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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팔공산 파계사 둘레 한바퀴(파계지구-해일봉-성전암-들뫼능선) 본문

◈ 산행이야기/☆ 2012년도 산행

팔공산 파계사 둘레 한바퀴(파계지구-해일봉-성전암-들뫼능선)

해와달^^* 2012. 2. 7. 13:30

♧ 산행일자 : 2012. 02. 04 (토) 날씨 : 맑음

♧ 산행장소 : 대구광역시 동구 송정동, 신룡동, 신무동 일원

♧ 산행인원 : 차가운 겨울 바람과 함께...

♧ 산행코스 : 공원관리사무소-해일봉-성전암-파계재-들뫼능선-제비바위능선-초소봉-매표소 입구-공원관리사무소

♧ 산행시간 : 약 5시간 40분(식사 및 휴식, 쉬엄쉬엄)

 

◈ 산행기

오늘도 어김없이 산으로의 나들이를 떠나고자 장비를 챙겨 애마를 몰고 나선다.

코스는 내심 정한 바 있어 망설임없이 대구를 향해 고속도로를 달려 대구의 진산 팔공산 자락으로 접어들고 있다. 팔공 IC를 빠져나와 봉무동을 거쳐 지묘동 방향으로 기수를 돌려 파계사 입구의 공용주차장을 지나 공원관리사무소 옆 공터에 숨돌릴 틈 없이 달려와 열이 바짝 올라있는 애마를 쉬게 한다.

온 몸을 감싸는 차가운 바람에 잠시 망설여지지만 그저께의 수십년만의 한파에 비하면 그야말로 따뜻한 봄날씨다.

배낭을 들쳐메고 관리사무소 비로 뒷에 있는 공중화장실을 돌아 우측 도로를 따라 방향을 틀면 이내 좌측으로 '등산로 폐쇄'를 알리는 현수막이 보인다.

앞서 몇 분의 등산객이 현수막 아래로 통과하여 숲으로 빠져 들어간 상태라 거리낌없이 무작정 따라 들어간다.

소나무가 군락을 이룬 오름길의 음지에는 아직도 잔설이 깔려있어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한발한발 내디디며 처음 밟아보는 파계사 서쪽 능선을 올라선다.

 

 

'갈대'님의 방에서 업어온 산행지도

 

 

공원관리사무소를 끼고 좌측으로 진행하면 나오는 화장실을 지나 우측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기면

 

 

좌측으로 '등산로 폐쇄'를 알리는 현수막이 있는 곳이 들머리입니다.

 

 

심설산행을 못한 올 겨울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눈을 밟아볼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고도를 높여가는 발걸음에 탄력이 붙기 시작합니다.

 

 

눈 덮힌 가파른 오름을 헐떡거리며 올라선 끝에는

 

 

도덕산이 건너보이는 첫 전망대가 기다리고 있어 잠시 휴식을 하고 갑니다.

 

 

소담스러운 눈을 밟으며 마음 속의 때 역시 깨끗해졌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삼각점이 있는 해일봉(666.3m)

 

 

가파르고 미끄러운 오름길을 힘겹게 올라서니

 

 

멋진 조망을 보여주는 바위전망대에 당도하며 힘들여 올라온 보람을 찾게 됩니다.

 

 

몇달 전 걸어보았던 응해산(좌)과 도덕산이 건너보이고

그 아래 송정동에 채 녹지않은 하얀 눈이 온 마을을 뒤덮고 있는 모습입니다.

 

 

 

 

성전암 갈림길

 

(← 송정동, ↑ 도각봉, ↗ 성전암)

 

 

한국 불교계의 선지식이셨던 성철 큰 스님의 흔적을 간직한 곳인 성전암으로 가는 길은

산사면을 따라 오롯이 나있는 눈덮힌 소로의 옛길이었네요.

 

 

세상의 온갖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순백의 고결함을 닮고 싶고

 

 

장구한 세월을 온갖 풍상에도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켜온 장송의 굳건함도 배우고 싶은데

 

 

녹록치 않은 세속에서의 생활이 쉬 허락치 않을 듯 합니다.

 

 

아담한 '성전암 오층석탑'을 지나

 

 

'성전암 현응선원 유래 안내문'을 읽어보고 일주문을 들어서며 합장 반배로 인사하고

 

 

벼랑 위에 터를 잡은 성전암의 탁월한 자리매김에 그저 탄복할 따름입니다.

 

 

관음전

 

 

관음전 내부 모습

 

 

'출입금지' 팻말에 진입을 포기하고 되돌아나와 산행을 계속합니다.

 

 

오층석탑 뒤의 가파른 오름을 올라서 내려다 본 성전암 전경

 

 

그 흔한 시그널 하나없는 가파르기 그지없는 오름길의 바윗길에

 

 

토끼길 수준의 희미한 등로를 쫓아 시경계능선을 찾아 오르는 길엔

 

 

대공포진지 인듯 포신을 드러낸 기묘한 바위들이

 

 

여러 방향으로 정조준을 하고 있는 폼새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요새처럼 성벽을 둘러쳐 앞을 가로막는 암벽을 에돌아

 

 

미끄러운 급사면을 헐떡이며 올라서니

 

 

도각봉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시경계능선에 당도하게 됩니다.

 

 

능선에 올라서니 드센 바람에 옷깃을 여미지만

잘 생긴 소나무를 만나니 바삐 내딛던 발걸음은 저절로 멈춰집니다.

 

 

돌 하나에 염원을 담아 바위에 올려놓은 이의 마음은 어떠할지...

 

 

바람에 실려 차곡차곡 쌓인 눈밭에 살짜기 발도 담궈보며 깊이를 가늠해보고

 

 

가팔환초 종주 때 만났던 한티재와 도각봉으로 갈라지는 삼갈래봉(834m)에도 올라봅니다.

 

 

언제보아도 정겹게 느껴지는 돌불바위군(가족바위)

 

(이곳에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점심시간을 가져봅니다.)

 

 

헬기장봉(830m)에서 바라본 파계봉(991m)의 전경

 

 

능선 상의 바위전시장들을 카메라에 담고

 

 

명물인 쌍둥이소나무 역시 그냥 지나칠리 만무하지요.

 

 

파계사, 제2석굴암 갈림길인 파계재

 

 

이어지는 오름을 올라서 종주등산로 NO.138 이정표에서

우측의 사면길로 접어들어 하산구간으로 접어듭니다.

 

 

허리길을 돌아나가는 등로에 경사가 심하고 눈까지 덮혀있어 안전산행을 위해 아이젠을 착용했지요. 

 

 

종주등산로 NO.137번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합류가 되고 편안한 산길을 걷다보니

 

 

바위 틈에 자라고 있는 커다란 소나무를 보면서 생명의 끈질김도 느끼고 멋들어진 바위도 바라보면서

 

 

인적없는 호젓한 산길을 홀로 걷는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걷다보니

 

 

좌측으로 학생야영장이 있는 안부 3거리에 도착하게 되네요.

 

(4-10. ← 팔공학생야영장, ↑ 들뫼능선)

 

 

4-9 팻말이 있는 787봉

 

 

4-8 팻말을 지나 안부 갈림길(↑ 들뫼능선, ↘ 파계사)에서

마주보이는 마지막 오름길인 침목구간을 올라서 5분여 진행하면

 

 

본격적인 하산길로 접어들게 될 중요 포인트인 4-7 팻말이 있는 삼거리에 당도하게 됩니다.

 

(4-7, ↓ 늘뫼재, ← 식당가)

 

 

조망이 뛰어난 제비바위 전망대에서 다시 한번 멋진 조망을 즐기고

 

 

예전 산불감시초소가 있었던 초소봉에서 지나온 능선을 돌아봅니다.

 

 

오전에 걸었도각봉에서 삼갈래봉으로 이어지는 시경계능선이 건너다 보이네요.

 

 

파계봉(995m)과 4-9 팻말이 있던 787봉 뒤로 파란 하늘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식당가 방향인 좌측으로 내려가려다 차량회수가 수월할 것 같아 우측으로 진행을 합니다.

 

 

파계사 매표소 입구에 있는 보호수인 현응대사 나무를 사진에 담으며 오늘의 산행을 종료합니다.

 

 

파계사 현응대사나무(보호수, 수령250년, 느티나무)

 

신라 애장왕 5년(804년) 심지 대사가 개산(開山)한 파계사는 조선조 선 조때 계관(戒寬) 스님, 숙종 21년(1695년) 현응 대사(玄應 大師)에 의해 중창돼 오늘날의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현응 대사의 법명(法名)은 영원(靈源)인 듯하고 출신이 어딘지, 언제부터 파계사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사찰이 관(官)이나 양반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는 걸 매우 못마땅해 한것 같다. 대사는 이런 횡포를 막는 길은 왕에게 직접 아뢰는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동료 스님들에게 알리고 서울로 올라가 왕을 뵈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중궁궐 깊은 곳에 거처하는 지존(至尊)을 일개 시골 스님이 만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3년이란 세월을 허송한 영원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내려 오기로 작심한 그날 밤 숙종(1674∼1720)이 한 승려가 대궐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하도 선명한 꿈이라, 신하를 시켜 남대문 밖을 살펴보게 하였더니 마침 한 승려가 보여 왕과 대면케 하였는데 그가 바로 현응 대사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숙종은 애로사항을 들어주는 대신 왕자 회임(懷妊)이 되도록 기도해 줄 것을 당부했다. 대사는 도반인 농산(聾山) 스님에게 부탁해 수락산에서 열심히 기도하도록 해 숙빈 최씨가 옥동자를 낳게 되니 그가 바로 조선의 21대왕 영조(1724∼1776)였다. 이에 왕실에서는 경비 3천냥을 내려주어 당우를 크게 짓도록 하고, 영원선사에게는 ‘현응(玄應)’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영조 27년에는 우의정 이의현(李宜顯)으로 하여금 기영각(祈永閣)을 지어 대사의 사전과 사후 수복(壽福)과 명복(冥福)을 기원하는 축원당으로 삼도록 했다. 딱히 대사의 불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해 조선조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파당정치를 없애고 스스로 검약·절제의 생활하는 한편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개혁을 하여 성군으로 칭송받게 됐다. 불심이 남달랐던 대사의 일상도 일상의 궤를 뛰어넘었다. 심지어 절 앞에 기다리고 있던 호랑이를 잡아타고 외출을 다녀오기도 했다는 얘기도 전해져 온다. 훗날 파계사 중창에 크게 기여한 현응 대사를 기리기 위해 절 초입에 나무를 심었으니 그것이 바로 ‘현응대사 나무’이다.

 

 

근자에 팔공산 자락을 자주 찾으면서 못 가본 능선과 골짜기를 밟아보고자 시작한게 두달 전쯤인데 아직 가봐야할 곳은 부지기수인 점을 생각하면 '과연 팔공산이구나!'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조급해 하지않고 천천히 계절의 변화를 몸소 느껴가면서 하나하나 돌아보기로 마음 먹으면서 눈 덮힌 겨울산행을 다녀온 나만의 느낌을 잠시 소회해 보기로 한다.

먼저 내가 살아 있음과 존재감을 알게 해 준데 대한 감사한 마음이다. 따뜻한 이불속 단잠의 유혹을 뿌리치고 등산장비와 먹거리를 챙기는 등 유난히 부산을 떨며 알싸한 차가운 공기를 온 몸으로 맞으면서 누가 나를 기다려주지는 않을지라도 나 자신에게 선언한 작은 도전의식이요, 나이는 먹되 아직도 나는 젊다는 자위감의 발로가 생겨난다. 대자연의 품속에서 온갖 자연의 소리를 벗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자만하지 않고 언제나 겸손하기를 간구하고 채찍질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 있게 노력하고자 한다.

또 하나 인내와 기다림의 발견이다. 새봄의 화사한 꽃과 신록을 만개시키기 위하여 눈덮인 황량한 산야에 숨죽이며 그 춥고 긴긴 한겨울의 찬바람을 꿋꿋이 참고 견디는 이름모를 나무, 풀에서 나는 인내와 기다림의 미학을 배운다. 몇년 남지 않은 직장생활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새로운 삶을 이어가야 할 청사진을 그려보면서 막연한 미래에 붙들려 불안한 삶을 살고 싶지는 않은 자신에게 오늘도 팔공산은 말없이 미소만 띤채 굽어보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한줌의 흙이 될 몸일지 몰라도 살아있는 동안 핑계나 변명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성공한 삶이라 생각되어진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흐르는 물처럼 여유로운 마음으로 내가 먼저가 아닌 당신이 먼저가 될수 있는 배려와 용서가 함께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그리고 나이가 들면 들수록 꽃 같은 인품의 향기를 지니고 넉넉한 마음으로 살게 해주십사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두손 곱게 모아 파계사를 향해 합장 반배로 절을 올리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애마를 만나러 서둘러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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