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시원한 물줄기에 매료된 천황산-재약산의 폭포 탐방기 본문
⊙ 산행일자 : 2012. 04. 01 (일) 날씨 - 맑음
⊙ 산행장소 : 밀양시 단장면, 울주군 상북면 일원
⊙ 산행인원 : 따스한 봄볕과 아직은 차가운 바람과 함께...
⊙ 산행코스 : 표충사 - 한계암(금강폭포) - 천황산 - 천황재 - 재약산 - 고사리 분교 - 층층폭포 - 흑룡폭포 - 표충사
⊙ 산행시간 및 거리 : 7시간 40분, 10.7km (GPS 기준) - 컨디션이 좋지 않아 쉬어가며 가다보니...
▣ 밀양 천황산(1,189m)
재약산은 재약산, 수미봉, 사자봉, 천황산으로 혼동되어 부르고 있다. 또한 수미봉과 사자봉을 혼돈하기도 한다. 지형도나 대부분의 등산지도에는 재약산(1,018m)과 천황산(1,189.2m) 따로 표기되어 있다.재약산은 주봉이 수미봉(1,018m)이고 천황산은 주봉이 사자봉(1,189.2m) 이었다. 천황산이 일제 때 붙여진 이름이라 하여 우리 이름 되찾기 일환으로 천황산 사자봉을 재약산 주봉으로 부르면서 위와 같은 혼돈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산하"에서는 천황산을 재약산으로 표시한다.
도서출판 "사람과 산"의 등산지도에는 재약산을 수미봉으로, 천황산 사자봉을 재약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대부분의 산꾼들은 일반적으로 재약산은 재약산 수미봉, 천황산은 재약산 사자봉으로 부르고 있다.
영남 밀양 청도 일대 해발 1,000 미터 이상의 준봉들로 이루어진 영남알프스 산군중의 하나인 재약산은 산세가 부드러우면서도 정상 일대에는 거대한 암벽을 갖추고 있다.
얼음골, 표충사, 층층폭포, 금강폭포등 수많은 명소를 지니고 있으며, 재약산 수미봉, 사자봉, 능동산, 신불산, 취서산으로 이어지는 억새풀 능선길은 억새산행의 대표적이다.
표충사 못미처에서 오른쪽으로 뚫린 계곡이 옥류동천이다. 오솔길을 따라 2㎞ 거리에 흑룡폭포가 있고 1.8㎞를 더 오르면 20m쯤의 폭포 2개가 연이은 층층(칭칭)폭포가 있다.
층층폭포에서 2㎞ 지점에는 늦가을의 명소인 사자평 분지와 폐교된 사자평분교(산동초등학교 고사리분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사리마을로도 불렸던 이 일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몇 가구가 민박을 받으며 식사를 팔았지만 지금은 모두 철거됐다.
한편, 표충사에서 북쪽으로 1.5㎞쯤 등반하면 일곱 빛깔 무지개가 영롱한 높이 25m의 금강폭포가 있다.
재약산 아래 대찰 표충사가 있고, 취서산으로 넘어가면 통도사, 가지산을 넘으면 석남사, 운문산을 넘으면 운문사가 있다. 그래서 예부터 이 일대의 산길은 아무리 험준해도 산승의 표연한 모습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표충사 주위는 송림이 울창하다. 석탑과 사우들도 정갈하다. 원효가 창건했으며 사명대사와 효봉스님을 배출한 대찰. 특히 유품전시관을 두고 해마다 향사를 지내는 등 사명대사의 호국성지로 유명하다.
전시관에는 국보 75호인 청동합은 향완과 선조가 하사한 금란가사 등 보물과 문화재들이 가득 진열돼 있다.
◈ 산행기
당직근무로 인해 매월 첫째 주 일요일에 떠나는 포항라푸마산악클럽의 정기산행에 참여치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습관처럼 떠나는 산으로의 나들이를 시작한다.벌써 몇달 째 정기산행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은데 이번엔 지리산 자락으로 떠나는 여정이라 더더욱 가고픈 마음이 간절했는데 이마저도 함께 할수 없어 클럽장과 통화할 때도 괜히 미안하기도 해서 장기 결석으로 인해 퇴출은 하지 말라고 애교 섞인 멘트도 보내곤 했다. 내달엔 가능할지...
전날 미리 꾸려놓은 배낭을 차에 싣고 이틀 전 내린 제법 많은 강수량의 봄비에 깊은 골짝의 폭포에는 불어난 물로 인해 볼만하리라는 생각에 밀양 표충사를 기점으로 한바퀴 돌아보자고 코스를 정해놓고 언양방면으로 차를 몰아간다. 가지산터널을 지나 도래재를 향해 올라서니 문득 근자에 불의의 사고로 운명을 달리하신 '포항산친구들'카페의 회원이셨던 '솔아'님이 생각난다.
산행 막바지에 이마에 불 밝히며 구천산-정각산-정승봉을 종주산행했던 그때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산행이었음을 돌이켜 생각하니 다시금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고 부디 편안한 영면이 되시길 빌어본다.
구비구비 이어지는 도래재를 내려와 오랜만에 다시 찾은 표충사를 찾으니 먼저 매표소가 앞을 가로막는다.
품안에 지니고 있던 '유공자 유족증'을 내미니 그냥 통과! 입장료에 주차비까지 혜택을 보게되니 다시금 아버님이 곁을 떠나셨어도 오래오래 크나큰 그늘로 남아 자식들을 지켜주고 계시다는 마음에 새삼 감사함과 보고픔이 가슴속 저 깊은 곳에서 차올라온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화장실을 다녀온 뒤 장비를 챙겨 표충사 일주문을 사진에 담으며 산행을 마친 후 사찰 경내를 돌아보기로 하고 일주문 좌측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향하며 걸음을 옮겨나간다.(10:15)
산행궤적
표충사 일주문을 사진에 담으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효봉대종사 천진보탑비라 새겨진 비석 옆에는...
자연석인 커다란 바위로 된 효봉대종사님의 사리탑 입니다.
앞쪽의 상석에 보면 바위를 <두드리지 말라... 두드리면 벌을 받게 된다>는
조그마한 경고문이 적혀 있습니다...
효봉스님의 행적
속성(俗性)은 이(李), 이름은 찬형(燦亨). 호는 효봉(曉峰)이며, 일명 학눌(學訥) 평양 출생.
할아버지에게 사서삼경을 배우고 1913년 일본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
일제강점기 때 한국인 최초로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10여년간 판사를 지낸 분 입니다.
그러던 중 조선인 죄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는 인간적인 고뇌에 빠져 계시다가 결국 판사직을 사임하고, 3년여 동안 엿장사를 하시면서 전국을 돌아 다니시다가 1925년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승려의 길을 택하신 큰 스님이십니다.
출가 후 고승을 찾아 전국을 순례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27년에 금강산으로 돌아와 밤낮으로 수행을 거듭하셨는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를 않아서 절구통수좌(首座)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1931년에 도를 깨닫고,, 1937년부터 10여년간 송광사 삼일암에서 후학을 가르쳤고, 1947년 해인사 가야총림 방장을 역임, 1954년에 통영 미륵산에 미래사를 창건.. 그후, 조계종 통합에 혼신의 힘을 다하셨고, 1962년 통합조계종 초대 종정을 역임하신 분입니다.
멀리 병풍처럼 두른 천황산 사자바위와 재약산을 바라보며 걸음을 재촉하니
내원암과 천황재로 올라가는 갈림길이 나타나고 곧장 나있는 길로 진행을 합니다.
표충사 앞을 지나 사자봉 등산길에 오르면서 표충사 뒤로 이어지는 문수봉에서 재약산을 지나 천황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봉우리가 멋진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올려다보며 사뭇 오늘 산행에 대한 기대가 예상되면서 부푼 가슴을 안고 발걸음을 내딛는다.
시멘트 포장도로 우측에 천황봉 가는 길임을 알리는 이정표를 지나 시멘트 포장길을 따르니 10여분 후에 좌측으로 서있는 이정표가 반긴다.
여기서 시멘트 길을 버리고 좌측 오름으로 천황산 3.7km를 알려주는 스텐이정표를 따라 돌계단을 올라서면서 힘겨운 산행은 시작된다.
백옥 같은 청정 맑은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계곡을 끼고 오르면서 크고 작은 폭포수는 끝없이 연결되고 있는데, 그야말로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한다.
이틀 전 내린 봄비의 양이 많은지 계류를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어느 때보다 힘차고 크게 들려오네요.
올봄 처음 만나는 졸방제비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모습에
갓 시집온 새색시를 보는 듯합니다.
고개를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며 찾아봐도
우리네 들꽃은 잘 보이지 않아 생강나무만 담고 산길을 이어갑니다.
너덜을 올라서며 본격적인 산비탈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힘차게 쏟아져내리는 금강동천(金剛洞天)의 맑은 물을 보노라면 생동하는 봄의 기운을 느낄수 있네요.
한계암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쏟아지는
은류폭포(좌)와 금강폭포의 위용이 참으로 대단합니다.
금강서천에서 내려오는 은류폭포 물줄기가
금강폭포보다 오히려 더 풍부한 수량인 것 같네요.
금강폭포
흔들거리는 출렁다리를 조심스레 건너니 이곳 또한 굉음을 울리며
맹렬히 쏟아져 내려오는 옥류폭포의 물줄기가 가히 일품입니다.
한계암을 지나 목재데크를 올라서니 가파른 오름길이 기다리고 있네요.
이틀 전 내린 제법 많은 양의 비 덕분에 금강동천은 그야말로 물의 나라가 따로 없다. 옥빛 맑은 물이 쉼없이 굉음을 울리며 흘러내리는 모습은 세속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어내주는 것 같고 마음마저 쌍폭포를 지나 올라가자 출렁다리가 있는 금강폭포가 눈에 들어온다.
금강폭포에서 자연의 조화에 다시 한번 도취되었다가 정신을 가다듬고 출렁다리를 건너 우측 암벽을 올라서면서 가파른 오르막 길을 힘겹게 오른다. 등산길은 사자봉 까지는 외길이다.
훤한 등산길만 따르면 별 문제없이 사자봉 정상까지는 등산길을 벗어날 염려는 없다.
따뜻한 날씨에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등로를 오르다 얼굴 주변에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다. 어지럼증도 느껴져 잠시 바위에 걸터앉아 휴식을 취해본다. 아마도 지난 밤의 당직근무 여파가 아닌가 싶다. 잦은 전화로 인해 수면부족이 그 원인이지 싶은데 그렇다고 여기서 중도포기를 할수는 없는 일이라 연양갱과 초코렛을 꺼내 물과 함께 먹으면서 원기회복을 꾀해본다.
가끔씩 초반 페이스를 급히 올리다보면 무리가 있는지 현기증을 느낄 때가 있는데 심장이 적응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속도가 붙어 산행을 무사히 마무리하곤 했었는데 오늘 역시 그러하리라는 기대감을 안고 쉬엄쉬엄 산행을 이어간다.
숨이 턱에 차도록 치고 올라야 하는 된비알에서
반겨주는 조릿대가 눈을 즐겁게 합니다.
너덜지대
그렇게 쉬어가며 오르다보니 걸음은 마냥 느림보가 되어 출렁다리에서 50분 가량을 올라서면 넓은 너덜지대 한 복판으로 들어서게 되고 붉은 페인트 화살표를 칠해 놓아 길잡이를 알려주고 있다.
화살표 방향대로 너덜 지대를 통과하여 지나치니 오름길이 힘이 들었음인지 너덜 한가운데 쉬면서 간식을 먹고 있는 산님들의 대화를 은연 중에 듣게 되는데 이제 어지간히 올라 온것 같은데 정상이 아직도 안나온다고...
산이 높음을 안타까워 할게 아니라... 내가 아직 정상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을 뿐이다.
산은 거기에 서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 단, 한번도 변함이 없다.
등로 우측으로 펼쳐지는 재약산과 문수봉의 위용이 눈에 들어오네요.
천황산이 멀리서 보면 사자형상을 하여 일명 사자봉이라고도 하는데,
오늘 보니 과연 그렇게 보입니다.
마치 대평원의 사자가 포효하는것 같습니다.
잘 생긴 소나무가 발걸음을 붙잡네요.
계곡을 따라 올라온 금강동천 끝자락엔 표충사가 자리하고 있고,
우측엔 뾰족한 필봉과 가운데 향로산이 버티고 있는 모습입니다.
필봉 능선 뒤로 정각산, 영산 그리고 멀리 청도의 명산인 화악산과 청도남산이 조망이 됩니다.
보이는 봉우리에서 왼쪽으로는 필봉능선이고,
그 너머로 영남알프스의 좌장인 운문산과 억산,
조망이 멋진 사자봉과 문바위가 눈에 들어옵니다.
눈 앞에 다가온 천황산 정상부
이어 숲 속으로 들어서서 다시 가파른 오르막을 40여분 오르면 등로에 잘생긴 소나무가있는 전망터가 나타나고 등로 우측으로 펼쳐지는 천황산과 재약봉의 웅장한 모습을 사진에 담고서 정상을 향한 발걸음은 쉼없이 이어진다. 보기에는 금방이라도 정상에 올라 설 것만 같은데 그리 쉽게 자리를 내어줄리 만무하다.
40분 가까이 어렵게 능선을 올라서자 돌무덤과 이정표가 서있는 천황산 정상에 올라선다.(13:02)
돌무지가 있는 옆에는 얼음골 3.3km, 재약산 2.0km, 한계암 3km, 표충사 4.5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고 암반 위에 천황산이라고 새겨진 큼지막한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언제나 찾아와도 한결같은 느낌이지만 정상에 올라서면 지금까지 힘들었던 순간은 온데 간데없고 마음속이 확 뚫려 나가는 느낌을 준다.
깨끗한 맑은 날씨에 시계 또한 좋아 사방은 확 트여 조망이 좋다.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동쪽으로는 간월산과 신불산이 맞닿아 있고, 그 우측으로는 신불평원을 넘어 영축산으로 이어지는 낙동정맥의 마루금이 헌걸차게 다가온다. 남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재약산과 향로봉이 눈 앞에 펼쳐지고 그 뒤로 에덴밸리스키장으로 이어지는 영축지맥이 아스라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자락 아래쪽엔 거대한 표충사가 자리하고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풍수지리학은 잘 모르지만 표충사의 자리는 사방으로 산이 감싸주고 있어 아늑함이 더해 보이는 아주 좋은 터로 보인다.
서쪽에는 정각산이, 북으론 운문산과 가지산이 손에 잡힐 듯이 다가오고, 배내고개 방향의 북동쪽으로는 샘물상회와 능동산이 다가오고 멀리 고헌산 자락도 조망이 된다.
그 사이로는 광활한 억새분지가 펼쳐지는 초원지대가 눈 앞에 바라보인다.
다시찾은 천황산(사자봉) 정상에서...
가야할 재약산과 그 우측으로 향로산이 펼쳐지는 풍광입니다.
간월산에서 신불산 억새평원으로 이어지는 능선...
말이 필요없는 그야말로 웅장함을 느낄 뿐입니다.
보기만 해도 가슴이 절로 뛰는 곳...
때론 눈물 글썽이며 자신을 돌아보게도 만드는 곳...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서야 오를수 있는 곳...
그래서 차라리...
겸손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아무튼 영남알프스의 정중앙에 위치하여 영남알프스 산군을 이루는 산들이 모두 시야에 펼쳐지고 있으니 그 조망이 가히 환상적이라 할 수 있다.
좌우로 펼쳐진 가지-운문-억산과 영축-신불-간월산, 그리고 능동산, 그 뒤로 우뚝 솟은 고헌산, 그리고 정면으로는 재약산은 제법 암산을 이루고 있고, 그 우측으로 영알의 전망대라 불리워지는 향로산이 그 전모를 드러내고 있다.
그 외 첩첩산중을 이루면서 파란 하늘과 함께 첩첩산중을 이룬 남쪽의 무수한 산들을 둘러볼 수 있으니 천황산을 찾은 보람을 맘껏 만끽한다고 해야 할 듯...
마냥 머무르고 싶은 생각뿐이다.
좌측 바위 위에서 멋진 조망을 감상하며 느긋한 오찬을 즐긴 후에
천황재를 향하면서 다시 한번 천황산 정상부를 올려다 봅니다.
마주보이는 재약산과 아래 안부지점은 천황재입니다.
털보식당이 있는 천황재와 재약산이 한층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침목계단을 따라 내림길을 이어가면 털보식당이 있는 천황재에 당도하게 되고
많은 산님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천황재에서 올려다 본 천황산
가을이면 은빛 물결이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 사자평원.
125만평이라 하니 먼 옛날 이런 곳을 발견한 군주라면 새로운 나라라도 하나 세웠을 꿈을 간직할 만한 땅이다.
풍화작용 탓이었을까 잘게 쪼개 놓은 듯 부서진 편린처럼 얇고 넓은 돌들이 너덜길처럼 널려있고, 평지처럼 보이는 길도 침목을 박아놓은 걸 보니 평소에도 얼마나 질척거리는 진창인지 미루어 짐작이 간다.
길게 이어지던 사다리 경사로. 목적이 무수하게 여러 갈래 길을 하나로 모아 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이었지만, 또 다른 한 켠에서는 천황산까지 이어지는 케이블카 설치공사가 시작되어 거의 마무리 단계에까지 이르고 있다.
산을 사랑한다면 산은 그냥 산답게 그냥 두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겹겹이 쌓여있는 산그리메를 보고 있노라면
몇시간이고 퍼질러 앉아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네요.
주암계곡 갈림삼거리
(여름철과 가을날 주암계곡을 찾으면 너무나 멋진 곳이겠지요)
재약산(1,108m) 정상을 향하는 길에는 바위 사이로 녹지 않은 얼음이 아직도 남아있고 지금까지의 길과는 달리 질퍽거리면서 신발에 엉키기 시작해서 한 무더기씩 뭉텅 달라붙어 함께 살자고 아우성이다.
진창길을 지나가다 보니 바짓가랑이는 온통 흙받이가 되어있어 발이 빠지지 않도록 살살 피해가며 산길을 이어간다.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듯이 걷는 속도에 맞춰서 따라온 따사로운 봄기운은 서서히 사자평을 감싸더니 온 산을 휘감고 바람마저 잠재운다.
행여 발목이라도 접질릴까 봐 조심 또 조심하면서 속도를 줄이고 주위의 자잘한 나뭇가지를 잡고 암릉길을 빠져나와 또 한번 소나무와 굴피나무 숲이 보일 즈음해서 조금 더 진행하니 재약봉 정상부가 바로 앞에서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가까이 다가온 재약산 정상부
재약산 정상
가을이면 은빛물결이 넘실거리는 100만평이 넘는 억새군락지인
'사자평'과 산중 습지인 '산들늪'이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재약산 오름길은 억새와 함께 종종 바위군을 이루고 있어 더욱 멋진 풍경을 제공하고 있다. 바위지대를 이룬 가운데 역시 커다란 정상석이 있는 재약산에 도착한다.
일명 수미봉... 천황산과 마찬가지로 사방으로 시야가 확 트여 조망이 아주 장관을 이루고 있다.
특히 지나온 천황산이 더욱 웅장한 느낌이고, 저 아래 사자평은 내려다 보는 자체로써 그저 평화스럽기만 하다.
오랜만에 올라온 재약산 풍경은 모든 것이 새롭다. 멀리 보는 풍경은 겹겹의 능선으로 포개져 아득한 그리움처럼 번지고 산정에서 바라보는 먼 산들은 크고 듬직한 뼈대만 보인다.
실제 저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볼품없이 작고 짧은 지능선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저토록 근사한 산을 이룬 것이리라. 높은 곳에 올라보니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자잘한 일상, 기뻐하고 절망하고 분노했던 순간순간들에 피식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 자잘한 것들이 내 삶의 근간인 것을 낸들 어쩌랴. 그렇게 소소한 것에 목숨거는 것이 우매한 내 삶이었던 것을...
어느 날 문득 걸어온 길을 되돌아 봤을 때 저 산줄기처럼 듬직한 인생이었으면 좋겠다. 이젠 내 걸음에 책임져야 하고 걸었던 길을 되돌아 볼 시간들이 멀지 않았기에...
산뜻한 목재데크 계단길 건너로 재약봉이 보이고 우측엔 향로산이 다가오네요.
그리고 가운데 옥류동천 계곡이 시작되는 병풍바위도 눈에 들어옵니다.
임도를 따르다 만난 갈림이정표에서 고사리분교터가 있는 우측 아래로 등로를 이어갑니다.
지금은 잡초만이 무성한 고사리분교 터
고사리분교는?
1966년 개교, 졸업생 36명, 1996년 폐교.경남 밀양시 산동면 해발 1108m 재약산 수미봉 아래 사자평이라는 넓은 평원이 있습니다.
원래 나무숲이 빽빽한 곳이었는데 일제가 스키장을 만든다고 나무를 베어내고 초지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후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기 위해 끊임없이 불을 질러 평원으로 변해버렸다고 합니다. 해발 800m가 넘는 곳이지만 화전민들이 하나 둘씩 삶의 터전으로 삼으면서 마을이 형성되었습니다. 화전민들은 밭을 일구며 산나물, 약재를 캐면서 힘든 삶을 꾸려갔다고 합니다.
1960년대 경남도의 지원으로 '고사리 마을'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 13가구가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화전민이지만 자식 교육에 대한 열망은 커 배움터를 만들 필요가 있었겠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산아래 마을 산동초등학교의 분교였죠. 학교의 정식 명칭은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
해발 800m 넘는 곳이니 '하늘 아래 첫 학교' 입니다. 그런데 마을 이름이 고사리 마을로 불린 탓에 학교 이름도 '고사리 분교'로 더 많이 불리게 되었나 봅니다.
고사리 분교는 30년간 모두 36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정식으로 폐교되었습니다.
학교 건물은 1999년 철거되었습니다. 이 땅의 소유주는 표충사입니다. 등산객들이 몰리면서 갖가지 부작용이 생겨 건물을 아예 뜯어버린 것입니다.
고사리분교는 1966년 4월 29일 개교하여 만 30년만인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습니다. 그동안 배출한 졸업생은 36명이니 한 해 1명이 조금 넘는 학생이 졸업장을 받았습니다. 졸업생 수로 유추해 보면 1학년에서 6학년까지 10명 정도의 학생이 동시에 교육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죠. 개중에는 중간에 대처로 전학간 학생도 있었을 것이고요.
그렇다면 과연 누가 선생님으로 부임해 이들 '고사리손'을 어루만져 주었을까요. 교육대학을 나와 교원자격증을 받은 엘리트 선생님이 이곳 산골까지 올라와 생활하기가 쉽지는 않았겠죠. 어째든 30년간 졸업생을 배출했으니 그동안 이곳을 거쳐간 선생님의 숫자도 적지는 않았겠죠.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노태운기자의 '발 가는대로'에서...)
배내골이나 산들늪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삼거리에서
작전도로를 따라 표충사로의 등로를 이어갑니다.
작전도로를 따라 진행하다 층층폭포 갈림길에서 우측 내림길로 등로는 이어집니다.
옥류동천의 명물인 층층폭포
(지난 여름 이곳에서 폭포수를 맞으며 더위를 식혔던 생각이 납니다.)
옥류동천의 기암
재약산에서 밀양에 살고 있고 자주 재약산을 찾는다는 연세 지긋하신 어르신과 자제분과 서로 사진을 찍어주며 한담(閑談)을 나눈다. 사방 거리낌없이 펼쳐지는 멋진 조망을 즐기며 주변 산을 하나하나 꼽아보며 얘기하니 저으기 놀라는 모습이다. 수도 없이 다닌 산인데 먼곳의 산까지 망설임없이 이름을 꿰차고 있다고 감탄을 해마지 않으시는 모습에 멋적은 감이 들어 얼른 인사를 드리고 자리을 떠 본격적인 하산 길로 접어드는데... 산뜻한 목재데크를 따라 20여분을 내려서니 임도에 내려서게 되고 재약산1.7km, 고사리분교0.5km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반긴다.
이어 임도를 가로질러 내림길을 이어가니 잡초만이 무성한 고사리분교 터를 지나 배내고개로 이어지는 등로와 합류가 되는 진불암 갈림길을 만나게 되고 작전도로를 따라 계곡의 물소리를 음악삼아 널찍한 도로를 털레털레 걸어가니 층층폭포 입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급내림길을 내려서니 나무 사이로 층층폭포의 위용이 멀리서도 감지된다. 환상의 층층폭포 앞에는 출렁다리가 놓여져 있고 웅장한 폭포는 물보라를 일으키면서 30m 아래로 폭포수가 되어 흘러내리는 모습은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작년 이곳을 찾았을 때 너무 더워서 옷을 입은 채로 폭포수를 맞으며 더위를 식혔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사진 몇장 담고서 층층폭포를 뒤로 하고 10여분 거리에 또 다른 출렁다리가 있는 폭포 앞에 이른다.
두번째 출렁다리의 소폭(小瀑)
흑룡폭포 상단부의 모습
산행지로 잡은 선택이 탁월했음을 실감케 해주는
웅장한 흑룡폭포 뒤로 병풍바위의 위용 또한 대단합니다.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옥류동천 흑룡폭포
해발 1100여m 이지만 계곡이 무척 깊습니다.
불어난 계곡물이 징검다리를 삼켜버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겨우 건너왔네요.
표충사 절집 뒤로 울창한 대나무 숲이 펼쳐지고
좌측의 필봉, 우측의 사자바위가 펼쳐져 있네요.
여기서부터 깊고 수 백길 계곡 좌측으로 바라보면서 가파른 너덜지대를 어렵게 내려서는 계곡은 웅장하고 대자연의 품속에서 포근함을 느끼게 만든다.
나무 숲 사이로 계곡 건너편에 보기 좋은 폭포가 바라보이기도 한다.
시간은 벌써 오후 5시를 지나고 있고 햇살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등로 좌측의 흑룡폭포 전망대에 도착하여 전망대에서 저멀리 병풍바위 아래의 계곡에 펼쳐지는 길고 긴 흑룡폭포는 또 다른 장관이다. 지난 해 만났을 때보다 수량이 더 풍부하여 멋진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다시금 찾아온 보람을 만끽한다.
여기서 한참을 머무르며 남은 간식을 꺼내 허기를 달래가며 흑룡폭포를 관람하고 가파른 길을 내려선다.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리는 계류에서 가로질러 건너야 하는데 불어난 계곡물로 인해 건너기가 여의치 않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겨우 돌부리를 밟고 건너와 널찍한 등로를 내려가니 표충사 뒷쪽의 울창한 대나무 숲이 눈에 들어오고 특유의 필봉 꼭대기가 시야에 잡힌다.
이제 목적지인 표충사가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 늘 물이 차있어 조심스레 징검다리를 건너던 시멘트보를 조심스레 건너 장비와 손발을 씻고 주차장에 도착하여 장비를 내려놓고 달랑 카메라만 손에 들고서 표충사 부처님을 뵈러 일주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7시간 40분에 걸친 길고 긴 산행은 막을 내리게 된다.
표충사 유물관 뒤로 천황산, 재약산, 문수봉이 병풍처럼 두른 아늑한 마루금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봉우리가 붓끝처럼 뾰족하여 붙여진 이름 '필봉'이 올려다 보여
다시금 멋진 조망을 보고 싶은 마음이 불끈 솟아나네요.
표충사 사천왕문을 들어서며 좌우로 도열해 있는 사천왕을 배알합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표충사의 사당(祠堂) 영역과 사원(寺院) 영역을 구분하고 있는 사천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는 대광전 맞은편 우화루 앞쪽에 사천왕문이 있었으나, 최근 사당영역을 새롭게 조성하고 절의 진입로를 옮기면서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내부에는 근래에 조성한 목조사천왕상과 함께 현대의 불모(佛母) 석정(石鼎) 스님이 조성한 사천왕탱이 봉안되어 있다.
매실나무
표충사 삼층석탑과 석등
삼층석탑(三層石塔)
표충사 대홍원전(大弘願殿) 앞에 세워진 3층석탑이다.
탑 앞에는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 있으나 이 곳은 탑과 석등이 놓였던 원래의 위치가 아닌 듯하다.
표충사의 원래 이름은 죽림사(竹林寺)인데 신라 흥덕왕 4년(829)에 두번째로 크게 확장시켜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로 고쳤다고 전한다.
조선 헌종 5년(1839)에는 그때까지 밀양군 무안면에 있었던 표충사(表忠祠)를 영정사로 옮기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表忠寺)로 개칭하였고, 가람배치도 큰 이동이 있었던 것이니 이 탑도 그 때에 옮겨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기단(基壇)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으며, 각 면을 둘로 나누어 놓았다.
탑신부(塔身部)는 층마다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다.
1층 몸돌은 기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형태로, 균형면에서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다. 표면 모서리에는 매우 넓은 기둥이 새겨져 있고 다른 장식은 없다.
2층 몸돌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급격히 줄었으며 3층도 체감되어 있다.
또한 2·3층의 몸돌 모서리에도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으나 너비는 전체가 축소됨에 따라 좁아졌다.
지붕돌은 밑에 4단의 받침이 있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었으며, 지붕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내리다가 네 귀퉁이에서 경쾌하게 치켜올려져 있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얹혀져 있으나 정돈되지는 못하고, 그 위에 1m 가량의 끝이 뾰족한 쇠막대를 세웠다.
탑신부 1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커다란 단점이 있으나, 기단이 1단으로 구성된 신라석탑양식을 따른 아담한 탑이다.
탑의 머리장식도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서 주목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석등(石燈)
표충사 내의 석등으로 경상남도지정 유형문화재 14호.
방형으로 된 지대석과 원형으로 된 하대석이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나 그 일부가 부서진 상태이다.
하대석은 낱장의 연꽃잎 모양 8매가 둘레에 고루 조각되어 있고, 각형 1단의 받침으로 8각의 간주를 받치고 있다.
간주에는 명문이나 조각이 전혀 없고 중대석에도 하대석처럼 낱장의 연꽃잎 모양 8매가 조각되어 있다. 화사석은 부등변의 8각형으로 4면에는 장방형의 화창구가 있다.
옥개석 추녀에는 낙수 흠이 있고, 옥개의 이면에는 8구의 희미한 안상이 있으며 화사석과 연결되어 있다.
전각의 반전은 경쾌하며 옥개석 윗면 중심에 낱장의 연꽃이 모양 13매가 둘려져 있으며 정상에 보주를 꽂도록 되어 있다.
보주는 복발형 2단의 몰딩 받침위에 원좌를 두르고 그 위에 연봉오리 1개를 얹었는데, 석등은 대체로 완형이지만 간주석, 화사석, 보주 등은 뒤에 보수된 흔적이 있다.
조각의 특징으로 볼 때 통일신라시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영정약수(靈井藥水)
신라 흥덕왕 4년에 왕의 셋째 왕자가 나병에 걸려 명의, 명약을 찾던 중 황발선인이 소문을 듣고 이곳에 찾아와 병을 치유했다고 한다.
이에 왕이 친히 선사를 찾아와 크게 칭송하나 황발선인이 말하기를 이곳 산초와 유수가 모두 약초요, 약수라 하였다.
왕은 그 말에 감탄하여 탑을 세우고 가람을 부흥시키고 산 이름을 재약산이라 하고, 사명 또한 영정약수의 이름 따서 영정사라 하였다.
지금도 이 영정약수를 찾는 발길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다.
관음전(觀音殿)과 명부전(冥府殿)
관음전(觀音殿)
관음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셔 놓은 법당이다.
관세음보살은 관자재보살이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의 좌보처로서 아미타불의 뜻을 받들어 대자대비를 근본 서원으로 삼아 중생을 보살피고 도와줄 뿐 아니라,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이들을 인도하는 보살이다.
관세음이란 세간의 음성을 관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은 현실세계에서 괴로움에 처함 중생이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그 음성을 듣고, 인간의 간절한 기원과 요구에 응해 나타나는 구세대비자이기도 하다.
또한 중생에게 온갖 두려움이 없는 무외심을 베풀어서 시무외자(施無畏者)라고도 한다.
법화경에서는 이르기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마음에 간직하고 염불하면, 큰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하고 홍수에도 떠내려가지 않으며, 모든 악귀도 괴롭힐 수 없다.
또 중생의 마음 속에 있는 불안과 두려움을 제거하고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삼독을 여의게 하며, 아들이나 딸을 바라는 이에게는 뜻에 따라 자식을 얻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렇듯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근기에 맞게 32응신으로 나투시어 중생을 구제한다.
관음전은 바로 이러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며, 일면 원통전(圓通殿)(관세음보살이 주불전일 때)이라고도 한다.
표충사 관음전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을 상징하는 42수 관세음보살을 모셨다. 좌우보처로는 남순동자와 해상용왕이 응립해 있으며, 후불탱화로는 1930년에 조성된 천수천안관세음보살탱화가 모셔져 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옥에 계신 어머니를 구하고 지옥으로 떨어진 모든 자들이 구원될 때까지 지옥세계에 계시겠다는 서원을 세운 지장보살과 죽은 자의 삶을 평가하고 형벌을 정하며 새로 태어날 세계를 결정하는 심판관 역할을 하는 시왕(十王)이 계신 전각이다.
그래서 지장전, 또는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전각이므로 쌍세전(雙世殿)이라고도 한다.
사람이 죽으면 그 날로부터 49일 되는 날까지 7일째마다 차례로 7번 시왕 앞에 나아가 생전에 지은 죄업(罪業)의 경중과 선행·악행을 심판 받는다고 한다.
불가에서 49재(四十九齋)를 지내는 까닭도 여기서 연유하며, 명부전에서 재를 지내는 까닭은 지장보살의 자비를 바탕으로 시왕의 인도 아래 저승의 길을 밝혀 좋은 곳에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뜻에서이다.
표충사 대광전 (表忠寺 大光殿)
대광전은 표충사의 큰 법당이다.
법당이란 진리로써 가득 채워져 있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법당에는 모든 번뇌와 미혹을 밝혀서 불멸의 생명, 무한한 행복과 영원한 자유를 이룬 부처님이 계신다. 스스로 이기심과 탐욕과 어리석음을 불러 일으켜서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눈 멀게 하는 중생을 향해 무궁무진한 법문의 세계를 펼쳐 놓으신 곳이 바로 법당이다.
대광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깊이 신봉 되어온 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다.
삼존불은 석가모니불(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 부처님을 형상화함), 약사여래불(동방 유리광세계의 주인.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등의 12대 서원을 세운 부처님이며, 손에 약함을 들고 있음), 아미타불(서방 극락세계를 주관하시며 그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무한한 세계에까지 미 치며 그 광명을 받은 사람은 모든 고통이 사라진다고 함)이며, 이들 부처님은 중생의 염원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에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 깊이 신봉되어 왔다.
표충사의 대광전은 신라시대에 창건하였다고 하나, 화재나 병화(兵火)로 소실되어 중건, 중수 되었다.
현재의 전각은 조선후기에 중건한 정면 5칸, 측면 3칸, 외3포, 내3포의 다포식 팔작지붕이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131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광전 삼존불
삼존불은 가운데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모시고,
오른쪽에 약사여래불을 왼쪽에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팔상전(八相殿)
대광전 옆에 나란히 자리잡은 팔상전은 1854년(철종 5년)에 당시 주지였던 환월선사(幻月禪師)가 창건하였으며, 1926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9년에 중창한 것이라고 한다.
원래 위치는 현재 종무소가 있는 자리이고 지금의 위치에는 표충서원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일부 승려들이 사찰 내에 유교식 서원의 존재가 불가할 뿐 아니라 대광전과 나란히 사당을 둔다는 것은 불경(不敬)하다는 지적이 있어 1971년에 자리를 맞바꾼 것이었다.
대광전과 마찬가지로 잘 다듬어진 장대석의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에는 소조석가여래좌상만을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은 현재 경상남도문화재자료 1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우화루(雨花樓)와 범종각(梵鐘閣)
우화루(雨花樓)
대광전을 바라보며 마주하여 자리잡은 우화루는 정면 7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원래 중심법당인 대광전으로 들어서는 중문으로 최근까지 우화루 앞으로 진입로가 있었으나, 근래에 가람을 정비하면서 진입로가 바뀌었다.
우화루는 야외참선 장소로 쓰인 곳이며, 우화루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남계천 맑은 물이 발아래 깔린다.
범종각(梵鐘閣)
범종루 종각이라고 불리우는데 이층의 누각인 경우 범종루, 종루라고도 한다.
표충사의 종루는 대광전을 마주하고 2층의 누각으로 이루어져 있어 범종루라 칭하며, 범종루에는 불음을 전하는 사물을 배치하고 조석예불, 또는 절의 크고 작은 행사에 울려 퍼지게 한다.
범종루에는 범종을 비롯해 법고, 목어, 운판 등 불교의 법전사물(法殿四物)을 함께 설치하기도 한다.
이들은 중생의 교화를 상징하는 불구로 예불의식 때 쓰인다.
그동안 손에 꼽을 만큼 적은 횟수의 표충사 방문이었지만 올 때마다 느끼는건 참 아담하고 잘 꾸며진 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후세들에게 잘 알려진 사명대사의 호국혼이 서려있는 표충사 경내를 돌아보고 절 주변을 병풍처럼 두른 재약5봉의 위용이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멋진 모습을 다시금 찾게 되어 반가웠고 때맞춰 풍부한 수량으로 장관을 이룬 이름난 폭포를 보는 즐거움은 그 어느 산행 때보다 크다 하겠다.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푸근한 어머님의 품처럼 아늑하게 느껴지는 천황산 정상에서의 조망과 은빛물결이 넘실대는 억새의 향연을 다시 보고 싶어 가을이 얼른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집으로 향한다. 비록 수면부족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않아 산행시간이 평소보다 많이 길어졌지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돌아보았다는데 만족을 하며 앞으로 좀더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야겠다고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며 어둠이 깃들기 시작하는 도로를 질주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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