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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아내와 둘이서 떠난 지리산 종주산행 (첫날 이야기) 본문

◈ 산행이야기/☆ 2014년도 산행

아내와 둘이서 떠난 지리산 종주산행 (첫날 이야기)

해와달^^* 2014. 10. 27. 00:31

★ 산행일자 : 2014. 10. 18(토)~19(일)  날씨 - 맑음

★ 산행장소 : 전라북도 남원시,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지리산국립공원)

★ 산행인원 : 아내와 함께...

★ 산행코스 : 성삼재 - 노고단 - 돼지령 - 임걸령 - 노루목 - 반야봉 - 삼도봉 - 화개재 - 토끼봉 - 연하천대피소 - 형제봉 - 벽소령대피소

★ 산행시간 및 거리 : 1일차 : 11시간15분, 17.7km,

                               2일차 : 10시간 25분, 15.8km.

                                 누적 : 21시간 40분, 33.5km. (식사 및 휴식 포함, GPS 기준)

 

 

 

▣ 산행지 소개

♧ 지리산(智異山)

이 땅 모든 산줄기들의 시작이며 강의 시원이고 생명의 요람인 백두대간! 그 백두대간의 머리가 되는 백두산(白頭山)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만나는 산이 바로 지리산(智異山)입니다. 백두대간은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속리산, 태백산, 소백산, 지리산 등 수많은 산들이 모여 이루어진 산줄기가 아니라 백두가 흘러내리며 금강도 되고, 설악과 오대도 되고, 태백과 소백도 되고, 지리도 된 것입니다. 그 모두가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산이고 하나의 산줄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지리산을 '백두산이 흘러 내려 이루어진 산'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는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백두에서 지리까지 흐르고, 지리에서 백두까지 이어진 약 1,625km의 장엄한 산줄기가 바로 백두대간입니다. 백두가 흘러 지리가 된 것이니 백두가 지리를 닮고 지리가 백두를 닮아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백두산(白頭山)이 '지혜의 머리가 되는 산'이니 지리산(智異山) 또한 '머물면 사람 사는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 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백두대간은 '지혜에서 시작하여 지혜로 끝나는 산줄기'입니다. 모든 산줄기와 강줄기들 품어 흐르게 함으로써 이 땅에서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게 한, 생명을 주관하는 하늘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산줄기입니다. 이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한 신성한 공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백두산의 연못은 하늘의 못인 '천지'(天池)이어야만 하고 지리산의 최고봉은 하늘의 봉우리인 '천왕봉'(天王峰)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천문(開天門)과 통천문(通天門)을 지나야만 천왕봉에 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지리산의 본래 이름은 지리산(智利山)입니다. 이것은 대지문수사리보살(大智文殊師利菩薩)에서 '지'(智)자와 '리'(利)자를 가져온 것입니다.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현신한 문수보살의 지혜가 깃들어 있는 산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가 계승되고 재해석되어지는 가운데 지리산(智異山)이라고 불리기도 하고 지리산(智理山)이라고 불리게도 된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을 살리는 지혜를 가득 품은 산이건만 인간을 품은 지리의 역사는 험난하기만 합니다. 헤아리기 쉽지 않은 아픔과 주검들이 담겨 있습니다. 멀리 삼한시대까지 이야기가 올라갑니다. 당시 마한 왕조는 지금의 달궁 계곡으로 쫓겨 들어왔다가 최후를 맞았습니다. 당시의 상황들을 지리의 곳곳에 남아 있는 지명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달궁에 은거지를 마련한 마한 왕조는 사방의 험준한 산세를 지키기 위해 수비군을 배치했습니다. 북쪽에는 8명의 장군을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그 재의 이름은 '팔랑치'가 되었습니다. 서쪽에는 정장군이 배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령치'이며, 동쪽은 황장군이 있었으므로 '황령'입니다. 남쪽은 중요한 요충지여서 성씨가 각기 다른 3명의 장군을 배치하여 지키게 하였으므로 '성삼(姓三)재'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때 쌓은 성의 흔적들 또한 고리봉에서 정령치, 만복대로 이어진 능선에 아직도 남아 그 옛날의 이야기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지리산에는 많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삼국시대에는 높은 산줄기로 인해 국경의 접경지대였기에 싸움이 끊이지 않았고, 고려 때는 몽고군과의 항전과 왜구와의 전쟁 그리고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습니다. 근대에는 동학농민혁명의 아픔이 깃들어 있고, 현대에 들어서는 1948년 여순반란으로부터 1955년까지 계속된 치열한 좌우 대립으로 수많은 생명들이 봄바람에 진달래 꽃잎 떨어지듯 그렇게 스러져가기도 한 곳입니다.

 

지리산의 이러한 험난한 역사는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라는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리산은 바다에 인접해 있어 외국의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유입되는 통로로써 새로운 문화적의 발상지 역할을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토의 남쪽 변방에 자리하고 있다는 지리적 위치로 말미암아 변방에 머물러 있게 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변방성은 다른 의미에서 보면 중심지에 대한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상과 문화가 유입되는 곳이면서 중심지와 멀리 떨어져 어느 정도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조건 등이 지리산을 험난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게 만드는데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입장에서 보면 반역의 속성이 있었던 땅이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었던 것입니다. 통일 신라 말 불교의 변혁과정을 주도한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와 같은 선종의 구산산문 중 2개 산문이 일어난 곳도 지리산이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동이 일어난 곳도 지리산이었습니다. 지리산이 불복산, 반역산이라는 또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이성계가 조선 창업을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이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생겨난 배경 역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으로 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지리산에는 역사의 숨결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기에 때로 반역의 땅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지혜 품고 있는, 생명의 땅 지리산에는 주검의 역사 또한 드리워져 있습니다. 멀리 삼한 시대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이 해방 정국만을 보더라도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이 지리산에서 죽어 갔습니다.

 

 

◈ 산행기

예로부터 금강산, 한라산과 함께 삼신산(三神山)의 하나로 민족적 숭앙을 받아 온 민족 신앙의 영지(靈地)인 지리산을 종주라는 이름으로 다녀온지도 벌써 5년이란 세월이 흘러버렸다.

물론 그동안 지리산 천왕봉을 목표로 중산리로 올라본 경험도 몇 번 있었지만 늘 마음속으로는 동경의 대상으로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리산의 넓고 깊은 품속을 걸으며 마음속에 크나큰 감명과 추억을 만들어주고픈 생각이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보니 지금껏 말만 앞세운 꼴이 되어 버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 더 늦기 전에라도 다녀 와야겠다는 생각에 최근 억새산행을 테마로 해서 체력훈련을 겸한 산행을 5회에 걸쳐 시행하고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에 지리산 대피소 예약을 신청하여 당첨되었다는 문자를 받고 그날로 예매를 마치고 차근차근 준비에 들어가 예약날짜가 다가오니 잠시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차를 가지고 갈것인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을 하다가 결국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로 하고 당직근무를 마치고 퇴근한 금요일 집으로 돌아와 미리 준비해 놓은 배낭을 들쳐메니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진다.

무게를 달아보니 자그마치 18.2kg이 나오는게 아닌가. 물병은 빈통인데...

아내의 배낭 또한 만만찮게 나오는데 14kg이 넘는다. 이래선 안되겠다 싶어 인터넷으로 구매한 일명 '전투식량'들을 하나만 빼고 과감히 들어내고서 배낭을 다시 꾸려보지만 그래도 무게감은 여전히 양 어깨를 짓누른다.

과연 이 무게를 짊어지고 종주는 무사히 마칠 수 있을런지 슬슬 걱정이 앞서지만 까짓거 일단 한번 해보자는 심정으로 차에 싣고 가까운 버스정류장 부근에 주차를 해놓고 시내버스를 타고 포항시외버스터미널로 간다.

 

산행 출발지인 구례로 가기 위해선 두 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진주-하동-구례로 가는 길보다 예전 종주산행 때 갔던 방법대로 서대구-남원-구례로 가는 방법이 더 나을 것 같아 1시간 10분 가량 소요되는 서대구행 버스에 몸을 싣고 대구로 향한다.

남원행 버스시간이 여유가 있어 터미널 부근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식당에 배낭을 맡겨놓고 터미널 옆에 있는 관문시장을 구경하며 간식거리도 사서 남원행 버스에 올라타니 당직근무의 여파인지 슬슬 눈이 감기기 시작한다.

잠시 꿈나라로 여행을 다녀온 뒤 눈을 뜨니 남원 입구에 들어서고 있어 정신을 차리고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5년 만에 다시 찾은 남원터미널은 크게 변한게 없는 것 같다. 지방 소도시의 터미널이 다 그렇듯 시골 촌로들의 순박한 얼굴들이 반겨주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정겹게 들려오니 가만히 듣고 있던 아내도 신기한 듯 배시시 웃음을 지어 보인다.

그렇다고 큰소리로 경상도 보리 문디 사투리를 쓸 수도 없어 조용히 터미널 대합실로 들어가 구례행 버스시간을 알아보니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플랫폼에 서있는 구례행 버스는 완행인데 곧 출발한다고 그 차를 이용하란다. 완행이지만 30분 이상 빨리 도착한다나... 그러면서 하는 말이 완행버스 타고 가면 볼거리는 많을 테니 이용해도 괜찮을거라는 사족을 달아주기에 어차피 오늘 안으로 구례에 도착하기만 하면 된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완행버스에 몸을 실으니 이내 버스는 시동을 걸고 떠나기 시작한다.

시내버스처럼 정류장마다 안내방송을 하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동안 오르고 내리는 촌로들의 모습과 오가는 말투속에 느껴지는 정감있는 사투리에 차창 밖으로 들어오는 완연한 가을 풍경 속의 산하와 누렇게 익은 황금 들녘의 곡식들이 환상의 풍경을 그려내고 있다.

 

구례공영터미널에 도착하니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 산뜻한게 일단 보기에는 느낌이 좋아 보인다. 우선 숙소부터 정해야겠기에 읍내로 걸어 들어가 예전 묵었었던 동경모텔 방향으로 걸어가니 멀리 보이는 건물을 보던 아내가 다른 곳으로 가잔다.

하는 수없이 부근에 있는 예일각모텔로 들어가 숙박비를 지불하고 여장을 풀어놓고 저녁식사를 할 요량으로 바깥으로 다시 나와 24시간 김밥집을 찾아 새벽 3시에 올테니 김밥 세줄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해놓고 구례하나로마트 옆에 있는 구례축협명품관을 찾아 며칠동안 제대로 먹지 못할 속을 든든히 하고자 한우로 배를 채우기 시작한다.

명품관답게 육질이 좋아 입 안에 살살 녹는 느낌이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하나로마트에 들러 간식거리로 빵 몇개 사서 챙겨넣고 숙소로 돌아와 일찍 잠자리에 들어간다. 다음 날 반야봉까지 목표를 삼았으니 성삼재행 첫차를 타려면 초저녁부터 꿈나라로 가야 하기에...

 

맞춰놓은 알람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두시 이십분이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배낭을 들쳐메고 숙소를 빠져나와 전날 주문해 놓은 김밥을 찾으러 경찰서 앞에 있는 김밥천국에 들러 김밥을 받아 갈무리하고 터미널로 향하니 처음 이곳을 찾아왔을 때보다 시내의 환경이 훨씬 밝아졌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때는 구례읍내가 깜깜하다시피 했는데 지금은 많이 밝아졌다는 사실이다. 24시간 영업하는 김밥집만 까만 밤을 밝히고 있었는데 지금은 가로등도 졸지 않고 열심히 보초를 서고 있었고 무엇보다 택시들이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도착한 터미널에는 너무 일찍 왔는지 아무도 없고 성삼재행 티켓도 무인자동발급기에서 발권을 하게 되어 있어 세상 참 많이 변했고 편리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대합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잠시 쉬고 있으니 3시 30분 가까이 다가오니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는 산꾼들의 모습에 덩달아 서두르기 시작한다.

11번 플랫폼에 도착한 버스에 몸을 실으니 예전 생각에 일찌감치 서둘렀던 자신의 서툰 모습에 멋적은 미소가 머금어진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줄을 서서 발권을 하고 콩나물 시루처럼 성삼재까지 만원버스에 몸을 실었던 기억에 오늘 좀 서둘렀었는데 탑승객 전원이 좌석에 앉아서 갈수 있었으니 말이다.

새벽공기를 가르며 목적지인 성산재를 향해 굽이굽이 돌아치는 시골버스는 거친 숨소리를 내며 어둠속을 달린다.

 

화엄사 입구를 경유한 버스는 꼬불꼬불 고갯길을 구비구비 돌아 목적지인 성삼재에 도착하여 가로등만이 외로이 밤을 밝히고 있는 너른 광장에 내려놓는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성삼재 주차장에는 어디서 밤을 보내고 왔는지 모르는 수백 명의 등산객들이 너나 할것 없이 저마다 산행준비에 여념이 없고 채비를 마친 산님들은 서둘러 달리기 경주하듯 이마에 불 밝히고 탐방안내소를 통과하며 어둠속으로 빠져 들어가기 시작한다.

화장실에 다녀와 등산화 끈부터 조이고 GPS를 가동하면서 아내와 무사산행을 위한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지리산종주산행의 대장정에 나선다.

 

 

지리산 종주 산행궤적(전체)

 

 

산행궤적 (제 1일차)

 

 

아직 깊은 잠속에서 깨어나지 못한

탐방안내소 계수기를 통과하며

지리산의 너른 품속으로 들어섭니다.

 

 

이마에서 환한 빛을 발하는 랜턴을 벗삼아

어둠을 간직한 어머니 품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임도를 버리고 지름길로 인도하는 이정표를 따라

노고단을 향한 발걸음을 이어갑니다.

 

 

노고단까지는 그야말로

워밍업 정도였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성 싶네요.

2.6km, 30여분이면 오르는 구간이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밤 노고단대피소에서 하룻밤을 보냈거나

신새벽을 뚫고 달려온 등산객들이 함께 모이는 장소이니 만큼

노고단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만원 사례가 따로 없었네요.

 

 

대피소에서 김밥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서

종주산행을 잇고자 걸음을 옮겨 도착한 노고단고개엔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여명이 머무르고 있었답니다.

 

 

여명이 밝아오는 노고단고개에서 선뜻 종주산행을

시작하지 못하고 일출을 보고 가자는데 의견이 좁혀져

기다리는 동안 모조노고단에서 기념사진 한장 남겨봅니다.

 

 

실루엣으로 다가오는 반야봉 뒤로 까마득히 천왕봉이 새벽을 달려

찾아오는 여명을 등에 업고 고고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네요.

 

 

구례읍을 비롯한 골골 마다에는 운해로 뒤덮혀 있어

지리산 10경 중 제3경인 '노고단 운해'가 생각이 나는군요.

 

 

이제 먼 동이 트기 시작하는걸 보니 일출이 시작되나 봅니다.

 

 

빼꼼히 고개를 내밀기 시작하는 태양의 모습에

구경하고 있는 모두가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기 시작합니다.

 

 

6시 39분에 시작된 일출...

 

환상적이고 장엄한 광경에 할 말을 잊은 채 넋을 놓고 바라만 봅니다.

 

 

지금껏 지리산을 찾을 때마다 날씨가 좋았는데

오늘 역시 은혜를 베풀어 주심에 그저 감사한 마음입니다.

 

 

때마침 환상적인 일출에 부응이라도 하듯

날아오르는 새들의 비행이

더더욱 멋진 풍광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일출도 보았으니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고자

통제소를 지나 종주를 시작합니다.

 

 

 

 

등로를 잇는 도중 좌측 숲 사이로 건너보이는 만복대와

정령치를 지나 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시야에 들어오네요.

 

 

지리 10경에 든다는 '노고단 운해'의 모습을 보니

마치 다도해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환상적인 풍경입니다.

 

 

지리산의 각 능선에 굽이친 운해의 모습...

 

아마도 이 모습을 보기 위해 사람들은

지리산을 찾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지나온 노고단을 되돌아보며 그 아래로 펼쳐지는

운해의 모습에 탄성을 내지르면서

 

 

카메라는 쉼없이 이곳저곳 셔터 누르기에 바빠집니다.

 

 

 

 

여타 다른 산에서는 쉽게 볼수 없는 나무들의 형태가 눈길을 끌고

 

 

예전보다 한결 나아진 등로를 바삐 걷다보니

 

 

돼지령에 들어서게 되네요.

 

돼지령은 멧돼지가 많이 출현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실제로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원추리뿌리와 둥굴레뿌리가 많다고 합니다.

돼지라는 말에서 만만하고 친근감을 느낍니다.

 

 

 

 

주능선에는 이미 단풍의 절정이 지나간 듯

말라버린 나뭇잎만 보여 작은 아쉬움이 남지만

그윽한 산길을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이어갑니다.

 

 

피아골 갈림삼거리

 

 

밝게 빛나는 아침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걸어가는 숲길엔

 

 

미처 떠나지 못한 가을의 증표들이 남아

찾아온 산꾼의 발걸음마다 즈려밟고 가게끔 해주는군요.

 

 

그래도 봐줄만한 녀석들도 있어

눈맞춤도 해주며 부지런히 등로를 이으니

 

 

따뜻한 가을의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펑퍼짐한 곳에

산님들이 둘러앉아 요기를 하고 있는

물맛 좋기로 소문난 임걸령에 당도를 하게 됩니다.

 

임걸령(林傑嶺)은 조선조 선조 때

산사람 '임걸년'의 이름에서 유래한답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임걸년은 지리산 일대 사찰을 터는 도적이었다 하며,

화개장터까지 진출해 보부상들을 털었다 합니다.

 

도적의 이름을 따서 그런지

임걸령에 오르면 산도적들만이 가질 수 있는 감각으로

고개 마루가 만들어져 있고 약수 물도 풍부하네요.

 

노고단대피소에서 채웠던 수통을 비우고

임걸령 약수 물로 다시 채웁니다.

 

 

임걸령의 피아골전망대에서 예전 흔적을 남겼던

그때 그 포즈를 취하게 하고서 한장 남겨봅니다.

 

 

산길을 걷는다는 것은 자연이 주는 지혜를 얻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더구나 지리산은 그 이름부터가

'머물면 세상과는 다른 종류의 지혜를 얻게 되는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어찌 지혜가 깃들지 않겠습니까.

 

 

떠나지만 돌아올 곳이 있으면 여행이고

돌아올 곳이 없으면 방랑이 된다는데...

휴식과 좋은 경치구경을 겸하면서

힐링이 되고 있는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으니

더 부러울 게 없는 것 같네요.

 

 

더불어 산정의 마루금엔 이미 떠나기 시작하는

가을 단풍이 끝물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은 그런대로 보아줄만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어

간간히 사진에 담아가며 코 끝을 스쳐가는 쌀쌀한 바람속을

보무도 당당히 뚫어가며 전진을 계속해 나갑니다.

 

 

오늘은 늘 보던 하늘도 새롭게 보이고

산이고 나무도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 되는군요.

아마도 지리산의 너른 숲에 안겨 있어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반야봉을 오르는 길목인 노루목입니다.

새벽 일찍 출발할 때는 반야봉을 오를 생각이었지만

노고단고개에서의 장엄한 일출을 보기 위해 지체하다보니

반야봉을 다녀와 벽소령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지 않을까 싶고

무엇보다 아내에게 너무 힘들지 않을까 싶어

오늘도 아쉽지만 그냥 지나칠까 합니다.

 

 

노루목에 있는 조망바위에서 바라본

지나온 노고단 방향 풍광을 바라보고

 

 

예전에 섰던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포즈를 취해봅니다.

 

 

삼도봉을 향한 걸음에 반야봉을 다녀오자는 아내의 말을 듣고

삼거리 이정표에서 좌측으로 길을 듭니다.

마음속으로는 기쁘기 한량없었지만 벽소령까지

제 시간에 도착이 가능할지 조금은 걱정이 되더군요.

 

 

초입부터 가파른 오름이 시작되어

등로 옆 숲속에 배낭을 내려놓고

카메라와 물 한병 달랑 들고

빈 몸으로 반야봉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첫번 째의 노루목 이정표에서 오르게 된다면

지금 오르는 등로와 만나게 되는

삼거리 이정표에 배낭을 내려놓고 오르면 되겠지요.

 

 

반야봉을 오르는 등로가 길지 않은 거리지만

은근히 힘이 든다고 하던데 막상 걸어보니 그리 힘든 줄 모르겠네요.

 

 

해발 1732m 반야봉.

 

그렇게 오고 싶어했던 그 반야봉 정상에 드디어 도착을 했네요.

 

 

구름 한점 없는 맑고 파란 하늘과 푸른 산이 어우러져 만든 절경...

하늘과 땅의 파노라마... 심장이 마치 큰북처럼 울려댑니다.

 

설마, 오늘 이곳에서 생명의 진리를 깨닫고

반야(지혜)를 얻게 되는건 아니겠지요?^^*

 

 

서쪽으로는 노고단과 성삼재, 이어서 서북능선의 고리봉, 만복대...

푸른 능선 아래 골짝마다 운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구름 속에 광양의 백운산이 선계의 섬처럼 떠 있고,

 

 

동쪽방향으로는 천왕봉까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모든 능선이 한 눈에 아스라이 잡힙니다.

 

 

반야봉에서 절정의 풍광을 맘껏 감상하며 마냥 노닐고 싶었지만

가야할 길이 아직은 멀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되내려갑니다.

 

 

이곳이 진짜 '노루목'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우측은 노루목이정표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길이고

좌측은 삼도봉 방향으로 본인이 올라왔던 곳이랍니다.

 

이곳은 산봉이라고 할 수는 없고

경사면이라 할 수도 없는 조금 튀어나온 부분인데

종주하는 사람들은 굳이 이곳으로 올라오지 않기 때문에

이정표를 아랫쪽에 세운 것이라고 하네요.

 

이곳 '노루목'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 얻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반야봉을 직접 올라보거나 노고단 쪽에서 반야봉을 바라보노라면

반야봉 정상의 남쪽 지세는 피아골을 향해 몹시 가파르게 내리다가

바로 이곳에서 잠시 멈추어 선 모습이 마치 노루가 고개를 치켜들고

먼 산을 멍청히 바라보는 형상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니

우리 선조들의 지세(地勢)를 관찰하는 안목과 그 표현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네요.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3개의 도가 만나는

삼도봉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원래 이름은 바위 봉우리가

낫의 날을 닮았다 하여 낫날봉이라 불리우다가

날라리봉, 닐리리봉으로 불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1988년 10월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삼각뿔 모양의 표지석을 세우면서

삼도봉으로 불리기 시작했답니다.

 

 

백두대간이 남한 땅에 들어와 세 개의 삼도봉을 만들고 있는데,

두 개는 민주지산 삼도봉과 대덕산의 거창 삼도봉이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 지리산 삼도봉(三道峰)이랍니다.

 

 

지리산 삼도봉은 북쪽이 전라북도(남원시 산내면),

서남쪽이 전라남도(구례군 산동면과 토지면),

동쪽이 경상남도(하동군 화개면)이다.

이 삼도봉은 조선 말기 고종 33년(서기 1896년)에

전국이 8도에서 13도로 개편되면서 얻게된 백년 남짓된 이름이지요.

 

 

화개재를 향한 내림길에 놓여있는

그 유명한 580계단이 드디어 시작되는군요.

 

 

거꾸로 오르는 이에겐 그야말로

죽음의 코스가 따로 없을 듯한 구간이지만

그나마 나무 계단이라 조금은 낫지 않나 싶네요.

 

 

 

 

화개재

 

화개재는 해발 1,300m 남짓한 지리산 주능선에서는 가장 낮은 곳입니다.

북쪽은 뱀사골이고, 남쪽은 목통골로 해서 화개장터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남쪽 화개장터를 거친 생선, 해산물, 소금 등이

이곳을 거쳐 북쪽의 운봉, 산내, 마천 등지로 공급되고,

내륙의 곡식, 산채 등 특산물이 이 고개를 넘어서

화개, 악양, 하동 등지로 공급되는 교역로였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좌측 아래로 진행하게 되면

뱀사골을 거쳐 반선으로 내려서게 되지요.

 

 

화개재에서 토끼봉 가는 길엔 유독 쓰러진 거목들이 많았는데

센 바람이 자주 들이치는 곳인지

둥치 굵은 참나무와 소나무가 쩍쩍 갈라져 누워 있습니다.

뿌리 채 뽑혀 벌렁 누워있는 나무도 여러 그루 보았답니다.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순환 법칙에 순응하며

조용히 누워있는 그들을 보면서

가파른 오름길을 천천히 걸어 도착한 곳은

헬기장이 있는 토끼봉이었답니다.

 

토끼봉에는 토끼가 많이 서식한다거나
산 모양이 토끼를 닮지도 않는데
'토끼봉'이라 부르게 된 것은 전혀 다른데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지리산 서편의 주봉인 반야봉에서 정 동쪽에 있기 때문에
동양식의 24방위(方位)로 묘방(卯方)에 해당하고,
묘(卯)는 12지(十二支)에서 토끼띠이기 때문에
이 봉우리를 '토끼봉'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랍니다.

 

 

토끼봉을 지나 명선봉을 향하는 등로에는 너덜이 있는 오름길이라

지난 종주산행 때 무척 힘이 들었던 곳이었는데

오늘은 크게 힘들다는 느낌을 못 받은걸 보면

아마도 그때보다 체력이 훨씬 좋아졌음을 느낄 수가 있었지만

뒤따르는 아내에겐 고행길이 아니었나 싶네요.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거친 산길을 힘겹게 걷고있

아내를 다독이며 명선봉을 지나 내림길 계단을 내려서니

보기만 해도 반갑기만 한 연하천대피소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연하천대피소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라면을 끓이고 준비해간 햇반과 반찬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과일과 커피로 후식을 즐기며 1시간 가량 머물다

"흐르는 개울의 물줄기가 마치 구름속에서 흐르는 것 같다" 해서

연하천이라 불리우는 샘터에서 맑고 시원한 샘물을 맛보고

수통 가득히 물을 채우고 벽소령으로의 발걸음을 이어갑니다.

 

 

연하천을 출발하여 10분 여를 진행하면

좌측으로 음정으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만나게 되고,

조금 더 진행하며 오름길을 올라서면

하동의 화개면과 함양의 마천면,

남원의 산내면의 경계가 되는 곳이 나오는데

웬만한 지도에는 산봉 이름이 없지만

사람들이 '삼각고지' 또는 '삼각봉'이라 부른답니다.

 

 

이 삼각고지 남쪽 계곡이 빗점골이라는 깊은 계곡이지요.

6. 25를 전후하여 지리산이 빨찌산의 아지트가 되어

상당기간 국군의 대대적인 공비토별작전이 전개되었을 때

이 계곡 아래 의신마을에 사령부를 차리고 있던

빨찌산 남부군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이 빗점골로 도주하였다가 이 곳에서 최후를 맞은 곳이라 합니다.

그래서 명선봉부터 벽소령까지는 소위 '피의 능선'이라 불리기도 한답니다.

 

 

거친 돌길에 가파른 오름길이

무거운 배낭을 어깨에 짊어진 채 묵묵히 걷고 있는

꾼의 호흡을 숨가쁘게 하더니

 

 

'형제바위'에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오는 형제봉에 당도하게 됩니다.

 

 

형제봉이란 이름은 '형제바위'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형제바위는 두 개의 바위가 마치 두 형제가 등을 맞대고

서있는 듯한 높이 20m가 넘는 큰 입석바위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답니다.

 

옛날 두 형제가 성불수도 하려고

지리산에 입산하여 도를 닦기에 온 정성을 드리는데

심술궂은 지리산녀(智異山女)가

끈질기게 유혹하면서 방해를 하였답니다.

 

두 형제는 그녀의 유혹으로부터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의지하며 부동자세로 서 있다가

너무 긴장했던지 그대로 굳어져서 지금 형상의 바위가 되었다고 전해옵니다.

 

 

형제봉을 지나 등로 우측으로

조망이 트이는 전망터에서 바라본 1399봉 아래로

오늘의 종착지인 벽소령대피소가 보이는군요.

이제 거의 다온 것 같네요.

 

 

지나온 형제바위를 한번 올려다보고는

 

 

죽어서도 고고하게 서 있는 주목에

눈길이 안 갈 수가 없어 카메라에 담고서

 

 

1399봉을 우회하는 허리길을 따라 막바지 등로를 이으니

 

 

오늘 하룻밤을 유숙하게 될 벽소령대피소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대피소 앞 야외식탁에는 함께 동침을 하게 될 많은 산님들이

저녁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모습들이네요.

 

 

 

예정보다 이른 오후 4시경에 대피소에 도착을 했으니 쉼없이 걸어온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 빈 식탁을 찾아 배낭을 내려놓고 서둘러 해가 지기 전에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100미터 가량 떨어진 식수대를 찾아 코펠과 수통에 물을 가득 받아와서 저녁준비를 한다.

버너에 불을 피우고 준비해간 삼겹살을 꺼내 후라이팬에 구워내니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에 맞춰 냄새 또한 후각을 자극하고 있어 입 안에는 군침이 감돌기 시작한다.

햇반을 데우고 밑반찬 몇 가지 내어놓고 식탁에 앉으니 산상파티가 따로 없다. 11시간이 넘도록 부지런히 걸었던 오늘의 산길에 힘든 내색없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잘 걸어준 아내가 참으로 대단하다 싶어 배부르게 먹고난 뒤 배정받은 숙소에 여장을 풀어놓고 고생한 두 다리에 파스를 붙여주고 대피소 바깥으로 나와  지리10경 중 하나인 '벽소명월'은 아닐지라도 별빛이 유난스레 반짝이는 지리산의 너른 품속에서 밤하늘을 바라보며 정말 수고 많았다는 덕담으로 얘기꽃을 피우며 데이트를 즐기고 내일은 느긋한 산행이니 느지막히 출발하자며 잘자라는 인사와 함께 각자의 숙소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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