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20011년 춘계 성지순례 (봉화 청량사, 안동 하회마을) 본문
♣ 언 제 : 2011년 4월 17일 (일)
♣ 어디로 : 봉화 청량산 청량사와 안동 하회마을
매년 봄이면 직장의 불교회에서 주관하는 전국의 유명 사찰을 찾아 떠나는 성지순례길에 오른다.
직장생활에 바쁘다보니 자칫 소흘해지기 쉬운 가족과의 사랑과 유대를 여행을 통해 다시금 되새겨보는 유익한 시간이기도 한 좋은 기회라 이미 가본 곳이지만 아내에게 청량사와 청량산의 멋진 풍광을 보여주고 싶어 신청해 뒀었는데 D-데이가 도래하여 준비를 마치고 직장에 달려가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몸을 싣고 청량사를 향해 길을 떠난다.
이번 성지순례 코스는 봉화에 있는 청량산 청량사와 안동 하회마을이다.
봄철 순례길은 당일치기라 가족 단위로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직원들이 많아 버스 4~5대는 가곤 했는데 올해는 코스가 괜찮아서 그런지 신청자 수가 많아 버스가 자그마치 7대가 출동을 하는 초대형 순례단이 되어 버렸다.
3호차 인솔을 맡아 아내와 함께 맨 앞자리에 앉아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오랫만에 들으며 차창 밖으로 보이는 따사로운 봄볕 가득한 우리의 산하를 눈에 담으며 남안동IC를 빠져나온 버스는 안동시내를 거쳐 봉화 춘양을 지나 낙동강의 지류천인 이나리강을 끼고 진행하니 범상치 않은 청량산의 암봉들이 나타난다. 벌써 만 2년이 지나버린 시간이 흘렀지만 변함없이 그 모습 그대로 찾아온 객을 반겨준다.
일주문을 지난 버스는 산행을 온 산꾼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는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주차장에 일행을 내려놓는다.
축융봉 입구까지 버스가 올라가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가기에는 버거울 것 같아 시멘트도로를 따라 곧장 청량사를 향해 오르기 시작한다.
더운 날씨 탓에 가파른 오름길에 땀이 나기 시작하더니 끝내 등줄기가 흥건해지기 시작한다. 15분 가량 도로변을 따라 피어난 야생화들을 구경하며 올라서니 언제 보아도 멋진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청량함과 고귀함을 간직한 청량사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거대하고, 빽빽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열두 봉우리가 찾아온 나그네의 눈길을 잡는다.
▣ 청량산(淸凉山)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峰)을 아나니
나와 백구(白鷗) 백구(白鷗)야 헌사하랴
못미들손 도화(桃花)로다 도화(桃花)야
떠나지 마라 어주자(漁舟子) 알가 하노라"
청량산(淸凉山)은 경북 봉화군 명호면과 재산면, 안동시 도산면과 예안면에 위치하고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하고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어 예로부터 소금강으로 불려진 명산이다.
기록에 의하면, 청량산은 고대에는 수산(水山)으로 불려지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청량산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조선시대 풍기군수 주세붕이 청량산을 유람하며 명명한 12봉우리(일명 6.6봉)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청량산에는 지난 날 연대사(蓮臺寺)를 비롯한 20여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지금은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과 응진전(應眞殿)이 남아있다. 또한 퇴계 이황이 공부한 장소에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와 통일신라시대 서예가 서성(書聖) 김생(金生)이 글씨공부를 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김생굴(金生窟), 대문장가 최치원이 수도한 풍혈대(風穴臺),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와서 쌓았다는 산성 등이 있다.
청량산은 1982년 8월에 경상북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07년 3월에 청량사 주변지역을 중심으로 공원 일부가 국가지정 문화재 명승 23호로 지정되었다.
▣ 청량사[淸凉寺]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북곡리에 있는 사찰.
663년(신라 문무왕 3년) 원효대사가 창건했으며, 청량산 도립공원 내 연화봉 기슭 열두 암봉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암봉에는 소나무와 각종 활엽수가 울창하며,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청량사가 내청량이라면 응진전은 외청량이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본시 매우 큰 절이었으나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절은 유리보전(경북유형문화재 47)과 응진전만 남은 채 피폐했다. 법당에는 약사여래불을 모셨다는 뜻으로 공민왕이 친필로 쓴 유리보전(琉璃寶殿)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종이로 만든 지불(紙佛)이 있는데, 지금은 금칠을 했다. 절이 있는 청량산에는 김생(金生)이 공부하던 김생굴과 공민왕당, 퇴계 이황이 즐겨 머물며 수학하던 정자 오산당이 있다. 본전 앞에는 오래된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주변에 청량산도립공원, 고산정, 도산서원, 석빙고, 안동호, 봉정사, 일월산 등의 관광지가 있다.
△ 선학정이 있는 청량사 입구입니다.
△ 청량산 청량사 일주문
△ 가파른 시멘트도로를 따라 올라서니 멀리 연화봉이 고개를 내밀고 있네요.
△ 작지만 아름다운 우리네 들꽃입니다. - '남산제비꽃'
△ 부처님의 모습이 보인다는 연화봉의 장대한 위용입니다.
△ "바람이 소리를 만나면..." 사찰 내의 전통 다원(茶園)인데 오늘은 들러볼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 통나무를 이용한 배수로가 특이해서 담아봅니다.
△ 청량사 종각(鐘閣)
△ 청량사 오층석탑과 삼각우송
원효대사 청량사 창건시 말 안듣는 뿔이 셋 달린 소를 시주 받아 절 창건시 재목 운반 등 일을 부리다가 청량사 준공 하루 남기고 생을 다하여 묻은 자리에 가지가 셋달린 소나무가 자라 이를 삼각우송이라하고 소를 묻은 자리를 삼각우총이라 전한답니다.
△ 청량사 유리보전 부처님
(주불인 약사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인 지장보살(좌)과 문수보살)
♤ 청량사 유리보전((琉璃寶殿)
경북 유형문화재 제 47호
명호면 북곡리 청량산 한 가운데 자리한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설과 동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는 고찰로 한때는 연대사를 비롯한 27개의 암자가 있어서 불교의 요람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 전란을 겪으면서 증·개축하였다고 전해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건물의 구조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다포계인 듯하면서 주심포계와 절충한 양식을 하고 있어 현존하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공포는 외1출목 내 2출목의 형식으로 첨차의 짜임이 고졸하고 쇠서의 내부 끝은 연화 및 용수형 조각을 새기고 있으며, 정면 중간기둥위에는 용두와 용미를 주두 밑에 내외로 뻗게 하고 있다. 내부는 판상이고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천장에는 운궁이 설치되어 있다. 이 건물의 큰 보 밑에 간주를 세워 후불벽을 구성한 특징은 다른 건물에서 보기 드문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불단에는 건칠불로 알려진 약사여래좌상과 협시보살인 지장보살과 문수보살이 봉안되어 있으며, 유리보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온다.
△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와 화려한 연등이 경내를 가득 수놓고 있었답니다.
△ 공민왕의 친필 현판 유리보전 모습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라는 뜻이라 한답니다).
△ 연등의 행렬이 참으로 아름답네요.
△ 야단법석(野壇法席)입니다.
△ 두손 모아 주지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예를 올리는 모녀의 모습이 참으로 귀해 보입니다.
♤ 야단법석 [野壇法席]
野 : 들 야
壇 : 제터 단
法 : 법 법
席 : 자리 석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 멀리서 찾아온 중생들을 위해 설법을 하고 계시는 청량사 주지이신 "지현"스님
(가까운 곳에 사찰이 없어 절에 갈 수 없는 농촌의 불자들을 위하여 마을회관을 빌어 출장법회도 하시는 분이랍니다.)
△ 산괴불주머니
△ 현호색
(보기 힘든 흰현호색이 이곳에는 참으로 많이 있네요.)
△ 봄철 흔하게 볼수 있는 꽃 중의 하나인 '개별꽃'
△ 청량정사 (淸凉精舍)
♤ 청량정사(淸凉精舍)
경북 문화재 자료 제244호
경일봉(擎日峯) 아래 김생굴(金生窟) 밑, 유리보전(琉璃寶殿)에서 응진전(應眞殿)으로 가는 도중에 자리하고 있다. 이중봉(李中鳳)이 쓴「오산당중건기(吾山堂重建記)」에 의하면 이 건물은 선생이 남기신 뜻을 받들어 사림(士林)의 합의(合議)로 조선 순조(純祖) 32년(1832)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이곳은 퇴계 선생을 기리는 수많은 후학들의 학문과 수양의 장소가 되었으며, 1896년에는 청량의진(淸凉義陣)이 조직되어 의병투쟁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현재의 건물은 1896년 일본군의 방화(放火)로 소실되었던 것을 1901년에 중건한 것이다. 강당 10칸, 부속건물 6칸으로 되어 있고 당은 오산당(吾山堂), 헌은 운서헌(雲棲軒), 요는 지숙요(止宿寮), 문은 유정문(幽貞門)이다.
△ 청량사 '산꾼의 집'
△ 달마화의 명장으로 소문난 산꾼의 집은 무척 고풍스러웠네요.
△ 누구든지 산행길에 들러 약차 한잔 무료로 얻어 마시고 쉬어가는 초막입니다.
‘오고가고 아픈 다리 약차 한 잔 그냥 들고 쉬었다 가시구려.’(초막산인)
청량사 유리보전에서 어풍대로 올라가는 계곡의 길목. 퇴계선생을 기리기 위해 지은 오산당(吾山堂) 옆의 작은 초막 ‘산꾼의 집’ 안에 붙은 글귀다.
이렇듯 깊은 산 중이라면 대처보다 두 세배는 더 받아도 됨직한 약차인데 ‘그냥’ 들고 가라니…. 그래서 누구든 머뭇거리게 마련.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다.
‘초막산인’ 이대실씨가 무료로 내는 것이다.
공휴일에는 2000여잔이나 나갈 만큼 인기인 이 차는 수행스님들이 들던 것인데 맛도 좋다고 해서 따끈한 약차 한잔하고 나와 어풍대를 들르기 위해 가파른 오름길을 올라선다.
△ 어풍대에서 바라본 청량산의 기묘한 암봉들의 모습입니다.
(좌로부터 연적봉, 탁필봉, 자소봉)
△ 연화봉
△ 연꽃의 꽃술에 해당하는 자리에 앉아 있다는 청량사의 전경입니다.
△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마셔서 더욱 총명해졌다 해서 이름 붙여진 총명수(聰明水)
△ 깎아지른 벼랑 위의 바위가 위태로워 보이지만 응진전은 마냥 한가롭기만 합니다.
♤ 응진전(應眞殿)
현재 청량사(淸凉寺)의 부속 건물로 금탑봉 중간 절벽에 위치해 있다. 금탑봉 중간절벽 동석(動石) 아래에 위치해 있었던 청량사의 부속 건물의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맞배기와집으로 내부에는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앞뒤가 모두 천길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뒤쪽 절벽위에는 동풍석(動風石)이 요사체 옆의 절벽 사이로는 감로수(甘露水)가 흘러나온다. 또한 법당 앞에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는데 주세붕은 자신의 자(字)를 따서 경유대(景遊臺)라 이름하였다.
△ 진달래와 생강나무의 색감이 참으로 곱고 조화롭네요.
△ 현호색
△ 올해 처음 만난 '각시붓꽃'의 수줍은 모습에 살며시 카메라를 들이대 봅니다.
△ 따스한 햇살아래 군락을 이루고 있는 '양지꽃'
△ 산수유
△ CF 광고로 더 유명해진 '애기똥풀'
△ 버스를 타고 청량사를 빠져 나와 되돌아보니 역시 명불허전의 산세입니다.
연화봉 기슭 한 가운데 연꽃처럼 둘러쳐진 꽃술 자리에 자리 잡은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며 송광사 16국사의 끝 스님인 법장 고봉선사(1351-1426)에 의해 중창된 천년 고찰이라고 한다.
유리보전에 들러 쌀 공양을 올리며 삼배로써 부처님을 알현하고 나와 '야단법석'이라고 하는 3층석탑 앞에 모여 주지스님으로 부터 법문을 듣고 설선당으로 자리를 옮겨 점심공양을 마치고서 어풍대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산꾼의 집'에 들러 내부를 잠시 구경하고 어풍대에 서서 천하절승 청량산의 기암 봉우리들과 그 아래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는 아름다운 절 '청량사'를 배경으로 다녀간 흔적을 남기고 응진전을 지나 바쁜 걸음 옮겨가니 청량사에서 곧바로 도로로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하산을 하던 순례단 일행들과 합류하여 일주문 입구가 있는 선학정으로 이동하여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몸을 싣고 하회마을로 이동을 한다.
△ 전에 없던 '하회장터' 마당이 생겨 먹거리와 기념품을 팔고 있더군요.
△ 목공예 제품들이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 하회탈을 표현한 목공예 작품들.
△ 만첩홍매화
♠ 안동하회(安東河回)마을
안동하회마을(중요민속자료 제122호)은 풍산류씨가 600여 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마을이며, 와가(瓦家:기와집) 초가(草家)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 된 곳이다. 특히 조선시대 대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河回)라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다. 하회마을은 풍수지리적으로 태극형·연화부수형·행주형에 일컬어지며, 이미 조선시대부터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도 유명하였다. 마을의 동쪽에 태백산에서 뻗어 나온 해발 271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 곳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하회마을의 집들은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기와집)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하회마을에는 서민들이 놀았던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였던 '선유줄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전승되고 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 안동의 민속주 안동소주입니다.
△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편안함을 기원하는 격문이 새롭네요.
△ 활짝 핀 개나리와 자목련이 따스한 봄날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 활짝 핀 벚꽃과 파란 하늘의 멋진 앙상블입니다.
△ 삼신당 신목(三神堂 神木)
△ 양진당(養眞堂)
♠ 양진당(養眞堂) - 보물 제306호.
우뚝 솟은 솟을 대문과 장엄한 분위기가 감도는 「양진당(養眞堂)」은 풍산 류(柳)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사랑채에 걸려있는 「입암고택(立巖古宅)」현판은 겸암 류운룡(柳雲龍, 1539~1573)선생의 부친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영, 1515~1573) 선생을 지칭한다. 당호인 「양진당(養眞堂)」은 겸암 선생의 6대 자손인 류영(柳泳, 1687~1761)공의 아호(雅號)에서 유래하였다.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 부르며, 양진당(養眞堂)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랑채는 고려건축양식이며 안채는 이조건축양식으로서 고려양식과 이조양식이 공존하는 고택이다.
풍산류씨의 하회마을 입향조(入鄕祖) 전서(典書) 류종혜(柳從惠) 공(公)이 13세기 입향 당시에 처음 자리잡은 곳에 지어진 건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일부가 소실 된 것을 17세기에 중수하여, 고려말 건축양식과 조선중기 건축양식이 섞여 있다. 하회마을에서는 드물게 정남향(正南向)의 집이며 99칸으로 전해오지만,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
문간채와 행랑채가 길게 이어져 있고, 口자 형의 안채와 그 북쪽의 사랑채를 一자 형으로 배치하였으며, 오른편 북쪽에는 2개의 사당(祠堂)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입암 류중영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공신이나 대학자 등의 탁월한 자에게만 영원히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말하며, 불천위로 인정되면 4대조까지 올리는 제사의 관행을 깨고 후손 대대로 제사를 올린다.)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겸암 류운룡 선생의 불천위 사당이다.
△ 입암(立巖) 류중영 선생의 호를 따서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고도 부른다네요.
△ 만지송(萬枝松)
(한 나무에서 가지가 저렇게 많이 나올수 있다니... 참으로 희한하네요.)
△ 충효당(忠孝堂)
♠ 충효당(忠孝堂) - 보물 제414호
충효당은 문충공 서애 류성룡의 종택이다. '서애종택'이라고 부르지만, 현재의 충효당은 서애 생존시의 집은 아니다. 서애는 현재 충효당이 지어지기 이전의 집에서 소년기와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30여년 몸담은 관직에서 파직당하고 낙향했을 당시의 집은 극히 단출했다고 한다. 선생은 64세 때인 1605년 9월에 하회마을이 수해를 당해 풍산읍 서미동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에서 기거하다가 1607년 5월 6일 삼간초옥 농환재에서 타계했다.
지금의 충효당은 서애 사후에 지은 집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선생이 초가삼간에서 돌아가신 후, 선생의 문하생과 사림이 장손(長孫) 졸재(拙齋) 원지(元之)공을 도와서 지었고, 증손자 의하(宜河)공이 확장한 조선중엽의 전형적 사대부(士大夫) 집으로서, 대문간채, 사랑채, 안채, 사당으로 52칸이 남아있다.
충효당 내에는 영모각이 별도로 건립되어 서애선생의 귀중한 저서와 유품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바깥마당에 엘리자베스2세의 방문기념식수가 있다.
△ 마을이 끝나는 곳에 있는 불에 탄 고목나무.
△ 초가집 짓고 사는 현지인들은 문명의 이기를 제대로 누리지 못해 많은 불편이 있겠다 싶네요.
△ 수령이 400년 된 소나무.
△ 냉이
△ 쇠뜨기
△ 강변을 따라 늘어선 벚꽃의 화려한 춤사위를 보노라니 두 눈이 그저 황홀할 따름입니다.
△ 만송정 숲에서 건너다 본 부용대
♠ 부용대 [芙蓉臺]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안동하회마을의 서북쪽 강 건너 광덕리 소나무 숲 옆에 있는 해발 64m인 절벽이다.
태백산맥의 맨 끝부분에 해당하며 정상에서 마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부용대라는 이름은 중국 고사에서 따온 것으로 부용은 연꽃을 뜻한다. 처음에는 북애(北厓)라 했는데 이는 하회의 '북쪽에 있는 언덕'이라는 뜻이다. 아래로 낙동강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옥연정사와 겸암정사, 화천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 안동 하회마을 만송정숲 [安東河回ㅡ萬松亭ㅡ]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2006년 11월 27일 천연기념물 제473호로 지정되었다. 안동 하회마을(중요민속마을 122호) 북서쪽 강변을 따라 펼쳐진 넓은 모래 퇴적층에 있는 소나무숲이다.
조선 선조 때 서애(西厓) 유성룡의 형인 겸암(謙菴) 유운용(1539~1601)이 강 건너편 바위절벽 부용대(芙蓉臺)의 거친 기운을 완화하고 북서쪽의 허한 기운을 메우기 위하여 소나무 1만 그루를 심었다고 하여, 만송정(萬松亭)이라 한다. 1983년에 세운 만송정비(萬松亭碑)에는 이 솔숲의 내력과 함께, 현재의 숲은 76년 전(1906년)에 다시 심은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숲에는 수령 90~150년 된 소나무 100여 그루와 마을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심는 작은 소나무들이 함께 자란다. 이 소나무들의 크기는 나무높이 16~18m·가슴높이 줄기지름 30~70㎝ 정도이다. 이 숲은 여름에는 홍수 때 수해를 막아주고 겨울에는 세찬 북서풍을 막아주며, 마을사람들의 휴식공간 혹은 문화공간으로 활용된다. 보호면적은 47만 6,430㎡이다.
매년 음력 7월 16일 밤에는 이 숲에서 강 건너편 부용대 꼭대기까지 밧줄로 이어 불꽃을 피우는 선유(船游)줄불놀이가 펼쳐진다. 부용대에서부터 밧줄을 타고 내려오며 참나무숯의 불꽃이 하늘에서 터지고, 그 빛이 강물에 비치는 모습은 장관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의 뱃놀이와 함께 펼쳐졌다고 하니 그 풍류를 짐작할 수 있겠다.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이 줄불놀이는 일제강점기부터 수십 년간 중단되다가 최근 다시 이어지는 전통놀이이다.
중요민속마을로 지정된 하회마을과, 그 마을을 휘돌아 흐르는 낙동강, 그리고 맞은편의 부용대와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난 마을숲으로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매우 크다.
△ 벚꽃이 화려하게 수놓는 강변 산책로를 걸으며 성지순례 일정을 마무리 합니다.
몇년 전 이곳 하회마을을 찾아 옛 선인들의 해학과 풍자를 웃음 한마당으로 풀어내는 그 유명한 하회별신굿탈놀이 공연을 보면서, 서애 류성룡 선생의 충효당을 보면서 풍산 류씨 가문의 대단함을 몸소 체험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몇 해가 흐른 지금 그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유유자적 봄볕 따사로운 골목길을 이곳저곳 다니다보니 어느 덧 정해준 관람 마감시간은 코 앞에 다가와 아쉬운 마음으로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와 셔틀버스에 몸을 싣고 주차장으로 되돌아온다.
조금은 부족한 듯한 시간이라 충분한 관람이 되지 못해 성에 차질 않지만 단체로 나들이 온 탓에 욕심은 접어야 하는게 순리리라.
예전보다 깔끔하게 정돈된 마을 모습이 보기에도 좋았고 차량출입을 막아 걸어서 출입을 할수 있게 해 놓은게 무엇보다 맘에 들었다.
다음 다시 올 기회가 있다면 주차장에서 둘레길을 따라 걸으며 낙동강의 정취를 맘껏 느끼며 걷고 싶다.
오래오래 지금의 모습 잘 간직하여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후손 대대로 잘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 가슴 가득히 안고서 하늘을 가릴 정도의 벚꽃 터널을 걸어가는 발걸음은 만족스런 하루를 보낸 탓인지 밝은 마음처럼 가벼워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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