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2012년 춘계 성지순례(문경 봉암사-윤필암-대승사) 본문
◈ 2012년도 춘계 성지순례 (4월 22일)
직장불교회에서 1년에 두번 성지순례를 떠나는데 봄철에는 가족과 함께 하는 사찰순례길이고, 가을에는 1박 2일의 템플스테이를 실시하고 있다.바쁜 직장생활과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가족과 함께 오붓한 시간을 가지며 부처님의 향기가 물씬 풍겨나는 성지를 순례하는 일은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 생각이 되고 동료들과의 돈독한 정 또한 다질 수있는 좋은 기회라 춘계 성지순례길은 언제나 만원사례로 가득찬다.
올해는 일년에 딱 한 번 초파일에만 산문을 여는 조계종립 특별수도원(우리나라에 한 곳 뿐임)인 문경 봉암사를 찾아가는 코스라 망설일 겨를도 없이 신청을 하고 때를 기다려 아내와 함께 출발장소인 동국대경주캠퍼스로 간다.
8대의 관광버스에 분승을 하고 출발한 버스는 문경새재IC를 빠져나와 대야산자연휴양림 방향으로 진행하니 봉암사가 있는 상괴마을로 접어든다.
주차장에 도착한 버스에서 내려 전날 내린 비의 양이 많아서인지 봉암사계곡을 흘러내리는 맑은 물은 시원스럽기 그지없다.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라고 씌여있는 현판이 반겨주는 일주문을 들어서며 합장 반배로 산문을 들어선다.
깊은 산중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 치고는 제법 큰 규모라 저으기 놀라면서 구산 선문의 선풍과 전통을 이어가는 대한불교 조계종 특별선원(禪院)인 봉암사 경내로 들어간다. 사진촬영을 금하게 하고 묵언을 하라는 지시에 난감한 마음이 들었지만 홍보부의 특수임무(?)를 소흘히 할수 없어 몰래 사진에 담아내느라 진땀을 뺀 시간이었다.
구석구석 다니며 봉암사의 이모저모를 담고 싶었지만 워낙 통제가 심해서 유명한 태고선원은 발도 들여놓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귀한 기회와 인연으로 희양산의 멋진 암봉 아래 자리하고 있는 봉암사를 찾아본 것만으로도 소원을 풀었다고 자부하면서 다녀온 흔적들을 풀어내 본다.
★ 희양산 봉암사(曦陽山 鳳巖寺)
봉암사는 신라 헌강왕 때인 879년 지증도헌 국사가 창건하였다. 당시 심층거사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희양산 일대를 희사하여 수행도량으로 만들 것을 간청하였다. 대사는 처음에 거절하다가 이곳을 둘러보고 "산이 병풍처럼 사방에 둘러쳐져 있어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흩는 것 같고 강물이 멀리 둘러 쌓였는 즉 뿔 없는 용의 허리가 돌을 덮은 것과 같다."며 경탄하고 "이 땅을 얻게 된 것이 어찌 하늘이 준 것이 아니겠는가. 스님들의 거처가 되지 못하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라 하며 대중을 이끌고 절을 지었다.지증대사가 봉암사를 개산하여 선풍을 크게 떨치니 이것이 신라 후기에 새로운 사상흐름을 창출한 구산선문 중 하나인 희양산문이다. 그 후 후삼국의 대립 갈등으로 절이 전화를 입어 폐허화되고 극락전만 남았을 때인 고려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중창하여 많은 고승을 배출하였다. 조선조 세종대왕때 험허당 기화 스님이 절을 중수한 뒤 머물면서 '원각경소'를 저술하였고. 1674년 다시 소실된 절을 신화 스님이 중건하였으며 1703년 다시 중건하였으나 이후 크게 쇠퇴하였다.
구한말 1907년 의병전쟁 때에 다시 전화를 입어 극락전과 백련암만 남고 전소되었다. 1915년 윤세욱스님이 요사와 영각, 창고 3동을 신축하였고, 1927년에는 지증대사의 비각과 익랑을 세웠다. 근래에 들어 당시 조실을 지낸 전 조계종 종정 서암스님과 주지 동춘스님 후임 원행, 법연스님 등의 원력으로 절을 크게 중창하여 수행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했다. 지증대사 적조탑, 지증대사적조탑비, 정진대사 원오탑, 정진대사 원오탑비, 봉암사 삼층석탑 등의 성보문화재가 옛 선사의 향기를 은은하게 전하고 있다.
봉암사 선원의 역사는 저 멀리 신라 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지증대사 도헌스님이 구산선문중 하나인 희양산문을 이곳에서 개창하였던 것이다.
이후 태조 18년 정진대사가 사찰의 소임을 볼때는 이 봉암사에 3천여 대중이 머물러 동방장과 서방장으로 나누어 정진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분위기가 계속 이어져 '태고 보우국사'를 비롯한 많은 수행자들이 이곳에서 정진하여 "동방의 출가 승도는 절을 참배하고 도를 물을 때 반드시 이곳 봉암사를 찾았다" 고 한다. 이렇게 유서 깊은 선사 봉암사에 근대 선원이 다시금 부흥된 것은 1947년이다.
해방 직후 사회적 혼란이 극심한 상황에서 봉암사는 한국불교의 현대사에서 새로운 흐름을 창출한 결사도량으로 거듭난다. 이름하여 '봉암사 결사' 가 그것이다. 봉암사 결사는 1947년 성철스님을 필두로 청담. 자운. 우봉스님 등 4인이 "전체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임시적인 이익 관계를 떠나서 오직 부처님 법대로 한번 살아보자. 무엇이든지 잘못된 것은 고치고 해서 부처님 법대로만 살아보자."는 원을 세우고 결사도량을 찾으니 그 곳이 봉암사였다.
그 후 청담. 행곡. 월산. 종수. 보경. 법전. 성수. 혜암. 도우 등 20인이 결사에 참여하였다. 당시 결사대중은 공주 규약을 제정하여 추상같은 법도를 세워 오늘날 수행의 근간을 세웠던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결사정진도 1950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단되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하게 된다. 그후 1970년 초부터 다시 수좌들이 봉암사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불교신문 기록으로 보건데 봉암사 희양선원은 1972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15명의 납자가 정진했다. 이후 1974년에 서옹스님이 조실을 맡은 것을 제외하고는 78년까지 향곡스님이 줄곧 조실역활을 하면서 납자를 제접했다.1980년경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선원은 청룡의 승천과 봉황의 날개짓처럼 웅대한 자태를 희양산 자락에 펼치게 되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이어 1984년 6월 제 13차 비상종단 상임위원회에서는 선풍 진작과 종단 발전을 위해 봉암사를 종립선원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994년 범룡스님이 조실로 추대되어 2년여간 납자를 제접하여오다, 2000년 하안거 해제에 진제스님을 조실로 모셨으며 그후 2001년 하안거 결제에 서암스님을 다시 조실로 추대하여 대중 스님들을 지도 하시다가 2003년 3월 29일 날 열반에 드셨다. (봉암사 홈페이지에서...)
봉암사 방향으로 가는 도로에서 올려다 본 희양산의 웅장한 모습에 저절로 카메라를 들게 만듭니다.
주차장에서 봉암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봉암사계곡의 맑은 물은 옥색 그 자체입니다.
일년 중 단 하루 산문(山門)이 열리는 절(寺)...
'희양산 봉암사 일주문'입니다.
봉암사(鳳巖寺)는 경북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희양산(曦陽山) 자락의 조계종 특별수도원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고 있는 천년고찰로서 수행도량이다.
특별히 매년 "부처님 오신 날" 단 하루만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있다.
일반인은 물론 먹물옷을 입은 스님이라고 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니, 우리 땅에서 가장 문턱이 높은 절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희양산 뒷자락이 백두대간(白頭大幹)길이라 산행객도 많고, 희고 미끈한 화강암 절벽까지 갖춘 희양산을 암벽등반 하기 위해 앞다퉈 봉암사를 기웃거려보지만 끝내 산문(山門)은 열리지 않는다.
천년을 내려온 봉암사의 탑과 부도, 법당을 보고 싶어하는 답사객들도 쉽게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왜 이렇게 산문(山門)턱이 높은가? 한국 불교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는 달마조사의 선맥을 이어왔는데 그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구산선문이 근간이 된다. 그 구산선문중 하나가 희양산문의 종찰인 봉암사다.
하안거, 동안거엔 100~130명 정도의 스님들이 결제에 들어가는데, 오겠다는 승려가 많아 경쟁도 치열하며, 워낙 규율이 엄해 웬만한 사찰의 주지들도 쫓겨 나간다고 한다. 봉암사는 그러기에 한국불교의 정신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상치 못했던 큰 규모의 사찰이라 들어서면서부터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극락전(極樂殿 - 보물 제1574호)
신라 경순왕이 이곳에 피난하여 원당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합니다.
극락전(極樂殿)은 팔작지붕에 앞면과 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법당으로서는 유례가 드문 2층 전각이다. 절의 오랜 역사 속에서도 극락전만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처 지금에 전한다. 서까래 모양이나 건물의 구조가 특이하며, 특히 법주사 팔상전과 더불어 현존하는 희귀한 목탑으로 알려져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었다. 안에는 '어필각(御筆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아미타불상과 1904년에 조성한 극락회상탱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상층의 중앙에는 석조 노반과 보륜을 가설하여 전체적으로 탑의 형식을 채용하였다.
봉암사 대웅보전
장중하게 솟은 희양산을 주산(主山)으로한 대웅보전은 1992년에 새로 지은 전각이다.
정면 7칸에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치미에 용머리(龍頭)가 장식되어 있으며, 전각 앞 4마리의 사자상(獅子像)이 수호를 하고 있다. 창호에는 화려하게 수놓아진 꽃문살로 장식되어 있다.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처리 하였다. 안에는 근세 제작된 후불목각탱(後佛木刻幀)을 봉안한 것이 특징이다. 이 외에 신중목각탱(神衆木刻幀), 석가불좌상(釋迦佛坐像), 관음입상(觀音立像), 대세지입상(大勢至立像), 소종(小鐘) 등이 봉안되어 있다.
봉암사 삼층석탑
지증대사가 봉암사를 창건한 때인 헌강왕 5년(87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높이 6.3미터의 아담한 명작으로 불국사 석가탑을 모본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가 훤칠하게 커서 늘씬한 미인을 연상하게 한다.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은 이중 기단 위에 구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탑은 단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와 상부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의 비례와 균형이 조화되어 보기 드문 아름다움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상륜부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한국 석탑 중에서 매우 귀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탑의 높이는 6.31m이고 그중 상륜부의 높이는 2.38m이며 지대석의 너비는 3.24m이다. 이 탑의 조성 시기는 9세기로 추정된다.
금색전(金色殿)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에 다포계(多包系) 양식이며, 둥근서까래가 네모난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겹처마이다. 용마루 끝의 치미는 용머리(龍頭)로 장식한 팔작지붕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다. 천정은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안에는 비로자나불과 후불탱, 신중탱이 봉안되어 있다. 지금 대웅전 조성 전에 있던 법당이다.
조사전(祖師殿)과 진공문(眞空門)
법계 만물은 이름으로 있고 모두 공(空)인데
진공(眞空), 참공은 또 어떠하기에 참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 하였는가...
정말 眞空妙有의 세계 본성의 세계를 찾는 납자들이 들어가는 문.
결재시엔 100여 명의 스님들이 정진한다고 하는 태고선원.
이 문을 드나든 수 많은 스님들.......
그리고 우리들에게 익숙한 성철스님, 서암스님 등......
선원의 고요한 외관은 보았으나 그 속을 볼 수 없으니
가장 봉암사 다운 것을 보지 못한 것이나 다름 없다.
대웅전 앞 마당
대웅전 정면에 남훈루가 보인다. 그리고 좌우에 요사채가 있으며,
마당 좌우에 야간에 관솔불을 피우던 노주석(정료석 : 불우리)이 있다.
대웅보전의 꽃살문이 참으로 아름답더군요.
그리고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쓰여져 있어 소개해 봅니다.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 붙이는 글씨>
佛身普遍十方中 (불신보변시방중) 부처님은 우주에 가득하시니
三世如來一切同 (삼세여래일체동)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다르지 않네
廣大願雲恒不盡 (광대원운항부진) 광대무변한 원력 다함이 없어
汪洋覺海竗難窮 (왕양각해묘난궁) 넓고 넓은 깨달음의 세계 헤아릴 수 없네
威光遍照十方中 (위광변조시방중) 부처님의 위엄 있는 빛(威光)이 시방세계에 가득차고
月印千江一切同 (월인천강일체동) 천 갈래 강에 비친 달은 천 개로 보여도 근본은 하나
四智圓明諸聖士 (사지원명제성사) 사지(四智)에 모두 통달한 많은 성인들
賁臨法會利群生 (분림법회이군생) 넓게 집회에 임해서 많은 중생을 이롭게 하네.
지증대사 비각(碑閣)
지증대사(824~882)는 경주 김씨로 자는 지선(知詵)으로 17세에 부석사(浮石寺) 경의화상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양부화상, 혜은화상에게 사사하였다.
하루는 거사 심충(沈忠)이 찾아와서 제자를 자칭하면서 희양산에 절짓기를 청하므로 따라서 지세를 살펴보고 “만약에 이곳에 사문(沙門)이 살지 않으면 아마도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 하고 이에 응했다. 헌강왕이 배율문(裵律文)을 보내 절의 경계를 정하게 하고 절이름을 봉암사로 사액했다.
지증대사는 헌강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왕사(王師)로 삼으려 하였으나 사양하고 돌아와 헌강왕 8년(882) 12월 18일에 가부좌를 하고 또록또록하게 사람들과 마주 담소하다가 고요히 잠자듯 입적(入寂)하였다. 지증의 입적을 최치원은 “아! 이 땅에 내려왔던 별이 상천(上天)으로 되돌아 가고 달이 큰 바닥에 떨어졌도다(鳴呼星廻上天月落大海)” 라고 적었으니 큰 스님의 입적에 탑호를 적조(寂照)라 내렸다.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제315호)
지증대사 적조탑비는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공덕을 찬양한 부도탑비로서 신라 경애왕 원년(924)에 세운 것으로 귀부와 이수를 완전히 갖춘 석비이다. 귀두는 1개의 뿔을 장식한 용두형으로 되어 있으며, 앙련과 8마리의 용이 서로 얽히어 싸우듯 장식한 매우 섬세하고 특이한 이수를 비신 위에 갖추고 있는 통일신라 최성기의 석비이다.
이 비의 비문(碑文)은 신라의 대문호인 고운 최치원선생이 지었다.
성주사 낭혜화상비, 쌍계사 진감국사비, 경주 숭복사비 등과 함께 소위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이며, 분황사에 계시던 혜공(慧江) 스님이 나이 83세에 글씨를 쓰고 아울러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비의 높이는 2.73m, 너비는 1.64m이다. 글씨는 2cm 크기의 행서로 왕희지 글씨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꾸밈없는 필획은 일가를 이룬 글씨이다.
봉암사 지증대사탑(보물 제137호)
지증대사 적조탑은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의 부도로서 신라 헌강왕 8년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승탑이다. 탑의 높이는 3.41m, 지대석 너비 2.28m의 당당한 탑으로 883년에 건립되었다. 옥개석이 약 1/3정도 절단된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파손이 없는 완형으로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여진 방형의 지대석 위에 각 부의 장식조각이 섬세하고 수려하게 제작된 당시 신라부도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중대석에 새긴 사리함, 공양상과 주악상은 다른 부도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조각이 세련되었다.
기단은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대석 측면에는 안상을 1구씩 음각하고 그 안에 동적인 사자상을 1구씩 양각하였다. 탑신석은 각 면의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고 전면에 조각이 있다.
8각 몸돌의 앞뒤에 자물쇠를 단 문을 새겨서 부도 안에 큰스님이 계신다는 의미를 부여하였고, 사천왕으로 호위를 시키고 두 명의 보살을 배치하였다. 옆에 조성된 탑비의 명문을 볼때, 건립 연대는 883년으로 추정된다.
남훈루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첫 출입문이고 문 위에 누(樓)가 있다.
백운대 마애불좌상을 만나러 가는 길은 좁은 산길.
그러나 높이 오르지는 않고 내내 평탄한 길입니다.
남산제비꽃
산을 닮아 가고 싶다는 바람으로 나서는 산길을 걷는 마음은 언제나 설레임으로 충만해집니다.
봉암사 뒤편 백운계곡에 있는 마애불 입구의 풍광입니다.
청아한 소리로 흘러내리는 옥류가 마치 묘음 같아 기분이 산뜻해 좋으네요.
힘차게 쏟아지는 계곡물에 뛰어들고픈 충동을 억제하고서
좌상 앞 반석을 돌로 두드리면 목탁소리가 난다고 하는
'백운대 마애불좌상'에 도착하게 됩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21호)
미륵보살로 추측되는 이 불상은 환적 의천선사의 원불이라고 전해오며, 조각연대는 고려말기로 추정된다.
높이는 4.5m, 폭이 4.4m인데 불두주위를 약간 깊게 파서 감실처럼 만들었으며 광배를 겸하는 듯하게 처리하였다.
가슴에 꽃을 품고 가부좌를 튼 채 그저 묵묵히 내려만 보고 계시는
마애보살 부처님을 알현하고 주변 바위군을 돌아드니
'백운대'라 새겨진 잘 쓰여진 글씨가 눈길을 끄는
무릉도원이 따로 없는 듯한 풍광에 넋을 놓고 바라보다 돌아서니
찾아온 길손에게 자리를 내어주던 숲은 다시 푸르러지고
차가운 계곡물은 세차게 흐르기 시작합니다.
고깔제비꽃
산괴불주머니
여느 절에서는 볼수 없는 굴뚝이 이채로운 봉암사 전경입니다.
남훈루 앞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벚꽃과 묘하게 조화를 이룬 모습이 보기에 좋으네요.
할미꽃
금낭화
매발톱
미국제비꽃(종지꽃)
노주석(爐柱石)
법당 앞 마당 좌우 한쌍으로 있다.
정료석(庭燎石) 우리 말로는 '불우리'라 하며
이 돌받침은 야간에 행사가 있을 때
이 위에 관솔불을 피워 마당을 밝히는 곳이라고 한다.
설선당에서 준비해간 음식을 내어놓고 점심시간을 가집니다.
명자나무
봉암사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주차장으로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다시 몸을 싣고 출발하여
바위 틈에 피어난 '돌단풍'이 맨 먼저 반겨주는 윤필암에 도착하게 됩니다.
솔향기와 하얀 목련 꽃향기가 코끝을 스치는 윤필암 사불전의 모습입니다.
윤필암[閏筆庵 ]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사불산 자락에 있는 대승사의 부속암자로 수덕산 견성암, 오대산 지장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비구니 선방의 한 곳이며,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인 대승사의 부속암자이다. 1380년(고려 우왕 6)에 각관(覺寬)이 창건하였으며 1645년에 서조(瑞祖)와 탁잠(卓岑)이 중건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중건을 거쳐 1885년에 고종의 명으로 창명(滄溟)이 다시 중건하였으나 1980년대에 모든 전각을 새로 지어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다.
윤필암의 명칭은 원효와 의상이 각각 사불산의 화장사와 미면사에서 수행할 때 의상의 이복동생인 윤필이 이곳에 머물렀다 하여 이름 지었다고 한다.
관음전과 사불전, 산신각, 선원이 갖추어진 비교적 규모가 큰 암자이다.
사불전에는 불상이 없고 정면에 설치된 유리창을 통해 사불산 정상에 있는 사면석불을 향해 참배한다. 사면석불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03호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0호인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및 지감(紙龕)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48호로 지정된 후불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사불전 뒤쪽의 암벽 위에는 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삼층석탑이 있다.
윤필암 전경
마주보이는 전각이 법당인 사불전이고,
좌측 목련 꽃잎이 갈라진 듯해 보이는 이 꽃은 별목련이라고 한답니다.
무스카리
큰앵초
사불전에서 바라본 윤필암 전경
균형감있고 포근하고 안정적인 배치에
아주 잘 가꾸어진 화단과 정원, 연못, 돌담의 햇살과 작은 나무들...
봄을 맞아 온갖 기화요초들이 만발한
꼭 다시 오고픈 마음이 절로 드는 곳...
비구니 암자라 그런지 작은 부분까지도 미적 감각이 배어 나옵니다.
윤필암 사불전
사불전은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은 적멸보궁처럼 무불전입니다.
그것은 저 앞 봉우리에 있는 사불암이라는 바위에 부처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고,
그 사불암을 사불전 기단에 그대로 모셔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까이 당겨본 사불석불
명자나무꽃
긴병꽃풀
어느 곳을 보아도 허투루 된 공간이 없네요.
이 절의 스님들은 정말 주변을 갈고 다듬는 일이 이러할진대
마음 공부는 얼마나 정성껏 할지 지레 짐작이 됩니다.
앵초
소래풀(보라유채)
너무 정갈하여 모든 것이 공력처럼 다가옵니다.
이곳에서 스님들의 정성을 느끼고 또 느끼고...
돌단풍의 전송을 받으며
줄기를 자르면 붉은 즙이 나오는데, 피 같다고 '피나물'이라 불립니다.
'대승사 1km'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산길로 접어들어 갑니다.
윤필암에서 대흥사로 넘어가는 1km 남짓한 오솔길은
참으로 한적하고 조용해 사색하며 걷기에 제격이었네요.
대승사를 향한 걸음 도중에 사불석불을 보고 가야겠기에
길 옆 장군수에 들러 물 한모금 들이키고서
가파른 오름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사불석불
바로 이 바위가 사불암으로 진평왕 때 바위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졌는데 바위 네 면에 부처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면별로 정확히 동, 서, 남, 북을 가리키고 이 바위는 좌상과 입상의 여래불이 새겨져 있는데 진평왕이 감탄해서 지은 절이 바로 대승사라고 전한다.
이 바위가 정확히 반대편 사불전 유리창에 비치니 곧 법당에 부처님을 모신 것이나 다름 없으리라.
사불산 사불암
사불석불인데 오랜 세월 풍화작용으로 사면불상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사불암은 약 3m 바위(기둥) 사면에 불상을 새겼는데 오랜 시간 풍파에 그대로 노출되어 지금은 두면에서만 불상의 흔적을 볼수 있고, 나머지 두면에서는 도저히 그 윤곽조차 볼 수가 없다.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 꺼내 사불암 기둥에 붙여놓고 마음속으로 기도해본다.
사불석불에서 바라본 윤필암과 사불전입니다.
사불암에서 보는 전망은 일품이다. 거침없는 조망을 바라보니 속이 다 시원하다.
윤필암과 묘적암이 손에 잡힐 듯하고, 조금 전 윤필암 사불전에서 이곳을 보았던 것이 이제는 그 반대가 되어 여기서 사불전을 내려다보는 느낌은 색다르게 다가온다. 지나치지 않고 올라오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알록제비꽃
노랑제비꽃
대승사 도량을 들어서는 순간 대웅전의 장엄함과 우아함에 넋이 나갔습니다.
그 긴 세월 이겨낸 흔적이 남아있는 단청과
법당문 꽃살의 미묘한 조화에 선사들의 수행을 더하니
마음은 겸허해질 수밖에....
대승사 [大乘寺]
대승사는 직지사 말사로서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전두리 사불산(四佛山)에 있는 절이다.
사불산의 산마루에 있는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에 관한 설화에 따르면 587년(진평왕 9)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 고종 때 최자(崔滋)가 절 서남쪽에 있는 백련사(白蓮寺)를 새롭게 단장했으며, 조선초에는 기화(己和)가 반야사(般若社)를 결성하여 후학들을 지도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1604년(선조 37)부터 1701년(숙종 27)에 걸쳐 여러 사찰 당우를 신축했는데, 1692년 금당을 지은 뒤 미면사(米麵寺:白蓮寺) 삼존불을 옮겨 봉안했다. 1725년 의학(義學)이 삼존불상을 개금할 때 아미타불 몸속에서 사리(舍利) 1과와 705년(神龍 원년)에 금으로 쓴 〈화엄경〉 7권이 나왔다. 1862년(철종 13) 건물 대부분이 소실된 후 몇 차례의 중수공사가 있었고, 1956년 다시 화재가 났으나 1966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극락전·나한전·시왕전·선원·요사채 등이 있으며, 부속암자로는 묘적암·운필암·상적암 등이 있다. 경내에는 대승사목각탱화부관계문서 4매(보물 제575호), 사적비, 아미타불상에서 나온 금자 〈화엄경〉 7권, 석가모니 사리 1과 등이 소장되어 있다.
현재 철산주지스님이 몇년 전부터 경내 노후시설과 절 주변 환경을 말끔히 정비하여 사찰 환경을 많이 변모 시켰으며 선방은 선승들의 수행처로도 전국에 명성 있는 사찰이다.
특히 주지스님은 건강식품에도 관심이 높아 장뇌삼으로 경옥고를 제조하여 방문객에게 큰 사발그릇에 제공하여 맛에 놀라고 그릇 크기에 놀란다.
제조한 죽염으로 죽염치약을 만들어 방문신도들에게 보시하고 죽염 고추장, 된장을 대량으로 직접 담그고 있으며 전통가마로 다기셑과 다완은 물론 3.000여개의 옹기를 직접 구어 죽염된장을 담구어 진열한 옹기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 부처님
머위꽃
대승사 입구에 있는 장독대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뚜껑을 열어보고픈 진한 충동을 느껴보지만
출발해야 할 시간이 촉박해 아쉬운 마음으로 사진에만 담아봅니다.
전날까지 전국적으로 많은 양의 비가 내려 과연 제대로 성지순례를 할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부처님의 보살핌 탓인지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아오기 시작해 안심을 하며 떠난 성지순례길.
4호차 인솔책임자로 아무 탈없이 다녀올 수 있었음에 감사한 마음이 앞서고 간간이 무리지어 피어 있는 진달래를 비롯한 새순 돋은 나무들로 산색이 예뻤던 산길을 걸어본 하루가 참으로 감사하다.
좋은 계절에 가보고 싶어도 쉽게 갈수 없는 신비의 왕국 봉암사를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고 희양산 자락을 지키며 천년 향기 피우던 천년고찰의 모습이 다시금 아련하게 떠오른다.
조계종 특별 수도원인 봉암사에서 참선수행하시는 스님들의 기운을 느껴보기도 하고, 기둥모양의 바위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 사불암이 보이는 윤필암은 자연과 인위적인 조화가 잘 어우러지는 정말 아름다운 도량이었고, 아담하면서도 단아한 절 대승사에서는 세월을 이고 있는 빛바랜 단청을 감상하며 잠시나마 자신을 점검도 해보는 눈으로 보는 관광의 순례가 아니라 가슴으로 바라보고 느껴보는 마음여행이 된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음에 다시 한번 부처님의 크신 가피에 머리숙여 감사를 드려본다.
고운 자태로 한껏 아름다움을 과시하는 들꽃의 향연을 만끽하며 차례로 돌아본 봉암사, 윤필암, 대승사의 순례길의 우리 모두는 더 아름다워진 하루가 되었다.
화사한 꽃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 행복한 마음을 안고 돌아왔기에...
윤달맞이 삼사순례는 이렇게 나를 내려놓을 수 있는 밝은 마음과 환한 미소를 더 짓게 하는 아름답고도 행복한 순례길이었으니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당직근무의 여파로 피곤한 몸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흡족한 마음으로 경주를 향한 귀로에 오른다.
'★ 여행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탐방 (0) | 2012.08.17 |
---|---|
부처님 오신 날에 떠난 사찰 순례(묘봉암, 중암암, 백흥암, 운부암, 은해사) (0) | 2012.05.28 |
초등친구 부부와 함께한 전라도여행(둘째 날 여정) (0) | 2011.06.10 |
초등친구 부부와 함께한 전라도여행(첫째 날 여정) (0) | 2011.06.09 |
서울 명소 돌아보기(북촌 한옥마을-인사동-청계천-탑골공원-조계사) (0) | 2011.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