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어머님을 위한 기도도량 순례 본문
나의 어머님 가신 지도 벌써 한달이 지났다.
아직도 뇌리속엔 그냥 주무시는 듯한 모습만 남아있어 돌아가신게 실감이 나질 않는다.
살아 생전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책감에 문득문득 떠오를 때마다 왈칵 눈물이 쏟는다.
그동안 대구에서 동생이 모시고 지내온 탓에 부대끼며 살아온 지난 세월속에서 미운 정 고운 정은 덜하지만 언제나 마음속엔 낳아주시고 고이고이 길러주신 내 어머니의 모정은 잊을 수가 없다.
큰 아들에 대한 기대가 크셨지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늘 걱정만 끼쳐드린 불효자였기에 마지막 가시는 길에 더 슬피 통곡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우리 곁을 떠나셨어도 마음속엔 언제나 남아 계실 내 어머니의 극락왕생을 위해서 절을 찾아 불공이라도 드려야겠기에 무작정 팔공산으로 향한다.
갓바위 부처님 찾아뵙는 것으로 시작한 사찰 순례가 5곳으로 늘어나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그나마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다. 어디 계시든 편히 지내시라는 기도와 함께 남은 가족끼리 잘 지내며 울 엄마 잊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본다.
★사찰 순례코스
팔공산 선본사 갓바위-용주암-약사암-불굴사-홍주암
<흔적들>
△ 갓바위 부처님(관봉석조여래좌상)
관봉 석조여래좌상 [冠峰石造如來坐像]
1965년 9월 1일 보물 제431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4m, 재료는 화강석이다. 대좌와 불상이 하나의 돌로 조각된 좌상불이다. 소발(素髮)에 육계(肉髻)가 명확하고 얼굴은 풍만하다.
눈·코·입은 세련되게 표현하여 풍만한 얼굴과 잘 조화되어 있다. 코 끝에서 입 가장자리까지 八자로 깊이 판 것은 시대성과 유파성(流派性)을 보여주는 좋은 보기이고, 이마에 뚜렷한 백호(白毫)도 특징적이다. 귀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굵고 곧은 목에 삼도(三道)가 있다.
어깨는 넓고 반듯하며 가슴도 발달되어 풍만하다. 손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다리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하여 그 비율도 격식에 맞고 조각수법도 훌륭하다. 통견(通肩)한 법의는 평행단상(平行袒裳)이 기본을 이루며 옷도 퍽 얇고 선도 유려하다.
대좌는 4각형이나 앞과 양 옆으로 옷자락이 내려와 상현좌(裳懸座)가 되어 있고, 전면의 옷주름[褶襞]이 세 가닥으로 내려진 점은 경북 군위 삼존불(軍威三尊佛) 본존의 좌상과 같으나 변화를 생략한 점이 다르다. 육계 위에 자판석을 올려놓고 있으며, 이것은 본래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이 불상의 동쪽 계곡에 있는 선본사(禪本寺) 사적기에 따르면, 원광(圓光)의 제자 의현(義玄)이 사별한 어머니를 위하여 조성한 미륵보살이라 하나 이것은 불상의 형태이어서 확실한 상명(像名)을 단정할 수는 없다.(네이버백과 발췌)
△ 비비추
△ 용주암의 불상들
△ 팔공산 관봉 용주암(八公山 冠峰 龍珠庵)
△ 수국
△ 용주암에서 바라본 경산시 하양 방면 전경
△ 용주암 주지스님의 정성이 대단하지요.(20년이 넘은 공덕입니다)
△ 용주암에서 올려다 본 관봉 갓바위
△ 층층이꽃
△ 짚신나물
△ 참나리
△ 불굴사 은행나무
불굴사 [佛窟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의 말사이다. 690년(신라 신문왕 10) 옥희(玉熙)가 창건하였다. 사찰 옆에 석굴이 있는데, 원효(元曉)가 수도하던 곳이라고 하며, 김유신이 이곳에서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기도하다 천신(天神)으로부터 깨달음과 지혜를 얻었다고도 한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건물이 500동에 이르고 암자가 12곳, 물레방아가 8대나 있었고 은해사를 말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1736년(조선 영조 12) 큰 비가 내려 건물들이 대부분 무너진 뒤 송광사에서 온 한 노승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절이 갑자기 쇠퇴하게 된 이유가 설화로 전한다. 조선시대 들어 이 절은 유생들의 횡포에 크게 곤혹을 치렀다. 유생들이 이 절을 놀이터로 삼고 승려들에게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점잖은 선비가 찾아왔다. 승려들이 선비에게 유생들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선비는 산너머 솔밭에 가면 큰 거북돌이 있을테니, 그 거북의 눈을 빼면 손님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승려들이 그의 말을 믿고 거북의 눈을 빼자 천둥과 번개가 치고 비가 오더니 산사태가 일어나 절이 모두 묻혀버렸다. 이후 작은 암자만 복원하여 은해사의 말사가 되었다고 한다.
법당과 약사전·염불당·산신각·석탑·염화실·종무소 등의 건물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보물 제429호로 지정된 불굴사삼층석탑을 비롯하여 약사여래입상과 석등·부도 등이 전한다. 이 중 삼층석탑은 창건 당시에 조성된 것으로 높이 7.43m이다. 약사여래 입상은 머리에 쪽두리 비슷한 모양의 장식이 있어 주목되고, 6km 떨어진 팔공산 갓바위부처와 마주보고 있다고 해서 민간에는 영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6년 사찰 옆 석굴을 수리하다가 청동불상 1점을 발굴하기도 하였다.(네이버백과 발췌)
△ 불굴사 적멸보궁과 삼층석탑(보물 제429호)
△ 원효굴과 홍주암이 정상부에 있습니다.
△ 홍주암 표석
불굴사 홍주암(佛窟寺 紅珠庵)
홍주암은 붉은 구슬이라는 의미로 태양을 뜻하는데 음의 기운을 가지고 있는 불굴사 경내에서는 가장 이른 시간에 해가 솟는 것을 볼수 있기 때믄에 지어졌다고 한다.
이는 홍주암 석굴인 원효굴에서 정진하던 어느 스님이 지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이라 한다.
△ 원효굴의 부처님과 인왕상
이 석굴은 원효대사의 최초의 수행처로써 무애 득도한 곳으로 알려져 원효굴 또는 원효암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원효대사가 토담을 쌓고 수행 정진하던 당시에 모셨던 불상이 1970년 2월 발견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한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기원한 도량으로서 장군이 17세때 이 곳에 기단을 쌓고 기도정진 하던 중 삼일 만에 신인(神人)을 만나 비법을 배웠다고 한다.
△ 아동제일약수(我東第一藥水)
원효굴에 있는 천연약수인 '아동제일약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고 귀한 약수로서 신장과 피부에 특효가 있다. 원효스님 뿐만 아니라 김유신 장군이 기도할 때 음용했던 것으로 "장군수"로도 알려져 있으며 예로부터 주변에서는 만병통치의 약수로 유명하다.
△ 원효굴에서 바라본 멋진 전망(대-포 고속도로가 쭉 뻗어있네요)
'★ 가족'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와 함께 떠난 탐라국(제주) 나들이 마지막 날 이야기 (0) | 2010.09.17 |
---|---|
아내와 함께 떠난 탐라국(제주) 나들이 첫째날 이야기 (0) | 2010.09.15 |
2010. 01. 01 양포 바닷가 해맞이 (0) | 2010.01.02 |
부모님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던 날... (0) | 2009.09.07 |
소매물도로의 여행 (0) | 2008.03.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