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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속 염원으로만 남아있던 3대 관음기도 성지 낙가산 보문사... 그리고 전등사 본문

★ 여행이야기

가슴속 염원으로만 남아있던 3대 관음기도 성지 낙가산 보문사... 그리고 전등사

해와달^^* 2016. 7. 5. 15:27

석모도 종주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내려와 함께 걸었던 산우들과 어울려 맛난 점심식사를 가진 뒤 버스에 올라타고 해수관음성지인 보문사를 찾아간다.

우리나라 3대 해수관음 기도도량 중 하나로 꼽히는 보문사는 아직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 늘 마음속 염원으로만 남아 있었는데 오늘에야 찾게 되었으니 그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그동안 나머지 두 군데의 기도도량은 몇 번씩 다녀왔기에 마지막 남은 이곳 보문사를 찾기를 희망하고 있던 차에 산행을 겸한 방문이 되니 눈썹바위 아래 자리잡고 있는 마애불을 찾아 간절한 마음으로 발원을 하기로 한다. 

 

 

해수관음 성지 보문사

 

한국의 해수관음 성지는 예로부터

남해 보리암, 양양 낙산사, 강화 보문사, 여수 항일암을 꼽아왔습니다.
관음성지는 "관세음보살님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란 뜻으로

이곳에서 기도발원을 하게 되면 그 어느 곳 보다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를 잘 받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함께 한 산님들과 어울려 보문사 경내로 들어서지만

정해진 시간안에 버스로 돌아와야 하는 까닭에

눈썹바위까지 다녀오려면 서둘러야 했네요.



보문사(普門寺)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로서, 우리 나라 3대 관음영지(觀音靈地) 중의 한 곳이다. 이 절의 창건에는 다음과 같은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전한다.

635년(선덕여왕 4) 4월, 삼산면에 살던 한 어부가 바다 속에 그물을 던졌더니 인형 비슷한 돌덩이 22개가 함께 올라왔다. 실망한 어부는 돌덩이들을 즉시 바다로 던져 버리고 다시 그물을 쳤지만 역시 건져 올린 것은 돌덩이였으므로 다시 바다에 던졌다.

그날 밤, 어부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귀중한 것을 바다에 두 번씩이나 던졌다고 책망하면서, 내일 다시 돌덩이를 건지거든 명산에 잘 봉안해 줄 것을 당부하였다. 다음날 22개의 돌덩이를 건져 올린 어부는 노승이 일러준 대로 낙가산으로 이들을 옮겼는데, 현재의 석굴 부근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돌이 무거워져서 더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으므로 “바로 이곳이 영장(靈場)이구나.” 하고는 굴 안에 단(壇)을 모아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신라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고려 초기에 금강산 보덕굴(普德窟)에서 관음진신(觀音眞身)을 친견한 회정(懷正)이 이곳에 와서 불상을 살펴보니, 가운데 좌상은 석가모니불, 좌보처는 미륵보살, 우보처는 제화갈라보살이었고, 나머지는 18나한상과 송자관음이었다. 회정은 이 22존 중 삼존불과 18나한은 굴 속에 모시고 송자관음은 따로 관음전을 지어서 봉안한 다음 이 절을 낙가산 보문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의 역사는 사찰의 격에 비하여 자세히 전하지 않으며, 조선시대 후기부터의 역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1812년(순조 12)에는 이 절의 승려들이 홍봉장(洪鳳章)의 도움을 받아 중건하였고, 1867년(고종 4)에는 경산(京山)이 석굴 안에 처마를 이어 나한전을 건조하였으며, 1893년(고종 30)에는 명성왕후의 전교로 요사와 객실을 중건하였다.

1911년 일제가 30본·말사를 제정하면서 전등사 말사가 되었다. 1918년에 대원(大圓)이 관음전을 중수하였고, 1932년에는 주지 배선주(裵善周)가 객실 7칸을 새로 지었으며, 1935년에는 나한전을 중창하였다. 그 뒤 관음전을 중건하고 대범종을 조성하였으며, 1976년 범종각과 요사를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대방(大房)·종각·석실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석실 굴 안에는 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굴 입구에는 세 개의 홍예문을 설치하였고, 동굴 안에는 반원형 좌대를 마련하고 탱주(撐柱)를 설치하였으며, 탱주 사이에 21개 소의 감실이 있어 석불을 안치하였다.

이 밖에 이 절에는 마애석불좌상과 천인대(千人臺)가 있다. 마애석불좌상은 1928년에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의 승려인 이화응(李華應)이 보문사 주지 배선주와 함께 조각한 것으로, 높이 9.2m, 폭 3.3m이다. 석불좌상의 상부에는 거대한 눈썹바위가 있고, 좌측에는 비명(碑銘)이 있으며, 불상 앞에는 소규모의 석등이 있다. 이 석불과 석굴에서 기도를 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하여 찾는 여인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다.

또 천인대는 길이 40m, 폭 5m의 큰 바위이다. 이 절의 창건 당시 서역(西域)의 고승이 이 천인대에 불상을 모시고 날아왔다는 전설이 있다. 그 뒤 이 바위는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바위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여 천인대라고 명명하였다. 1994년 10월 대한불교조계종 직영 사찰이 되었다. (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오백나한


천인대는 길이 40m,폭5m의 큰 바위로

창건 이후로 법회 때 설법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그 크기가 넓어서 천명이 앉을 수 있다하여

"천인대"라 이름 붙여졌습니다.


오백나한은 2009년 와불전과 함께 천인대에 조성되었습니다.


진신사리가 봉안된 33관음보탑을

중앙에 두고 오백나한이 감싸는 형상입니다.
나한은 부처님의 제자로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를 말하며

해탈하여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보문사의 오백나한상은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나한님의 좌대에는 봉안에 동참하신 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보문사 와불전



와불전은 오백나한과 함께 천인대에 조성된 전각입니다.
열반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모습을 자연석에 그대로 조각하여 모셨으며,

전체 신장 10m, 열반대는 12m로 그 규모가 큽니다.
전각 내부는 부처님 뒤로 공간이 있어 주위를 돌면서 참배를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누워 계신 모습과 손의 모양, 불의(佛衣)의 주름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고,

운양으로 장식된 열반대는 구름의 모양이 수려하고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보문사 석실



신라 선덕여왕 4년(635)에 회정대사가 처음 건립하고

조선 순조 12년(1812)에 다시 고쳐 지은 석굴사원입니다.

단연 보문사의 자랑이지요.


일명 나한전이라고도 하는 이 석굴은 천연동굴을 이용하여

입구에 3개의 홍예문을 우아하게 만들어 놓았답니다.


동굴 안에 불상들을 모셔 놓은 감실을 설치하여

석가모니불을 비롯한 미륵,보살과 나한상을 모셔 놓았는데

이들 석불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어떤 어부가 고기잡이 그물에 걸린 돌덩이를

꿈에서 본 대로 모셨더니 부처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눈썹바위 아래에 모셔져 있는 마애관음보살 부처님을 알현하기 위해

대웅전 옆으로 나있는 419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올라섭니다.

 


꽤나 가파른 길이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다녀와야 하기에 쉼없이 올라서니 산행을 마치고

갈아 입었던 등산복이 금새 흥건해지는 것 같습니다.


마애관음보살 부처님께 염원을 모아 발원공양을 하고자

가는 길이니 땀으로 범벅이 된들 어떻겠습니까...

 


줄줄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바쁜 걸음 이어가니 용왕단을 만나게 됩니다.


용왕단에는 각자의 소원을 적어

조그만 유리병에 넣어 매달아 놓았네요.

 


누구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 또한 소원이 있지요.


마음속에 간직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기도...

그 기도를 위하여 높은 언덕으로 오르는 중이랍니다.

 

 

강화 보문사 마애석불좌상(江華 普門寺 磨崖石佛坐像)



마애관세음보살좌상은

금강산의 표훈사 주지 이화응스님과 보문사 주지 배선주 스님이

1928년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암벽에 조각한 것입니다.



간절한 염원을 담아 초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발원합니다.


염원이랄게 따로 있겠습니까?


그저 아이들 하고자 하는 일 잘 되게 해달라는 것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 건강하게 해주십사 하는거지요.



우리나라의 3대 관음성지 중 한 곳인 석모도 보문사...



관세음보살을 일심으로 염불하여 현세의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영험을 얻고자 하고, 관세음보살은 광세음보살(光世音菩薩)·관세음자재보살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관음보살이라고 부릅니다.
일반 보살이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겠다는 서원을 가지는 데 대하여, 관음보살은 특히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서원으로 하는 보살이지요.

이 보살에 대해서는 방대한 대승불교의 여러 경전 속에 거의 들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할 만큼 널리 나타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근본도량은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이며, 중국은 경치가 좋은 주산열도(舟山列島)의 보타도(補陀島) 조음동(潮音洞)이 관음성지라 합니다.

바다가 없는 티베트에서는 키추(Kichu)강을 바다로 가정하고 강 유역에 있는 라사(Lhasa, 拉薩)를 보타낙가로 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의 3대 관음도량은 모두 바다에 접하여 있으며,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서해의 보문사, 남해의 보리암을 3대 관음성지로 하고 있답니다.

 

 

마애석불에서 내려다 본 보문사 전경입니다.

 

 

보문사 큰 법당인 극락보전.

 

 

극락보전(極樂寶殿)



보문사의 중심전각인 극락보전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을 주불(主佛)로 모시고

좌우 협시로 대세지보살,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습니다.

 


범종각


 

1975년에 주조한 범종은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것으로

종머리에는 꿈틀거리는 용이 양각되어 있고

선녀의 비천상과 연화 무늬가 있어 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답니다.

 

 

보문사 경내에서 올려다 본 눈썹바위.


그 위에는 산행하면서 만났던 휀스가 보이네요.

 

 

군 지정보호수로 관리되고 있는 느티나무.

수령은 약 290년이라고 하는군요.

 


보문사 향나무


보문사 석실 앞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이 향나무는

밑동 지름이 2.1m이며 높이 1.2m, 부위의 둘레가 3.2m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나무의 생긴 모습이 마치 용트림을 하고 있는 듯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1.7m 높이에서 원 줄기는 동서 양쪽으로 갈라졌는데

동쪽 것은 둘레가 1.3m이고, 서쪽 것은 둘레가 1.5m이다.
6,25 동란 중에 나무가 죽은 것 같이 보이다가

3년 후에 다시 소생하였다고 합니다.




보문사 멧돌


신라 선덕여왕 때(635) 건립한 보문사에는

나한상을 모신 보문동천으로 유명합니다.
한때는 보문사 승려와 수도사들이 300명에 이르렀다고 하는 데

이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 때 사용했던 멧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하는군요.
보문사 멧돌은 크기가 지름 69Cm,두께 20Cm로

일반용 맷돌보다 두 배 정도 큰 화강암 멧돌입니다.



와불전(臥佛殿)



법고와 목어, 운판이 있는 법음루.




시간의 제약이 있어 그리 길지 않은 보문사 탐방이었지만 진심을 담아 부처님께 발원을 하고 경내를 짧게나마 두루 돌아보고 버스에 몸을 싣고 석모도 선착장으로 달려가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차량들과 승선을 한후 강화 본섬으로 향한다.





해변에 대기하고 있다가 배가 출항을 시작하면

새우깡을 얻어 먹기 위해 일제히 날아오르는 갈매기떼들...

습관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초롱꽃'



'비비추'



삼랑성의 남문인 '종해루(宗海樓)'




삼랑성 (남한 인천 산성)  [三郞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사적 제130호. 둘레 약 1㎞.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 한다.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성벽은 거친 할석(割石)으로 축조되어 있다. 1259년(고종 46)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고종은 왕업을 연장하기 위해 성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마니산(摩尼山)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1660년(현종 1) 삼랑성 안에 새로 사고를 짓고 옮겨놓았다. 이를 정족산사고라 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명명했다. 1764년 다시금 성을 중수했다. 1866년(고종 3)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친 병인양요의 승첩지로도 유명하며, 성안에는 양헌수의 승전비가 있다.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종해루를 세웠다.





전등사 보호수(600년 된 은행나무)




조선시대 말기 불교 탄압이 심해 스님들은 국가의 노역에 불려나가거나 절의 특산물은 나라에 바쳐야했다. 수령이 600년이나 되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풍년이 들어야 열가마니인데 스무 가마를 바치라며 독촉이 심해 주지스님은 백련사의 추송선사를 모셔와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구경하던 포졸이 스님의 기도를 비웃자 한 쪽 눈이 멀어버렸다. “남섬부주 해동 조선국 강화도 전등사에서 3일 기도를 지성 봉행하여, 두 그루 은행나무에 열매가 맺히지 않게 해 주기를 축원 하나이다”라고 기도했다. 그러자 열매가 우수수 떨어져 버리더니 그 후로는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전등사 윤장대(輪藏臺)




윤장대(輪藏臺)란 책장의 일종으로 경전을 넣고 중심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에 의지하여 원형 또는 다각형의 나무장을 올린 뒤 여기에 경전을 넣고 손잡이로 돌릴 수 있도록 만든다.
경전은 경장뿐 아니라 율과 논,여러 고승들의 장소도 함께 넣어 둔다.
또한 불도를 믿으려 하나 글을 알지 못하거나 불경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었으며 한 번 돌리면 경전을 한 번 읽은 것과 공덕이 같다고 한다.
더불어 경전을 넣고 돌리면서 소원을 빌거나 소원을 써서 윤장대 안에 넣고 돌리는 등 소원을 빌 때 사용한다.



'홑왕원추리'



'산수국'



5년전 전등사를 찾은 그때처럼 포즈를 잡아봅니다.



전등사 대웅전



보물 제178호로 지정된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 특히, 건물 내부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용가(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내부에 있는 유물로는 석가여래 삼존과 1880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에서 개판한<법화경>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현재의 건물은 1621년(광해군 13)에 지은 정면 3칸, 측면 3칸 형식의 목조 건물이다. 정면 3칸은 기둥과 기둥 사이를 같은 길이로 나누어 빗살문을 단 형식이다. 좌우 옆면은 벽이나 앞 1칸에만 외짝으로 문이 있다.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퉁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 끝이 들리도록 했다.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준다.



대웅전 내부의 모습입니다.





전등사의 명물인 노거수(老巨樹) 210년 된 느티나무.



600년된 아래쪽의 은행나무 곁에는

507년 된 또다른 보호수인 은행나무가 자리하고 있네요.





'황금달맞이꽃'



'낮달맞이꽃'




포항까지의 먼 여정에 도로가 정체되기 전에 출발하기 위해 전등사 경내 이곳저곳 속속들이 구경을 할수 없음이 아쉽지만 그나마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기에 조금은 익숙해진 풍경들인데다 사진에 많이 담아 둔게 있어서 망설임없이 전등사를 빠져나와 기꺼운 마음으로 귀로에 오를 수 있었다.

또 언제 이곳을 찾을 기회가 올지 모르겠지만 인연이 된다면 재회를 할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달리는 버스 좌석 깊숙이 몸을 누이면서 눈썹바위 아래에 정좌를 하고 서해바다를 응시하고 계시던 마애관세음보살님의 영험함을 기대하면서 지그시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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