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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경주 산쟁이 서울 관악산 나들이 본문

◈ 산행이야기/☆ 2010년도 산행

경주 산쟁이 서울 관악산 나들이

해와달^^* 2010. 3. 23. 01:26

♣ 산행일자 : 010. 03. 21 (일) 맑음

♣ 산행장소 : 서울특별시 관악구, 경기도 과천시 일원

♣ 산행인원 : 옆지기랑 둘이서...

♣ 산행코스 : 서울대입구 - 호수광장 - 제4야영장-연주대-연주암-과천향교

♣ 산행시간 : 4시간 40분(휴식 및 식사 포함, 관악의 절경을 넋을 놓고 구경하다보니...)

 

관악산(冠岳山) 개요

높이는 632m이다. 북한산(北漢山)남한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이중으로 둘러싼 자연의 방벽으로, 옛 서울의 요새지를 이루었다. 1968년 건설부 고시 제34호에 따라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면서 산이름이 구의 명칭이 되었다.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五岳)에 속했던 산으로, 서울의 남쪽 경계를 이루고 있고 그 줄기는 과천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까지 이른다. 북서쪽으로 서울대학교, 동쪽으로 정부 과천청사, 남쪽으로 안양유원지가 자리잡고 있다. 주봉(主峰)은 연주대(戀主臺)이고, 산정의 영주대(靈珠臺)는 세조(世祖)가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산중에는 연주암(戀主庵:경기기념물 20),자왕암(慈王庵),불성사(佛成寺),삼막사(三幕寺),관음사(觀音寺) 등의 산사(山寺)와 과천향교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삼막사는 원효의상 등의 고승들이 수도하였다고 한다. 산정에는 기상청의 기상 레이더 시설이 있다. 산세는 험한 편이나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도심에서 가까워 많은 등산객이 찾는다. 매년 봄 철쭉제가 열린다.(두산백과 발췌)

 

◈ 산행기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큰 아이와 이미 직장생활을 하는 딸아이의 사는 모습을 둘러보려고 올라갈 차비를 하던 중 이왕지사 서울나들이를 제대로 해볼 요량으로 좋아하는 산이나 다녀오자는데 생각이 미치자 머리속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어느 곳으로 가볼까 생각하다가 관악산, 청계산 두 곳을 놓고 저울질하다 100대 명산에 들어가는 관악산을 올라보기로 하고 아이들한테 보내줄 것과 산행장비 등등을 챙겨 차에 실어보니 뒷좌석이랑 트렁크가 그득하다.

주말 늦은 아침을 챙겨먹고서 11시가 넘어서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올라가 수도권으로 들어서니 넓은 고속도로도 막히기 시작한다. 게다가 짙은 황사로 보이는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는게 마치 사막 한 가운데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내일 산행에는 지장이 없을런지...걱정이다.

근 6시간 가까이 소요되고 나니 아이들 사는 집에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과 반가운 해후를 하고 짐을 내려놓고서 준비해 놓은 저녁식사를 가진다.

식사 후에 마트에 가서 아이들 살림 몇가지와 식료품도 구입하고 돌아와서 모처럼 식구가 다 모여서 얘기꽃을 피우며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니 어느 덧 장성하여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아이들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오누이가 오손도손 의좋게 서로 의지하며 잘 지내면 좋으련만... 하는 바램이지만 잘 될런지... 다 같은 부모 마음이리라...

아들 넘한테 차 키를 넘겨주고 안전운전 잊지말라고 당부하고서 늦은 시간까지 얘기꽃을 피우다 잠자리에 들어간다.

아침에 바깥을 내다보니 다행히 황사현상도 없고 날씨마저 맑아 멀리서 온 산꾼의 마음을 밝게 해준다.

식사를 하고서 배낭을 들쳐메고 아이들과 작별을 하고 나와 가까운 분식점에 들러 김밥과 주먹밥을 사서 챙겨 넣고 지하철을 타고 환승까지 해가며 서울대입구역에 도착, 다시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서울대입구에 하차하여 매스컴으로만 접했던 서울대 정문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으로 관악산으로의 첫 걸음을 내 딛는다.

이미 많은 등산객들로 인해 굳이 헤멜 필요가 없을 정도인 것 같다. 먹을거리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관악산공원 가는 길 옆에는 김밥이며 떡이랑 먹을거리가 수두룩하다. 아내는 떡이 맛있게 보인다고 쑥떡을 한 봉지 사서 배낭에 쑤셔 넣는다. 언제 다 먹을런지... ㅎㅎ

선거철이 다가왔는지 교육감 입후보자들이 나와서 유인물을 나눠주며 인사치레하기 바쁜 모습이다. 나야 해당사항이 없으니 애써 외면하며 그냥 지나친다.

등산안내판을 사진에 담고서 신발끈을 고쳐매고 화장실까지 다녀와서는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한다.(11:55) 

△ 산행지도

△ 서울대 입구의 모습(뒷쪽으로 관악산 정상부가 보입니다.)

△ 관악산공원 안내도

 

양 볼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쌀쌀한게 확실히 북쪽지방이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이 든다. 남쪽 지방은 벌써 들꽃이 피기 시작하는 따뜻한 봄날인데...

일요일이라 많은 등산객들로 인해 정상부에 발디딜 자리는 있을지 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가며 아내랑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걷다보니 어느새 호수공원에 도착하게 되고 밝은 햇살에 빛나는 호숫물이 너무 맑아 사진에 담지 않을 수가 없다.(12:10)

△ 관악산 호수공원 입구

△ 물이 너무 맑은데다 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실 지경이었네요.

△ 아담한 계곡에 이런 멋진 비경이 숨어 있을 줄이야...

△ 부족한 수면 때문에 산행을 제대로 할런지 걱정이 되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은 것 같네요.

 

호수공원을 지나 좌측으로 나있는 계곡을 따라 진행하니 한층 더 흐르는 물소리가 가까이 들려온다.

겨우내 얼었던 계류에 소리없이 따스한 봄의 빗장을 열고 맑은 음악소리를 내며 힘차게 흐르는 맑은 물을 바라보니 새삼 삶의 역동성을 느낀다.

늘 산은 그대로인듯 하면서도 새롭고 사랑스런 공간이다. 개울가의 작은 풍경 하나도 신비롭고 궁금 투성이고 물속을 보듯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그곳에 가려진 그런것도 좋고 보는 시각에 따라 새로운 모습처럼 하염없이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도 오케스트라의 감미로운 음악으로 들려온다.

작은 계곡에도 있을건 다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저마다 자태를 뽐내고 있는 기기묘묘한 풍치를 카메라에 담으며 오르다보니 오히려 아내보다 더 늦어져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소리에 허겁지겁 냅다 달려간다.

비록 산행시간은 고무줄처럼 늘어질지언정 주변 풍광을 가슴에 그리고 두 눈으로 담으며 걷는 지금의 순간은 적어도 행복한 시간임에 틀림이 없을 것 같다.

제4야영장 쉼터에서 가져간 귤을 꺼내 하나씩 먹고서 연주대를 향한 오름길로 접어든다.(12:38)

△ 아이들의 무탈함을 소망하며 돌탑에 돌 하나 올려놓는 엄마의 마음입니다.

△ 북한산 못지 않게 돌길이 제법 많은 곳이었네요.

△ 돌길을 따라 오르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관악산 정상부가 보이는 멋진 모습입니다.

△ 연주암, 학바위능선 갈림 이정표

 

△ 곳곳에 샘터가 있어 작은 물병 하나만 있어도 걱정이 없을 정도입니다. 더구나 물맛 또한 일품이었구요.

△ 정성이 지극한 돌탑을 지나며...

△ 막바지 난코스 '깔딱고개'를 오르며 아내로부터 처음으로 힘들다고 하는 소리가 나옵니다.

 

돌길이 이어지는 쉽지않은 등로를 쉼없이 오르니 벌써 하산하는 산님들도 꽤 있어 교행하는데 조금은 걸리적거려 불편한 감이 든다. 요즘 우측통행을 하라고 권유를 하고 있으니 다들 그대로 따라하기만 하면 좁은 등로에서 어깨를 부딪히는 일은 없을텐데...

급사면길의 연속인 깔딱고개 오름길은 아내에게는 조금 버거운가 보다. 지금껏 잘 따라오더니 처음으로 다리가 아프다는 소리를 한다.

잠시 쉬면서 '이제 거의 다왔으니 조금만 참으라'고 격려를 해준다. 인생살이에서 힘든 고비들을 수없이 겪게 되지만 그때마다 참고 극복하다보면 필경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처럼 정상부에 당도하여 내려다보는 산정에서의 풍광을 맛보려면 지금의 힘듬과 고통은 참아내야 할 일이다.

△ 제3 깔딱고개 고갯마루

△ 깔딱고개에서 소머리바위 방향 암릉길을 오르며...

△ 사방 막힘이 없는 조망에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 과천시 전경

(경마공원과 건너 청계산이 한 눈에 조망이 되는 멋진 모습입니다.)

△ 소머리바위(牛峰)

△ 연주대를 배경으로...

 

깔딱고개를 힘겹게 올라서니 웬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지... 눈이 휘둥그레진다.(13:39)

이곳에서 사당역으로 내려가는 코스와 과천향교로 내려가는 두 개의 코스를 하산 코스로 정했었는데 고속버스 예매시간에 맞춰 움직이기로 하고 일단은 소머리바위 쪽부터 올라보기로 하고 아내를 데리고 암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르내리는 등산객들로 인해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다. 경사도가 심한 암릉길을 조심스레 올라서서 연주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야말로 탄성이 절로 나온다.

동서남북 어느 한 군데 막힘이 없이 시원스레 터지는 조망에 그리고 그 아래 세계적인 도시 수도 서울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광경에 할말을 잃고 그저 눈으로 감상하기 바쁘다. 북쪽 연주대 너머 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아스라하고 그 아래 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가운데 우리의 아름다운 서울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과천시가 내려다 보이는데 지난번 친구들과 찾았던 경마공원도 조망이 되고 청계산, 광교산이 그 뒤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서쪽으로는 멀리 인천광역시의 고층빌딩들이 아련히 조망이 되고 남으로는 소머리바위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있고 관악에서 뻗어나간 학바위능선과 팔봉능선 등이 겹겹이 도열해 있는 멋진 전경에 오늘의 산행지로 정한게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해본다.

△ 북서쪽 방면의 서울시내 전경

△ 서쪽 방면의 전경. 멀리 인천광역시도 어렴풋이 조망이 됩니다.

△ '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절경 앞에 그저 말을 잊고 바라볼 뿐입니다.

△ 다시 한번 과천 방향을 조망하며...

△ 우봉(牛峰) 위에 올라선 산님들의 멋진 모습입니다.

△ 학바위능선과 국기봉

(그 뒤 능선이 팔봉능선입니다.)

 

오랫동안 일망무제의 조망을 구경하노라니 불어오는 찬 바람에 한기를 느끼게 되어 바위 틈으로 찾아들어 준비해간 김밥과 주먹밥 그리고 컵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한다. 게다가 산행 시작할 때 샀던 쑥떡도 꺼내놓으니 풍치좋은 명산에서 둘만의 푸짐한 오찬이 되었으니 신선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가까이 건너다 보이는 소머리바위에 산님들이 오르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오금이 저려오게 만든다.

하지만 나 역시 오르고픈 유혹을 진하게 느끼지만 아내가 만류하기에 참을 수밖에...

따끈한 커피 한잔에 몸을 녹여가며 주변 풍광을 맘껏 구경하고서 연주대를 오르기 위해 깔딱고개로 되돌아 내려간다.

암벽을 조심스레 밧줄을 잡고 내려 깔딱고개 안부에 도착하여 시간 계산을 해보니 사당역 방향 코스는 차 시간 맞추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 같아 연주암을 경유하여 과천향교 방향으로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연주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 점심을 챙겨 먹고서 다시 깔딱고개로 내려갑니다.

△ 말바위능선을 지나며 올려다 본 기상관측소의 웅장한 모습

△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외길 암릉길을 오르려니 다리가 후들거리네요.

△ 관악산 정상부에 위치한 연주대의 풍광은 그야말로 압권입니다.

 

 

연주대 [戀主臺]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있는 연주봉(:629m) 절벽 위의 절.

1973년 7월 10일 경기도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되었다. 보광사에서 소유하고 있다. 관악산 최고봉인 연주봉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절벽이 솟아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약간의 석축을 쌓아 올린 곳에 연주대가 있다. 신라시대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이 관악사(冠岳寺:지금의 연주암) 창건과 함께 세워 의상대(義湘臺)라 이름 붙이고, 이곳에서 좌선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후 조선 1392년(태조 1)에 중건하였다.

연주대란 이름은 조선 초에 개칭한 것으로, 태조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뒤 고려의 충신인 강득룡(康得龍)·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의 유신(遺臣)들이 이곳에서 멀리 송경(松京:개경) 쪽을 바라보며 두문동(杜門洞)에서 순국한 72인의 충신열사와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통탄하였다 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라고 전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전설도 전한다. 태종이 셋째 왕자 충녕대군을 태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를 눈치챈 첫째 양녕대군과 둘째 효령대군이 왕궁을 빠져 나와 발길 닿는 대로 방랑의 길을 떠나 이산 저산을 헤매다가 며칠 만에 문득 발을 멈춘 곳이 관악산이었다.

그들은 관악사에 들어가 입산수도하면서 왕좌에 대한 집요한 미련과 동경하는 마음을 누를 길 없어 관악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그러나 왕좌에 대한 미련으로 발길은 언제나 왕궁이 바라다보이는 산정으로 향하였으며, 이 연주대에 올라 왕궁을 바라보며 왕좌를 그리워하였다. 그리하여 관악사의 이름도 어느덧 연주암으로 바뀌게 되었다.

△ 포토존(photo zone)에서...

 

말바위능선에 올라서니 좌우로 낭떠러지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까마득한게 어질어질할 지경이다. 게다가 불어오는 차갑고 세찬 바람에 공포분위기를 느끼게 되고 저절로 발걸음이 멈춰버린다.

오르고 내리는 산객들이 서로 양보하며 조심스레 암릉을 오르고 올라서니 눈 앞에 펼쳐지는 풍광은 천하절경이 따로 없는 입이 떡 벌어진다.

기둥처럼 솟은 바위들 위에 석축을 쌓아 터를 마련하고 넓적한 바위를 배경으로 암자가 서있는데, 삼면이 가파른 낭떠러지이다. 어떻게 저런 곳에 건축물을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조상님들의 자연과의 조화로움속에 넓은 안목에 새삼 경탄스럽기 그지없다.

기상관측소를 좌측에 두고 넓은 암반이 있는 곳에 도착하니 최정상부가 아닌 경사진 암반에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바위에 글씨를 새겨놓은 정상석이 반겨주는 관악산(연주봉) 꼭대기에 도착한다.(14:57)

△ 관악산 정상석을 배경으로...

△ 사당역 방향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전경(멀리 북한산과 도봉산이 조망이 됩니다.)

△ 관악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전경

(우측의 말바위와 관악산기상관측소 뒤로 KBS송신탑이 보입니다.)

△ 절경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다시 한번 담아봅니다.

 

 

정상부 이곳저곳을 돌아보며 처음 찾은 관악산의 조망을 마음것 만끽해본다. 북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북한산과 도봉산이 버티고 있고 그 아래 강북과 강남을 가르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모습이 펼쳐져있다.

오랫동안 눈요기를 마치고 연주대를 들러보기 위해 걸음을 옮겨 내려가니 자그마한 암자에 불자들이 불공을 드리고 있다.

차례를 기다려 순서가 되어 법당 안으로 들어가 삼배로써 부처님께 예를 올린다. 좁은 법당 안이라 서너명이 엎드리니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다.

협소한 공간에서 많은 참배객들로 북적이는게 뭣해서 서둘러 빠져나와 하산길로 접어든다. 정상에서 너무 시간을 지체해서 자칫 귀가길에 지장을 초래할까 싶어 서둘러 하산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내림길에도 눈에 들어오는 절경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진에 담는것은 잊지 말아야겠기에 연신 셔터를 눌러대니 오늘도 손가락은 저 혼자 고생이다.

△ 관악산 연주암 대웅전과 삼층석탑

 

♠ 연주암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고,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지점에 연주암이 있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며 나한도량(羅漢道場)으로서 알려져 있다.

연주암은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652~702)이 창건한 절이다. 의상은 관악산 연주봉 절벽 위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冠岳寺)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 이후부터 고려 말까지는 거의 폐사되다시피 하다가 1392년(태조 1) 태조 이성계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는 조선왕조의 번창을 기원하는 200일기도를 하였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다. 1411년(태종 11), 동생인 충녕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위치를 바꾼 이유는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관악사의 이름이 연주암으로 바뀐 유래에 대하여는 다른 견해가 있다. 고려의 충신이었던 강득룡(康得龍)과 서견(徐甄)·남을진(南乙珍) 등이 그 자리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통곡하였는데, 이 때문에 ‘주인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 절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를 하였는데, 1868년(고종 5) 중수작업 때에는 명성왕후의 하사금으로 극락전과 용화전(龍華殿)을 신축하였으며, 1918년에는 경산(慶山)의 주도 아래 중수 작업이 이루어졌고, 1928년에는 재운(在芸)에 의해, 1936년에는 교훈(敎訓)에 의해 새로 건물을 세우거나 수리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본당인 대웅전과 그 뒤편에 금륜보전(金輪寶殿:삼성각)이 있고 연주대에 응진전(應眞殿)이 있다.

금륜보전은 현재의 건물 중 제일 오래된 건물로서 1929년에 신축한 것이고 대웅전 및 기타 건물은 1970년대 이후에 지은 것이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신 천수관음전과 효령대군 영정(경기도 지방문화재 제81호)을 모신 효령각은 1996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대웅전 앞에 있는 높이 3.2m의 고려시대 양식의 삼층석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4호)은 효령대군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탑은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뛰어나며 단아한 느낌을 주고 있다. 16나한의 모습을 비단에 그린 탱화가 응진전에 봉안되어 있고, 약사여래 석상이 응진전 옆의 암벽에 마련된 감실에 봉안되어 있는데 고려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석상은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연주암 삼층석탑 []

1980년 6월 2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관악산(冠岳山) 연주암 대웅전 앞에 있는 3층 석탑이다. 연주암은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며 통일신라시대인 677년(문무왕 17)에 의상(義湘:625∼702)이 관악산에 '관악사(冠岳寺)'라는 이름으로 세운 절이다. 그뒤 고려 말까지 폐사되었다가 조선 태조(太祖:재위 1392∼1398)가 중수하고 1411년(태종 11) 태종(太宗:재위 1400∼1418)의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과 둘째 왕자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이 머물면서 '연주암'이라고 하였다. 이 석탑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동생인 충녕대군(忠寧大君)에게 왕위를 계승하도록 부탁하고 궁을 나와 관악산 연주암에 머무르면서 수도할 때 효령대군이 조성한 탑이라고 전해진다.

3층석탑은 높이 3.6m 정도로 주변에 석조 난간을 둘러 보호하고 있다. 4개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는 각 판석을 서로 맞물리도록 구성하여 우주(隅柱)처럼 표현하였다. 기단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지대석 위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2단으로 이루어진 상대갑석 위에는 3단의 층급 받침으로 1층의 탑신석(塔身石)을 받쳤다. 그 위에는 전체가 한돌로 구성된 1층 탑신석이 놓여 있는데, 양면에 우주를 모각(模刻)하였다. 한돌로 이루어진 옥개석(屋蓋石)은 밑면에 4단의 옥개받침을 조각하였고, 두터운 전각 끝단은 약간의 반전을 이루고 옥개석의 낙수면은 가파르게 처리되었다. 2층 탑신석부터는 그 높이와 크기가 갑자기 줄어들었고, 옥개석 받침도 3단으로만 조각되었다. 2층과 3층의 탑신석에도 우주만을 간략하게 모각하였다. 탑의 상륜부(相輪部)는 노반(露盤)·앙화(仰花)·보주(寶珠)만 남아 있다. 이 석탑은 지대석 위의 연꽃무늬나 한돌로 구성되어 우주가 모각된 탑신석과 4단·3단으로 구성된 옥개받침 등 고려시대의 석탑 양식을 따른 조선 초기의 탑으로 추정된다.

△ 하산길 역시 돌길의 연속입니다.

 

다시 깔딱고개 안부로 되내려와 좌측 계단길을 따라 진행해 나가다 서울대입구로 내려가는 갈림길 옆에 위치한 효령대군 영정을 모신 효령각을 잠시 구경하고서 길을 이어 내려가니 아담한 삼층석탑이 반겨주는 연주암에 도착하게 된다.(15:32)

요사채 툇마루에는 산님들이 걸터앉아 다리쉼을 하고 있고 대웅전을 들러 불공을 드리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북적이고 있다.

해우소를 들러 생리현상을 해결하고서 본격적인 하산길로 접어든다.

내림길 역시 돌길로 이어지는 하산길이다. 이따금씩 평지성 길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서는 돌길이 주종을 이루는 관악산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주는 등로라 심신이 나른해질 시점에 자칫 발목이라도 삐끗할 안전사고로 이어질까 조심스러운 길이다.

산장을 지나 계속되는 등로를 이어가니 그제서야 목재데크로 된 아담한 등로가 나타나 잠시 다리쉼을 해본다.

계단을 내려서니 우측에는 약수터가 보이고 마침 갈증을 느끼던 차에 물 한바가지 들이켜보니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차갑고 시원한 그 맛에 하산길의 피곤이 저멀리 달아난듯 하다.

△ 바위 틈속을 뚫고 내려온 맑은 계류는 속세의 때를 말끔히 벗어던진 생명수 그 자체입니다.

△ 돌길을 쉼없이 내려오니 운치있는 목재데크가 반겨주는 계곡길이 나타납니다.

△ 약수터를 그냥 지나칠 수야 없으니 맛을 보고 가야겠지요.

△ 관악산에서 가장 물소리가 잘 들린다는 곳이랍니다.

△ 소나무와 어우러진 암반 길이 자칫 지루해질 하산길에 눈요기거리였네요.

△ 목재데크를 따라 쉴수 있도록 벤치를 만들어 놓은 세심한 배려에 우리도 한번 앉았다 떠나봅니다.

 

△ 하산을 완료하니 요런 희한한 구경도 덤으로 하게  되네요.

△ 과천향교

 

♠ 과천향교 []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

1983년 9월 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되었다.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세운 조선시대의 지방
교육기관이다.

과천향교는 조선시대인 1398년(태조 7)에 처음 세워졌는데, 창건 후 1400년(정종 2)에 소실되어 1407년(태종 7)에 중건하였으며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도 불에 타 다시 세웠다가 1690년(숙종 16)에 과천 서이면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1944년에는 일제의 1군 1향교 원칙에 따라 시흥향교·안양향교·과천향교를 통합하여 과천향교라고 하였는데, 1959년 시흥향교라고 하였다가 1996년에 다시 과천향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향교 건물은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이루며 홍살문과 외삼문을 지나면 교육 공간인 명륜당(明倫堂)이 있고,그 뒤에 있는 내삼문에 들어서면 제사 공간인 대성전(大成殿)이 있다.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양식 건물로 맞배지붕에 풍판(風板)이 있고, 겹처마로 되어 있다.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인 명륜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이던 것을 좌우 양쪽으로 1칸씩 증축하였다. 내삼문은 대성전의 문으로 소슬삼문 형태로 좌우에 협문이 1개씩 있다. 향교의 정문 역할을 하는 외삼문은 소슬삼문 형태로 좌우에 1칸씩의 방이 붙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이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50여분을 부지런히 내려와 케이블카 승강장이 있는 곳을 지나 날머리로 빠져 나오니 목공예 집 앞을 지나게 되고 아스팔트 길을 따라 좀더 내려오니 좌측으로 과천향교가 나타난다. 보호수와 홍살문을 앞에 놓고 사진 한장 찍는 것으로 산행을 마무리하고서 리어카레 팔고 있는 생밤 한봉지 사들고 과천지하철역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16:35)

바위를 머리에 쓴 듯 보인다 하여 ‘갓뫼’라고도 불렀다는... 말그대로 암반과 암벽이 어울려 험한 산세를 이루고 있는 관악산을 꼭 한번쯤은 올라보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그 소원을 풀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수 없을 정도다. 

시원스러운 조망을 마음껏 즐기며 내가 산이 되고 산이 내가 되는... 그렇다고 산이 나를 알리 없지만 나도 산을 알리 없지만 오늘만큼은 하나가 되었으면 하면 마음으로 올랐던 관악산으로의 나들이는 앞으로도 오랫동안 뇌리에 남아 있을듯 싶다.

무엇보다 연주대의 기가 막힌 위치 선정과 자연과 어우러진 멋진 정경은 첫 번째, 눈으로 보고... 두 번째, 카메라에 담고... 세 번째, 카메라에 담긴 사진을 한번 더 보고... 네 번째, 블로그에 올리고... 이렇게 네 번 산행을 하게 만드는 첫번째 사례로 오래오래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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