세에서 한쪽다리를 풀어 대좌 밑으로 내린 자세

▲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慶州 南山 七佛庵 磨崖石佛) - 보물 제200호

 

이 磨崖佛(마애불)은 東側(동측)에 있는데 兩別(양별)되어서 암벽의 三尊巨像(삼존거상)과 그 앞의 方柱(방주)에 새긴 四方佛(사방불)을 볼 수 있다. 이들 바위에는 架溝(가구) 흔적이 남아있을 뿐 아니라 瓦片(와편)들이 많이 늘려 있어 木造(목조)의 前室(전실)을 구축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三尊(삼존)가운데의 本尊(본존)은 素髮(소발)의 머리에 육계(상투)가 높이 솟아있으며 얼굴은 豊麗(풍려)하다. 당당한 체구에 힘에 넘쳐 있다. 法衣(법의)는 偏袒右肩(편단우견)에 階段式衣紋(계단식의문)이 생동하고 있으며 옷은 얇게 밀착되어 있다. 仰蓮(앙련)과 伏蓮(복련) 위 二段(이단) 蓮花臺座(연화대좌)이며 光背(광배)는 頭光(두광)만 表現(표현)된 寶珠形(보주형)이다. 兩脇侍菩薩(양협시보살)은 本尊(본존)과 흡사한 手法(수법)이다. 左脇侍菩薩像(좌협시보살상)은 右手(우수)에 淨甁(정병)을 잡고 있으며 右脇侍菩薩(우협시보살)은 右手(우수)를 어깨까지 올려서 蓮花(연화)를 잡고 있다. 「方柱四面像(방주사면상)」은 모두 同一(동일)한 手法(수법)과 樣式(양식)으로 닮았다. 東面像(동면상)의 法衣(법의)는 다소 무겁게 처리된 감이 있으나 육체의 굴곡은 뚜렷이 表現(표현)되었다. 光背(광배)는 頭光(두광)만 나타내고 있고 臺座(대좌)는 仰(앙)·伏蓮(복련)을 생기있게 彫刻(조각)하였다. 右手(우수)에 藥盒(약합)을 들고 있어 藥師如來(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南面像(남면상)은 東面像(동면상)과 모든 점에서 흡사하지만 裙衣(군의)의 띠 매듭은 새로운 形式的(형식적) 스타일이며 짧막한 常縣座(상현좌)의 形式的(형식적) 衣褶(의습)은 圖式化(도식화)되어 있다.


* 연혁(유래)
이 불상들은 경주 남산 봉화골의 정상 가까이 위치한 마애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로서 '칠불암 마애석불'이라 불린다.
삼존불의 가운데에 있는 본존불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이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고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사방불도 모두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 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보살상(菩薩像)이 본존을 향하고 있는 것이나 가슴이 길고 다리가 짧게 조각된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 전면에서 본 칠불암 마애석불(七佛庵 磨崖石佛)

▲ 우측(동편)의 모습

▲ 좌측(서편)의 모습

▲ 傳 염불사지 삼층석탑

 

사적 제 311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130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불교유적이 계곡마다 조영된 경주남산은 신라인들의 역사와 문화.신앙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영산(靈山)으로써 2000.12.2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남산 봉구곡 자락 남산동 1130번지 일원에 위치한 傳 염불사지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한 스님이 하루에 몇 번식 시간을 정해 염불을 외우셨다.
법당에 앉아 나무아미타불(南舞阿彌陀佛)을 부르는 소리가 당시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염불사(念佛師)라 불렀는데 스님이 돌아가니 그의 초상을 흙으로 만들어 민장사(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살던 피리사(避里寺)를 염불사(念佛寺)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너져 있던 傳 염불사지 석탑 2기의 탑재와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을 이용하여 1963년  불국동 구정광장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2008.1.24 복원을 위하여 해체하였으며, 복원공사는 2007.6.13 착공하여 2009.1.15까지 석탑 2기와 주변정비를 완료하였다.
서탑의 사리장엄구를 봉안하였던 사리공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수 없는 2개이며, 3층 탑신의 방형사리공이 투공된 점으로 보아 최초 탑 건립시기를 7세기말 또는 8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慶州南山里三層石塔)

 

보물 제124호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227-2

 

南山寺址(남산사지)의 雙塔中(쌍탑중) 東塔(동탑)은 模塼石塔(모전석탑)이고 西塔(서탑)은 一般形(일반형) 石塔(석탑)이다. 東塔(동탑)은 넓은 二重(이중)의 地臺石(지대석)위에 八個(팔개)의 石塊(석괴)로서 基壇部(기단부)를 이루고 있다. 各層(각층)의 塔身(탑신)과 屋蓋石(옥개석)은 一個(일개)의 石材(석재)로 되어 있으며 表面(표면)에 彫飾(조식)이 없다. 塔身部(탑신부)의 重積手法(중적수법)은 一般形(일반형) 石塔(석탑)과 다름없이 屋蓋石(옥개석)과 塔身(탑신)은 層層(층층)이 遞減(체감)의 比率(비율)을 보이고 屋蓋石 (옥개석)받침은 初層(초층)부터 五段(오단), 五段(오단), 四段(사단)으로 되어 있다. 相輪部(상륜부)는 露盤(노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缺失(결실)되었다. 이에 對한 西塔(서탑)은 二重基壇(이중기단) 위에 三層石塔(삼층석탑)을 세웠다. 下臺石(하대석)과 下層基壇面石(하층기단면석)을 一石(일석)으로 만들어 西石(서석)으로 구성하고 西石(서석)에는 各面(각면) 二柱式(이주식)의 撑柱(당주)를 表示(표시)하고 있다. 下臺甲石(하대갑석)은 大小 四石(대소사석)으로 上層基壇西石(상층기단서석)을 받고 있으며 面石(면석)의 各面(각면)은 撑柱(당주)로서 二區(이구)로 나누고 各區(각구)안에 八部衆像(팔부중상) 一軀式(일구식)을 陽刻(양각)하였다. 上臺甲石(상대갑석)은 二枚(이매)의 板石(판석)으로 되어 있으며 上面(상면)에 二段(이단)의 받침이 있어 塔身部(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塔身部(탑신부)는 屋身(옥신)과 屋蓋石(옥개석)이 各各(각각) 一枚石(일매석)으로 되어 있고 各層(각층)마다 遞感(체감)의 比率(비율)이 되어 있으며 塔身(탑신)은 各層(각층)마다 隅柱形(우주형)이 表示(표시)되어 있다. 屋蓋石(옥개석)은 처마 끝이 直線(직선)을 이루었고 屋蓋(옥개)받침은 各層(각층) 五段(오단)이며 그 주위로 溝條(구조)가 돌려 있다. 相輪部(상륜부)는 露盤(노반)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缺失(결실)되었다. 이 兩塔(양탑)의 建立年代(건립연대)는 그 樣式(양식)으로 보아 9世紀頃(세기경)으로 推定(추정)되며 이 곳의 寺名(사명)은 알 수 없다.


* 연혁(유래)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경에 조성된 것으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처럼 형식을 달리하는 두 탑이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높이는 동탑이 7.04m, 서탑이 5.85m로 차이가 있다.
동탑은 3층인데, 돌을 벽돌처럼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 양식으로, 바닥돌 위에 돌덩이 여덟 개로 어긋물리게 기단을 쌓고 층마다 몸체돌 하나에 지붕돌 하나씩을 얹었다. 지붕돌은 벽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처마밑과 지붕 위의 받침이 각각 5단이다.
서탑은 이중(二重) 기단 위에 3층으로 몸돌을 쌓은 일반형이다. 윗기단의 몸체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을 돋을새김한 것이 독특하다.
팔부신중은 신라 중대 이후에 등장하는 것으로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탑을 부처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나타내려는 신앙의 한 표현이다.

▲ 서탑(西塔)

▲ 동탑(東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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