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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기동회 친구들과 간단히 몸 풀어본 가산산성 한바퀴 본문

◈ 산행이야기/☆ 2011년도 산행

기동회 친구들과 간단히 몸 풀어본 가산산성 한바퀴

해와달^^* 2011. 2. 15. 00:27

♤ 산행일자 : 2011. 02. 13 (일) 맑음

♤ 산행장소 : 경북 칠곡군 가산면 가산리 일원

♤ 산행인원 : 기동회 친구들과 함께...(총 20명)

♤ 산행코스 : 진남문 - 남포루 - 중문 - 가산바위 - 중문 - 가산임도 - 탐방지원센터 - 해원정사 - 진남문(산행시간 : 3시간 30분)

 

☆ 가산산성(架山山城)

사적  제216호.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을 겪은 후 잇따른 외침에 대비하기 위해서 세워진 성이다.
성은 내성·중성·외성을 각각 다른 시기에 쌓았고, 성 안에는 별장을 두어 항상 수호케 하였다.
하양, 신령, 의흥, 의성, 군위의 군영과 군량이 이 성에 속하며 칠곡도호부도 이 산성내에 있었다. 내성은 인조 18년(1640)에 관찰사 이명웅의 건의로 쌓았으며, 칠곡도호부가 이 안에 있었다. 중성은 영조 17년(1741)에 관찰사 정익하가 왕명을 받아 쌓은 것으로 방어를 위한 군사적 목적이 크다. 중요시설은 내성 안에 있으며, 중성에는 4개 고을의 창고가 있어 비축미를 보관해서 유사시에 사용하게 하였다. 외성은 숙종 26년(1700)에 왕명에 의해서 쌓았다.
성은 외성 남문으로 들어가게 되고, 성의 주변에는 송림사를 비롯한 신라때 절터가 많이 남아있다. 1960년의 집중 폭우로 문 윗쪽의 무지개처럼 굽은 홍예문이 파손되고 성벽의 일부가 없어졌으나 그 밖에는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산산성은 험한 자연지세를 이용한 조선 후기의 축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 산행기

고교친구들과 함께 단합을 겸한 산행에 초대를 받아 아내와 함께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인 가산산성 입구의 진남문주차장에 당도하니 시간이 08:40분이다.

9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집을 나와 경산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달려왔건만 아직 친구들 얼굴은 한명도 보이질 않는다. 바깥에 서있으려니 귓전을 때리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제법 매섭다. 오래 서있지 못하고 차 안으로 들어와 히터를 틀어놓고 한참을 기다리니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하는 친구들과 반가운 해후를 하고서 오고 있다는 친구의 연락을 받고 그간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기다리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친구와 함께 진남문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는 것으로 오늘의 산행을 시작한다.(09:50)

지난 연말 송년모임 이후로 두달만에 만났지만 초등학교 친구들과의 만남처럼 격의없이 반갑기는 매 한가지라 산행 내내 우스개 소리 곁들여가며 즐거운 산길을 이어간다. 급할 것 없는 산행이라 힘들다 싶으면 쉬어가면 될 일이라 내딛는 발걸음엔 여유가 넘쳐난다. 친구들과 함께했던 산행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기억에 가물가물하니 그동안 많이 소원했던 것 같다. 앞으로는 시간을 내어서라도 참여하고픈 마음 굴뚝같은데 뜻대로 될지는 두고봐야겠지만 그렇게 되도록 노력은 해야겠다.

몇년 전 친구들과의 송년모임을 마치고 울산 사는 친구 내외와 대구에서 1박을 하고 함께 가산산성을 한바퀴 돌아본 기억을 되살리며 낯익은 풍광들을 되돌아보며 걷는 산길은 마냥 행복감에 젖어간다.

 

▲ 산행안내판

▲ 산행 출발에 앞서 진남문 앞에서 단체사진으로...

 

 

진남문은 산성 안으로 들기 위한 여러 문 중 가장 큰 문으로 성의 정문이고 남쪽에 있다.
모습은 우람하고 큰데 본래 것은 병화에 불타고 고증에 의해 복원한 것이다. 

이제 진남문을 통하여 가산성 안으로 들었으니 우선 가산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가산도 함께 팔공산이라 부른다. 그러나 다른 산이다.
가산에도 많은 유적지와 명승지가 있지만 팔공산의 그늘에 뭍혀있다.

팔공산을 그토록 유명하게 한데는 그 속에 있는 많은 유적지들이 한 몫을 하였겠지만 이조 500년 동안 왕실에서 팔공산 기슭인 태실과 수태골에 태자와 왕자들의 태를 뭍어오고 왕실에서 사용할 숯을 팔공산에서 조달해온 탓에 그 긴 세월 동안 그 지방 백성들은 왕권으로부터 직접 은혜도 입고 고초도 당한 때문이리라.
팔공산 정상은 오도재 부근이고 좌우에 동봉과 서봉을 거느리고 있다.
가산은 팔공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서봉, 파계봉, 파계재, 한티재를 순차 지난 약 10여km 지점에서 가산의 정상인 유선대를 만난다. 일명 칠봉산이라고도 불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해발 901.6m인 가산은 한문표기로 架山이라 적는데, 경상도지리지에는 가산은 팔공산의 연봉 서북쪽 갓(끝, 말, 변)산이란 뜻으로 갓산이 가산으로 불리고 架山이라 표기된 것이라하며, 가산 기슭의 漆谷이란 지명은 가산의 7개의 봉우리가 7개의 골짜기를 이루었다고 하여 七谷이라 한 것이 漆谷으로 되었다고 한다.

▲ 산성 성곽을 따라 가산바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 오름길 좌측으로 조망이 트이니 파계사에서 동명으로 가는 순환도로가 보이네요.

▲ 소나무가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엔 따스한 우정도 함께 실려 따라갑니다.

▲ 산성의 흔적이 오롯이 남아있어 옛선인들의 수고로움이 온전히 전해져 옵니다.

 

 

가산산성은 1640년(인조 18년)에 쌓았다고 하며, 성의 축조를 주도한 관찰사 이세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당시 주민들이 세운 비석인 불망비는 인근 해원정사에서 관리하고 있으며 남원리 주민들에 의해 신성시되고 있다고 한다.
산성의 규모를 보고 나니 만약 그러한 비가 있다면 이는 아마 관에서 백성들의 돈으로 세운 다음 그 원성을 달래기 위하여 백성들 스스로가 세운 것이라고 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산성을 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동원되고, 그 희생은 또 얼마나 컸을까, 그런데도 백성들이 원망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영세불망비를 세워?.....
성 내에는 칠곡도호부의 치소가 약 180년간 있었다는데 현재는 장군정 정도가 남았을 뿐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바위능선을 에돌아 올라서니

▲ 저멀리 팔공산의 정상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마루금이 멋진 모습으로 눈 앞에 펼쳐집니다.

▲ 6.25 동란 때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 도덕산이 가운데 우뚝합니다.

▲ 남서방향을 바라보니 가야산이 아득합니다.

 

▲ 남포루 갈림 이정표

▲ 응달진 곳에는 며칠 전 내린 눈이 수북히 쌓여있어

▲ 모처럼 찾아온 산꾼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네요.

 

▲ 선정을 베푼 수령의 은덕을 잊지 못해 세운 공덕비

 

 

거사비(去思碑)와 영세불망비

거사비란 감사나 수령이 갈려간 뒤에 그 선정을 사모하기 위하여 고을 주민이 세운 비란 뜻이고, 영세불망비는 영원토록 잊지 않기 위해 세운 비란 뜻이다. 영세불망비는 흔히 보는 것이나 거사비는 처음 본다. 사실 보았을 터지만 평소 관심 없이 그냥 지나첬을 것이다.
축성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남원리 주민들이 신성시 한다는 이세재의 영세불망비는 막상 보지 못하고 진남문에서 등산길로 오르면 동문까지 사이에서 관찰사 홍우길 거은비, 별장 서지한 영세불망비와 관찰사 조강하 만세불망비를 차례로 만난다. 도중에 무슨 사연인지 모르지만 허부사의 비는 동강이 나서 아래 부분은 어디로 가고 윗 동강만 딩굴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 후미조를 기다리는 동안 한 컷 남겨 봅니다.

 

▲ 중문

▲ 고목에 꽃이 피듯 줄지어 달려있는 운지버섯이 가던 걸음 멈추게 합니다.

▲ 가산바위 안내문

▲ 가산바위 정상부엔 찾아온 산님들로 북적입니다.

▲ 가산바위에서 바라본 서쪽 방면 풍광입니다.

(오른쪽이 6.25때 격전지였던 유학산이고 가운데 멀리 구미의 명산 금오산이 어렴풋합니다)

▲ 가산바위 아래로 펼쳐지는 진남문에서 올라온 능선길

▲ 가산바위에서의 단체사진

▲ 내림길에 만난 너덜지대에는 채 녹지않은 눈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그런대로 괜찮네요.

▲ 치키봉 갈림길

(할아버지, 할머니 바위도 보고갔으면 좋으련만...)

▲ 날머리인 탐방안내소 직전의 모습입니다.

(직진은 하산길이고 우측은 치키봉 가는 길입니다.)

▲ 해원정사 표석

 

▲ 황구와 백구에게 먹이를 주는 모녀의 모습에서 평화로움을 느껴봅니다.

▲ 해원정사 대웅전 입구의 모습

▲ 다시 만난 진남문에 다다르며 산행을 종료합니다.

 

 

산성은 산 중턱에서부터 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이리 꾸불 저리 꾸불 마치 기다란 배의 형국을 돌로 축성하였는데, 그 규모가 참으로 대단하다. 축조 당시의 인구, 그 시절의 연모 등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역사다. 진남문 앞에 수로공사를 한다고 오랜 기간 중장비가 들락거리며 소음공해를 유발했었는데....이를 미루어 보면 옛날 조상님들의 수고가 어떠했는지 어렴풋이 나마 짐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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