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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부처님 오신 날에 떠난 사찰 순례(묘봉암, 중암암, 백흥암, 운부암, 은해사) 본문

★ 여행이야기

부처님 오신 날에 떠난 사찰 순례(묘봉암, 중암암, 백흥암, 운부암, 은해사)

해와달^^* 2012. 5. 28. 22:58

♠ 일   자 : 2012. 05. 27 (일)  날씨 - 맑음

♠ 어디로 : 대한불교조계종 제 10교구 본사인 팔공산 은해사와 부속암자 네군데

♠ 누구랑 : 아내와 함께...

 

 

☆ 순례기

3일간의 연휴동안 첫날인 어제는 산행을 하고 둘째 날인 오늘은 지난 2월 돌아보았던 태실봉 주변의 능선상에 있는 은해사의 말사인 암자들이 너무 괜찮아 훗날 꼭 암자순례를 해보리라 마음 먹었었는데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 아내와 함께 다녀와 보고자 차를 몰아 은해사로 향한다.

요즘 아내의 몸상태가 안 좋아보여 병원을 찾아 검사예약을 해놓은 상태지만 이미 짐작이 가는 병명이 있어 상태가 어떤지 여부가 관건인데 부디 괜찮아야 할텐데 하는 안타까움에 부처님 전에 기도라도 올려야겠기에 사찰순례에 나선 계기가 된 것이다.

산행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일이라 차를 몰고 도착한 은해사 입구에서 신분증과 신도증을 내밀고 백흥암을 찾아간다고 하니 통과시켜 준다.

은해사 앞을 지나 낯익은 도로를 따라 맨 꼭대기에 있는 묘봉암부터 돌아보고 아랫쪽으로 내려오기로 하고 깊고깊은 골짜기를 따라 나있는 구불구불한 시멘트도로를 따라 부처님을 만나러 떠나간다.

 

 

묘봉암(妙峰庵) 원통전(圓通殿)

 

 

 

묘봉암의 역사
묘봉암은 833년(흥덕왕 8)에 심지(心地)왕사께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山內庵子)이다.

그 뒤 오랫동안 관음기도처와 수행처로 전승되어 오다가 1485년(성종 16)에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중창하였고, 1780년(정조 4)에 다시 중창하였으며, 최근에 6·25사변 당시 폐사된 것을 법운(法雲)스님께서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관음기도와 신신기도처로 유명하고 과거에는 나라에 큰 일이 있거나 큰 절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은해사 대중스님들이 모두 올라오셔서 산신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지며, 산령각 옆 석간수는 불치의 병도 낳게한다는 신비의 약수로 유명하다.

 

 

묘봉암의 가람
묘봉암은 가람 구조는 법당인 원통전(圓通殿)을 중심으로 왼쪽에 요사채가 있으며, 오른쪽 뒤편에는 산령각(山靈閣)이, 원통전 아래에는 염불당(念佛堂)과 부목방(負木房)이 위치해 있다. 원통전은 과거 석굴에서 기도를 해왔던 곳으로 석굴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높이가 매우 높아 정사각형의 모양에 가까운데 이는 내부에 큰 돌이 뻗어 있어 그 아래에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하고, 왼쪽 위에 2층을 만들어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산령각은 정면, 측면 각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산신상과 함께 산신탱이 모셔져 있다. 산신은 항상 호랑이와 함께 모셔져 있는데, 산신상에 표현된 호랑이는 애교스럽고 친근감이 간다. 입밖으로 자랑스럽게 드러낸 두 개의 송곳니, 길게 뻗은 꼬리, 왕방울만한 눈이 애교스럽게 보인다. 산신탱는 백발의 수염, 벗겨진 머리, 긴 눈썹이 휘날리는 신선의 모습으로 깃털부채를 들고 호랑이와 함께 있다. 뒤에는 시주하는 동자가 그려져 있다. 염불당은 현대에 지어진 시멘트 건물로 스님들이 거주하시는 요사채이다. '염불'이란 부처를 생각한다는 것으로 기도의 한 방법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커다란 바위가 자연적으로 법당 내부로 들어와 있는 광경은 참으로 흥미롭네요.

그 바위에 단청을 하고 관세음보살상을 모신 관음기도 도량입니다.

 

 

'광대수염'

 

 

'컴프리'

 

 

은해사 산내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묘봉암을 돌아보고 이번엔 '돌구멍절'로도 불리우는 중암암을 향해 갑니다.

 

 

중암암 안내표지판

 

 

 

중암암(中巖庵)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山內庵子)이다. 834년(흥덕왕 9)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그 뒤 꾸준히 수도승들의 수행처로 이용되어 오다가, 1834년(순조 34) 우일(宇一)과 유엽(有曄)이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과 요사채·객사(客舍)가 있으며, 문화재로는 3층 석탑과 석등(石燈)이 있다. 이 중 3층 석탑은 창건 당시에 건립된 것이라고 하는데 높이 3.7m이다. 석등은 높이 1.2m의 장방형으로 장식이나 기교를 가하지 않은 특이한 석등이다. 이 밖에도 도괴된 부도 1기가 있다. 절 주변에는 삼인암(三印巖)·건들바위·장군수(將軍水) 등이 있다. 이 중 건들 바위에는 전설이 깃들여 있다. 옛날 한 승려가 참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큰 소리가 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큰 바위가 암자로 굴러 떨어지려고 하므로 급히 법당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리자 바위가 떠올라 훨씬 뒤의 안전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고 한다. 또, 장군수는 김유신(金庾信)이 17세 때 이곳에서 수련하면서 마셨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물맛이 매우 뛰어난 석간수이다.

 

 

천연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바위틈을 지나 들어가야 법당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중암암 법당

 

 

구태여 터를 넓히지 않고

주변 산세에 맞춰 가람을 일궈 만든

중암암의 뒤편에는 삼층석탑이 있고,

 

 

그 틈을 통과하기만 한다면

품은 소원이 이뤄지고 극락에 다가갈 수 있다지만,

마음에 욕심을 담았거나 욕망을 단속하지 못해

몸집만 키운 이들은 드나들지 못한다는 곳.

그 바위 틈에 붙여진 이름이 '극락굴'입니다.

 

 

중암암의 명물바위인 '삼인암(三印岩)'

 

 

만년이야 됐을 리 없겠지만,

척박한 바위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기운차게 가지를 뻗은 소나무의 나이가

족히 수백년이 넘어보입니다.

 

흔들바위를 지나 좁은 바위틈을 지나서 만나게 되는

'만년송(萬年松)'이랍니다.

 

 

여기서 굽어보는 풍경은 가슴이 탁 트일 정도로 장관입니다.

멀리 코끼리봉능선과 거조암으로 연결되는 마루금이 조망이 되네요.

 

 

스님들의 선방인 소운당(小雲堂)

 

 

부처님 오신 날 행하는 의식 중의 하나인

관불식을 준비하려고 마련해 놓은 듯 하네요.

 

 

 

참고로 관불식(灌佛式)은 부처님이 되신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날에 아기 싯다르타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 분을 목욕시켜드리는 의식이 바로 관불식입니다.

 

 

이제 두번 찾아왔지만 올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중암암을 구경하고

비구니스님들의 수도도량인 백흥암으로 향합니다.

 

 

백흥암 보화루

(앞에서보면 2층인데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1층이 되는군요.)

 

 

 

은해사(銀海寺) 백흥암(百興庵)

대한불교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산내암자이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이 절은 국사 혜철(惠哲)이 861년(경문왕 1)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절 주위에 잣나무가 많아서 송지사(松旨寺)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1546년(명종 1)에 백흥암으로 개칭하였고, 1651년(효종 2)에 중건하였으며, 1677년(숙종 3)에 중수하였다. 1730년(영조 6)에는 보화루(普化樓)를 중건하였고, 1858년(철종 9)에는 청봉(靑峰)이 영산전(靈山殿)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은 한때 수백 명이 수도하였다고 하며, 규모도 암자로서는 매우 큰 편이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極樂殿)을 중심으로 영산전·명부전(冥府殿)·문루(門樓)·산신각(山神閣)·선실(禪室)·원주실(院主室)·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로서 보물 제790호로 지정되어 있다. 극락전 안의 아미타삼존불을 받치고 있는 수미단(須彌壇)은 보물 제4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수미단은 높이 1.25m, 너비 4.13m에 5단으로 27등분하여 제작한 목조 탁자로서, 각 면마다 안상(眼象)·봉황·공작·학·용·동자·물고기·개구리·코끼리·사자·사슴 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우리나라 조각미술의 원조(元祖)라고 할 만큼 조각사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1531년(중종 26)에 간행된 법화경판(法華經板)과 이 절을 거쳐 간 24인의 고승들의 영정(影幀)이 봉안되어 있다. 이 절은 현재 비구니의 수도처로서, 안거(安居) 때에는 수십 명의 비구니들이 정진하고 있다.

 

 

오늘 사찰순례를 하면서 가장 기대하였던 곳이

바로 이곳 백흥암이었습니다.

 

백흥암이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일년에 오직 두 번,

부처님 오신 날과 백중날에만 일반에게 개방되는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절집이기 때문입니다.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銀海寺 百興庵 極樂殿)-보물 제790호

정면3칸, 측면3칸의 다포계 구조의 팔작지붕이다. 백흥암은 신라시대에 개창되었으며, 극락전은 조선 초기나 늦어도 1546년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포는 내외 모두 3출목으로 칠포작 구성이고 창방과 평방이 갖추어지고 공포가 주두위에서 두공으로 촘촘히 조성되어 있다. 첨차와 제공의 끝은 그 운두를 2등분하여 윗면은 직절하고 아랫면은 둥글게 굴려 고식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들 첨차의 길이는 짧으나 운두가 높아 공포의 키가 훤칠한데 공간포는 전면에서 2조씩, 측면에서는 1조씩 두었다. 내부천장은 층단을 두어 소란(小欄)반자로 꾸몄다. 금단청과 벽화 등도 뛰어난 작품이며, 특히 내부 어간 뒤편에 있는 수미단은 특출한 것으로 일찍부터 주목되어 건물과 별도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최고의 불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銀海寺百興庵極樂殿須彌壇)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銀海寺百興庵極樂殿須彌壇) - 보물 제486호
백흥암 극락전 내부의 주불삼존을 안치한, 높이 1.25m, 너비 4.13m 조선시대의 불단이다. 수미단이란 불상을 안치한 일종의 대좌와 같은 형식으로, 불당내의 닺집과 더불어 장엄한 불세계를 묘사한 것이다. 수미산이라는 불교세계의 중심을 밑에 두고 앉아 있는 불타의 보다 높은 격을 상징화시켜, 수미단을 불상대좌로서 표현한 것이다. 이 백흥암 수미단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지금은 아미타삼존(阿彌陀三尊)이 나란히 앉아 있다. 후불상단탱화(後佛上段幀畵)를 벽면 앞에 불단이 있어서 바라다보는데 안정감이 높다. 불단은 장방형이고 앞과 좌우옆면을 삼단(三段)으로 구획하고 아래에 받침대를 두었다. 받침대는 전면(前面)을 다섯 간으로 나누고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내구(內區)에 너브러진 화훼(花卉)를 도드라지게 새겼다.

이 백흥암 불단은 그 세부장식의 화려함과 투각기법(透刻技法) 등에서 한층 돋보여, 조선시대의 여러 불단 중 가장 으뜸으로 평가되고 있다.

 

요사채 앞 마당에 피어있는 '매발톱'

 

 

빛바랜 보화루 건물이 오히려 정감이 간다.

운부암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주는 듯...

 

 

 

운부암 (雲浮庵)

운부암은 신라 선덕여왕 11년(서기 711)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 지세가 연꽃모양을 하고 있는 형국이라하여 연화지라 일컬어지는 명당이며 예전에는 팔공산 주인이 이곳에서 난다고 하였을 정도로 지기가 출중한 곳으로 알려졌다 한다. 성철스님이 수행하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도량 옆 뜰에는 의상대사가 창건 당시 짚고 온 지팡이를 땅에 꽂으니 즉시 살아나 푸른잎이 돗아 났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지금도 그 나무가 살아 있다고 한다. 운부암은 창건 이래 근세 한국의 조사스님들의 근본 수행처로 전해지고 있으며 당시에는 남한의 2대 중심선원을 선산 도리사와 팔공산 운부암을 꼽았다고 한다. 밝혀진 바로는 경허, 만공선사로 부터 용산, 운봉, 경봉, 향곡, 한암, 팔봉, 청담, 성철스님 등 무수한 고승대덕들의 수행처로 규모와 위용을 떨쳤던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맥이 잠시 끊겼다가 법타(法陀)스님이 은해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48년간의 공백을 깨고 1998년 동안거부터 선원장인 불산스님이 개원해 13명의 납자가 정진에 몰두하는 도량으로 거듭나고 있다.

 

 

운부암 아래에 있는 연지(蓮池)와 달마조사상

 

 

은해사운부암청동보살좌상 (銀海寺雲浮庵靑銅菩薩坐像)

 

 

 

높이 102㎝. 보물 제514호. 화려한 보관 및 복잡한 장신구가 돋보이는 아담한 크기의 이 보살상은 안정된 자세, 눈꼬리가 올라간 갸름한 얼굴 등 경상북도지방의 1395년작인 영덕장륙사건칠보살좌상(盈德莊陸寺乾漆菩薩坐像, 보물 제993호)·문경대승사금동보살좌상(보물 제991호)·상주갑장사금동보살좌상(호림박물관 소장) 등과 유사한 양식을 보여주는 보살상이다.

심지어 크기라든가 손모양도 거의 같아 이들은 지방적인 유파나 특색을 암시하여준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 한편, 띠주름식의 삼도(三道), W자의 가슴 아래 수평으로 입은 내의의 표현, 다리 위로 흐르는 대칭된 옷주름 등은 장륙사 건칠보살좌상보다는 진전되고, 대승사나 갑장사의 금동보살좌상보다는 앞 시대의 특징을 보이는 15세기 중엽경의 단엄한 보살상이다.

조선 초에 대두된 감투모양의 높은 보관 및 장신구는 1447년작으로 추정하는 대구파계사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992호)과 비교되는 것으로, 자료가 희귀한 조선 초기의 우수한 보살상으로 높이 평가된다.

 

 

은해사 운부암 원통전

 

 

백흥암과 더불어 암자 치고는 큰 규모인데다

문외한이 보아도 명당임을 알아볼 수 있는 절집입니다.

 

 

은해사 보화루

 

 

은해사 극락보전

(내일의 석탄일 행사준비로 여념이 없네요)

 

 

 

은해사(銀海寺)는 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팔공산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대구의 동화사와 함께 팔공산을 대표하는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신라 헌덕왕 원년(809년)에 혜철국사가 창건하여 해안사(海眼寺)라 이름하였다. 그뒤 중창을 거듭하다 1546년에 천교(天敎)가 지금의 장소로 법당을 옮겨 새로 절을 지었고, 그때 법당과 비석을 건립하여 인종의 태실(胎室)을 봉하고 은해사(銀海寺)로 이름을 고쳤다.
은해사는 진입로의 풍광이 아름답다. 산문같이 생긴 일주문을 지나면 걸어 보행자용 길과 차량용 길이 구분되어 있는데, 양쪽 길 모두 경치가 좋다. 특히 보행자 길을 따라가면 보화루 앞의 아름다운 계곡을 감상할 수 있다. 나올 때는 차량용 길로 걸어 나와도 무방하다.
사찰 자체도 전형적인 '口'자 가람 배치를 하고 있는 편안한 분위기의 사찰이다.
은해사는 주변 암자가 많이 있는데, 국보급 문화재들이 아직도 그대로 암자에 보관되고 있어 본사에는 이렇다할 문화재가 없다. 은해사 암자들의 문화재로는 거조암 영산전(국보 제14호), 백흥암 극락전(보물 제790호)과 수미단(보물 제486호), 운부암 청동보살좌상(보물 제514호) 등의 국보급 문화재가 있다. 이외에도 백홍암의 감로왕도와 아미타삼존도도 유명하다.

 

 

극락보전의 아미타부처님

 

 

은해사 지장전(地藏殿)

 

 

 

지장전의 편액은 1955년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7일간 3000배를 참배한 후 손가락을 태워 서원하는 이른바 '연지연향(燃指燃香)'으로 불법의 정진을 발원했다는 동곡 일타스님이 남긴 것이라 합니다.

 

 

지장전에 모셔져 있는 '지장보살'

 

 

지장전 앞 뜰에는 '쑥부쟁이'가 만발했네요.

 

 

지장전 옆에 있는 요사체

(출입금지 구역입니다.)

 

 

 

부처님오신 날을 맞아 사찰순례에 나선 오늘 컨디션이 좋지않은 아내와 함께 영천 은해사를 찾아 부속암자를 돌아보며 부처님 전에 삼배로 예를 올리고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고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새기고 열심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화훼단지에 들러 화분 하나 사달라는 아내의 말에 예쁜 꽃화분 사들고 귀가길에 오른다. 다섯 군데의 사암(寺菴)을 돌며 같은 내용의 발원을 하는 마음은 그리 편치만은 않지만 부처님께서 반드시 들어주시리라는 희망을 안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한 아들과 여자친구가 기다리는 집으로 서둘러 달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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