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얼음밭을 기다시피한 팔공산 산행(탑골-염불암-비로봉-동봉-도마재-동화사) 본문
⊙ 산행일자 : 2012. 03. 11 (일) 날씨 : 맑음
⊙ 산행장소 : 대구광역시 동구, 경북 영천시 신녕면, 군위군 부계면 일원
⊙ 산행인원 : 나홀로...
⊙ 산행코스 : 팔공산 탑골안내소-깔딱고개-염불암-철탑사거리-비로봉-동봉-염불봉-도마재-폭포골-약수암-동화사-주차장
⊙ 산행시간 및 거리 : 8시간 16분, 11.3km(GPS 기준)
<6시간대면 충분한 거리를 아이젠없이 얼음밭인 북사면을 기다시피 한데다 사찰 곳곳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엄청 걸려버렸네요>
◈ 산행기
어제의 '포항산친구들' 카페 회원님들과의 경주 백두산 정기산행에 참여하고 저녁에 대구의 동창모임에 참석하느라 조금은 피곤한 몸이지만 3일간의 휴무일에 방콕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준비해둔 배낭을 들쳐메고 대구를 향해 다시 달려간다.팔공산과 울산의 문수산 두 곳을 저울질하다 가는 겨울의 마지막 모습을 만끽해 보려고 팔공산으로 핸들을 꺾게 만든다.
대구 땅에는 약한 눈발이 날리고 있어 잘하면 눈꽃 구경도 할수 있겠다 싶은 즐거운 상상도 해보지만 불로동으로 접어드니 이내 그쳐버린 모양이다.
오늘 가고자 하는 코스는 염불암으로 올라 도마재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해본다. 한번도 못 가본 등로라 조심스레 이정표를 눈여겨 봐가며 철탑사거리까지만 가면 그 이후는 잘 아는 코스이니 큰 문제는 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춥다는 기상예보에 딱 들어맞는 차가운 겨울바람이 온 몸을 휘감고 있는 가운데 완전 무장을 하고 염불봉을 향한 걸음을 내딛는다.
휴일이라 산을 찾는 산님들이 꽤 많아보여 모르면 물어가며 가면 되리라고 편한 마음으로 산행을 시작한다.(09:09)
산행지도
탑골안내소 앞을 지나며 염불봉을 향한 산행을 시작합니다.
'깔딱고개'라는 이름에 걸맞게 제법 가파른 오름길이 초반부터 힘들게 하네요.
깔딱고개 이정표
반들반들한 평지성 등로를 따라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며 걷노라니
어느 새 동화사에서 포장도로를 따라 올라오는 등로와 합류가 되네요.
지루한 포장도로가 끝나고 흙길을 따라 오름길을 이어가니
파란 하늘아래 염불봉이 떠있는 염불암에 당도하게 되네요.
염불암 [念佛庵]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부속암자이다. 동화사에서 서북산정으로 3㎞ 지점에 위치하며 928년(경순왕 2)에 영조선사(靈照禪師)가 창건하였다. 고려 중기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창하였으며, 1438년(세종 20)에 중창하였다.
그 뒤 1621년(광해군 13)에는 유찬(惟贊)이 중창하였고, 1718년(숙종 44)과 1803년(순조 3), 1841년(헌종 7)에 각각 중수하였으며 근대에 이르러서는 1936년에 운경(雲耕)이, 1962년에 혜운(慧雲)이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과 동당(東堂)·서당(西堂)·산령각(山靈閣) 등이 있다. 극락전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지장보살을 봉안하였는데, 그 후불탱화(後佛幀畵)는 부드럽고 섬세한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1841년의 중수 때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중요문화재로는 극락전 옆의 암석에 새겨진 마애여래좌상(磨崖如來坐像) 및 보살좌상(菩薩坐像)이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된 청석탑(靑石塔)이 있다. 마애불상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옛날 이 암자에 있던 한 승려가 이 바위에 불상을 새길 것을 발원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암자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하는데 7일 동안이나 걷힐 줄을 몰랐다. 7일 만에 안개의 걷힘과 함께 법당에서 나온 승려가 바위 곁에 가보니 발원하였던 불상이 바위 양쪽에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문수보살이 조각하였다고 전해진다. 또, 염불암이라는 이름은 이 불상이 새겨진 바위에서 염불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청석탑은 극락전 앞마당에 있는데, 보조국사가 쌓았다고 하며, 아랫부분 3단이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위쪽 10단이 수마노석으로 된 높이 1.4m의 13층탑이다. 현재는 상층부 5층이 깨어져나가거나 갈라져 있다.
이 탑에는 이 절 일대에 칡덩굴을 찾아볼 수 없는 이유와 관련된 전설이 얽혀 있다. 보조국사가 이 탑을 쌓기 위하여 나무로 말을 만들어 타고 서해의 보령과 대천에서 수마노석을 운반해서 돌아오던 도중에 산길을 오르던 목마의 다리가 칡덩굴에 걸려 부러지고 말았다.
보조국사는 이에 크게 노하여 산신을 불러서 암자 부근에 있는 칡덩굴을 모두 없애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이후로 이 암자 아래의 양진암에서 상봉에 이르는 산등성이에는 칡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서당 뒤편에는 오인석(五人石)이라 새겨진 책상 세 개 정도의 네모난 바위가 있는데, 이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도망갈 때 그의 신하 5명이 쉬었다는 설과, 옛날 다섯 고승이 견성(見性)을 하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염불암은 동봉 남쪽 아래 해발 900여m에 위치하여 팔공산 내의 암자 가운데 가장 전망이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염불암 청석탑 (念佛庵 靑石塔)과 극락전(極樂殿)
염불암마애보살좌상 (念佛庵磨崖菩薩坐像)
염불암마애여래좌상 (念佛庵磨崖如來坐像)
동화사 염불암 마애여래좌상 및 보살좌상 [桐華寺念佛庵磨崖如來坐像, 菩薩坐像]
1988년 5월 30일 대구광역시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다. 동화사 극락전 뒤쪽에 있는 거대한 화강암의 양면에 나란히 새겨진 여래상과 보살상이다. 서쪽면에 새겨진 여래상은 높이 4m의 좌상으로 아미타여래로 추정된다.
구름무늬 위에 새겨진 앙련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천상세계에 있음을 묘사하였다. 연화대좌의 높이에 비해 양무릎이 넓어 안정감이 있으며, 머리는 소발(素髮)에 육계는 작은 편이다. 살집이 좋은 네모진 얼굴에 두 눈은 선각으로 가늘게 떴으며, 코와 입은 두툼하고 입가에 가는 미소를 띠고 있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의 법의에는 단절된 몇 겹의 옷주름이 잡혀 있다.
남쪽면에 새겨진 보살상은 높이 4.5m의 좌상으로 관세음보살로 추정된다. 연화대좌에 앉아 있으나, 하부로 길게 흘러내린 법의가 양무릎을 덮고 있어 앉은 자세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네모진 얼굴에 부채꼴의 보관(寶冠)을 썼으며, 두 볼과 턱이 통통하고 입과 코 사이가 붙은 듯하여 기형적인 인상이다. 오른손은 복부에 평행으로 들어 엄지와 약지로 보상화(寶相華)를 잡았는데, 꽃잎은 그 위의 보관까지 광벽(光璧)에 뚜렷이 조각하였다.
두 불상은 얼굴의 둔중함과 기형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염불암 극락전에서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나와
주변을 돌아보고 동봉을 향한 걸음을 옮겨가니
수태골에서 올라오는 등로와 합류되는 철탑사거리에 도착합니다.
(← 케이블카전망대, ↑ 수태골주차장, →비로봉, 동봉, ↙ 염불암, 동화사)
등로를 오르다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 바라본 서봉 방향의 조망입니다.
케이블카능선 좌측은 염불암,동화사 방향이고 우측은 수태골 방향입니다.
비로봉, 동봉 갈림길
(↖ 비로봉, 서봉. ↗ 동봉)
평소에 늘 챙겨두었던 아이젠을 빠트리고 오는 바람에 남은 산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비로봉 갈림길
(← 서봉, ↑ 비로봉, → 동봉)
팔공산 서봉 방향
비로봉 오름길의 기암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하기를 기원하며 하늘에 제사지냈던
팔공산 제천단(祭天壇)
팔공산 제왕봉(비로봉) 정상
세찬 바람이 정상부를 휘몰아치고 있어 흔적만 남기고
전망데크로 내려가려고 자켓도 안 입었네요.
뒤에 보이는 송신탑에 얼어붙은 얼음이 강풍에 떨어져 날릴 때면
전망데크까지 날아들어 라면 끓여 먹는 내내 신경이 꽤 쓰이더라구요.
제왕봉 북쪽의 일망무제의 조망과 청운대의 멋진 암릉이 다가옵니다.
약사여래입상이 있는 헬기장으로 향하는 길에
쌓인 눈으로 인해 등로가 제법 미끄럽네요.
약사여래입상이 있는 헬기장
(← 진불암, 치산계곡. ↑ 동봉, ↓ 비로봉)
동봉을 오르는 등로와 계단엔 온통 얼음이라
아이젠없이 오르기가 쉽지 않아 무척 힘들었네요.
동봉에서 바라본 대구 시내 방향
이번엔 서봉 방향으로 파계봉과 저 멀리 가산방향도 조망이 되네요.
팔공산 정상의 제왕봉과 청운대가 있는 군사시설 방향입니다.
팔공산 동봉에서 한장 안 남길 수 없겠지요.
지금가지의 등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얼음밭으로 들어갑니다.
온통 얼음이라 진행하기가 무척 까다롭네요.
오금이 저리는 구간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북사면의 얼음밭은 그야말로 지뢰밭이 따로 없네요.
염불암이 내려다보이고 골짜기 좌측으로 동화사가,
골짜기 너머에는 출발지였던 상가지구가 보입니다.
오랜만에 보는 기암이 반갑게 느껴지지만
바위 아래로 연결되는 등로를 통과하려니 걱정부터 앞서네요.
하지만 전망터에서 바라보는 멋진 조망에 잠시나마 설원을 지나야하는 부담을 잊어봅니다.
염불봉이 눈 앞에 다가오고 저멀리 노적봉으로이어지는 주능선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염불암 갈림길(NO.74)
병풍바위를 지나며 감히 올라갈 엄두가 나질 않아 다음을 기약하며 그냥 지나쳐 갑니다.
지나온 등로를 되돌아보며...
(좌로부터 염불봉, 동봉, 제왕봉)
투구봉에서 코끼리봉으로 이어지는 팔공산 북쪽능선과 염불골의 모습입니다.
응달진 북사면 등로엔 내린 눈이 얼어 아이젠 없이 진행하기가
참으로 버거워 온 몸에 진이 다 빠져버리는 느낌입니다.
병풍바위봉, 염불봉, 동봉으로 이어지는 지나온 등로
동화사 갈림길(NO.58)
등로 좌측의 기암이 멋져보여 잠시 들어가 보았더니 이곳에서의 조망 또한 괜찮더군요.
바위군락 안에서 산상파티를 하고 있는 산님들이 있어 사진 한장 담고 빠져 나옵니다.
눈밭은 계속 이어지지만 위험구간은 끝난 듯 걷기가 한결 편해졌네요.
신령봉(997m)이 눈 앞에 보이는걸 보니 도마재가 가까워오나 봅니다.
도마재(신령재) 갈림길
(↓ 동봉, ↙ 수도사, 공산폭포. ↑ 갓바위, → 동화사)
가파른 내림길을 10여분 내려오니 그제서야 등로는 부드러워지기 시작합니다.
산 정상부에서의 겨울의 끝자락 추위는 여전했지만 봄이 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는데
눈이 녹아 골짜기 개울을 이루니 계곡물이 소리를 내며 흘러내리고 있었답니다.
오랜만에 다시보는 옛 산장건물은 여전히 그 모습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오늘은 이곳에서 우측 약수암 방향으로 등로를 이어갑니다.
새로이 중창 불사중인 약수암 원통보전(圓通寶殿)
동화사 입구의 공덕비
팔공산동화사(八公山桐華寺)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 팔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서,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의 본사이다. 신라와 고려시대를 통해 대가람이었으며 금산사, 법주사와 함께 법상종 3대 사찰의 하나이다. 〈동화사사적기〉에 따르면 493년(신라 소지왕 15)에 극달화상이 창건하여 유가사(瑜伽寺)라 부르다가,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가 중창했는데 사찰 주변에 오동나무 꽃이 상서롭게 피어 있어 동화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 권4 심지계조조(心地繼祖條)에는 신라 헌덕왕의 아들이었던 심지가 갖은 고행 끝에 속리산의 영심대사(永深大師)가 진표율사로부터 받은 불골간자(佛骨簡子)를 전수받아 팔공산으로 돌아온 후 불골간자를 모실 절터를 찾기 위하여 간자를 던져 떨어진 곳에다 절을 짓고 동화사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심지를 그 개조로 보기도 한다. 고려 문종 때에는 이 절에서 원천 법천사의 지선국사(智先國師)가 배출되었고 그 문하에서 속리산 승통 석규(釋窺)와 금산사 주지 혜덕왕사 소현(韶顯)을 비롯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나왔다. 임진왜란으로 동화사 전체가 불타버렸으며, 1608년(광해군 1) 절을 중건할 때 화주(化主) 학인(學仁)이 미륵전을 재건했고, 1725년(영조 1)에 다시 중창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의 중창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경내에는 조선 영조 때 중건된 대웅전과 극락전을 비롯하여 20여 채의 건물이 남아 있다. 이밖에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보물 제254호)·금당암3층석탑(보물 제248호)·비로암3층석탑(보물 제247호)·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244호)·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보물 제243호)·석조부도군 등이 있다.
동화사 당간지주
동화사 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254호)
동화사 당간지주(桐華寺幢竿支柱)는 대한민국 보물 제254호이다. 남북국 시대의 화강석 당간지주로 동화사에 있으며, 높이 3.1m, 변의 길이 76cm 34cm이다. 66cm의 거리를 두고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서로 마주보는 안쪽 면에는 조각이 없으나 바깥쪽은 중심에 세로로 능선(稜線)을 조각하였으며, 양 지주의 중간쯤, 내면을 제외한 3면에 약 1m쯤 되는 길이가 전면적으로 음각되어 있다. 현재 높은 토단(土壇) 위에 있으나 당간을 받치던 기대(基臺)는 없어졌고 대석(臺石)도 대부분 없어졌다. 전체 형태는 튼튼하고 장중한 느낌을 준다.
동화사를 오르는 계단에 설치해놓은 '좋은 인연 빛계단'
옹호문(사천왕문)
동화사 옹호문(擁護門)
옹호문은 대웅전 봉서루와 동일 축선상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하며, 내부에는 사천왕상을 모시고 있다. 현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 맞배집이다. 전형적인 산문으로 가운데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쓰고 좌우 협칸은 사천왕상을 안치하였다. 건물 좌우는 아무런 시설 없이 트여 있다. 통로 좌우에는 홍살을 설치하여 사천왕상을 보호하고 있다. 장대석을 1단 돌려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거의 방형에 가까운 자연석 초석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다. 기둥 상부는 창방을 걸고 소로를 놓은 다음 장혀와 도리를 차례로 결구한 굴도리집이다. 내부는 구조를 드러낸 연등천장인데 구조는 5량가를 결구하였다. 처마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쓴 겹처마로 구성하였으며 한식기와를 올려 맞배지붕을 만들었다. 지붕 좌우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전면 기둥에는 주련을 걸었고, 어칸 처마에 옹호문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옹호문 내부에 걸린 '팔공산동화사옹호문중건기'에 따르면, 원래 옹호문은 지금 봉서루 자리에 있었던 것을 지금 자리로 옮겼고, 이 자리에 있던 일주문은 통일대전 앞 다리쯤으로 이건하였다. 옹호문은 그 뒤 사세확장에 따라 철거되었다가 불기 2548년(2004)에 중건한 것이다.
설법전(說法殿)
스님들이 공부를 하는 곳입니다.
동화사 봉서루(鳳棲樓)
동화사 봉서루(鳳棲樓)
옹호문을 지나면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봉서루가 있다. 봉서루 아래에는 봉황 알(?)이 3개 놓여 있는데, 봉황 알을 만지시면 소원성취 한답니다. 봉서루는 '봉황이 깃든 누각' 이란 뜻으로 동화사를 대표하는 누각이다. 네모난 돌기둥을 세워 누문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5칸의 목조 누각을 세운 독특한 건축양식이다.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중간에 널찍한 자연석이 하나 놓여 있다. 이곳이 봉황의 꼬리 부분이며, 누각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둥근 돌은 봉황의 알을 상징한다. 봉서루 뒤편에는 대웅전을 향해 '영남치영아문'의 현판이 걸려 있다.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영남도총섭으로 동화사에서 승병을 지휘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현판이다. 봉서루 오른쪽 아래에 원음각(圓音閣)이 있다.
창살로 둘러진 원음각(圓音閣)의 내부에는 범종(梵鐘)과 운판(雲版), 목어(木魚)가 봉안되어 있다. 원음각이란 범종각의 다른 이름으로 부처님은 하나의 음성을 내지만 그 음성은 원음이 되어 울려 퍼지며, 모든 중생이 근기에 따라 이익을 얻게 된다고 하는 말에서 유래하여, 원음은 부처님의 음성을 뜻하며, 여기에 있는 범종 법고, 목어, 운판의 소리는 중생을 위한 부처님의 설법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 내부의 범종은 조선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크기는 높이 140cm, 구경 94cm이다. 이 범종은 비교적 단순한 형태로 꼭대기 고리부분은 음통(音筒)과 용뉴(龍紐)로 구성되고, 종신(鐘身)에는 윗부분과 중간부분에 상대(上帶)와 중대(中帶)를 둘렀다. 중대 아래로는 별다른 문양이나 명문을 새기지 않고, 그 윗부분에 8개의 범자문과 4보살상, 4유곽을 배치하였다. 전체적으로 작아지고 단순화된 조선후기의 범종양식을 보이고 있다. 이 외에 원음각에는 길이 222cm, 폭 55cm의 목어와 동으로 만든 운판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사물중 하나인 법고는 봉서루에 봉안되어 있는데, 크기는 지름 210cm, 길이 207cm이며 1997년에 조성된 것이다.
통일범종루(統一梵鐘樓)
동화사 대웅전((桐華寺 大雄殿)
동화사 대웅전[보물 제 1563호]
동화사 대웅전은 팔공산을 대표하는 법당이다. 봉서루 누대 밑을 지나 절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이 대웅전이다.
동화사(桐華寺)는 493년(신라 소지왕 15) 극달(極達)이 세운 유가사(瑜伽寺)인데, 832년(흥덕왕 7)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건하면서 동화사(桐華寺)라고 개칭한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중건하였다. 대웅전(大雄殿) 또한 여러 차례 다시 지은 것이다. 지금 있는 대웅전(大雄殿)은 조선 후기인 영조 3년(1727)에서 영조 8년(1732)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대웅전(大雄殿)은 이 절의 중심 건물로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문짝은 여러 가지 색으로 새긴 꽃잎을 장식해 놓은 소슬꽃살창을 달았다. 또한 기둥은 다듬지 않은 나무를 그대로 사용해서 건물의 안정감과 자연미를 나타내고 있다.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그 위에 극락세계의 장엄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다. 불상을 봉안한 벽면에는 영산회상도가 걸려 있고 동쪽 벽면에는 신중탱과 지장탱, 서쪽 벽면에는 삼장탱의 탱화가 있다. 천장에는 세 마리의 용과 여섯 마리의 봉황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법화당(法華堂)
동화사의 법화당은 말 그대로 법의 꽃을 피우기 위해
강원 사교, 대교반(3,4학년) 학인스님들이 부처님 경전을 공부하는 장소입니다.
화엄당(華嚴堂)
화엄당에서는 치문,사집반(1,2학년)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이랍니다.
대웅전 전면에 있는 문의 문살의 문양이 너무 예뻐서 담아봅니다.
동화사 대웅전 부처님
석가모니를 주불로 왼쪽에 아미타불,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의 삼세불을 봉안하고,
그 위에 극락세계의 장엄을 입체적으로 표현한 닫집이 설치되어 있는데 사진에 담지 못해 아쉽습니다.
동화사의 중흥조인 '인악대사(仁嶽大師) 나무'
인악대사(仁嶽大師) 나무
달성군 화원읍 본리 인흥마을에서 태어난 인악 대사(1746∼1796년)의 속가 이름은 의첨(義沾)으로, 화엄사기(華嚴私記), 원각사기(圓覺私記), 인악집( 仁岳集) 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불교 경전을 깊이있게 연구한 학승(學僧)이다.
동화사 금당선원 앞에는 인악 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귀부(龜趺)가 일반적으로 조성되는 거북형태와 달리 봉황으로 만들어진 비각 인악당(仁岳堂)이 독채로 마련되어 있으며, 동화사를 빛낸 스님들의 영정을 모셔둔 조사전(祖師殿) 진영(眞影)에는 보조국사나 사명당 등 이름난 스님을 제치고 동화사를 개산한 극달화상(極達和尙) 바로 옆에 걸려있다. 뿐만아니라 정조( 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당(願堂)인 수원의 용주사 창건을 주관케하고 그가 지은 용주사제신장문(龍珠寺祭神將文)을 보고 스님 중 조선 제일의 문 장가라고 격찬한 것을 보아도 인악 대사는 보통 스님이 아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나라 고승들의 행적을 기록한 동사열전(東師列傳)이나 동화사 사적기, 심지어는 그가 태어난 달성군지(達城郡誌) 등에 도 인악 대사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오직 유작(遺作)인 인악집에 실린 시 72편, 편지 35편, 기타 20편을 통해 스님의 일면만 살펴볼 수 있음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홍직필이 서문을 쓴 인악집과 1808년 김의순(金義淳)이 쓴 비문으로 추정해보면 스님의 아버지는 휘징(徽澄)이요, 어머니는 달성 서씨였다. 세번만 읽으면 잊지않을 만큼 재주가 뛰어나 18세에 인근에 있는 용연사(龍淵寺) 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불가(佛家)의 청정한 법을 보고 23세에 스님이 되어 많은 절을 찾아 법문(法文)을 펼치시다가 처음 머리를 깎은 용연사 명적 암에서 돌아가시니 그때가 51세였다. 용연사 적멸보궁 초입 왼쪽편에 스님의 부도(浮屠)가 있다.
스님의 사기(私記)는 오늘날에도 주요 강원(講院)에서 교재로 활용된다 하니 그의 풍부한 선(禪)지식을 이해할 만하다.
이러한 출중한 스님이 머물렀던 동화사 봉서루 입구 약 500여년 된 큰 느티나무는 스님이 정진하거나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오묘한 진리를 설파하시는 모습을 지켜 보았을 것이다. 이 나무를 ‘인악대사(仁嶽大師)나무’로 부르기로 한다.
동화사 통일대불(統一大佛)
동화사 통일대불(統一大佛)
칠천만 우리 계례의 공통된 소원인 통일을 하루라도 빨리 이룰 수 있도록 온 계례의 염원을 담고 담아 건립한 통일대불이다.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道鶴洞)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세계 최대규모의 불상. 동화사의 남쪽 산자락에 1만여 평의 대도량(大道場)을 조성하고, 좌대(座臺) 높이 13m를 포함하여 30m 높이의 석불이다. 2,000t에 달하는 불상과 3,000t 무게의 좌대석은 전북 익산(益山)의 황등석(黃橙石)을 썼으며, 108명의 석공들이 약 7개월 동안 만들었다. 각계 전문가들의 고증·조언을 거쳐 조성되어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이 도량에 오르는 계단은 108개로 하여 백팔번뇌를 상징하였고, 석불 맞은쪽에는 약사여래 대불을 지킬 통일대불전이 조성되었다. 지하 2층, 지상 3층, 연건평 1,200평의 규모이다. 1992년 11월 27일 대불의 점안식(點眼式)이 있었다.
동화사 주차장에서 동화문 가는 길에 올려다 본
비로봉과 염불봉, 그리고 병풍바위 능선이 다가옵니다.
동화문(桐華門)
상가단지 입구에서 차를 세워둔 주차장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산행을 마무리 합니다.
평소 안전장구를 필히 챙겨 갖고 다녔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빠트려버려 내린 눈이 얼어 얼음이 되어버린 팔공산 북사면의 가파른 허리길을 진행하는데 무척이나 힘이 들어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손에 힘을 준 탓에 산행을 마치고나니 힘이 쭉 빠진다.
오늘의 악전고투가 좋은 경험이 되어 늘 확인 또 확인하는 습관을 길러 조금이라도 안전에 문제가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틀 연속 산행으로 조금의 피로감은 느끼지만 못 가본 코스를 다녀온 만족감은 약간의 피로 쯤은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고 벌써 다음 코스를 그려놓을 정도이니 본인이 생각해도 이젠 아예 산으로 들어가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쓴 웃음이 절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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