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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탐방 본문

★ 여행이야기

대구 근대화거리 (골목투어) 탐방

해와달^^* 2012. 8. 17. 00:08

태어나고 자란 대구를 떠나 경주에 뿌리를 내린지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버렸지만 지금도 학창시절의 벗들이 고스란히 있어 가끔씩 만나서 우정을 나누고 있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대도시의 풍광들은 어린 시절 보아왔던 추억의 거리를 빠른 속도로 기억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있다.

어릴 적 일제시대 때의 적벽돌 건물들(대구역 주변의 대구공회당, 계산성당, 제일교회 등)을 무심코 지나치며 지내왔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부터 주변의 오랜 문화에 눈이 자주 가는게 사실이다.

 

영남지역에서도 손꼽히던 대도시였던 대구 땅에 기독교가 들어와 동산병원 주변으로 계성학교와 신명학교 등 주변의 건물들과 확연히 구별이 되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들이 꽤 있었던 기억이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최근 대구광역시에서 '근대화거리'라는 이름으로 골목투어로 꾸며진 관광코스가 대구를 찾는 이들에게 좋은 반응이 있다는 소식에 대구를 찾을 때마다 한번쯤 돌아보고자 마음 먹었었지만 그때마다 산행이 우선이었던 탓에 지금껏 미루어왔었는데 오늘에야 그 원을 풀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예전 추억을 되살려가며 오래 전 희미한 기억속으로 추억여행을 떠나본다.

 

경상도지방의 큰장인 서문시장 주차장에 파킹을 하고 동산상가 육교를 건너 동산의료원 주차장을 가로질러 약간의 경사도가 있는 언덕을 올라서면 고딕 양식의 첨탑이 먼저 반겨주는 교회당 건물이 나오고 입구에 붉은 벽돌로 지어진 2층집이 시선을 끈다.

정원 입구에 '의료선교박물관'이라 씌어진 바윗돌이 있는 선교사 스윗즈 주택이다. 대구능금의 효시목임을 알려주는 안내문을 읽으며 '대구근대화거리' 탐방을 시작해 본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 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대구 근대화의 거리...

 

 

가만히 "동무생각"도 읊조리며 걸음을 옮긴다면

더욱 행복할 것 같은 청라언덕과 선교박물관...
그 곳에 또 다른 대구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의료선교박물관"은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424번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 동산의료원 내에 있지요.

 

 

소유자 역시 계명대학교이며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 25, 26호가 자리하고 있답니다.

 

 

 

 

대구 능금의 효시목의 2세목과 3세목입니다.

대구 사과의 역사를 알려주는 산증인이지요.

 

 

 

한때 대구는 우리나라 사과의 주산지로 명성이 높았는데

그 이면에는 제중원 설립자 존슨 박사가 있었습니다.

 

 

존슨 박사는 미국에서 사과나무 묘목을 들여와

대구지역 농민들에게 보급해 대구를

사과의 주산지로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때 미국에서 가져온 사과나무의 자손나무 한그루가

지금 동산에 있는 나무라고 합니다.

 

 

또한 뒤로 보이는 붉은 벽돌 구조물에 있는 것은

개원 100주년 종탑이라고 합니다.

 

 

동산의료원 초창기에 개척한 교회의 종들 중 하나라고 하는데,

전국 담장허물기의 행사로 철거된

의료원의 정문과 중문 기둥과 담장을 여기에 옮겨다 세웠답니다.

 

 

 

 

선교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선교사 스윗즈 주택입니다.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휴일에는 문을 열어놓지 않아 실내는 구경할 수가 없어서 아쉬운 마음이 들었네요.

실내에는 한국의 기독교 역사, 영남지역 기독교 역사, 동산병원 의료선교역사 등 각종 성경과 선교유물이 있고, 2층에는 구약시대 성막과 신약시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미국인 선교사 Miss Marttha switzer, H.H.Henderson, Archibad campbel 등이 살았던 주택으로 1910년 또는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였다.

붉은 벽돌로 쌓은 2층 건물로, 1층은 베란다, 거실, 응접실, 주방, 침실 등으로 되어있다.
2층은 욕실과 침실 2개가 있다.

건물 내부의 바닥은 마루장판으로 다시 깔고 붉은 벽에는 벽지를 붙였다. 지붕은 기와에서 양철로 바꾸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

 

 

 

선교사 Reiner가 살던 집으로 1910년 경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Reiner 후로 Chamness, Sawtell 등의 선교사가 살았고, 1984년 부터는 동산병원 의료원장인 H.F Moffett가 살고 있다.

남북으로 뻗은 긴 네모형으로 1층 내부에는 거실, 서재, 부엌, 식당, 계단 등이 있고, 2층에는 2개의 침실이 있다.

외부에는 나무로 된 현관과 베란다를 설치했으며, 지붕에는 2개의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이 솟아있다.


선교사 챔니스 주택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중이다.
1800년대 부터 1900년에 이르는 많은 동,서양의 의료기기가 소장되어 있어 의학의 발전상을 엿볼 수 있고 의학도들의 견학의 장이 되고 있기도 하다.

1900년 초부터 사용했던 청진기, 수술기구, 현미경, 세균배양기 등 그 당시의 의학기구들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선교사 블레어 주택(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

 

 

 

선교사인 블레어(Blair)와 라이스(Rice)가 살던 집으로 1910년 경에 지어진 건물이다.
붉은 벽돌로 지은 2층집이며, 남북 방향으로 긴 형태이고 안의 건축재료를 일부분 바꾼 것 외에는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잘 남아있다.

지붕 위엔 붉은 벽돌로 된 굴뚝이 있고 건물 안의 바닥은 나무로 된 마루바닥이다.
1층에는 베란다, 응접실, 거실, 침실, 부엌, 식당이 있고, 계단으로 연결된 2층에는 침실, 욕실 등이 있다.
창문은 위 아래로 열수 있게 되어 있으며, 현관의 베란다 윗부분에는 일광욕실이 있다.

(자료인용 : 문화재청, 대구광역시 중구청)

 

 

 

선교사 블레어 주택은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답니다.

교육, 역사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이후부터 1-6차 교육과정까지 각 시대별 교과서와 서당, 초등학교 교실을 볼수 있는 교육 자료와 3.1운동 당시의 일제의 만행과 독립운동 역사관으로 꾸며져 있고, 반지하실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합니다.

 

 

 

 

여기가 청라언덕입니다.
동무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

 


이 언덕을 찾는 이들의 가슴에

청라언덕의 노래소리가 울려 퍼지길 기원하면서...

 

 

마음 속으로 노래를 불러보니

정말 가슴속에서 가만히 퍼지네요.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옛 동산의료원 현관이었던 곳이랍니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좌측 사진부터

동산병원의 효시였던 '제중원' 사진과

위의 사진이 현관이었음을 보여주는 구.동산병원 건물과

의사 존슨이 한옥집에 미국약방이라는 간판을 달고

약을 팔던 시절의 사진입니다.

 

 

 

 

3.1운동길입니다.

 

 

 

대구 동산병원 후정,

언덕길이 시작되는 곳에서부터

동산을 넘어 90계단을 내려서는

계산성당 앞 큰 길가에 이르는 곳까지의 오솔길을

'3.1운동길'이라 부릅니다.

 

 

때는 1919년 3월 8일

조선독립만세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하던

대구 계성학교, 신명학교, 대구고보 학생들이

일본 순사들의 감시를 피해 동산병원 솔밭 오솔길을 이용하여

서문시장 큰 장터를 향해 달려갔던 애국의 혼이 서린 언덕길입니다.

 

 

현재는 동산병원 소나무숲과 오솔길이 사라졌지만

그 솔밭과 연결된 좁은 이 길은 여전히3.1운동길이라 불리워지고 있답니다.

나라를 위해 이 길을 오르던 선인들의 마음과 그날의 함성을 떠올리며

경건한 마음으로 걸어봅니다.


90계단이라고 불리기도 하며 "현진건계단"이라고도 합니다.
"운수 좋은 날", "빈처"를 쓰신 선생이 자주 다닌 길이라고 하네요.

 

 

 

청라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대구제일교회의 웅장한 모습입니다.

1994년 6월에 입당 예배를 하였다고 합니다.

 

 

 

 

제일교회 앞에서 내려다 본 1907년경 달구벌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사진 찍기  좋은 'PHOTO ZONE'이라 해서 한번 더 담아봅니다.

 

 

 

 

고딕식 벽돌조 건물로

서울,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영남지방에서는 최초로 지어진

대구계산동성당(大邱 桂山洞聖堂)

 

 

사적  제290호,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 20 (계산동 2가)

 

 

 


1886년 로베트(Robert.A.P) 신부가 경상도 지역에 천주교를 전파하다가 1897년에 현재의 계산동 성당 자리에 있던 초가집를 임시 성당으로 사용하였다. 1899년에 한식 목조 십자형의 성당을 지었으나, 다음 해에 화재로 불 타 1902년에 현재의 성당을 짓게 되었다.

설계는 로베트 신부가 하고 중국인이 공사를 맡았다고 한다. 당시 대구에서는 처음 세워진 서양식 건물로, 입구에 두 개의 종각에 우뚝 솟아 ‘뾰족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성당건축은 고딕양식이 가미된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화강석 기단 위에 붉은 벽돌을 쌓고 검은 벽돌로 고딕적인 장식을 하였다.

대구 지방에서 유일한 1900년대 성당 건축물로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이곳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집회를 가졌던 곳이고 또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한 곳이기도 합니다.

1950년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결혼식에서 당시 주례를 맞았던 허억 도지사가 식이 끝나도록 '영수 군', '정희 양'으로 반복한 실수담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일화가 있고, 또 김수환 추기경이 1951년 여기서 서품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년중 무휴로 누구에게나 탐방과 기도장소로 개방하고 있다고 하며 건물자체만으로도 문화재적인 가치가 높아 아예 대구시가 매입하여 영구보존하려는 계획이라고 합니다.

 

 

 

 

성당 내부 모습입니다.

 

기둥, 천정, 창문 등 반원 아치는

전형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경건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사진만 담고 빠져나왔네요.

 

 

 

 

약령시(藥令市)

 

 

 

중구 남성로에

한약방과 한의원, 한약도매상, 제탕원 등이 즐비하게 늘어선 약전골목.

도로를 따라 약 800m 이어지는 약전골목은

조선시대에 개설된 대구 약령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1898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가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기독교 교회인 남성정교회를 세운 곳

바로 지금의 제일교회의 자리.

 

 

 

1907년 전통과 서양 건축양식을 절충한 단층 교회당을 새로 지었고,

1933년 벽돌조 교회당을 지으면서 이름을 제일교회라고 하였고,

1937년 5층 높이의 벽돌조 종탑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벽돌 조적조 건물이기는 하나 외관구성에서 고딕적특성을 잘 나타내고,

각부 비례와 조적수법 등이 정교하여 대구지역 근대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선교사들이 근대적 의료,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던 장소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고 합니다.

지금은 제일교회 남성로 선교관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제일교회 바로 옆에 있는 약령시한의약박물관에 들러봅니다.

 

 

 

 

350년 약령시의 역사와 약전골목의 유래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전시 체험공간

.

.

.

약령시한의약문화관

 

 

 

 

3층은 약령시 역사문화존과 한의약전시존,

2층은 어린이체험존과 한방웰빙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의약박물관을 구경하고 나와 오던 길을 되돌아가며

다시 한번 담쟁이덩굴이 인상적인

제일교회를 바라보며 사진에 담아봅니다.

 

 

 

 

계산성당 정문을 빠져나와 좌측 사거리 방향으로 진행하면

도로변에 모자이크 벽화로 꾸며진

이상화선생과 서상돈 선생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모자이크 벽화를 지나면 나오는 골목 입구에는

이상화 시인의 대표작인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싯귀가 벽에 쓰여져 있네요.

 

 

 

 

골목안으로 들어가면 이상화 시인이 말년을 보냈다는

아담한 고택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 하나 건너 남산동에는 <광야>를 쓴

같은 저항시인 이육사(1904-1944)의 거처가 있다는데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고 죽었지만

이들의 소통흔적이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충분히 교류했을 법 한데...

 

 

 

 

골목 건너편에는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기치를 올렸던

서상돈 선생의 고택이

이상화선생의 고택과 이웃하고 있습니다.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었지만

경제침탈과 국권침탈에 대해

백성들을 각성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하겠지요.

 

 

 

 

중구 계산동에 복원된 서상돈 고택.

 

 

국채보상운동 관련 자료가 전시 예정이 전해지면서

함께 복원된 부근의 이상화 고택과 더불어

대구의 명소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내실에 붙어 있는 액자의 용봉인학(龍鳳麟鶴)은

상정(龍), 상화(鳳), 상백(麟), 상오(鶴).

 

 이상화선생의 4형제를 지칭하고

모두 각계에서 한 인물들을 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일제 저항 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

이상화 선생의 시향(詩香)이 남아 있는 곳...

 

 

이상화 고택(古宅)

 

 

 

 

이상화 선생은 이곳에서 1939년부터 임종 때까지

약 4년동안 거주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였다고 합니다.

 

 

 

 

이번 탐방이 근대화의 옛 역사와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좋은 기회도 되었지만 대구 역사와 거리를 걸을수 있어서 재밌고, 뜻깊은 시간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흑백 사진속에서 봤던 계산성당이나 3.1만세운동길, 선교사 주택 등을 직접 보니 더 웅장하게 느껴지고, 마음속에 깊게 새겨질 장면들의 연속이여서 너무나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그동안 대구에는 크게 흥미를 느낄 만한 관광명소가 부족하다는 인식이었는데 이번 '골목투어'는 그러한 고정관념을 일거에 불식시켜준 인상적인 시간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음 기회에는 방천시장에 있는 좋아했던 가객(歌客) '김광석거리'를 추가해서 제대로 된 투어를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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