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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경주남산문화유적답사산행제3탄(삼릉-상선암-금오봉-늠비봉-포석정-삼불사) 본문

◈ 산행이야기/☆ 2009년도 산행

경주남산문화유적답사산행제3탄(삼릉-상선암-금오봉-늠비봉-포석정-삼불사)

해와달^^* 2009. 2. 18. 19:05

◈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산행 제3탄

 

♣ 산행일시 : 2009. 02. 18 (수) 날씨:맑음

♣ 산행인원 : 나홀로 산행

♣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 삼불사-삼릉-경애왕릉-냉골-상선암-바둑바위-금오봉-남산순환도로-금오정(팔각정 전망대)-늠비봉 5층석탑- 부흥사-윤을골 마애삼존불-창림사지 삼층석탑-포석정-지마왕릉-배리삼존불-삼불사

                   ※ 소요시간 : 4시간45분 (13:10~17:55)

 

 

▣ 문화유적 답사 산행기

 

오늘은 남산 문화유적 답사 세번째로 계획한 날이라 간단히 빵 한 조각으로 요기를 하고 몇가지 챙겨넣은 후 애마에 올라타고 남산 삼릉으로 향한다.

오늘의 산행코스는 남산을 찾는 등산객들이나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코스인 삼릉이 있는 냉골로 잡았다.

삼불사 무료주차장에 차를 주차한 후 삼릉으로 향하니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리는게 오늘은 바람이 제법 세겠다 싶다.

젖가슴처럼 봉긋 솟은 왕릉들은 편안한 느낌을 준다. 삼릉과 경애왕릉을 카메라에 담은 후 상선암 이정표를 좇아 계곡을 따라 오른다.

냉골 코스 초입은 그동안 많은 등산객들로 황폐해져 보기가 흉했는데 말끔히 목재로 된 등산로가 설치되어 산뜻한게 보기도 좋다. 국립공원관리공단으로 관리주체가 이관된 후 많은 예산을 들여 공을 들인 표가 난다.

▲ 배리삼릉(拜里三陵)

 

배리삼릉(拜里三陵)

사적  제219호

 

배리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배리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 경애왕릉(景哀王陵)

 

경애왕릉(景哀王陵)

사적  제222호

 

경주 남산(南山)의 서쪽 삼릉계곡(三陵溪谷) 입구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3.8m, 높이 4.2m이다. 봉분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보이지 않으며 전면(前面)에 놓인 상석(床石)은 최근에 설치된 것이다.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재위(在位) 924-927)은 본명이 박위응(朴魏膺)이고, 경명왕(景明王)의 동생이다. 재위기간은 신라 말기의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서기 927년 11월에 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비빈(妃嬪)·종척(宗戚)들과 연회를 하고 있던 중 신라 왕경(新羅 王京)으로 침입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에게 사로잡혀 협박에 의해 자진(自盡)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애왕(景哀王)을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해목령(蟹目嶺)은 지금의 경애왕릉에서 2㎞ 정도 떨어져 있어 맞지 않으며, 해목령(蟹目嶺)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逸聖王陵)을 경애왕릉(景哀王陵)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새로 정비된 남산 오름길

 ▲ 냉골 석조여래좌상(佛頭 없는 여래좌상)

<머리와 손이 잘려나간 채 결가부좌를 틀고 있다.>

 

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300m쯤 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신라의 얼굴'과의 첫 만남은 불편한 마음이 앞선다. 바로 머리와 손이 잘려나간 냉골 석조여래좌상이다. 하지만 단단히 결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으면 당당한 기백이 느껴진다. 당당한 자세를 천년이 넘도록 지키고 있다.

현재 높이가 1.6m되고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들이 생생하게 나타나 있다. 다만 머리가 없어지고 두 무릎이 파괴되어 손 모양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편안히 앉은 자세며 기백이 넘치는 가슴이며 넓은 어깨는 8세기 중엽 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특히 왼쪽 어깨에서 가사 끈을 매듭지어 무릎 아래로 드리워진 두 줄의 영총(纓總)수실은 사실적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우리 나라의 특색 있는 장식품인 매듭은 먼 신라 때부터 전해 왔다는 것을 이 가사 끈이 말해 주고 있다. 부처님의 아래옷(裙衣)을 동여맨 끈도 예쁜 매듭으로 매어져 있다. 이 불상은 용장사(茸長寺) 삼륜대좌불(三輪臺座佛)처럼 가사 끈이 있기 때문에 존명을 정하기 어려우나 여래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마애관음보살입상 빛이 비치면 미소가 뚜렷해진다.>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三陵溪谷磨崖觀音菩薩像)

시도유형문화재 제19호 (경주시)

 

경주 남산의 삼릉계곡에 있는 이 불상은 돌기둥 같은 암벽에 돋을새김한 것으로 연꽃무늬 대좌(臺座)위에 서 있는 관음보살상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있으며, 만면에 미소를 띤 얼굴은 부처의 자비스러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어 보관과 함께 이 불상이 현세에서 자비로써 중생을 구제한다는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불상 뒷면에는 기둥 모양의 바위가 광배(光背) 역할을 하고 있는데, 자연미에 인공미를 가한 느낌이다.

이 불상은 정확한 연대와 조각자가 알려져 있지 않으나,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 삼릉계곡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

<두 개 바위면에 새겨져 있다.>

 

다시 석조여래좌상 앞으로 되돌아와 잠시 계곡을 따르면 이정표가 있는 갈림길에 선다. 갈림길에서 계곡으로부터 벗어난다. 유물들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선각육존불이 새겨진 바위로 길이 이어진다. 두 개 바위면에 여섯 불상이 새겨져 있다. 바위를 마주보고 왼쪽으로 바위에 오르는 길이 나 있다. 바위를 넘어 살이 오른 뺨과 미소가 편안함을 주는 선각여래좌상까지 길을 진행한다.

 

삼릉계곡선각육존불(三陵溪谷線刻六尊佛)

시도유형문화재 제21호 (경주시)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이 2구의 마애삼존상은 만들어진 시대나 조각자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오른쪽 암벽의 정상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三陵溪谷線刻如來坐像)

 

선각육존불을 감상하고 다시 오름길로 길을 이어가다 좌측으로 이정표가 나타나는데 '삼릉계 석불좌상', '선각여래좌상'이라고 씌어있다.

계곡을 거슬러 올라 7~80m 정도 올라가면 석불좌상이 나타나고 좌측으로 난 길을 따라 산허리를 돌아나가면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가던 길을 계속 이어가면 상선암 상단부에 있는 바둑바위에서 삼불사로 내려가는 등산로와 합류가 된다.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三陵溪谷線刻如來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159호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삼릉계곡에 있는 높이 10m가량 되는 바위에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여래상이다. 이곳은 신라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큰 무덤이 있어서 삼릉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서쪽을 향하고 있는 불상은 몸은 모두 선으로 그은 듯이 새기고 얼굴만 도드라지게 표현한 독특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유형의 불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경주삼릉계곡석불좌상(慶州三陵溪谷石佛坐像)

 

경주삼릉계곡석불좌상(慶州三陵溪谷石佛坐像)

보물 제666호

 

이 불상은 경주 남산 삼릉계곡의 왼쪽 능선 중턱에 위치한 석불좌상으로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들었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카락(나발)을 붙였고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육계)가 있다. 얼굴은 풍만한 모습으로 둥글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한쪽 어깨에 옷을 걸쳤으며, 원래 불신(佛身)과 불상 받침과 불상 뒤의 원광인 광배(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었으나, 얼굴이 크게 손상되어 보기가 흉했으나 경주시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는 2008년 12월 29일(월) 경주남산 삼릉계곡 석불좌상(보물 666호)를 수리 완료하고 공개하였다.
석불이 앉아 있는 연화대좌에 새겨진 연꽃무늬와 창 모양의 안상(眼象)을 비롯한 전체적으로 당당하고 안정된 불상의 모습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주변에는 석탑과 암자가 있던 절터>
이 불상근처는 원래 절터라고 전해온다. 불상 10여m 전방 아래 바위 무리 곁에 석탑자리가 있다.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인 ‘삼릉계 3층석탑’이 바로 이 자리에 있었던 탑이라고 한다. 1930년경 일제가 남산유적조사를 할 때 이 탑을 박물관에 옮겨놓았으나 이후 그 확실한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불상복원 발굴 조사 때인 작년 7월, 팀원인 최 모씨가 이 근처에서 탑 파편 두개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이탑 상대갑석 기단부와 2층 탑신 우주훼손부분에 맞춰보니, 꼭 맞음으로써 이탑이 이 불상 전면에 있던 탑임이 증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불상 왼쪽 아래공터에서 절터 흔적을 찾아냈다. 골짜기 위로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건축 흔적이 있으며, 초석석재와 기와 파편, 부재들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대나무가 산재해있어 풍치도 아름답다.
이와 같은 일들을 종합해 볼 때 이 불상을 중심으로 법당과, 석탑이 있는 절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가 있다.

▲ 석불 보수 연혁

 

이 불상은 1910년경에는 광배 없이 불두가 잘라져 불상 하대석 우측에 놓여있었고, 그 불두도 우측 볼 아래 부분이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1923년 경에 가서 광배를 만들고 불두도 목 위에 올려놓았었고, 근년에 이르러 깨진 얼굴부분을 누군가가 보수하였으나 볼과 코와, 입술등 주요부분이 볼품없이 엉성하게 처리되어 있었다. 뒤쪽 광배 또한 불꽃이 춤추며 약동하는 모습이었으나 세월이 지남에 훼손되어갔고, 1960년 전 후 해서 아이들이 놀이터로 삼아 무너져 버렸다고 한다.

불상주변 경관도 당시는 나무 없는 돌무지 산기슭에 바위만으로 둘러쳐있는 삭막한 돌밭이었으나, 60년대 조방사업으로 소나무들이 자리를 잡아 푸르름이 살아나면서, 지금은 울창한 숲으로 변해 있다. 그러나 불상만은 옛 그대로 여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쓰러움에 발길을 돌려야 했고, 더러는 무성의한 관계당국을 원망하기도 했다.

국립경주문화연구소가 이 불상 복원작업에 착수한 것은 재작년 3월부터이다. 주변 일대를 발굴조사하면서 지역 불교미술관계전문과의 자문을 통해 불두안면의 턱 부분 및 깨진 광배를 보수하고, 제 위치에 세움으로써 1년9개월 만에 불상과 주변은 크게 달라졌다.

부처의 얼굴모양은 통일시대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남산 미륵골 불상이나, 안계리 석불등 현존하는 불상의 안면을 참고하여, 종전에 길게 만들어진 얼굴상에 비해 어느 정도 둥글고 원만한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흉한 얼굴 불상이 잘생기고, 넉넉하고 후덕한 모습으로 쫙 바뀐 것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여유롭고 흐뭇하게 여겨진다.


뒤쪽 광배는 십여 개로 쪼개져있던 조각편을 부치고, 결실된 부분은 새로 만들어 붙였다. 두광과 신광 둘레에 두 줄로 돋음 새김을 한 주형광배로, 주변에 보상화문과 당초문을 새기고 타오르는 불길모습으로 불상좌대의 앙련과도 친화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마침 마무리작업을 하던 안면이 있는 작업팀장이 다가와,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란다. 그는 천막 속에 보관하던 설계도와 작업 공정 판을 보여주면서 불상과 광배를 세우던 과정을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보고 또 봐도 불상 상호가 의젓하다. 총 높이2.38m, 광배높이가 1.66m이다. 나발머리위에 육계가 우뚝하고, 목에 삼도가 있으며, 어깨는 넓고, 체구는 장대하며 당당하게 보인다. 우견편단 법의에 허리는 살짝 가늘고, 오른손은 항마촉지인이요, 왼손은 왼발위에 얹혀있다. 무릎넓이가 불상키와 비슷해 느긋한 안정감이 있다. 앙련상대석 밑 중대석엔 면마다 안상이 새겨져있다. 이는 귀인들이 앉는 평상임으로 그 위 연꽃대좌에 계시는 분은 역시  존귀한 부처님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참고자료:다음카페 '보리수필'>

▲ 가까이 다가가 찍은 석불좌상

 

'선각여래좌상'을 만나고 다시 되돌아와서 만난 석불좌상은 수리 완료하고 난 뒤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건조가 되질 않아 둘레엔 그물로 출입을 막고 있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며칠 새 그렇게 춥던 겨울 날씨도 오늘은 누그러져, 조금은 따스한 탓도 있겠지만 새롭게 단장된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에서 마음이 더욱 훈훈하고 아늑해진다. 골짜기에 구르는 낙엽을 밟으면서 멀어지는 불상을 뒤돌아본다. 살다가 지치고 답답하거든 언제든지 찾아오라는 듯, 그는 잔잔히 웃는 얼굴로 나를 떠나보낸다.

 

상선암까지 오르는 동안 길목 곳곳마다 반겨주는 부처님들을 일일이 찾아뵙고 합장삼배 후에 카메라에 담으며 등로를 이어가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날다람쥐 마냥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니 시간도 꽤 지체가 되고 아침,점심 겸해서 빵 한조각 먹고 오르니 지치고 힘에 부대낀다. 바둑바위에 올라가서 요기를 하며 날아가지 않고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이름모를 산새와 대화를 하며 먹는 컵라면이 그렇게 맛날 수가 없다.

▲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三陵溪谷磨崖石迦如來坐像)

시도유형문화재 제158호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의 거대한 자연 바위벽에 새긴 앉아 있는 모습의 석가여래불로 높이는 6m이다.

몸을 약간 뒤로 젖히고 있으며, 반쯤 뜬 눈은 속세의 중생을 굽어 살펴보는 것 같다. 머리에서 어깨까지는 입체감있게 깊게 새겨서 돋보이게 한 반면 몸체는 아주 얕게 새겼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하던 양식의 마애불로 추정된다.

▲ 바둑바위

<신선이 바둑을 두면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고 이곳에서의 전망은 일품이다.>

▲ 점심 요기 중에도 곁에서 꼼짝않고 있는 이름모를 산새

▲ 상사바위 위에서 내려다 본 마애대불

▲ 같은 장소에서 바라본 팔각정(금오정), 그 너머 우측에 토함산이 조망된다.

▲ 서남산 상사바위

▲ 상사바위 안내문

 

상사바위 위에 올라 주변경관을 감상하고 멋진 전망을 카메라에 담느라 연신 셔터를 눌러대니 차가운 바람이 시샘을 하는 듯 세차게 불어 제낀다.

금오봉을 향하여 등로를 이어가니 예전 등로가 닳고 닳아 미끄럽기 그지없던 길이 말끔히 계단으로 단장을 한 모습이 생태계 복원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니 걷는 발걸음도 한결 가볍다.

금오봉을 올랐다가 남산순환도로를 거쳐 금오정을 지나왔지만 이미 앞서 소개된 곳들이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다 하겠다.

▲ 늠비봉 오층석탑(백제계 양식의 탑이라고 합니다.)

▲ 내림길 도중에 올려다 본 늠비봉오층석탑

 

금오정 좌측 내림길로 내려오면 늠비봉오층석탑을 만날 수 있다.

언제나 이곳에 오면 탁 트이는 전망에 막혔던 마음도 뚫리는 기분이 들고 편안한 마음이 든다. 더구나 휘영청 둥근 달이 떠오르는 보름날 밤이면 환히 비추이는 남산의 능선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운 곳이다.

석탑 아래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부흥사가 나오는데 요사채 뒤로 나있는 차도로 길을 이어가면 일명 '황금불'이라 불리워지는 '마애여래좌상' 입간판을 만나게 되고 아래로 진행해 나가면 좌측 내림길로 안내판이 서있다.

▲ 부엉골 마애여래좌상

 

부엉골 마애여래좌상은 전체 높이 97cm, 무릎너비 86cm, 어깨 너비 40cm의 크기인데, 전체적으로 불상 주위를 파내고 세부적인 것은 가는 선으로 음각하였다. 불상은 앙련의 연화좌 위에 앉아 있는 자세로, 소발에 육계가 낮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2줄의 삼도가 표시되었다.
불의는 통견으로 왼쪽 어깨에 띠매듭이 표현되었고, 가슴중앙에도 내의인 승각기의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길게 내리 뻗어 우측 무릎을 짚고 있는 촉지인인데, 왼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좌는 단판 앙련의 9엽 연화로서 2단 받침을 하였다.

▲ 잘 정비된 남산순환도로

▲ 경주 배리 윤을곡 마애석불좌상

 

경주 배리 윤을곡 마애석불좌상
(경북 유형문화재 195호)


경주시 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하나인 윤을곡의 ㄱ자형 바위벽에 새긴 불상이다. 동남향한 바위면에 2구, 서남향한 바위면에 1구를 새겨 삼존불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그 배치가 매우 특이하다.
중앙의 불상은 연꽃 대좌 위에서 앉아 있다.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유난히 높고 크며, 얼굴은 긴 타원형을 이룬다. 턱은 각진 것처럼 표현하여 다소 완강한 느낌을 주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입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대체로 부드러운 인상이다. 오른손은 마멸이 심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손바닥을 보이며 손끝을 위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내려 무릎에 걸쳐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다.
오른쪽 불상은 본존불보다 조금 작고 위축된 느낌이 든다. 양감있는 얼굴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양 어깨가 치켜 올라간 신체는 사각형으로 처리되었다. 상체가 짧은데 비해 하체가 길어서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오른손은 무릎에 얹어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왼손은 배에 대어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로 생각된다.
왼쪽 불상의 광배 왼쪽에 ‘태화9년을묘(太和九年乙卯)’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들 불상이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조각된 것임이 밝혀졌다. 9세기 전반 통일신라의 불상양식 연구에 매우 중요한 예가 되고 있다.

 

남산순환도로로 빠져 나와 포석정 방향으로 길을 이어나가다 보면 우측에 '윤을곡마애삼존불'을 알리는 이정표가 있고 가리키는 대로 70여 미터 올라가면 ㄱ자 모양의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을 만날 수가 있는데 본인 역시 처음 이곳을 찾은 탓인지 작은 흥분감마저 든다.

사진에 담고서 올라온 길을 되돌아 내려와도 되지만 지난 2차 답사때 못 들렀던 '창림사지 삼층석탑'을 만나러 가야했기에 지름길로 가고자 삼존불 좌측으로 나있는 희미한 등로를 따라 진행해 나간다.

인적이 드문 산길이라 솔잎이 잔뜩 깔려있는 푹신한 등로는 양탄자를 밟는 듯한 기분이다.

방향을 가늠해가며 등로를 따라 길을 이어 나가 내림길에 들어서니 포석정 뒷마을로 나온다. 포석2길을 따라 진행해 나가다 농로를 따라 길을 이어가니 비닐하우스로 된 산불감시초소가 나오고 우측 농로길로 진입 마주 보이는 숲으로 들어서니 화려한 쌍거북 형태의 비석좌대가 방문객을 반긴다.

그 옛날 화려하고 웅장했을 창림사를 마음 속으로 그리며 삼층석탑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옮기는 발걸음에 힘이 쏟는다.

▲ 창림사지 쌍귀부좌대

▲ 창림사지삼층석탑(昌林寺址三層石塔)

 

이곳 창림사지는 삼국유사에 신라 최초의 궁궐지로 기록된 유서 깊은 곳이다. 창림사는 통일신라 시대에 창건되었고 고려때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조선 초기에 폐사되고 탑만 남았다.
1824년에 석탑은 사리장엄구를 도굴하려던 자에 의해 도괴되었고 이때 조탑 사실이 기록된 창림사 무구정탑원기가 나와 이 탑이 신라 문성왕 17년(855)에 건립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곳 사역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이 쓴 사비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쌍두 귀부와 수 많은 주초석만 남아 있어 창림사 옛터임을 말해주고 있다.

포석정 (鮑石亭)

 

鮑石亭, 경주포석정지

사적 제 1호

 

금오산 정상에서 시작하여 북을 향해 약 1km쯤 흘러오다가 부엉드미 부근에서 서서히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윤을곡 여울물을 합치고 배실 여울을 합쳐 포석정 기슭을 씻으며 기린내로 들어가는 장장 2.5km되는 깊은 골짜기이다.
이 계곡의 물은 높은 바위에서는 폭포를 이루고 거대한 바위 밑에서는 소(沼)를 이루며 경사가 급한데서는 멋진 여울을 이루고 흘러내려 남산에서도 손꼽히는 절경이라 하겠다. 옛날 신라 왕실에서 향락의 쉼터로 만들었던 포석정(鮑石亭)이 이 골짜기의 어귀에 있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포석정일대는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하셨을 때 머무시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지금은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받으며 즐기던 곳인 포석정만 남아 있을 뿐 여러 건축터는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근래에 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모형을 만들기 위해 이곳을 발굴 조사하던 중 가로 5.5cm, 세로 8cm의 네모난 선 안에 가로로 '砲石(포석)'이라고 음각된 문자기와가 발견되어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이 포석정의 돌홈을 보고 있으면 떠가는 술잔이 굽이굽이 흘러가다가 어느 곳에서는 느릿느릿, 어느 곳에서는 빠르게 또는 빙글빙글 돌다가 흘러가는 율동을 느끼게 된다. 물도 잔도 춤추며 흐르는 것은 돌홈의 경사와 굽이치는 곡선으로 알 수 있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기록에 없다.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앞에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임금은 신하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하였다. 남산 신이 산으로 돌아간 다음 이제는 놀아도 좋다고 하니 신하들은 물었다.


"그 동안 어찌하여 놀지 못하게 하셨습니까?" "그 동안 남산신이 내려오셔서 춤을 추고 가셨기 때문이다." "남산신이 어떻게 춤을 추었습니까?"
신하들이 재차 물으니 임금은 손수 일어서서 남산신이 춤추던 모습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 춤이 널리 행하여 졌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으며, 이 춤은 고려시대까지 유행되었다 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 해안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시대인 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거북의 입으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인데, 이 돌거북은 조선조 말엽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 조상 무덤의 비석대로 사용했다고 구전되어 오고 있으나 거북의 행방은 알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서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밭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신라천년의 종말을 내린 슬픈 자취가 기록되었으니 55대 경애왕(景哀王)때 일이다. 왕 4(927)년 9월 후백제(後百濟)의 견훤은 신라를 침범하여 지금 영천까지 쳐들어 왔다.
견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받은 경애왕은 고려의 왕건에게 도움을 청해놓고 이 곳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왕과 왕비를 위시하여 신하들은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놓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 기회를 노린 견훤이 불시에 쳐들어오니 왕은 왕비와 같이 숨어 버렸고 신하들은 붙잡혀 종이 되더라도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었으나 견훤의 손에 모두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궁을 차지한 견훤은 왕을 잡아오게 하여 스스로 죽게 하고 마음대로 횡포를 부렸다. 견훤의 군사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여자와 남자들은 종으로 잡아가니 그 영화롭던 신라의 서울은 수라장으로 변했고, 찬란하던 거리는 피로 물들었다.


견훤은 김부(경순왕)를 왕위에 앉혀놓고 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등을 인질로 데려가니 신라는 다시 일어설 기력을 잃고 그 후 10년도 못되어 고려에 항복하고 말았으니 신라 천년의 종말을 이곳 포석정에서 내리게 되었다.<자료출처: 신라문화진흥원>

▲ 포석정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황금대

▲ 지마왕릉(祗摩王陵)

 

지마왕릉(祗摩王陵)

사적  제221호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포석정(鮑石亭) 가까이에 있으며 주위에 송림(松林)이 울창하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봉분만 남아 있을뿐 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전면(前面)에 작은 석상(石床)이 놓여 있으나 이는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이 고분은 위치와 봉분의 규모 및 형태로 보아 신라 초기로 올라갈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신라 제6대 지마이사금(祇摩尼師金)(재위(在位) 112-134)은 일명 지미이사금(祇味尼師今)이라고도 하며, 성은 박씨이고 파사이사금(破娑尼師金)의 아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134년 8월에 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다고만 전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장지(葬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

 

경주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이 석불들은 기본양식이 똑같아 처음부터 삼존불(三尊佛)로 모셔졌던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본존불은 머리에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표면이 매끄럽게 표현되었다. 어린아이 표정의 네모난 얼굴은 풍만하며, 둥근 눈썹, 아래로 뜬 눈, 다문 입, 깊이 파인 보조개, 살찐 뺨 등을 통하여 온화하고 자비로운 불성(佛性)을 표현하고 있다. 목이 표현되지 않은 원통형의 체구에 손을 큼직하게 조각하였는데, 왼손은 내리고 오른손은 올리고 있다. 묵직해 보이는 옷은 불상을 전체적으로 강직해 보이게 하지만, 어린아이같은 표정과 불균형스런 체구 등으로 오히려 따뜻한 생명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왼쪽의 보살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으며, 가는 허리를 뒤틀고 있어 입체감이 나타난다.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보병(寶甁)을 잡고 있는데, 보관에 새겨진 작은 부처와 더불어 이 보살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오른쪽의 보살 역시 잔잔한 내면의 미소를 묘사하고 있는데, 무겁게 처리된 신체는 굵은 목걸이와 구슬장식으로 발목까지 치장하였다.

조각솜씨가 뛰어난 다정한 얼굴과 몸 등에서 인간적인 정감이 넘치면서도 함부로 범할 수 없는 종교적 신비가 풍기고 있는 작품으로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창림사지삼층석탑'을 구경하고 오던 길을 되돌아 나와 사적 제1호인 포석정을 관람한 후 주차장 왼편으로 나있는 소롯길로 접어들어 '지마왕릉'을 들러 흔적을 남긴 뒤 우측 농로길로 들어서면 삼불사가 나온다.

삼불사 뒷편으로 올라서면 절 마당 한가운데를 통과해 좌측으로 진행해 나가면 보물 제63호인 '배리석불입상'을 만난다.

그동안 못 찾은 사이에 둘러쳐져 있던 담장이 허물어지고 주변 환경이 깨끗해져 있었다. 담장과 지붕이 햇빛과 바람을 막아 석불에 곰팡이가 피는 등 훼손과 부식이 심하다 들었는데 이제라도 하나씩 개선되어 가고 있는걸 보면 다행이다 싶다.

이로써 3차 답사산행을 마치게 되고 다음 4차 답사를 위한 코스 구상에 들어가며 차를 몰아 보금자리로 향하는 발걸음은 하나씩 성취해 나가는 작은 기쁨에 가속기를 밟는 발걸음도 경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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