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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선도산을 넘어 옥녀봉 주변 한바퀴... 본문

◈ 산행이야기/☆ 2008년도 산행

선도산을 넘어 옥녀봉 주변 한바퀴...

해와달^^* 2008. 8. 7. 13:36

언      제 : 2008. 08. 06 (수) 맑음

누 구 랑? : 가끔씩 불어주는 바람과 함께

어 디 로? : 경주 선도산 - 옥녀봉 - 동국대 뒷산 - 금장대

소요시간 :  4시간 30분 (들꽃이랑 데이트하며...)

 

 

요즘 근무형태 변경으로 인해 자투리 시간이 많아 집에 혼자 있기도 지루하고 좋아하는 산이나 실컷 찾아보기로 하고 오늘도 배낭 들쳐메고 길을 나선다.

고유가 시대라 원거리산행이 조금은 자제되는 시점이라 또한 주말에 산행이 잡혀 있으니 가까운 곳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가볍게 다녀오기로 마음먹는다.

경주교 둔치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300번 좌석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 태종무열왕릉이 있는 서악에 내려 선도동주민센터가 있는 도로로 진입하여 도로 끝까지 올라가면 선도산 등산로를 알리는 입간판이 나타난다.

길은 좌우로 열려 있는데 어느 곳으로 진행해도 선도산으로 오를수 있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맨 끝지점에 외딴 가옥이 있는데 좌측 산길로 접어드는 곳에 등산로가 열려있다. 오늘은 유적답사도 겸한 산행이라 오늘은 우측길로 접어들어 서악리삼층석탑부터 구경하고 왕릉 4기를 들러본 후 선도산으로 향한다. 등로는 경운기도 다닐만한 수준이라 길 잃을 염려는 눈 씻고봐도 없을테고 선도산 이후 내리막길과 충효동을 넘어 옥녀봉 오르는 길 역시 설명대로 따른다면 길 이어가는데 문제는 없으니 이후의 등로는 사진으로 갈음하고자 한다.

무더운 여름날 간간이 불어주는 청량제같은 바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느긋한 마음으로 신라 천년의 향기를 음미하며 홀로 걷는 평일 오후의 발걸음이 마냥 가볍기만 하다. 들꽃과의 데이트 또한 설레임과 가벼운 흥분의 연속이어서 더위도 잊은 채... ^^*

 

 

♠ 사진으로 보는 산행기 ♠

 

<산행 경로>

 

<선도산 개요>

경주 중심가에서 해가 떨어지는 쪽을 바라보면 서천을 끼고 펼쳐진 탑정동 일대의 두드리 들을 지나 불쑥 솟은 산봉우리들이 보인다. 그 산들 가운데 제법 높은 산, 뾰족한 삼각형이지만 둥그런 곡선을 한 봉우리를 한 산이 있다. 그 산의 정상 바로 아래쪽을 쳐다보면 서천 건너편의 도심지에서도 마애불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라보며 경주 시청이나 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바로 서악, 선도산이다. 높이는 380미터에 지나지 않지만 신라 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 선도산 성모 사소(娑蘇)의 사당이 있는 산이다.

선도산 기슭에는 많은 사적(寺蹟)이 있으며 영경사지(永敬寺址), 애공사지(哀公寺址)가 있고 산정에는 높이 7m의 선도산 불적(佛蹟)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대마애삼존불(보물 62호)이 있다.
또 선도산 주변에는 고분이 많다. 동면의 남쪽에는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하여 김인문(金仁問)과 김양(金陽)의 무덤이 있고 태종무열왕릉과 같은 직선상에는 일렬로 4기의 고분이 있어 태종가(太宗家)의 가족묘역으로 추측된다. 이들 고분군의 북쪽 서악서원의 뒤쪽 산 허리에 또 일군의 고분군이 있는데 진흥왕릉,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이라고 전하고 있으나 능묘의 양식이나 위치, 그리고 사실 등으로 미루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태종무열왕릉의 북쪽 대구로 통하는 국도변에서 조금 들어간 곳에 서악서원이 있다. 서악서원은 사액서원이며 홍규공 설총, 개국공 김유신, 문창후 최치원을 위한 서원이다. 선도산의 서면, 애공사지의 서쪽에 율령정치의 실시, 연호의 사용, 불교를 공인하여 신라의 문화사에 새로운 장을 펼치게 한 법흥왕릉이 있다.

 

▲ 선도산 등산로 입구

 

좌,우측 어느 곳으로 가도 무방하고 원점회귀가 가능한 코스라 경주 시민은 마실 다니듯 올라가는 산이다.

 

▲ 경주 서악리 삼층석탑(보물 제65호)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에 속하는 탑으로, 문성왕릉과 헌안왕릉 앞에 있으며  모전탑은 전탑(전탑:흙으로 구운 벽돌로 쌓은 탑)을 모방한 것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것을 이른다.

 

석탑에서 몇 십 미터만 오르면 커다란 봉분의 문성왕릉이 있다.이 왕릉은 다른 왕릉의 봉분에 비해서 그리 크지는 않다. 봉분 앞의 안내판과 표지석을 보아야만 어느 왕의 능인지를 알 수 있으며, 아래 사진으로 보는 바와 같이 봉분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그저 평범한 무덤이다.

다만, 이 곳의 4기의 왕릉 중에서 문성왕릉과 진지왕릉이 똑같이 사적 178호로 함께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명도 신라진지문성왕릉으로 명명되어 있다.

문화재청 내용이 너무 헷갈려서 이해가 되질 않아서 왕릉 앞의 안내판 내용을 인용 해본다.

 

▲ 신라 제46대 문성왕릉(사적 제178호)

 

이 능은 신라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김경응)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헌안왕릉과 함께 선도산의 남쪽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능의 지름은 20.6m, 높이는 5.5.m이다.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여 나라를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으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진흥왕릉고(新羅眞興王陵考)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진지·문성·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 신라 제47대 헌안왕릉(사적 제179호)

 

문성왕릉에서 조금 우측으로 가면 조선시대의 무덤이 한 기 보이고, 바로 그 우측에 헌안왕릉이 있습니다. 단지, 표지석과 안내판을 보고서야 알 수 있으며, 뒤에 자료를 만들면서도 4기의 왕릉이 비슷비슷해서 사진으로는 구별도 쉽지 않아서 봉분 주변을 자세히 확인해 보고서야 겨우 구분이 가능하네요.

신라 47대 헌안왕(憲安王, 재위 857∼861)의 무덤이다. 헌안왕은 본명이 김의정(金誼靖 혹은 김우정(金祐靖))으로,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다. 재위기간 동안 특별한 치적은 없으나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는데 힘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61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안(憲安)이라 하고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공작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헌안왕릉에서 우측으로 조금 더 가면 2기의 왕릉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앞에 능이 진지왕릉이고, 뒤에 있는 능이 진흥왕릉이다.

4기의 능이 다들 고만 고만하고 봉분 밖에는 볼 것이 없어서 사진 몇 장씩만 찍고 선도산 정상을 향하여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긴다.

 

▲ 신라 제25대 진지왕릉(사적 제178호)

 

이 능은 신라 제25대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심사륜/김금륜)이 모셔진 곳이다. 밑둘레 53m, 높이 3m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 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지왕은 법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知道夫人)이다.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 신라 제24대 진흥왕릉(사적 제177호)

 

 신라 24대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무덤이다. 진흥왕은 본명이 삼맥종(三麥宗)이며, 법흥왕의 아우 갈문왕 입종(立宗)의 아들로서 왕비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다. 진흥왕은 신라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왕으로 기록되며, 스스로 법운(法雲)이라 칭할 정도로 불교에 의지하였다.

진흥왕은 지증왕의 손자로서 고구려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아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졌다.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유역을 확보하였고, 함흥평야까지 진출하여 신라 역사상 최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 점령지에 척경비를 세웠다.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으며, 신라 최대의 절인 황룡사를 세웠다. 또한 삼국통일의 중추세력인 화랑도를 창설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576년 8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진흥(眞興)이라 하고,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했다고 한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진흥왕릉은 법흥왕릉과 함께 애공사 북봉에 있었다는 것인데, 현재 전하고 있는 법흥왕릉과 진흥왕릉은 선도산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편에 2㎞ 이상 떨어져 있어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이 능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삼국시대 신라 왕릉으로서는 규모도 너무 작은 편이다. 따라서 진흥왕릉은 이 능이 아니라 무열왕릉 뒤에 도열한 4기의 대형 고분 가운데 위에서 두 번째 고분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높이 5.8m, 지름 20m의 원형 봉토무덤으로 된 이 무덤은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진지왕릉 바로 우측에 쌍릉처럼 있는 봉분이 진흥왕릉이며, 진지왕릉 보다는 지형적으로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 곳에 밀집해 있는 4기의 왕릉을 돌아 보면서 다른 왕릉은 몰라도 맨 마지막에 있는 진흥왕릉은 다른 3기의 왕릉에 비해서 크고 멋질줄 알았더니 4기의 왕릉이 거의 쌍둥이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곳에 있는 4기의 왕릉을 발굴하거나 지석이 발견되지 않은 한 누구의 왕릉이라고 확정적으로 단언은 할 수 없으나 그 유명한 진흥왕의 능이 봉분도 작고 아무런 부속물도 없이 초라함에 대해서 과연 이 능이 진흥왕릉일까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 뚝갈

 

▲ 뱀딸기

 

▲ 골등골나물

 

▲ 선도산 오름길에서 본 벽도산

 

▲ 술패랭이

 

▲ 이질풀

 

▲ 대나무 터널

 

▲ 선도산 마애삼존불(보물 62호)

 

<선도산성모설화>

경주의 서산 선도산성모가 불사(佛事)를 도와준 감응(感應)의 이적에 관한 설화. 신이담(神異譚)에 속한다. ≪삼국유사≫ 권5 감통편(感通篇)에 ‘선도성모수희불사(仙桃聖母隨喜佛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진평왕 때 안흥사(安興寺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 있었던 절)의 여승 지혜(智惠)가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하였으나 힘이 모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선도산의 성모가 나타나 불전 수리를 기특한 일이라고 하면서 “내 자리 밑에서 금 열 근을 꺼내 쓰라.”고 하였다. 다음날 지혜가 무리를 데리고 신사(神祠)의 자리 밑을 파 보니 황금 160냥이 나왔다. 이로써 불전 수리는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선도산성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딸로 이름을 사소(娑蘇)라 하였는데 일찍이 신선술(神仙術)을 배워 신라에 와 머물렀다. 아버지인 황제(皇帝)가 솔개(독수리) 발에 편지를 매어 딸에게 보냈는데, 그 편지에 이르기를 “이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삼으라.”고 하였다.
사소가 그대로 하였더니 솔개가 선도산에 앉았으므로 사소는 그곳의 지선(地仙)이 되었다. 이로써 산 이름을 서연산(西鳶山)이라 하였다. 그 뒤 선도산성모는 오랫동안 이 산에 살면서 나라를 지켰는데 그 동안 신령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 삼사(三祠)의 하나로 삼고 차례를 망제(望帝)의 위에 두었다.
신령스러운 일 중에는 신라 54대 경명왕이 매 사냥을 즐기다가 매를 잃고 선도산성모에게 기원하여 되찾은 일이 있으며, 또 다른 일로는 선도산성모가 처음 진한(辰韓)에 와서 아들을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 신라 혁거세왕과 알영(閼英)의 두 성인을 말함일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계룡(鷄龍)이나 계림(鷄林) 등의 지명도 닭은 원래 서방(西方)에 속하므로 서악(西岳), 즉 선도산과 관계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이 일찍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그를 접대한 왕보(王螺)는 김부식에게 우신관(佑神館)에 모셔 놓은 여신상을 가리키며 “이 상은 귀국의 신인데 누구인지 알겠는가?”고 묻자, 김부식이 대답하기를 “옛날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으로 가 아들을 낳아 해동(海東)의 시조가 되었으며 그 여인은 지선(地仙)이 되어 선도산에 있는데 이는 그녀의 상이다.”고 대답하였다.
한편, ≪삼국유사≫에서 일연(一然)은 다음과 같은 찬시를 지었다. “서연산에 머문 지 몇 십 년이 지났는고, 천제녀(天帝女)를 불러 신선의 옷을 짰도다, 장생술(長生術)도 영이함이 없지 않았는데, 부처를 뵙고 옥황(玉皇)이 되었도다(來宅西鳶幾十霜 招呼帝子織霓裳 長生未必無生異 故謁金仙作玉皇).” 이 설화에서는 고대의 산신 신앙(山神信仰)에 불교 사상과 신선 사상이 모순 없이 융합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 선도산 성모사에서 바라본 경주남산

 

▲ 경주 시내 전경

 

▲ 풀협죽도

 

▲ 시계꽃

 

 

 

▲ 국립공원 선도산(390m) 정상 - 경주산악회에서 세웠네요.

 

▲ 며느리밑씻개

 

▲ 탑꽃

 

 ▲ 산짚신나물

 

▲ 우산버섯

 

▲ 내림길에 건너다 본 옥녀봉

 

선도산에서 내려와 충효로를 건너 앞에 보이는 대우아파트 뒤에 있는 에덴아파트 우측 옆으로 옥녀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열려있다.

 

▲ 금불초

 

▲ 골등골나물

 

 

 ▲ 벌노랑이

 

▲ 미국자리공

 

▲ 사위질빵

 

▲ 옥녀봉 정상에서 본 좌측의 선도산과  바로 뒤의 벽도산, 우측 멀리 보이는 단석산

 

▲ 옥녀봉에서 본 경주의 북쪽과 동쪽 방면의 전경

 

▲ 미국자리공

 

▲ 동국대 경주캠퍼스 뒤로 보이는 옥녀봉 그 너머 선도산

 

 ▲ 옥녀봉 날머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정문을 지나면 나오는 부속 유치원 끝나는 지점에 옥녀봉 오르는 등로가 있고 진행방향으로 대구선 철길을 넘는 다리 우측에 애기청수로 가는 길이 있다.

 

▲ 마타리

 

▲ '애기청소'에서 본 동국대 경주병원(나의 일터)과 좌,우측의 선도산과 옥녀봉

 

▲ 톱풀

 

▲ '애기청소'에서 본 형산강과 경주남산

 

'예기청소', '애기청소' 혹은 '애기소'라 불린다. 서천과 북천이 만나는 곳으로 급류가 있다. 지명에 대한 전설이 여러가지가 있다. 첫째, 신라 20대 자비왕대에 을화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를 즐기다가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 둘째 조선시대 경주지방 사대부들이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맑은 소라는 설, 셋째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가 발간된 이후에 매년 한명씩 어린아이들이 빠져 죽는다고 해서 그러한 명칭이 부여되었다는설, 넷째, 신라시대 귀족의 딸인 예기 또는 애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둔 단오절에 친구들과 같이 금장대에서 소나무에 매어 둔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죽었는데, 이후부터 여기서 물놀이나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의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났다는 설 등이 있다.

 

▲ 경주 금장대 암각화

 

▲ 암각화 설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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