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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지리산 종주산행(첫째 날 : 성삼재에서 세석까지...) 본문

◈ 산행이야기/☆ 2009년도 산행

지리산 종주산행(첫째 날 : 성삼재에서 세석까지...)

해와달^^* 2009. 9. 12. 21:16

◆ 일      시 : 2009. 09. 09(수) - 09. 10(목) 날씨 : 맑음

◆ 행정구역 :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 주 요 산 : 노고단(1,507m) 삼도봉(1,499m) 토끼봉(1,534m) 명선봉(1,586.3m) 형제봉(1,452m) 덕평봉(1,521.9m) 칠선봉(1,558m) 영신봉(1,651.9m)

◆ 산행인원 : 직장 동료 4명과 함께...

◆ 산행코스 : 성삼재-노고단-임걸령-노루목-삼도봉-화개재-토끼봉-명선봉-연하천대피소-형제봉-벽소령대피소-덕평봉-칠선봉-영신봉-세석대피소

◆ 산행거리 및 소요시간 : 22.9km(이정표 거리), 12시간 35분 (04:50~17:25, 식사, 휴식 포함)

 

▣ 지리산은?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지리산은 3개도(경상남도, 전라남·북도), 1개시, 4개군, 15개 읍·면의 행정구역이 속해 있으며, 그 면적이 471.758㎢로서 20개 국립공원 중 가장 넓은 면적의 산악형 국립공원이다.


지리산(智異山)을 글자 그대로 풀면 "지혜로운 이인(異人)의 산" 이라 한다. 이 때문인지 지리산은 여느 산보다 많은 은자(隱者)들이 도를 닦으며 정진하여 왔으며 지리산 골짜기에 꼭꼭 숨어든 은자는 그 수를 추정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지리산은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민족적 숭앙을 받아 온 민족 신앙의 영지(靈地)였다. 지리산의 영봉인 천왕봉에는 1,000여년 전에 성모사란 사당이 세워져 성모석상이 봉안되었으며, 노고단에는 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를 모시는 남악사가 있었다. 반야봉, 종석대, 영신대, 노고단과 같은 이름들도 신앙을 상징한다.


구름 위에 떠 있는 고봉 준령마다 영기가 서리고, 계곡은 웅장하면서도 유현(幽玄)함을 잃지 않는다.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주 능선의 거리가 25.5km로 60여리가 되고, 둘레는 320여 km로 800리쯤 된다. 지리산의 너른 품안에는 1,500m가 넘는 20여개의 봉우리가 천왕봉(1,915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의 3대 주봉을 중심으로 병풍처럼 펼쳐져 있으며, 20여개의 긴 능선이 있고 그 품속에는 칠선계곡, 한신계곡, 대원사계곡, 피아골, 뱀사골 등 큰 계곡이 있으며, 아직도 이름을 얻지 못한 봉우리나 계곡이 많다.


이렇게 넉넉한 지리산의 웅장하고 아늑한 산세는 영·호남의 지붕으로서 이 지역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며, 생명의 산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지리산의 북쪽으로는 만수천-임천-엄천강-경호강-남강-낙동강이 이어지며, 남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 생명수를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왕봉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는 천왕샘을 비롯하여 주능선 곳곳에서 끊임없이 샘물이 솟아나고 있다. "산은 사람을 가르고, 강은 사람을 모은다." 고 했다.


경남의 하동, 함양, 산청, 전남의 구례, 전북의 남원, 이렇게 3도 1시 4군에 걸쳐 있는 지리산은 풍부한 동·식물만큼 그 문화는 동서간을 이질적이면서도 다양한 문화권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지리산은 단지 크고, 깊고, 넓은 것만으로 설명이 안되는 다른 매력이 있는 산이다. 

<종주산행지도>

 

◈ 첫째 날 산행기

그렇게 벼르고 별러왔던 지리산 종주산행을 떠나는 날이다.

며칠 전부터 배낭에 하나하나 챙겨넣고 체크해가며 혹여 빠진 것이 없는지 점검하며 주문한 물품이 도착하면 어김없이 다시 챙겨넣곤 하던 일이 실행에 옮기게 되니 막상 D-day가 도래한 지금 괜스레 긴장이 된다. 과연 그 머나먼 대장정을 무사히 안전하게 마칠 수 있을런지...

대구 서부시외버스정류장에 12시 30분까지 당도하도록 일행들에게 일러두고서 아내 차를 몰고는 단골 카센터에 정비를 맡겨놓고 택시에 몸을 싣고 경주시외버스터미널로 향한다. 11시에 떠나는 서대구행 버스에 올라 정확히 1시간 10분 걸려 도착하니 포항에서 출발한 세사람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니 경산에서 출발한 동료와 합류하여 주변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 요기를 한 후에 남원행 13시 40분 차에 올라타고 지리산으로 향한다.

남원에 도착하니 구례행 버스가 40여분 가까이 남아있다. 가까운 시장에라도 들러 동동주 한잔 하고 가자는 말에 선뜻 따라 나선다.

보리밭엔 근처도 못 가면서... ㅎ

동동주 두 되에다 돼지 순대 한 접시 후딱 해치우고 정류장으로 돌아와 16:35분(곡성 경유) 버스를 타고 구례를 향해 출발한다.

구례에 도착하니 평일이라 그런지 산행을 온 산님들은 별로 띄질 않는다. 일단 숙소부터 정해야겠기에 무작정 시내로 걸어 들어간다. 목욕탕을 겸한 여관에 들어가 큰 방 하나를 빌려 짐을 내려놓고 방을 빠져나와 저녁부터 먹기로 한다. 새벽산행을 해야하는 관계로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겠기에 근처 구이집으로 들어가 삼겹살로 반주를 곁들여가며 체력보강을 한다. 건배로써 무사산행을 기원하며 오가는 술잔 속에 동료애는 싹이 틔어가는데 늘어나는건 빈 술병이다.

혼자 속으로 저렇게 마시고 산행에는 지장이 없을지 은근히 걱정이 되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고 다들 주당들이라 그런지 끄떡도 없다. 기분 좋게 마시고 오는 길에 족발 큰 걸로 하나 사서 들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간다.

새벽 2시30분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나서 동료들을 깨워 산행준비를 한다.

3시30분에 숙소를 빠져나와 터미널로 걸어가 부근 김밥집을 찾으니 아뿔싸! 아직 문을 안 열었네. 부근에 물어보니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24시간 김밥 가게가 있다고 한다. 동료에게 돈을 주며 차표 끊어라 일러주고서 배낭을 맡겨놓고 쏜살같이 김밥집으로 달려 나간다. 숨을 헐떡이며 도착하니 준비된 김밥도 없어 새로 만들어야 한단다. 10여분 밖에 여유가 없으니 마음은 급하고 동작은 굼뜨고 미칠 지경이다.

서둘러 달라고 부탁하여 겨우 8줄 만들어 봉지에 담고서 터미널로 냅다 달려가니 출발 1분 전이다. 정확히 새벽 4시에 출발한 노고단(성삼재)행 버스에는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산님들로 꽉 차있다. 한 바탕 작은 소동을 벌인 탓에 이마엔 땀이 흥건하다. 산행 전에 몸이 다 풀려버렸네. 크~

터미널에 김밥가게가 있다는 것만 알고 왔기에 적잖이 당황이 되었지만 일찍 조치를 했으니 망정이지 다 굶길 뻔 했네. 하긴 대피소에 가서 라면 사다가 끓여 먹으면 되긴 하지만... 다음에 오게되면 아예 김밥집에 예약을 해 둬야겠다고 생각이 든다.

화엄사 주차장을 경유한 버스는 40여분 걸려 도착한 성삼재엔 어둠이 가시지 않고 싸늘한 새벽공기에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화장실을 다녀온 뒤 천왕봉을 향하여 머나먼 대장정의 첫걸음을 내딛는다.(04:50)

△ 싸늘한 새벽공기를 맞으며 신발끈을 조여 매고서...

 

△ 대장정의 길을 떠나 도착한 노고단대피소에는 아직 적막강산입니다.

 

 

몇년 전 아내와 노고단을 오른 뒤 다시 찾아온 등로를 헤드랜턴으로 불을 밝히며 오르니 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맑은 공기에 기분마저 정화되는 듯하다.

돌계단 지름길로 올라서 진행하니 30분만에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한다.(05:20)

아직 꼭두새벽이라 적막강산이다. 이슬 머금은 대피소 식탁에서 준비해간 김밥으로 간단히 요기를 한다. 공동취사장에 들러 물을 보충하니 많은 산님들이 그곳에서 라면을 끓이고 취사를 하는 등 아침을 챙겨 먹느라 부산한 모습들이다. 화장실도 다녀와서는 바로 노고단을 향해 길을 떠나니 날은 한결 밝아졌다.

△ 여명이 밝아오는 노고단에서...

(좌측에 반야봉, 저 멀리 가야할 천왕봉이 보입니다)

△ 모조 노고단에서의 단체사진

 

 

 

노고단의 '노고(老姑)'는 신라 건국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높인 말로 '노마님'이란 뜻이며, 제사를 지내는 단이 있었기 때문에 '노고단'이라 한다. 뒤에 '남악사(南嶽祀)'라 하였는데 이는 성모사상에 따른 민간신앙 차원의 행사에서 나라에서 관장하는 중사(中祀:제사)를 이 곳에서 지내므로서 국가차원의 공식행사로 격상한 것이다. 아울러 이 곳은 화랑도들의 수련장이기도 하였다 한다. (신라 때 중사를 지낸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통일 전은 속리산, 북악 태백산, 남악 지리산, 중악 팔공산)

이러한 신라시대의 전통은 고려와 조선조에도 이어졌다.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를 산신으로 받들고 제사를 지냈는데 장소는 노고단이 아니라 천왕봉과 함양 휴천면 남호리(산청 임천강 임천교가 있는 곳)로 옮겨서 하였다. 조선조 때는 세조2년(1456)부터 노고단의 남악사를 구례 산동면 내산리(현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는 곳) 평지로 옮겨 제례를 행하였다.

일제 때에 이러한 관 주도의 남악사 제례를 일체 중지하였고, 1969년부터는 남악사를 화엄사 앞으로 옮겨 구례군 축제로 약수(고로쇠, 거제수나무 물)를 지리산산신에게 바치는 제를 지내고 있다.

그래서 노고단은 이러한 역사적 민속적인 의미 때문에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세 주봉의 하나로 취급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노고단 또한 외세의 침략과 해방 후 이념갈등의 피해지역이기도 하다.

일제 때 노고단에는 미국, 호주 등 외국인 피서용 별장이 52동이나 들어섰는데 호텔, 공회당, 교회당, 발전소, 영화관, 간이풀장까지 갖춘 그 당시로는 호화판 별장이었던 것이다. 나라를 잃은 식민지는 대대로 숭고하게 여겨져 온 노고단 마저 홍콩식 외국조차지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해방 후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진압 후 근 두 달간 김지회를 두목으로 하는 반란군 잔존세력이 노고단 외국인 별장촌을 점거하여 빨찌산거점화 하자 12월에 국방경비대가 투입되어 토벌작전을 벌리면서 다시 그들이 거점화 하지 못하도록 별장 건물을 모두 불태웠는데 이 때 노고단 일대의 수목들도 함께 타 버려서 지금까지 노고단에는 큰 나무가 없고, 새로 돋아난 싸리나무 등 관목과 초본식물만 자라고 있는 것이다.

'노고단 운해(雲海)' 지리산 10경의 제3경이다. 가을 날씨가 너무도 쾌청해서 운해를 구경할 수는 없었지만 잠시 생각에 잠길 수는 있었다. 왜 하필이면 노고단 주변에 구름이 많을까 하는 생각과 구름 낀 노고단 주변의 경치를 상상해 보았다.

노고단은 해발 1,507m로 동서로 높고 길게 지리산 주능선의 맨 서쪽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남해에서 일은 구름이 섬진강을 따라 북상하다가 구례 땅에 이르러 지리산 만복대에서 서쪽으로 뻗어-다름재-밤재-천마산으로 이어지는 전라남,북도를 가르는 기맥에 막혀 몰려온 구름들이 지리산온천랜드가 있는 만복대 서쪽 저지대와 천은사-화엄사계곡, 피아골까지 구름이 꽉 채워지면서 구름바다를 이룰 것이다.

그 구름 위로 가까이는 서쪽으로 만복대, 고리봉, 종석대, 차일봉, 동쪽으로는 반야봉, 불무장등, 통곡봉, 황장산, 남쪽으로는 문바우등, 왕사리봉 등 높은 봉우리들이 구름 위에 마치 섬처럼 솟고, 멀리는 광양의 백운산, 승주의 조계산이 구름위로 가물가물 보이는 그야말로 구름바다(雲海) 위의 그 풍경은 속세를 떠나 천상에 온 듯한 느낌을 줄 것으로 상상이 된다.

여기에 더하여 이 일대 군락을 이룬 원추리꽃, 진달래, 철쭉 그리고 지금까지 입산 통제 덕분에 무성해진 야생화가 만발하고 보면 구름과 꽃이 이루는 조화 또한 가관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노고단은 또 하나의 지리산 10경의 제10경'섬진 청류(淸流)'를 바라보는 자리다. 평탄하게 닦은 노고단 봉우리 남쪽 가에 목재로 섬진청류전망대를 설치 해 놓았다. 가물가물하게 먼 남쪽이 하동과 섬진강하구이고, 좀더 가까이 시선을 옮겨오면 물가에 악양루와 고소성이 있는 악양이다. 이곳 고소성이 어떻게 해서 중국 소주에 있는 고소성(古蘇는 蘇州의 옛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름다운 섬진강에 기인된 것으로 생각된다. 

△ 노고단에서의 일출

(천왕봉을 옆에 두고 촛대봉 옆으로 솟아 오르는 붉은 태양이 아름답습니다.)

 

 

10여분 걸려 도착한 노고단에는 특유의 돌탑이 언제나 그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고 건너편에는 반야봉이 찾아온 산객을 반겨주고 있다. 원래의 노고단 돌탑은 심하게 훼손된 주변 등산로 때문에 복원중이라 현재는 일정 인원을 접수를 받아 탐방할 수 있도록 해 놓아 아무나 출입을 할 수가 없다. 몇년전 아내와 이곳을 찾았을 때 미리 인터넷으로 예약접수를 해 놓은 탓에 노고단 정상까지 다녀온 기억이 새롭다.

천왕봉 방향에서 여명이 밝아오고 있어 일출을 보고 떠나자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이곳저곳을 배경으로 해뜰 때까지 사진촬영으로 시간을 보낸다.

정확히 6시 8분에 떠오르기 시작한 일출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 보인다. 지리산에서의 일출을 보기란 그리 쉽지 않은데 날씨가 좋아 지리산을 찾을 때마다 기상조건이 좋은게 참으로 큰 행운이 아닌가 싶다. 촛대봉 옆으로 솟아오른 태양은 이곳 노고단에서 보았을 때는 이미 제법 지상에 떠오른 상태라 눈이 부실 정도다.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고서 다섯명이 모여 손을 맞잡고 힘찬 '화이팅'으로 천왕봉까지 무사 산행을 기원하며 숲길로 빠져 들어간다.

△ 떠오르는 일출을 배경으로...

△ 지나온 노고단을 되돌아보며...

△ 쑥부쟁이

 

아침햇살이 비추이는 숲길을 걸으며 등로 좌우로 피어있는 들꽃들을 보노라니 힘이 불끈 솟아 오른다.

투구꽃이 지천이고  오대산에서 보았던 흰진범도 눈에 많이 띈다. 가을의 전령사인 구절초와 쑥부쟁이도 곳곳마다 피어 먼길 떠나는 산꾼들을 격려해 주는 듯하다.

△ 투구꽃

△ 흰진범

△ 다들 건각들이라 힘이 넘칩니다.

△ 피아골삼거리 이정표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 임걸령에는 피아골전망대와 샘터가 있다. 등로 좌측 아래로 10미터 정도 내려가면 만나는 임걸령 샘터는 물맛 좋기로 소문난 탓에 일부러 내려가 물맛을 본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두 바가지 들이키고 노고단에서 가져간 물을 비우고 다시 물을 채운 뒤 전망대에서 소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한장 남겨본다.

북쪽 심원골에서 남쪽 피아골로 넘나드는 고개인데 조선 명종 때 관군도 토벌하지 못한 유명한 도적 두목 임걸년(林傑年)이 이곳에 근거지를 차리고 활동했었다는 전설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산 깊고 물 좋고 동서남북으로 길이 통하니 도적 소굴로는 십상인 것 같다.

△ 임걸령 샘터

(물맛 좋기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해서 실컷 마셨지요)

△ 구절초

△ 임걸령 쉼터에서...

△ 노루목 삼거리

(반야봉을 못 들러서 많이 아쉽습니다.)

 

 

원래 노루목은 이정표가 서 있는 이곳이 아니라 반야봉 쪽으로 좀 더 올라가서 삼도봉 쪽에서 반야봉으로 올라오는 길과도 만나는 삼거리가 진짜 노루목이라 한다.

산봉이라고 할 수는 없고 경사면이라 할 수도 없는 조금 튀어나온 부분인데 종주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이정표를 아랫쪽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이곳 '노루목'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얻은 이름이다. 반야봉을 직접 올라보거나 노고단 쪽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노라면 반야봉 정상의 남쪽 지세는 피아골을 향해 몹시 가파르게 내리다가 바로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선 모습이 마치 노루가 고개를 치켜들고 먼 산을 멍청히 바라보는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니 우리 선조들의 지세(地勢)를 관찰하는 안목과 그 표현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 까실쑥부쟁이

△ 삼도봉 지경표지 청동삼각뿔

 

 

전라남, 북도와 경상남도가 갈라지는 꼭짓점인 삼도봉에 도착하니 먼저 도착한 산님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08:10)

잠시 휴식을 취하며 사과 한 알씩 베어 물고서 아침햇살이 눈부신 지리산의 웅장한 풍광을 감상해 본다. 삼도봉 표식을 손에 쥐고서 흔적을 남기고 화개재를 향하여 부지런히 길을 떠난다.

△ 삼도(三道)를 한 손에 쥐고서...

 

 

노루목 이정표를 지나 비탈길을 10여분 가면 동-서 종주하는 사람들이나 뱀사골을 따라 올라온 사람들이 반야봉으로 오르는 길이 갈라지는 삼거리를 지나고, 내림길을 조금 내려가면 이내 오름길로 바뀌면서 바위 덩어리들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그래도 지리산에서는 날카롭다고 표현할 만 하고 정상 부근에는 암석 뿐 전망을 막는 나무가 없어 사방이 확 트이는 봉우리에 올라서게 된다. 삼도봉(三道峰)이다.
백두대간이 남한 땅에 들어와 세 개의 삼도봉을 만들고 있는데, 두 개는 민주지산 삼도봉과 대덕산의 거창 삼도봉이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 지리산 삼도봉이다.
지리산 삼도봉은 북쪽이 전라북도(남원시 산내면), 서남쪽이 전라남도(구례군 산동면과 토지면), 동쪽이 경상남도(하동군 화개면)이다.
이 삼도봉은 조선 말기 고종 33년(서기 1896년)에 전국이 8도에서 13도로 개편되면서 얻게된 백년 남짓된 이름이다.

 

 

삼도봉을 일명 '날라리봉'이라고 부르는데 그 많은 지리산의 산봉 이름치고는 좀 천박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것은 정상을 이루는 바위들이 낫 날처럼 날카롭다 하여 '낫날봉'이라 한 것이 발음하기에 어려워서 자연스럽게 변음하여 날라리봉이 되었다 한다.
삼도봉에서 지리산 10경중의 제2경 '피아골 단풍(丹楓)'을 구경할 수 있다. 피아골은 '직전(稷田)'이라고도 하는데 피아골 입구의 마을 이름이 직전이다. '직전(稷田)'은 '피 밭'을 말하는데 피밭이 '피아'로 변음된 것이라 한다. 그러니까 직전은 피아골의 한자어인 것이다. 옛날 이 곳에는 쌀 농사는 물론 다른 곡식도 잘 안 되는데 피(稷)농사는 그럭저럭 되기 때문에 피 농사를 지어 먹고 연명하며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은 등산객과 관광객이 많아 수입이 짭짤하다고 한다.

 

피아골은 지리산에서도 제일의 활엽수림이다. 시월 중순쯤 되면 독불장군이 없이 피아골 활엽수림을 이루는 모든 나무들이 함께 어울려 삼홍을 연출한다. 삼홍(三紅)! 참 멋진 표현이다. 단풍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니 산홍(山紅)이요, 그 붉은 산이 물 속에 비치니 물 또한 붉으니 수홍(水紅)이요, 연인의 손잡고 이를 보러 온 사람들 그 얼굴을 상기시켜 붉게 물 들이니 인홍(人紅)이라. 곧 삼홍(三紅)이다.
'삼홍소(三紅沼)'란 이름이 붙은 소도 있는데 피아골의 단풍 중에서도 제1의 단풍 경치를 삼홍소로 꼽고 있다. 피아골 단풍은 설악산이나 내장산처럼 화려하고 자극적이지 않고 은은한 색상이 오히려 사람을 매료시킨다.
피아골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이 계곡에서 흘린 피 때문에 이런 이름이 생겨났다고도 하고, 어떤 시인은 피아골을 '눈물의 울음주머니'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이곳 피아골을 무대로 한 지리산 빨치산들의 생활상을 그린 '피아골'이란 영화가 있었고, 그 후로도 이곳을 무대로 한 소설로 '남부군', '지리산'등의 여러 작품이 나왔다.

△ 가야할 방향을 가리키며...

△ 삼도봉 정상에서...

△ 우측에 피아골을 좌측에 목통골을 아래에 두고 폼을 한번 잡아봅니다.

△ 화개재로 내려가는 550개가 넘는 목재계단길

 

 

삼도봉에서 화개재까지 급경사 내림길인데 상,하행 두 사람이 지나갈 수 있게 넓은 나무계단을 만들어 놓고 좌측통행으로 내려가는 쪽은 고무 판까지 깔아서 미끄럽지 않게 잘해 놓았다. 워낙 많은 계단이라 좀 지루하기는 하지만 안전하니까 주변에 피어있는 들꽃도 구경하고 오손도손 이야기하며 내려가니 전혀 지루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다. 계단길을 다 내려와 조금 진행하니 앞이 훤히 트이는 넓은 터가 나타나고 이른바 화개재에 도착하게 된다.(08:41)

△ 화개재 안부

 

 

화개재는 해발 1,300m 남짓한 지리산 주능선에서는 가장 낮은 곳이다. 북쪽은 뱀사골이고, 남쪽은 목통골로 해서 화개장터에 이른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쪽 화개장터를 거친 생선, 해산물, 소금 등이 이곳을 거쳐 북쪽의 운봉, 산내, 마천 등지로 공급되고, 내륙의 곡식, 산채 등 특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화개, 악양, 하동 등지로 공급되는 교역로였다고 한다.

△ 토끼봉을 오르며 바라본 멋진 전경

 

 

화개재에서 제법 경사가 있는 오름길을 약 30분쯤 오르면 토끼봉에 이르게 되는데 오늘 산행 코스 중 가장 힘든 코스란다. 산행 시작한지 시간이 그리 오래되지 않아 그런지 크게 힘든 것 같지는 않다. 정상 20m 전에 헬기장이 있고 이정표도 이곳에 서 있다. 처음엔 토끼봉 정상인지 모르고 지나쳤다가 GPS로 확인해보니 토끼봉인 것을 알게되어 정상부를 사진에 담지 못하고 말았다. 조망도 별로이고 헬기장이라 구경거리가 되질 않는다는 것에 위안을 삼아본다.
토끼봉에는 '지보초'라는 풀이 군생하여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부르지만 토끼가 많이 서식한다거나 산 모양이 토끼를 닮지도 않는데 '토끼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혀 다른데 이유가 있다고 한다.
지리산 서편의 주봉인 반야봉에서 정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양식의 24방위(方位)로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는 12지(十二支)에서 토끼띠이기 때문에 이 봉우리를 '토끼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 물봉선

△ 정영엉겅퀴

△ 거친 돌밭길을 오릅니다.

 

 

토끼봉에서 다음 명선봉을 넘어 연하천 까지는 꽤 먼 거리인데 도중에 해발 1463m 봉우리를 하나 더 게 되는데 1463봉 오름길이 토끼봉보다 더 힘들게 느껴진다. 토끼봉과 명선봉 중간 쯤에 총각샘이 있다고 하는데 이정표가 없어 찾기가 쉽지 않았고 임걸령에서 충분한 물을 확보하여 두었기에 굳이 찾으려 애쓰지 않았다고 하는게 옳을 것 같다.

진주 지리산산악회가 맨 먼저 장터목의 샘을 찾아내서 '산희샘'이란 처녀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이 산악회가 1970년 7월에 이 지역 사람들에게 수소문하여 이곳에서 또 샘을 발견하고는 동쪽에 처녀 샘이 있으니 서쪽의 것은 '총각샘'이라 하자는 공론이 있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지리고들빼기

△ 연하천대피소

 

 

명선봉을 사면으로 돌아 나무계단을 내려서면 곧 연하천산장(煙霞泉山莊)에 도착한다.(11:49) 수용인원 60명으로 비교적 적고 산과 숲으로 둘러 쌓여 사방을 둘러보는 전망이 없어 동서남북을 구분하기도 어려운 그저 한적한 곳이다.

백두대간종주지도를 자세히 보면 이곳은 지리산 주능선의 북쪽이다. 연하천의 물은 얼핏 생각하기에는 남쪽으로 흘러 대성리를 지나 화개장터로 흘러갈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북쪽 뱀사골로 흘러간다.

지리산 동쪽부분에 연하봉(煙霞峰)이 있는데 하필이면 이 곳의 샘을 '연하천(煙霞泉)'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진주 지리산산악회의 전신이 연하반(煙霞伴)이었는데 그때 이 샘을 발견하고 산악회 이름으로 샘 이름을 지은 것이 지금까지 그렇게 불려지고 있다고 한다.

'대자연(煙霞)의 서기(瑞氣)가 어려 솟아나는 샘물' 이란 좋은 뜻이기는 하나 연하봉과 같은 이름이라 지리산을 처음 종주하는 본인에겐 좀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다.

각설하고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 곳이라 취사장에 들러 코펠이랑 버너를 꺼내어 물을 끓이기 시작한다. 인터넷에서 구입한 전투식량으로 요기를 하기로 한 것이다. 뜨거운 물을 부어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내용물 속에 들어있는 참기름과 고추장을 넣어 비벼서 역시 뜨거운 물을 부어 놓았던 된장국과 함께 먹으니 그런 대로 먹을만 하고 예전 군 생활 훈련 시절에 먹었던 전투식량이 생각난다.

과일에다 커피까지 곁들여 챙겨먹고 느긋하게 쉬면서 연하천 샘물을 수통에 담고서 벽소령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겨 나간다.(11:53)

△ 음정, 심정 갈림 이정표

 

 

연하천에서 동쪽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종주길에서 북쪽 심정리 마을로 내려가는 샛길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있다.(12:05) 오던 길보다 좀 높을 뿐인데 이곳이 하동의 화개면과 함양의 마천면, 남원의 산내면의 경계가 되는 곳이라 웬만한 지도에는 산봉 이름이 없지만 사람들이 삼각고지 또는 삼각봉이라 부른다.
이 삼각고지 남쪽 계곡이 빗점골이라는 깊은 계곡이다. 6. 25를 전후하여 지리산이 빨찌산의 아지트가 되어 상당기간 국군의 대대적인 공비토별작전이 전개되었을 때 이 계곡 아래 의신마을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빨찌산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이 빗점골로 도주하였다가 이 곳에서 최후를 맞은 곳이라 한다.

△ 형제봉을 오르며 바라본 천왕봉 정상에는 구름이 휩싸여 있네요.

△ 형제봉 전망터에서...

(등 뒤로 벽소령대피소가 보입니다.)

 

 

형제봉전망대에 이르니 아래에 벽소령대피소와 주능선의 끝에 있는 천왕봉이 구름에 휩싸여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천왕봉을 제외하고는 정상부가 전부 조망이되는 장쾌한 모습에 그저 말문이 닫혀버리고 지리산의 웅장함에 압도 당하고만 있다. 정말 대단한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참을 쉬면서 각자 포즈를 취해가며 사진에 담아본다. 가슴속에 뿌듯함이 가득가득 채워지는 듯하고……^^*

 △ 맨 왼쪽부터 하봉, 중봉, 천왕봉, 잘록이 부분은 장터목, 연하봉, 우측으로 촛대봉이 조망됩니다.

벽소령대피소 바로 뒤의 봉우리는 꽃대봉이고 그 뒤가 덕평봉입니다.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 세석산장이 있겠지요)

△ 형제봉의 기암과 파아란 하늘이 멋진 앙상블을 이루고 있습니다.

△ 기암 위에서 억겁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노송의 모습이 경이롭습니다.

 

 

형제봉이란 이름은 '형제바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형제바위는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두 형제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높이 20m가 넘는 큰 입석바위인데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고있다.
옛날 두 형제가 성불수도 하려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기에 온 정성을 드리는데 심술궂은 지리산녀(智異山女)가 끈질기게 유혹하면서 방해하였다. 두 형제는 그녀의 유혹으로부터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의지하며 부동자세로 서 있다가 너무 긴장했던지 그대로 굳어져서 지금 형상의 바위가 되었다는 것이다.

△ 미역취

△ 산부추

△ 바위떡풀

△ 벽소령대피소

(하늘 아래 첫 우체통이 이채롭습니다.)

 

 

형제봉을 지나면서 간간히 벽소령 산장이 보이기 때문에 마음은 느긋해진다. 그러나 길은 지금까지 온 길 중에서 가장 거칠다.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아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등산로에 큼직큼직한 돌들이 그냥 뒹굴고 있고, 로프를 잡고 온갖 용을 써야만 오를 큰 바위도 여러 군데 있다.

벽소령 산장에 도착 한 것이 오후 1시 35분이다. 성삼재 걷기 시작한 것이 오전 4시 50분이니까 8시간 45분을 걸은 셈이다. 물론 연하천에서의 식사시간도 포함한 것이지만... 급할 것이 없고, 좋은 경치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으니... 앞으로 3시간 넘게 걸릴 세석까지의 여정 또한 느긋한 걸음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지리산10경에 벽소명월이 있다. 덕평봉 위로 떠오르는 보름달빛은 과히 환상적이라는데, 언젠가 그 모습을 볼 때가 있겠지….

△ 둥근이질풀

 

 

오는 동안 흘린 땀으로 온 몸이 젖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치부해 보지만 땀으로 얼룩진 몰골은 말이 아니라 생각되어 세수라도 좀 해야겠기에 수수모님과 함께 벽소령 샘터를 향해 내려간다.

70미터 정도 아래로 내려가니 파란 물탱크에 저장해 놓고 수도꼭지를 틀어 사용하는 샘터가 나타나 잠시 세수를 한다. 귀한 물이라 양껏 씻지 못하고 겨우 한 바가지 정도만 머리에 부은 후 곧바로 대피소로 올라온다. 물론 한 모금의 물은 마셨으니 그걸로 족할 일이다.

△ 벽소령에서의 단체사진

△ 되돌아 본 벽소령대피소

(내년에 다시 오마~)

△ 선비샘

 

 

동료들은 준비해 온 딸기주로 피로를 풀어가며 쉬는 동안 혼자 주변 풀밭을 다니며 초가을을 수놓고 있는 들꽃들을 카메라에 담느라 분주하다. 종주산행로 주변에는 들꽃들의 개체수가 다양하지 못한 것 같다. 오는 도중 늘 같은 종류의 야생화들만 만났으니... 아마도 인적이 드문 심산유곡으로 들어가면 더 있으리라.

충분한 휴식을 가진 뒤 주변 산님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하여 벽소령에서의 단체사진을 남기고 등로를 이어가 덕평봉 오름길에 들어서 산 중턱을 오르자 등산로는 정상을 피해 남쪽 비탈길로 돌아서 간다. 덕평봉 정남에 이르렀을 때 약 40-50평 정도 되는 공터가 있고, 야트막한 축대 아래 꽂힌 PVC 파이프에서 맑은 샘물이 물줄기를 드리운다. 이정표에 '선비샘'이라 쓰여 있어 바로 여기가 선비샘인 것을 알려 준다.(15:13)
옛날 이 산 아래 있는 상덕평 마을에 착하고 점잖은 한 선비가 살았는데 워낙 가난해서 이웃 사람들로부터 몹시 천대를 받다가 '죽어서는 천대를 받지 않고, 사람대접을 받는 것이 소원' 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 효자인 그 아들이 어떡하면 아버지의 소원을 풀어 줄까 하고 며칠을 고민하고 궁리한 끝에 이 샘 위쪽에 부친의 묘를 썼다고 한다. 지나던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떠먹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니 결국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 준 셈이다.
지금은 무덤도 없어지고 공터가 생겨 등산객이 쉬어 가는 쉼터가 되었다. 샘도 파이프를 박아서 무릎 꿇고 머리를 숙이며 물을 뜰 필요가 없이 서서 흐르는 물줄기에 물병이나 물통을 대고 받아서 마시고 있다. 그래도 여전히 이름은 '선비샘'이다.

 

 

△ 바로 앞에 칠선봉과 그 뒤에 영신봉이 보이고 정상부만 조금 보이는 촛대봉이 눈에 들어옵니다.

 

△ 칠선봉(七仙峰) 정상부

 

덕평봉을 지나면 좀 멀지만 덩치가 큰 산이 시야에 들어오는데 백두대간에서 낙남정맥을 분기시키는 영신봉이다. 그러나 덕평봉에서 영신봉에 이르는 사이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암봉을 이리 넘고 저리 넘으면서 때로는 먼 경치로 온 길을 되돌아 보기도 하고, 영신봉에서 청학동 뒷산 삼신봉까지 흘러내린 낙남정맥도 전망하고, 띄엄띄엄 우뚝우뚝 솟은 암봉을 올려다보면서 가게 된다.
이곳에 솟아 있는 암봉들을 다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일곱 개라 한다. 이 바위들이 마치 아름다운 일곱 선녀들이 노니는 듯하다 하여 이 산봉들을 '칠선봉(七仙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 꽃며느리밥풀(며느리밥풀꽃)

△ 수리취

△ 영신봉이 눈 앞에 나타납니다.

(워메~ 우째 올라가꼬?)

 

 

△ 영신봉의 기암들

△ 영신봉 가는 도중에 다시 한번 천왕봉을 바라보며...

(연하봉과 제석봉이 가까이 보입니다)

△ 지나온 등로를 되돌아보니 햇살이 비치는 모습이 장관입니다.

(노고단을 바라보니 "참 멀리도 왔구나" 하는 뿌듯함이 있네요.)

 

 

칠선봉의 봉우리들이 끝나고 등산로는 짙은 숲에 들어서 영신봉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남쪽으로 우회하더니 정상에서 약200m남쪽의 낙남정맥 마루금에 올라서게 된다. 이곳부터 동쪽 사면으로는 키 큰 나무는 없고, 철쭉과 구상나무 군락을 이룬다. 여기서부터 세석평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 영신봉 정상에서... 뒤로 촛대봉이 보이네요.

△ 청학동 삼신봉이 보이고 영신봉으로 이어지는 낙남정맥 능선길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 하룻밤 유숙하고 갈 세석대피소가 눈 앞에 나타납니다.

 

 

세석평전을 '잔돌평전', '세석고원'이라고도 부른다.
남한에서는 가장 높고 넓은 고원으로 둘레 12Km, 넓이 약 30만평에 바닥에 잔돌이 깔려 있는 위에 수십만 그루의 철쭉이 대 군락을 이루고 드문드문 구상나무가 있어서 오월 말에서 유월 초가 되어 철쭉꽃이 만발하면 은은한 철쭉꽃과 주변경관이 조화되어 과히 장관이라 할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에 '세석평전 철쭉'이 지리산 10경의 제6경이다.

△ 세석산장에서 무사산행을 자축하며 건배로써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세석산장은 '96년에 건립된 것으로 19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 최대의 대피소이며 세석천(細石泉)이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동서로 지리산 종주길이 있고, 북쪽으로 고개를 넘으면 한신계곡을 통해 백무동으로 내려가며, 남쪽으로 200m쯤 내려가면 산청 시천면 내대리 거림마을로 가는 동쪽 길과 서쪽 영신봉에서 시작된 낙남정맥 마루금으로 올라서는 길이 갈린다.
또 낙남정맥의 마루금을 따라 조금 내려가면 화개면 대성리로 내려가는 서쪽 사면길이 갈리고, 마루금을 계속 따라가면 삼신봉을 거쳐 청학동 또는 불일폭포와 쌍계사로도 갈 수 있어서 세석산장은 등산로 교통의 요충지에 있어 늘 사람이 붐비는 곳이니까 산장도 크게 지어야 했을 것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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