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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산행 제2탄(나정-금오봉-백운암-고위봉-천룡사) 본문

◈ 산행이야기/☆ 2009년도 산행

경주남산 문화유적 답사산행 제2탄(나정-금오봉-백운암-고위봉-천룡사)

해와달^^* 2009. 2. 10. 22:31

♧ 산행일시 : 2009. 02. 10 (화) 날씨:맑음

♧ 산행장소 : 경주남산 일원

♧ 산행인원 : 직장 동료와 함께

♧ 산행코스 및 소요시간 : 나정-해목령-금오정-금오봉-봉화대능선-봉화대-백운암-고위봉-천룡사-틈수골

                                        (소요시간: 10:05-15:55, 5시간 50분)

 

당직근무 마치고 남산 둘러보기 두번째 코스를 밟아보기 위해 집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챙겨넣고 집을 나선다.

어제 저녁 직장 동료와 함께 남산을 둘러보기로 약속이 되어 있어 오늘 함께 산행을 하게되어 외로운 길이 되지 않을 것 같아 시작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며칠동안 계속되던 농무(濃霧)현상도 오늘은 많이 걷힌 듯 시야가 한결 나은 것 같아 또 한번 유쾌해 지는 기분이다.

오늘의 코스는 2월 4일 맛보기로 다녀왔던 '나정'을 들머리로 해서 해목령을 거쳐 금오봉으로 오르는 코스를 택했다. 몸 상태와 시간을 봐가며 등로를 늘리거나 줄여보기로 하고 일단 시작하고 본다.

오릉사거리에서 포석정 방향으로 차를 몰아 곧이어 나타나는 '나정', '일성왕릉'을 알리는 표석에서 좌회전하여 '양산재'입구에 차를 주차한 후 장비를 챙겨 심호흡을 한뒤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오늘의 산행을 시작한다.(10:05)

마을 입구 우측 논 가운데 홀로 서있는 '남간사지 당간지주'를 둘러보고 사진에 담은 뒤 오던 길을 되돌아 '보광사'를 알리는 조그마한 간판을 따라 길을 이어 나간다. 시멘트길을 올라가니 고풍스런 한옥이 눈에 들어오는데 바로 '배씨'문중의 시조를 모신 사당인 '경덕사'가 나오고 바로 위 우측에 '보광사' 사찰을 지나니 좌측 내림길이 나타나는데 차량출입을 금하는 쇠사슬이 길을 막는다. 아마도 일성왕릉으로의 차량 진입을 막고 있는 듯 하다. 왕릉을 구경하고 무덤 뒤 우측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니 상서장에서 올라오는 등산로와 합류하며 이어지는 등로는 여러번 소개된 길이라 이후부터는 사진으로 갈음하며 두번째 남산 문화유적 답사산행이 시작된다. 

△ 산행 코스 

△ 경주나정(慶州蘿井)

 

『삼국사기』신라본기 제1 ‘시조 혁거세 거서간’ 조에 보면 양산(楊山)과 나정(蘿井)이라는 말이 나온다. 양산은 버드나무가 많은 산이고 나정은 칡넝쿨 우거진 우물이다. 이곳 양산나정이 바로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다. 고허촌장(高墟村長)인 소벌공(蘇伐公)이 말울음소리를 듣고 가서 얻은 큰 알에서 나온 어린 아이가 바로 혁거세이다. 박이라는 성은 큰 알이 박과 같다고 해서 붙였다고 한다.

경주 시내에서 오릉사거리를 지나 좌회전해 남간마을 가는 길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소나무숲이 보인다. 양산이라는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버드나무가 있어야 하지만 현재는 이와 달리 소나무가 무성하다. 신라 왕조를 연 시조의 출생지라 후대에 소나무를 심어 보호했을 것이다.

이곳에는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평탄한 대지가 보이고 그 한쪽 편에 나정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유허비가 있다. 나정은 역사적인 의미가 있어 찾는 곳이지 별로 볼 것은 없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물은 매몰되어 볼 수가 없고 주변은 언덕과 밭처럼 쓸쓸하고 황량하기만 하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을 한 다음 정지작업을 해서 현재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 양산재(楊山齋)

 

 

 양산 아래 자리잡고 있는 이 재각 건물은 6부 촌장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6부 촌장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 땅에 알천양산촌, 돌산고허촌, 취산진지촌, 무산대수촌, 금산가리촌, 명활산고야촌의 여섯 촌을 나누어 다스리고 있었는데, 서기 전 57년에 알천 언덕에 모여 알에서 탄생한 박혁거세를 여섯 촌장이 추대하여 신라의 첫 임금이 되게하니 이 해가 바로 신라의 건국년이 되었다.

그 후, 신라 제3대 유리왕이 6부 촌장들의 신라 건국 공로를 영원히 기리기 위해 6부의 이름을 고치고 각기 성을 내리게 되니 바로 양산촌은 이씨, 고허촌은 최씨, 대수촌은 손씨, 진지촌은 정씨, 가리촌은 배씨, 고야촌은 설씨이다. 이로써 신라에 여섯 성씨가 탄생되었고 각기 시조 성씨가 되었다. 이 사당은 1970년 이들 6촌장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 남간사지당간지주(南澗寺址幢竿支柱)

 

보물 제909호

경북 경주시  탑정동 858-6

 

당간이란 사찰(寺刹)에서 불교의식(佛敎儀式)이 있을 때 불·보살(佛·菩薩)의 공덕(功德)과 벽사적(僻邪的)인 목적 아래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기 위한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세우기 위한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2개의 화강석(花崗石) 돌기둥으로 되어 있는데 사지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서 있다.

돌기둥의 윗부분과 옆모서리를 죽여서 의장수법(意匠手法)을 나타내었다. 정상부(頂上部)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십자형의 간구(竿溝)와 기둥몸체 두 곳에는 원형 구멍이 있다.
특히 십자형 간구는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수한 수법을 지녔으며 지주의 크기는 3.6m, 폭 60cm, 두께 45cm인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중기(中期)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 경주 경덕사(慶州 景德祠)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塔洞)에 있는 신라개국원훈(新羅開國元勳)을 모신 사당.
배문(裵門)의 시조이자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인 배치타와 중시조인 고려개국원훈 태사무열공(太師武烈公) 배현경(裵玄慶)을 안치하고 있으며,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1995년 새로 건립하였다.

원래 명활산(明活山) 아래에 유허비각(遺墟碑閣)이 있었으나, 문화재정리사업으로 1984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이후 다시 사묘(祠廟)로 개작하여 배치타를 중심위패로 모시고 배현경을 함께 배향하였다. 사당은 경내를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상단 중앙에는 경덕사(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배치하고, 내삼문인 경의문(敬義門)과 낮은 담으로 상하를 구분하였다. 하단에는 왼쪽에 재실인 한존재(閑存齋), 오른쪽에는 단칸의 유허비각을 두었으며 밖에는 외삼문인 육화문(六和門)을 세우고 사방에 담을 둘렀다. 음력 1월 5일과 양력 4월 18일에 제를 올린다.

△ 신라 일성왕릉(新羅 逸聖王陵)

 

사적 제173호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 23


慶州南山西麓(경주남산서록) 약간 경사진 地点(지점)에 位置(위치)하며 下段(하단)에는 石築(석축)을 쌓았다. 封墳(봉분) 前面(전면)에는 自然石(자연석)으로 쌓은 護石(호석)으로 보이는 石列(석열)이 있고 封墳周圍(봉분주위)에도 그러한 돌을 돌렸던 듯하다. 石床(석상)은 後世(후세)에 設置(설치)한 것이다. 新羅(신라) 7代 逸聖王(일성왕)(134∼154)은 儒理王(유리왕)의 長子(장자) 혹은 儒理王兄(유리왕형)의 아들이라고도 하나 未詳(미상)이다. 王(왕)은 農土(농토)를 늘리고 堤防(제방)을 수리하여 農業(농업)을 권장하였으며 民間(민간)에서 金(금), 銀(은), 珠玉(주옥)의 사용금지를 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치에 주력하였다. 封墳(봉분)은 높이 7m, 직경10m이며 주위면적은 34,557㎡(10,472坪)이다.


* 연혁(유래)
이 능은 신라 제7대 일성왕(逸聖王, 재위 134∼154)을 모신 곳이다. 경주 남산의 북쪽인 해목령(蟹目嶺)에서 뻗어내리는 능선의 서쪽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일성왕의 성은 박씨(朴氏)인데 『삼국사기, 三國史記』에는 제3대 유리왕(儒理王)의 맏아들로,『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제3대 유리왕의 조카 혹은 제7대 지마왕(祗摩王)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농사짓는 땅을 늘리고 제방을 수리하여 농업을 권장하였으며, 백성들이 금은주옥(金銀珠玉)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왕릉의 봉분은 지름 15m, 높이 5m인데 둘레의 돌이나 주위 환경으로 보아 내부 구조는 돌방 石室 으로 추정된다.
이 능은 조선 영조(英祖) 6년(1730) 이후에 알려지기 시작한 왕릉이다. 한편 이 왕릉은『삼국사기』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지냈다는 경애왕릉(景哀王陵)일 것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 소나무와 어우러진 멋진 산책길

△ 해목령 게눈바위

△ 게눈바위에서 바라본 남산 정상부

(좌측:금오정, 가운데 바위 위의 소나무 뒤로 늠비봉5층석탑이 보인다)

△ 남산산성 

△ 남산 순환도로의 돌탑

△ 남산 금오정(南山 金鰲亭)

△ 상사바위 안내문

△ 상사바위

△ 남산부석(南山浮石)

△ (구) 팔각정 터(사자봉)

△ 사자봉에서 바라본 금오정과 경주 시내 전경

△ 금오산 정상에서...

△ 금오산 정상석

△ 기암괴석(누군가 두꺼비를 닮았다고 하던데...)

△ 삼화령 연화대좌

△ 삼화령 안내문

△ 삼화령에서 올려다 본 연화대좌

△ 봉화대능선의 기암

△ 봉화대능선 길에서...

△ 다시 찾은 신선암 마애불

△ 봉화대 가는 길에...

△ 고위산 백운암 대웅전

△ 고위능선을 오르며...

△ 모처럼 전망좋은 곳에 앉아 한컷!

△ 천룡사 삼층석탑을 배경으로...

 

△ 고위산 정상에서 천룡사로 내려서는 새로 조성된 계단길

△ 무척 가파르고 험했던 천룡사 내림길에 조성된 나무계단

△ 열반재 갈림길(우측: 열반골 관음사,천우사. 좌측: 천룡사)

△ 열반골 안내문

△ 천룡사지 삼층석탑(天龍寺址三層石塔)

 

보물 제1188호
명   칭 : 천룡사지삼층석탑 (天龍寺址三層石塔)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875-2

이 석탑은 단층기단< 單層基壇 > 위에 3층의 탑신< 塔身 >을 형성한 일반형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 1990년 탑지< 塔址 > 주변을 조사하여 단층기단< 單層基壇 >임을 확인하였고, 기단부< 基壇部 >의 일부와 상륜부< 相輪部 >는 부족한 부재< 部材 >를 보충하여 고증을 거쳐 새로이 복원하였다. 단층기단에 각층의 탑신< 塔身 > 괴임대가 다소 작아지고 옥개석< 屋蓋石 >의 낙수면< 落水面 >이 신라시대 특유의 경쾌한 면인 것으로 보아 9세기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연혁(유래)
『삼국유사, 三國遺事』에 남산 남쪽의 제일 높은 봉우리를 고위산이라 하고, 산 남쪽의 절을 고사(高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라 기록하고 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발굴조사결과 7개소의 건물터를 확인하였다.
이 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3층의 몸체돌을 형성한 일반형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 원래 천룡사터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90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조사단이 탑 주변을 발굴조사하여 단층기단의 3층탑임을 확인하고, 1991년 기단의 일부와 꼭대기 부분의 머리장식 대부분이 없어진 것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9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탑의 높이는 6.75m이다.

 

* 천룡사(天龍寺)의 내력

이 절은 수리사(高位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남산의 많은 절터 중에서 이름이 확실하게 남아있는 세 절 중의 하나이다. 신라 통일 초기 당나라 사신 악붕귀가 이 절에 와보고 이 절이 허물어지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 하였다 한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이 절이 처음 지어진 연대는 사천왕사나 망덕사와 같이 7세기 말경에는 이미 세워졌던 것으로 믿어진다.
악붕귀가 서라벌에 다녀간 것이 통일 신라 초기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절은 신라 말기에 허물어진 것을 고려 초기에 이르러 최제안 이라는 사람이 다시 지었는데, 여러 법당과 회랑 . 주방 . 창고 등을 갖춘 대가람이 있고, 돌부처며 흙부처 등 많은 불상이 모셔져 있었다 한다.
천룡사라는 이름은, 이 절을 지은 최제안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큰 딸이 천년(天女)이고 동생이 용녀(龍女)였다 한다. 이 두 딸을 위하여 지은 절이기 때문에 천룡사라 부르게 된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실상은 성수천장(成壽天長: 임금이 오래 삶)과 국태민안(國泰民安: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안함) 을 기도하는 중요한 절이었다 한다.
전설로 미루어 볼 때, 신라시대에는 수리사라 부르던 것을 고려 정종17년에 최제안이 다시 지은 후로 천룡사로 절 이름을 고쳐 부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 고려 양조(兩朝)를 내려오면서 나라 지키는절로 이름있던 이 사원은 200년 전까지도 남아 있었다고 하는데, 부근에는 신라. 고려 . 조선시대의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 천룡사 터에서 올려다 본 고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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