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불보종찰 영축산 통도사 본문
영축산 통도사 (靈鷲山 通度寺)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영축총림 통도사는 삼보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불보를 간직하고 있어 진정한 '불지종찰(佛之宗刹)'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이다.
총림이란?
총림(叢林)의 뜻은 범어 vindhyavana의 번역으로 빈타바나(貧陀婆那)라 음역하며 단림(壇林)이라고도 번하는데,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화합하여 함께 배우기 위해 모인 것을 나무가 우거진 수풀에 비유한 것이다. 지금은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지칭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5대총림
우리나라에는 총림이 5군데 있는데,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를 5대 총림이라고 한다.통도사는 1972년 총림으로 승격되었으며, 총림의 수장은 방장(方丈)이라고 한다. 모든 승려들은 행자교육을 마치고 사미계를 받으면 강원이나 선원, 율원에 입방 4년 간의 교육을 수료해야 비구계를 받을 수 있다.
△ 유구한 세월 통도사를 지켜보며 살아왔을 노송
△ 통도사 성보박물관
△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능소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니 절로 카메라를 들이대게 됩니다.
능소화(凌宵花, chinese trumpet creeper) 이야기
'땅을 기어가는 가련한 꽃 능소화가 소나무에게 "나도 먼 곳을 볼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자, 능소화의 아름다움에 반한 소나무가 쾌히 승락하여 능소화는 나무나 담을 붙잡고 자라게 되었다'
오월의 장미가 지고 무더운 여름이 다가오면 능소화의 계절이 된다. 그래서 '능소화가 피면 장마가 진다'고 한다.
농경사회에 살던 우리 조상들은 철철이 피는 꽃을 보고 절기을 판단하고 농사계획도 세웠었다.
능소화는 금등화(金藤花), 대화능소화(大花凌宵花), 자위(漢藥名) 등으로도 불리는데, 옛날에는 능소화를 양반집 마당에만 심을 수 있었다고 해서 '양반꽃'이라고도 부른다.
능소화의 꽃가루에는 유독성분은 없지만 갈고리 같은 것이 붙아 있어서 간혹 안과질환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능소화를 독초라고 여긴다.
능소화는 가지에 흡착근(吸着根, 흡착뿌리) 또는 기근(氣根, 공기뿌리)이 있어 나무나 담장을 잘 타고 오를 수 있다.
능소화는 나무나 담장 또는 절벽을 타고 올라가 높은 곳에서 주황색 꽃을 필 때가 제일 예쁘다.
능소화는 중부지방 이남의 절에서 주로 심어 왔으며, 요즈음은 정원에도 많이 심고 있다.
당신을 향해 피는 꽃 / 박남준
.....
혼자서는 일어설 수 없어 나무에, 돌담에
몸 기대어 등을 내리는 꽃
능소화 꽃.....
능소화 / 이원규
꽃이라면 이쯤은 돼야지
.....
주황색 비상등을 켜고
송이송이 사이렌을 울리며
하늘마저 능멸하는
슬픔이라면
저 능소화 만큼은 돼야지
시인들은 시로 능소화의 아름다움을 노래했고, 궁중의 여인들은 '구중 궁궐에 핀 능소화가 여름 한 낮에 주홍빛 꽃을 송이째 뚝뚝 떨어뜨리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가슴 설레지 않을 수 없다.'고 한탄했다.
<능소화 이야기>
아주 먼 옛날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습니다.
임금의 눈에 들어 하룻밤 사이에 빈이 되어 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 임금은 빈의 처소를 한 번도 찾아오질 않았답니다.
게다가 빈의 자리에 오른 다른 이들마다 자신의 처소에 임금을 불러들이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는 가운데서도 마냥 착하기만 했던 소화는 밀리고 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지내며 마냥 임금이 오기만을 기다렸답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소화는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빈이 되었으되 아무런 권세도 누리지 못했던 이 여인, 임금과의 단 하룻밤의 사랑 이후 잊혀진 소화는 초상도 치르지 못하고 그녀의 유언대로 자신이 머물던 처소의 담장 곁에 묻혔습니다.
이듬해 초여름, 그 곳에서 가느다란 줄기가 나와 담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하더니만 담장 위에서, 담장 너머에 예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답니다.
소화의 복숭아 빛 뺨을 닮은 꽃, 행여나 님의 발자국 소리를 놓칠 새라 귀를 닮은 꽃, 이 꽃이 바로 '능소화'입니다.
△ 일영교(日影橋) 너머 활짝 핀 자귀나무꽃이 아침 일찍 찾아온 객을 반가이 맞아주고 있네요.
△ 아침 공양전 경내를 청소하고 있는 학승(學僧)들의 모습입니다.
△ 대웅전(大雄殿)
대웅전(大雄殿) - 조선(1644년), 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뒷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당 내부에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건물이다. 현재 국가 지정 국보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이 법당은 통도사의 중심건물로서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인데 특히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행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 대웅전 내부 모습
△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금강계단(金剛戒壇)
금강계단(金剛戒壇)
영축총림 통도사는 646년(신라 선덕여왕 15)에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통도사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정골(頂骨)과 지절(指節), 치아사리(齒牙舍利), 금란가사(金?袈裟)가 봉안되어 있어 불지종가(佛之宗家)이자 국내에서 가장 큰 가람으로서 국지대찰(國之大刹)의 사격(寺格)을 지닌 사찰이라 할 수 있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錄)』에 보면 원래 통도사가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아름다운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을 메운 후 그곳에 금강계단을 쌓고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또한 창건주인 자장율사에 대한 기록인 『삼국유사(三國遺事)』 「자장정률(慈藏定律)」조의 기록에 의하면 스님이 643년(선덕여왕 12)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지고 온 불사리(佛舍利), 금란가사 대장경 400여 함을 봉안하고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당시의 가람은 자장율사가 쌓은 금강계단을 중심으로 몇 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고려시대인 1085년(고려 선종 2) 통도사의 경내임을 나타낸 사지석표(四至石標), 즉 국장생석표(國長生石標)를 세울 만큼 사세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1235년(고종 22)에 상장군(上將軍) 김리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종의 명을 받아 낙동강 동쪽을 지휘하던 차에 절에 와서 계단의 석종을 들어내고 석함 속의 사리를 예경했다고 한다. 이때 돌함 속에 있는 유리통 하나가 금이 가서 유석이 마침 가지고 있던 수정통을 기부하여 거기에 사리를 보관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예로 보인다.
계단(戒壇)이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 당시 누지보살(樓至菩薩)이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할 것을 청하자 석가모니가 허락하여 기원정사의 동남쪽에 단(壇)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통도사 창건의 근본정신은 바로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근본도량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본래 통도사의 절터는 큰 연못이 있었고, 그 연못에는 아홉 마리 용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자장율사는 이들 용을 교화하여 여덟 마리를 승천(昇天)하게 하고 그 연못을 메워 금강계단을 쌓아 통도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 금강계단은 그 안에 안치된 사리를 친견하고자 열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참배가 이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사리의 영험담과 함께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과 사신들이 여러 차례에 걸쳐 사리를 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의 황실에서도 금강계단을 참배하는 등 참배객이 끊이지 않는 성(聖)스러운 장소로 여겨져 왔다.
고려 말에서 조신시대에 걸쳐 왜구들에 의한 사리 약탈기도가 여러 차례 자행되었는데 이때는 개성 송림사 · 서울 흥천사 · 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니며 난을 피하는 등 사리를 보호하기 위한 승려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어졌다.
현존하는 금강계단은 창건 이후 수차례 걸쳐 중수되었기 때문에 창건 당시의 정확한 구조는 알 수 없다. 다만『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2층으로 위층가운데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 것과 같다는 기록을 통해 그 형태가 현재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계단의 모습은 2중 사각기단 위에 종 모양의 부도(浮屠)가 놓인 석조계단의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는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天人像), 신장상(神將像)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의 중수 과정에서 새롭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강계단 주변에는 층계의 소맷돌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금강역사상(金剛力士像)이 있다.
△ 금강계단(金剛戒壇)과 적멸보궁(寂滅寶宮)
△ 대웅전 남쪽면의 모습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 - 조선(1888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195호
명부전은 대웅전의 동남쪽에 서향(西向)하고 있다. 창건연대는 1369년(공민황 18)이라 전해내려오고 있으나 현재의 건물은 「통도사사적비(通度寺事蹟碑)」에 의하면 1760년(영조 36) 춘파대사(春坡大師)에 의해 개건(改建)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1887년(고종 24)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해인 1888년 (고종 25) 호성대사(虎星大師)가 중건한 것으로 범종루상(梵鍾樓上)의 「명부전중수기(冥府殿重修記)」에 의하면 “1887년(고종 24)봄에 감로당에서 실화로 원통방(圓通房), 화엄전(華嚴殿)과 더불어 명부전이 회록(回祿)되매, 다음날 보집원(普集院)에 대중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방료(房寮)의 회복이 하루라도 급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저승에서 제도받을 중생들이 노좌(露坐)하여 있는 것을 어찌하겠는가’하였다. 1887년(고종 24) 화재가 발생하여, 다음해인 1888년 (고종 25) 호성대사(虎星大師)가 중건하였으나, 범종루상(梵鍾樓上)의 「명부전중수기(冥府殿重修記)」에 의하면 1891년이 되어서야 현재의 명부전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장로(長老) 호성화상(虎性和尙)들이 주관하여 산내(山內)의 18개의 방사 및 암자에서 시주받고 표충사 등 9개처의 타사(他寺)와 전 승통(僧統) 문우대사(文佑大師), 정일화상(定日和尙) 등 수많은 도속(道俗)의 희사(喜捨)로써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모두 마쳤다. 그로부터 애석하게도 호성화상이 입적하였다”라 하고 있다. 이 기문(記文)은 광서(光緖) 16년경인 8월 화주(化主) 영해대사(永海大師)의 기록인데 전당(殿堂)이 소실된 지 3년 후의 기록이다.
현재의 건물은 전면 5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평면(長方形平面)으로 양측칸 2칸씩 별동공간(別途空間)으로 되어 있는 건축양식상 다포식 팔작(多包式八作)지붕으로서 특별한 특징은 없으나 19세기말의 명부전 양식을 나타내주는 한 예로서 문화재적 가치를 갖고 있다. 법당 내부의 중앙에는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을 비롯하여 십대왕(十大王)을 봉안(奉安)하였고 시왕(十王)의 탱화(幀畵)를 모셨으나 탱화는 경내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보호되고 있다. 명부전의 ‘명부(冥府)’라는 말은 저승, 곧 지옥세계를 의미한다. 즉 세상에서 무자비한 살생을 하거나, 도적질, 사음(邪淫), 망어(妄語) 등 온갖 나쁜짓을 하면 사후 명부의 십대왕으로부터 심판을 받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삼악도(三惡途 : 지옥, 아귀, 축생)로 보내고 또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세상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 가운데 지장보살은 지옥의 문전에서 언제나 눈물을 흘리면서 지옥으로 오는 중생들을 교화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일명 명부전을 지장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명부의 주인이 지장보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까닭에 명부전의 경우 시왕탱화가 이 전각(殿閣)의 성격을 잘 나타내 준다. 즉 각 대왕의 주변에는 죄인의 죄목을 살피고 있는 여러 대신(大臣)들의 모습이 있고, 그 아래에는 죄인들이 고통받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 응진전(應眞殿)
응진전(應眞殿) - 조선(1677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196호
응진전은 대웅전 서남쪽 동향한 불전으로 1677년(숙종 3)에 지섬대사(智暹大師)가 창건하였다 전한다. 현존의 건물은 원래의 것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된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형식은 정면 3칸, 특면 3칸의 주심포식(柱心包式) 맞배집으로 비교적 간결하지만 지대석(地帶石), 면석(面石), 갑석(甲石)을 갖춘 고식의 기단 위에 동향(東向)하여 있다.
공포(?包)는 기둥 위에만 짜여져 주심포식을 취하고 있고, 제공(諸貢)은 쇠서를 갖춘 다포식(多包式)의 모양을 하여 절충식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 주심포 형식으로 된 공포는 다포식을 많이 수용한 절충식이다.
현재 응진전에 봉안된 나한도는 근현대 불화사로 유명한 고산당 축연을 비롯한 화승들이 함께 그린 불화로 유명하다. 그리고 외벽의 달마도 또한 명작이다.
불당 내부에는 중앙에 석가여래와 좌우에 미륵보살과 제화갈라(提華褐羅)가 동쪽으로 향하여 봉안되었고 그 주변에는 16나한상과 범천 및 제석천왕상을 좌우에 모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과 함께 16제자상을 봉안한 셈이다. 곧 미륵보살은 석가여래의 일생보처(一生補處 : 다음생에 성불하여 부처님이 될 보살)이고 제화갈라보살은 과거불이기 때문이다. 응진전은 나한전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나한이 범어(梵語)의 아라하트(Arahat)를 한자로 음사(音寫)한 것으로서 그 뜻은 중생의 공양에 응할 만한 수행이 있다는 뜻인 ‘응공(應供)’ 또는 진리에 응하여 남을 깨우친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 삼층석탑 뒤로 세존비각(世尊碑閣), 개산조당(開山祖堂) 그리고 석등 옆에 삼십칠 조도품탑(三十七 助道品塔)이 보입니다.
세존비각(世尊碑閣) - 조선(1706년)
이 비각(碑閣)은 1706(숙종 32)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곧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불사리(佛舍利)를 왜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봉안하여 보관하였다. 그 후 한 개의 함은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통도사 금강계단에 다시 봉안토록 하였고, 또 다른 한 개의 함은 태백산(太白山) 갈반사에 봉안되었음을 석비(石碑) 전면(前面)에 기록(記錄)을 통해 알 수 있다.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고 있어 참고된다. 석비의 건립은 숙종(肅宗) 32년(1706)이며 높이는 2.5m, 폭 1m이다.
이 비각(碑閣)은 1706(숙종 32) 계파대사(桂坡大師)가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중수(重修)하고 석가여래의 영골사리비(靈骨舍利碑)를 세우면서 건립(建立)한 것으로 비석(碑石)에는 불사리의 행적을 소상히 밝히고 있다. 곧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사리를 모셔온 일과 임진왜란 당시 사명대사(泗溟大師)가 불사리(佛舍利)를 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크고 작은 2개의 함에 문수대성(文殊大聖)께서 자장스님께 부촉하신 승지(勝地)이므로 이곳에 다시 봉안토록 하셨고 한 개의 함은 태백산(太白山 : 영변 묘향산)으로, 다른 한 개는 현재의 계단에 봉안토록 하였던 사실들을 석비(石碑) 전면(前面)에 기록(記錄)하고 있다.
비문은 수사간(守司諫) 채팽윤(蔡彭胤 : 1669-1731)이 짓고 글씨는 승정원(承政院) , 도승지(都承旨), 이진휴(李震休)가 썼다. 석비 뒷면의 비음(碑陰)은 성능대사(性能大師)가 짓고 보윤대사(普允大師)가 썼는데 이곳에서는 석가모니의 행적(行蹟)과 함께 각지(各地)의 시주(施主)내용을 적고 있어 참고된다. 석비의 건립은 숙종(肅宗) 32년(1706)이며 높이는 2.5m, 폭 1m이다.
개산조당(開山祖堂)
개산조당은 용화전 옆 서쪽에 위치한다.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아담한 전각이다. 전각 정면에 개산조당이라는 현판이 붙은 솟을문은 해장보각의 조사문으로서 ‘솟을삼문’형식이며 해장보궁(海藏寶宮)으로 통하는 문의 3칸 건물인데 중앙칸이 양 측면칸보다 높게 솟아 ‘솟을삼문’이라고도 한다. 3칸 모두 두 쪽의 널문을 달아 여닫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건물형식은 조선시대 말기의 수법으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당(祠堂)의 솟을삼문과 같다.
37조도품(助道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37가지의 방법을 말합니다.
즉 4염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역(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37보리도법(菩提道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수행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관음전(觀音殿)과 석등(石燈)
관음전(觀音殿) - 조선(1725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전은 용화전 앞에 위치한다. 곧 중로전의 중심법당인 대광명전, 용화전 관음전의 세 법당이 남북으로 나란히 놓인 가운데 제일 남쪽에 위치하는 법당이다. 관음전은 영조 원년(1725)에 용암대사(龍岩大師)에 의하여 초창되었고, 그 이후의 중수 사실은 알지 못하며 근래에 기와를 개수(改修)한 법당이다.
통도사 석등(通度寺 石燈) -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
관음전 전방에는 석등(石燈)이 있는데, 높이는 약 300㎝로서 그 조성수법은 용화전 앞의 석조봉발(石造奉鉢)과 비슷하여 고려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상부의 옥개(屋蓋)와 보주(寶珠)는 착실하게 고식(古式)을 따르고 있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에는 8각의 받침돌을 3단으로 쌓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아래받침돌의 옆면에는 안상(眼象)을 얕게 새겼고, 윗면에는 엎어놓은 연꽃무늬를 조각했으며, 가운데기둥은 중앙에 3줄의 테를 둘렀다. 윗 받침돌에는 위로 솟은 연꽃무늬를 장식하고, 4각의 화사석은 각 면에 네모난 창을 크게 뚫어 불빛이 퍼져 나오게 하였다. 지붕돌은 귀퉁이마다 꽃장식을 달았으며 꼭대기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를 놓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여러 가지 양식뿐만 아니라 화문(花紋)의 조식(彫飾)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전체 높이는 약 350cm이고,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 대웅전과 관음전
△ 대웅전을 배경으로 한컷...
△ 영산전(靈山殿)
영산전(靈山殿) - 조선(1714년), 경남 유형문화재 제203호
영산전은 하노전(下爐殿)의 중심 건물이다. 남향한 영산전의 전방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동서에 놓여 있고, 그 중앙 지점에는 신라 말기의 3층석탑 1기가 있다.이 탑은 현 위치에서 동북쪽 약 1.5m 지점에 경사진 채 있었으나 최근에 현 장소로 이동하여 복원되었다.
영산전 팔상탱(通度寺 靈山殿 八相幀) - 보물 1041호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가로 151㎝, 세로 233.5㎝의 비단에 채색한 그림이다. 팔상탱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출가상, 설산(雪山)에서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전법상,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열반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층석탑 - 경남유형문화재 제18호
영산전 앞에 서 있는 이 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는 기둥모양이 표현되고 특히 아래층에는 안상(眼象)이 얕게 조각되어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올려 조성하고, 지붕돌 처마의 곡선처리와 귀퉁이에서의 치켜올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붕돌 밑면에 새긴 4단의 받침도 탑의 외형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부분으로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탑 앞의 배례석과 함께 통도사의 석조문화재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배례석은 직사각형으로 연화무늬를 조식하였는데 음각된 명문(銘文)에 의하면 1085년(선종 2)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을 알 수 있다.
석탑은 전체 높이가 약 3.5m이고 구성은 4장의 큰 장대석(長臺石)을 다듬어 지대석(地臺石)을 설치하고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인 이중 기단을 형성하였다. 상층 기단에는 모서리에 각각 우주(隅柱)를 새겨넣고 그 사이에 탱주(撑柱)를 두었으며, 하층 기단에는 각 면에 안상(眼象)을 3개씩 조각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석탑의 장식적 기능을 강조하던 통일신라시대 말기, 즉 9세기 이후의 특징이다.
각 탑신에는 우주만 새겼을 뿐 별다른 조각은 없으며 옥개석(屋蓋石)은 옥개받침을 4단으로 축소시키고 있어 역시 시대성을 반영한다. 상륜부는 3층 옥개석 위에 2단 받침형의 갑석을 가지는 노반(路盤)을 설치하고 그 위에 복발(覆鉢)과 보개(寶蓋)가 남아 있는데 노반 이상은 원래 이 탑의 부재였는지 의문이다.
이처럼 석탑 기단에서 불상이 발견된 예로 경주의 미탄사지(味呑寺址) 삼층석탑과 경주 남산의 천룡사지 삼층석탑(天龍寺址三層石塔:보물 1188), 그리고 목탑의 경우 부여 군수리사지(夫餘軍守里寺址:사적 44)의 목탑지 등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예는 지진구(地鎭具), 즉 탑을 건립하기 전에 땅의 힘을 누르기 위해 매납된 유물이거나, 혹은 사리를 봉안하는 탑의 건립과정에서 소요되는 여러 단계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으로, 건탑의식(建塔儀式)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 탑은 1987년 해체 복원시 기단의 맨 윗돌에서 조선시대의 백자가 발견되어 이전에도 탑의 보수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경남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다.
△ 불이문(不二門)
불이문(不二門) - 조선(18세기 이후), 경남 유형문화재 제252호
이 문은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경내의 마지막 문으로 일명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즉 동구(洞口)밖의 산문(山門)과 일주문, 천왕문(天王門)을 거쳐 들어온 마지막 문이다. 이 문은 1305년(충렬왕 31) 처음 지었으나 현재의 건물은 언제 중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세부수법으로 보아 조선 주익 이후의 것으로 생각된다.
△ 약사전(藥師殿)
약사전(藥師殿) - 조선(18세기), 경남 유형문화재 제197호
약사전은 극락전과 함께 공민왕 18년(1369) 성곡대사(星谷大師)가 초창하였으며 이후의 중건에 대하여는 알 수 없으나 18세기초 극락전과 함께 중건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건물양식으로 보아 18세기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1칸으로 하여 주칸에 공포를 배치하지 않고 다포식이면서도 앞뒷면에만 공간포를 배치한 점이 특색이다.따라서 측면에는 평방(平方)을 생략하고 있는데 그 기법도 다른 건물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처리라 할 수 있다.
△ 목조수통
△ 천왕문(天王門)
천왕문(天王門) - 조선(18세기), 경남 유형문화재 제250호
천왕문은 하로전으로 들어오는 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주심포계 익공식 맞배집으로 고려 충숙왕 6년(1337) 취암대사에 의해 초창하였으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 이후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구조는 비교적 간결하며 5량 구조로 되었다. 건물 내부는 중앙칸을 통로로 하고 좌우 측간에는 목조의 거대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배치하고 있다.
△ 일주문(一柱門)
일주문(一柱門) - 조선(1770)
일주문은 절에 들어오는 첫 번째 문으로 기둥의 배열이 한 줄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일주문의 초창은 고려 충렬왕 31년(1305)이며 현 건물은 영조 46년(1770) 두섬대사(斗暹大師)가 중건한 것이다.
일주문의 ‘일주(一柱)’란 이러한 기둥 배열의 뜻도 있겠지만, 본래의 의미는 『법화경(法華經)』신앙에서 유래되는 것으로 짐작된다. 즉 『법화경』의 대의가 ‘회삼귀일(會三歸一)’, 다시 말하면 부처가 될 수 있는 방편인 성문행(聲聞行- 불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독각행(獨覺行- 열심히 참선수행하는 것)·보살행(菩薩行)를 통해 일승(一乘)의 경지 즉 부처가 될는 궁극적인 방법을 상징한다. 따라서 반드시 일주문은 ‘일주삼칸(一柱三間)’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도사의 일주문(一柱門) 역시 전면 3칸뿐이며 측면은 없다.
“영축산통도사(靈鷲山通度寺)”란 편액은 흥선대원군의 필적으로 유명하다. 주련(柱聯)에는 ‘국지대찰(國之大刹), 불지종가(佛之宗家)’란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의 글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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