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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경북 3대 물돌이 중 하나인 영주 무섬마을과 3사 순례 본문

★ 여행이야기

경북 3대 물돌이 중 하나인 영주 무섬마을과 3사 순례

해와달^^* 2015. 1. 27. 09:36

전날 살고있는 지역의 못가본 근교산을 찾아보고자 종주산행이라는 이름으로 한바퀴 돌아 보았는데, 인적이 거의 없는 등로에 잡목이 우거진 산길을 헤쳐 나오느라 야트막한 야산이지만 여느 고산 못지않게 힘이 들었던 것 같다. 피곤이 덜 풀린 상태였지만 홀로 산을 찾는 미안함에 바람이라도 쐬어줄 요량으로 지난 번 찾았던 회룡포와 마찬가지로 낙동강 3대 물돌이 중 한 곳인 영주 무섬마을을 시작으로 영주지역의 유명 사찰을 돌아보는 것으로 오늘의 여정을 계획하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오늘은 고속도로가 아닌 국도를 이용하여 영천, 군위까지 이동을 한후 부근 식당에서 아침을 해결하고 군위IC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하여 예천IC를 빠져나와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대로 무섬마을 주차장에 도착하여 주차를 해놓고 맨 먼저 이 마을의 상징이기도 한 외나무다리부터 찾아보기로 하면서 영주 지역 관광의 첫 걸음을 내딛는다.

 

 

영주시 문수면에는 명당으로 선택받은 고풍스런 전통마을로

물 위에 뜬 연꽃 모양을 한 무섬마을, 수도리라 부르는 마을이 있습니다.

 

 

반남(潘南) 박씨, 선성(宣城) 김씨의 집성촌인 이곳은

영주 일대에서 알아주는 반촌(班村)으로

삼면을 휘감아 도는 내성천을 따라 은백색 백사장과

얕은 산의 아름다운 자연과 고색 창연한 50여 고가(古家)가 어우려져

고즈넉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어 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느긋하고 한가로운 고향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입니다.

 

 

외나무다리...


무섬마을에 총연장 180m, 폭 5.5m의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가 놓인 것인 1983년 이었답니다.


수도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외나무다리가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지요.

 

 

책보를 메고 학교 가는 아이,

장가가는 새신랑, 꽃가마 타고 시집오는 새색시,

황천길로 가는 상여도 어김없이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도 외나무다리처럼

혼자서 걸어가는 길이라는 현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350여 년간 무섬마을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로

애환 어린 추억의 역사를 지닌 외나무다리라 할수 있겠지요.

 

 

물줄기에 둘러싸여 둥근 형태를 띄고 있는 조그만 섬마을.

마을을 350도 돌아나가는 내성천의 유유함이 아름다운 곳...

그 유려한 물길처럼 여유 가득한 무섬마을로 들어가 볼까 합니다.

 

 

 

 

 

수도리전통마을

<경북 영주시 문수면 무섬로 234번길 41(무섬마을)>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줄기에는 강물이 산에 막혀 물돌이동을 만들어 낸 곳이 여럿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라 불리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무섬마을은 이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라 불린다. 마을 주변을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휘돌아 흐르는 대표적인 물동이마을이다.

무섬마을의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남(潘南) 박씨인 휘(諱) 수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있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마을을 이루는 무섬마을은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오롯이 남아있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만죽재(晩竹齎)를 비롯해 총 9개 가옥이 경북문화재자료 및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있어 조상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마을 내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런 옛 향취를 풍기고, 30년 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 외나무다리가 마을의 대표 상징물로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참조: 무섬마을.com)

 

 

민박과 차와 음료를 파는 '마당넓은 집' 사랑채 마당에 놓여진

널빤지에 올라 널뛰기를 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우리도 한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 봅니다.

 

 

무섬마을은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 의 우리말 원래 이름이라고 합니다.

 

 

영주 수도리 김위진 가옥(榮州 水島里 金渭鎭 家屋)

 

 

 

건립은 현 소유자의 조부(祖父)가 19세기말에 정성을 들여 지은 ‘ㅁ’자형 집으로, 1999년 경북문화재자료 제360호로 지정되었다.

배치구성은 넓은 대지에 배산 하여 ‘ㅁ’자형 정침에 우익사부터 안채 좌측 단부를 ‘ㄱ’자형으로 토석담장으로 돌려 뒷·옆마당을 구획하였다.

평면은 정면 5칸 중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우측에 안방 칸반, 정지 칸반, 도장 1칸이 주문 우측의 마구와 연결되어 우익사를 구성하였다. 정지는 안마당 쪽으로 개방시키고, 부뚜막위에 반침과 상부에는 다락을 두어 안방에서 이용하고 있다. 고방은 판벽을 치고 안대청 쪽으로 쌍여닫이 띠장 널문을 달아 놓았고, 안방 우측면에는 쪽마루가 설치되어 있다.

대청 좌측은 고방을 두고 고방 앞쪽으로 건넌방 1칸, 문간 1칸, 중방 1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좌익사를 이루었다. 문간은 정지와 대향하고, 안마당 쪽으로 개방시키고 좌측에 널문을 달아 옆마당으로 출입케 했다. 중문 좌측은 사랑채 부분으로 사랑방 2통칸, 마루방 1칸이 연이어 있고, 마루방 1칸은 ‘ㅁ’자형에서 좌측으로 돌출되어 있다. 사랑채 전면은 얕은 기단에 통주의 두리기둥을 세워 툇마루를 깔고 계자각 헌함을 돌렸다.

 

 

약 350년의 역사를 간직한 영주 무섬마을에는

9개의 가옥이 경북문화재자료 및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가 남아있는 곳입니다.

 

 

영주 수도리 김덕진 가옥(榮州 水島里 金德鎭 家屋)

 

 


200여년 전에 반남박씨가 건립한 것을 현 소유자의 증조부가 매입하였다고 한다. 18세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999년 경북민속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었다.

배치구성은 ‘ㅁ’자형 정침과 우측에 ‘ㄱ’자형 방앗간채로 이루어져 있다. 정침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5칸의 납도리집이다. 평면은 안마당 뒤쪽에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우측에 칸반 안방을 두었고, 그 앞쪽으로 정지 1칸, 고방 1칸, 마구 1칸이 우익사를 구성하였다.

정지는 안마당 쪽으로 개방시키고, 부뚜막위에 반침과 상부에는 다락을 두어 안방에서 이용하도록 하였다. 다락은 안마당 쪽으로 널문을 달고 사다리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대청 좌측에는 상방 1칸을 두고 그 앞으로 상방 정지 1칸, 고방 1칸, 중방 1칸이 사랑채와 연결되어 좌익사를 이루었다.

중문 좌측은 사랑채 부분으로 사랑방 1칸, 사랑마루 1칸을 연이어 놓고, 사랑방 뒷벽에 벽장을 두었다. 사랑마루와 중방사이에는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고 중방과 내정 사이에는 외여닫이 세살문을 달아 안채로 통하게 했다. 사랑방 전면에는 폭이 좁은 쪽마루를 설치하고 계자각 난간을 세워 마치 누마루처럼 꾸몄다.

지붕은 안대청 전·후로 고주를 세워 맞배지붕을 들어 올렸고, 사랑채와 양익사는 한단 낮은 우진각에 골기와를 이었다. 방앗간 채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ㄱ’자형이다.

 

 

김광옥 가옥(위당 고택)

 

선성(예안)김씨 입향조인 김대(1732~1809) 선생의 집으로

지금은 '마당 넓은 집'이라는 이름으로 민박체험을 할 수 있답니다.

 

 

기와집과 초가집의 조화속에 낮은 담장의 골목길이 정겨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조상의 신주를 모셔 놓은 사당(祠堂)입니다.

 

 

영주 수도리 박천립 가옥(榮株 水島里 朴天立 價屋)

 

 

 

정면 3칸, 측면 2칸의 까치구멍집으로, 6간 까치구멍집의 초기변형의 예를 보여주고 있다. 1999년 경북문화재자료 제346호로 지정되었다.

봉당을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방을 두고 우측에 정지를 두었으며, 후열에는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윗방을 두고 우측에는 안방을 두었다.

일반적으로 마구간이 있어야할 자리에 사랑방이 설치된 것과 사랑방의 전면과 측면, 상방의 측면에 외부로 통하는 문을 설치하여 폐쇄적인 까치구멍집에 개방성을 도입한 평면상 특징이 보인다. 이러한 형태는 6간 까치구멍집의 초기변형의 예를 보여주는 것으로 겹집의 변형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로 생각된다.

 

 

초가지붕 이엉을 교체하고 있는 모습을

오랜만에 보게되니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가는군요.

 

 

영주 수도리 박덕우 가옥(榮州 水島里 朴德雨 家屋)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6칸 까치구멍집으로, 이 마을 까치구멍집의 기본형이라 할 수 있다. 1999년 경북문화재자료 제363호로 지정되었다.

평면구성은 먼저 전열은 전면 가운데의 대문을 들어서면 흙바닥의 봉당이 나오고, 봉당 우측에 정지 1칸, 좌측에 마구 1칸이 연결되어 있다. 마구는 근년에 좌측으로 1칸 달아내었고, 기존 마구간은 봉당과 연계해 사용하고 있다.

후열은 마루를 중심으로 좌측에 사랑방, 우측에 안방을 두었다. 이러한 평면구성은 기본 6칸 까치구멍집에서 필요공간을 생활편의에 따라 횡축으로 확장한 모습이다. 정지는 전면 벽체를 2尺 가량 달아내고 그 자리에 찬장을 설치하였고, 부뚜막위에는 안방에서 사용하는 반침이 설치되어 있다.

지붕은 초가지붕을 1976년 지붕개량사업 때 일식 시멘트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만죽재 고택(晩竹齋 古宅)

 

 

 

만죽재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가옥으로, 무섬마을 입향시조 반남 박씨 수(檖)가 지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93호다. 본래 당호는 ‘섬계초당(剡溪草堂)’이었으나 8대손이 중수를 하며 당호를 ‘만죽재’로 바꾸었다. 무섬마을 중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고택으로 마을 대부분 가옥들의 사랑이 우측에 있는 것에 반해 좌측에 독립된 사랑을 둔 것이 특징이다.

 

 

섬계고택(剡溪古宅)

 

 

일계고택(逸溪古宅)

 

 

 

예로부터 유교의 고장으로 남녀노소,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교육을 시켰다는 무섬마을...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만 중시 했다는 선조들 덕분에 이곳은 좌우익이 공존할 만큼 자유로웠던 공간이기도 했단다.

반상(班常)의 법도가 지엄했을 때 양반과 평민이 함께 공부를 했고,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본거지 아도서숙이 있었고, 한민족이 사상전으로 서로에게 총을 겨눌 때 좌우익이 공존했던 공간...

이것이 무섬마을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해서 마음 속에 쉼표 하나를 갖기 위해 행장을 꾸리는 이가 있다면 이곳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의 무섬마을을 꼭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초가와 오래된 고택으로 이루어져 있어 단아한 정취와 고풍스런 멋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전통마을인 무섬마을 다녀가는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 속에 간절함을 하나 지니게 될 것이다.

이곳만은 제발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헤쳐지고 얄팍한 상흔이 뒤엉키지 않고 지금 이 모습 이대로 오랫동안 지켜지기를... 마음속 간절함이 절실하지만 천혜의 휴가명소로 아름다운 모래강인 내성천에 건설중인 마지막 4대강 사업이 벌어지고 있는 영주댐이 완공되면 휴양의 공간이자, 치유와 명상의 공간인 내성천이 망가지는건 시간 문제일 테니 시간을 잊은 둣 여유로움을 갖고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본 무섬마을을 떠나는 발걸음은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렇다고 계속 무거운 마음을 갖고 오늘 일정을 소화한다면 먼 길 떠나온 보람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잠시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고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불리우는 무섬마을을 떠나 다음 행선지인 희방사를 향해 차를 몰아간다.

희방사는 오래 전 집사람과 죽령고개에서 천문대를 거쳐 연화봉을 찾았다가 희방사로 내려온 적이 있는데 지금껏 남아있는 기억은 무지 지루했던 천문대까지의 시멘트길과 끝없이 이어지던 희방사로의 돌계단길이 그것이다. 아내와 그때의 추억을 회상하면서 풍기읍을 지나 죽령고개로 오르는 국도를 따르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희방사 방향으로 꺾어 올라가니 국립공원탐방안내소를 지나 희방사주차장까지 올라가니 주차장은 만원사례다. 모퉁이에 겨우 기대어 놓고선 사찰관람료 1인분 2,000원을 지불하고 희방사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매표소를 지나 도로를 따라 조금 올라가면

 

 

눈 쌓인 돌계단이 나타나는데 집사람의 발목이 신경쓰여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겨갑니다.

 

 

깊은 산중의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당도한

높이 28m로 내륙지방 최고의 폭포인 '희방폭포(喜方瀑布)'입니다.

 

 

계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희방폭포는

소백산 중턱 해발 700m 지점에 있는데,

소백산 절경 중 하나로 꼽히며 높이가 28m에 달해

영남지방 제1폭포로 불린다고 합니다.

요란한 굉음과 물보라를 일으키며 끊임없이 떨어지는

힘찬 물줄기는 그 자체로 장관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얀 눈이 내린 고요한 세상에 유일한 소리 한자락...

추운 날에도 희방폭포의 물소리는 잔뜩 얼어있는 빙벽 사이로 끊이질 않네요.

 

 

조선 전기의 학자 서거정은 희방폭포를 평하기를 천혜몽유처(天惠夢遊處)

즉, '하늘이 내려준 꿈에서 노니는 듯한 풍경'이라 평했다 합니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의 아찔함이

극락세계나 무릉도원을 꿈꾸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하네요.

 

 

 

 

운치있는 돌담사이로 놓인 눈덮힌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하얀 설원이 반겨주는 희방사 초입에 들어서게 됩니다.

 

 

 

소백산(小白山) 희방사(喜方寺)

경북 영주시 풍기읍 수철리 313-3에 있으며, 대한불교 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 의 말사다.

소백산 연화봉 아래 해발 850m의 능선에 자리 잡고 있는 희방사는 신라시대 선덕여왕 12년(643년)에 두운(杜雲) 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데, 희방사(喜方寺)란 절 이름은 창건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370년 전 두운대사가 태백산 심원암에서 소백산 연화봉밑 작은동굴에서 기도정진을 하고 있었는데 눈보라가 치던 어느 겨울날 호랑이 한마리가 굴로 뛰여들어 고통을 호소했다.

호랑이는 사람을 먹고 비녀가 목에 걸렷는데 두운대사는 이를 빼주고 호랑이를 살렸다.

그후 호랑이는 두운조사의 은혜를 갚고자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는데 이 양가집 규수가 경주호장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었다.

외동딸을 살린 경주호장은 그 은혜로 이 절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되여 기쁘다는 뜻의 기쁠 희 喜 와 두운조사의 참선방 이라는 모 방(方)을 써서 희방사(喜方寺)라 하였다 한다.

또한 1568년(선조 1)에 새긴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6·25전쟁으로 법당과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소실되었다.

1953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경내에 희방사 동종(경북유형문화재 226)과 월인석보 책판을 보존하고 있다.

월인석보는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으로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국문으로 엮은 《석보상절》과 세종이 석보상절을 보고 석가세존의 공덕을 찬송하여 노래로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합친 책이다.

불경언해서로서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1권 머리에 훈민정음 판 15장, 30면이 얹혀 있어서 국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

 

 

요사채 벽면에 걸려있는 정체모를 나무조각상이 눈길을 끄는군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닌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렇다면 왜 생뚱맞게 여기에 걸려있는지...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셔놓은 대웅보전입니다.

 

 

희방사 대웅전 내부의 모습

 

 

요사채

 

 

개울 건너로는 범종각, 지장전, 요사채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네요.

 

 

 

눈덮힌 고즈넉한 천년고찰 희방사를 찾아 부처님께 삼배로써 예를 올리고 경내를 돌아보고 올라왔던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내려와 다음 목적지인 소수서원을 향해 차를 몰아간다. 네비게이션에 입력한 대로 소수서원에 가까워질 무렵 언뜻 보이는 안내판을 보게 되었는데 바로 '초암사'라는 사찰 이름이다.

소수서원 다음 찾아갈 곳이 영주의 대표적인 사찰인 부석사인데 이왕이면 세 군데의 절을 찾아보는게 낫다 싶어 예정에 없던 초암사를 향해 차를 몰아간다.

이름모를 마을을 통과해 좁은 시멘트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국립공원탐방안내소가 나오고 커다란 주차장이 반겨준다. 공단 직원인지 공익요원인지 한 명이 다가오더니 주차비를 내라고 한다. 하는 수없이 유공자유족증을 내어보이면서 이곳은 문화재도 없는데 입장료는 없을 텐데 웬 주차비냐고 물으니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운영하는 주차장은 전국 같은 요금으로 징수를 하고 있단다. 사실 오늘 유족증 때문에 입장료와 주차비를 꽤 번 것 같아 그 돈으로 부처님께 보시하면 되겠다 싶다.

주차장에서 10분 가량 도로를 따라 올라가니 죽계 2교 입구에 입간판이 하나 서있어 다가가보니 말로만 듣던 죽계구곡의 설명문이다.

 

 

죽계구곡(竹溪九曲)

 

 

 

죽계구곡은 고려후기의 명현이자, 문장가인 근재 안축의 '죽계별곡'이며, 이퇴계와 주세붕 등 조선시대 유현들이 유상하던 자취들이 있어 잘 알려진 계곡이다. 죽계구곡은 초암사 앞에서 제1곡으로 시작되어, 시냇물을 따라내려 삼괴정을 못미처 있는 제9곡에 이르기까지 약 5리 사이에 분포되어 있다. 이 죽계구곡은 영조 초에 순흥부사를 지낸 신필하가 처음 정한 바인데 옛 초암법당 앞 바위벽에 '죽계1곡(竹溪一曲)'이라 커다랗게 새겨있고, 시냇물이 넓게 고여 흐르는 물밑 반석에 행서로 세겨진 '제일수석(第一水石)' 4자는 아주 힘차고 활달한 글씨인데 오랜 세월에 갈려 겨우 알아볼 지경이다.

 

 

제3곡 송림곡(松林曲)

 

 

퇴계의 후예인 이가순(李家淳)은

퇴계가 유람한 자취를 따라서 순흥향교를 시작으로

죽계천(竹溪川)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소백구곡을 설정하고 구곡시를 남겼습니다.

 

 

 

 

국망봉에서 흘러내리는 죽계천의 맑고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잠시 걸음을 이어가니 죽계 1교가 나타나고

초암사의 본당인 대적광전이 시야에 들어옵니다.

 

 

 

 

초암사(草庵寺) 대적광전(大寂光殿)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당우로 화엄전, 비로전이라고도 합니다.

 

 

초암사는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스님인 의상대사가

호국사찰을 세우고자 산수 좋은 이곳에 초막을 지어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명당자리를 골라 부석사를 세운 뒤 초막을 지었던 곳에

절을 지었다고 해서 초암사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초암사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으나,

6.25 전란으로 인하여 쇠락해 있던 것을

보원스님의 각고의 노력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소백산의 절경 속에 자리 잡은 청정도량으로

지방유형문화재 초암사 삼층석탑과

초암사 동부도, 서부도 등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초암사의 경내를 돌아보고 다음 행선지인 소수서원을 찾아간다. 널찍한 주차장에는 제법 많은 수효의 관광객들이 겨울철임에도 이곳을 찾는 걸 보니 영주의 필수 관광코스가 아닌가 싶다. 한 사람분인 입장료 3,000원을 지불하고 울창한 소나무가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서원 안으로 들어가 본다.

소백산 비로봉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시원해지는 맑은 죽계천가에 자리한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사립교육기관의 첫 발자취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참 많이 듣고 읽은 곳이지만 처음으로 들러보는 자리는 새로운 기분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소수서원 소나무숲.

 

소수서원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또 다른 풍경은 시원하게 펼쳐지는 소나무숲입니다.

하늘로 쭉쭉 뻗은 모습들이 보기만 해도 시원합니다.

 

 

 

소수서원은 주세붕(周世鵬, 1495~1554)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풍기 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 문성공 안향 선생이 젊어서 공부하던 이곳 백운동에 중종 37년(1542)에 영정을 모신 사묘(祠廟)를 세웠다. 그리고 이듬해에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인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웠다. 그후 퇴계 이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1550)에 왕에게 진언을 올려 ‘紹修書院’(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수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살아남은 47개소에 들었으며 사적 제55호이다.

 

 

원래 소수서원 자리는 숙수사라는 절이 있던 자리여서

당간지주가 그대로 남아있네요.

그 시절의 숭유억불 정책에 밀려 폐사가 되었을

숙수사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게 느껴지는군요.

 

 

 

 

서원으로서의 파격을 가장 먼저 깨는 것은 소수서원을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당간지주 한 쌍이다. 아니, 서원 영역에 웬 당간지주일까? 소수서원 자리는 본래 숙수사(宿水寺)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절의 흔적은 이 당간지주나 소수서원 사료전시관 마당에 모아놓은 석등·석탑의 부분으로 남아 있는데, 1953년에는 손바닥만한 금동불 수십 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땅 위의 통치원리가 유교로 바뀌게 되자 힘이 미약해진 불교문화는 그런 식으로 땅속에 파묻혔던 것이다. 그 하나의 흔적인 이 당간지주는 높이 3.65m로 두 지주가 마주보며 곧게 뻗어 있는데 바깥면 중앙에 세로로 띠선을 새긴 것말고는 아무런 조각이 없다. 이 지주는 기둥 끝으로 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지다가 맨 끝을 곧게 둥글렸다. 당간을 받도록 원호를 새긴 댓돌이 지주 가운데에 길게 남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여겨지며 보물 제59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렴정(景濂亭)

 


경렴정(景濂亭)은 서원으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있는 정자 건물로 유생들이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던 공간이다. 주세붕 선생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이 정자를 지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정자 중의 하나이다.

'경렴정'이란 이름은 중국 북송의 철학자 염계 주돈이(濂溪 周敦頤)를 경모하는 뜻에서 그의 호에서 첫 글자 '濂'자를 취했고 안향 선생을 높인다는 뜻에서 '景'자를 취해 붙인 것이다.

전면 3칸에 측면 1칸의 건물로 우물마루바닥에 4면으로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일필휘지의 호방함을 느낄 수 있는 경렴정의 초서 현판은 조선 중기 퇴계의 문인인 고산 황기로(孤山 黃耆老)의 글씨다.

서원경내와 외부 자연풍경을 이어주는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경렴정은 원생이나 유림이 모여 시연(詩宴)을 열며 풍류를 즐기고 심신을 고양할 수 있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정자 내부에는 주세붕 선생과 퇴계 선생 등 당대 여러 묵객(墨客)들의 자연을 노래한 시판(詩板)이 걸려 있다.

유유히 흘러가는 죽계수를 끼고 수령 500년의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드리워진 정자는 시공을 뛰어넘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던 유생들의 풍취가 묻어난다.

 

 

장서각(藏書閣)

 

 

강학당의 뒤쪽으로 일신재, 직방재와 나란히 배치된 장서각(藏書閣)은 서원의 서적과 서원에서 출판한 판각들을 보관했던 곳으로 오늘날의 대학 도서관이다.

임금이 직접 지어 하사한 ‘어제 내사본(御製 內賜本)’을 비롯해 3000여 권의 장서(藏書)를 보관하던 곳이며 이 건물은 1543년(중종38년)에 주세붕이 건립하였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한 간소한 구도로서 정면에는 각 칸마다 판문을 달았고 내부는 마루를 깔았다.

한편 장서각의 위치는 ‘좌우지선(座右之先)’의 예를 따라 서책은 으뜸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의 숙소인 직방재의 오른쪽에 자리했다. 이 또한 서쪽을 높게 여기는 우리나라 고유사상 ‘이서위상(以西爲上)’의 한 표현으로 선현들의 가르침을 간직한 책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장서각은 강학공간에 부속되는 주요건물로서 선현들의 문집 등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며, 목판을 제작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규모가 큰 서원은 장판각을 따로 두기도 했다. 대개 장서각의 구조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은 땅에서 떨어뜨려 마루의 형태를 취하고 환기구나 살창을 설치한다.

 

 

문성공묘(文成公廟) - 보물 제1402호.

 

 

강학당 후면 좌측에는 별도로 독립된 담장과 대문을 갖추고 '문성공묘(文成公廟)'라는 편액을 붙인 건물이 보인다. 이곳이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조로 불리는 안향(安珦)의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로서 1542년 주세붕이 세웠다. 문성공(文成公)은 안향을 가리킨다. '文成公廟'이라는 편액은 명나라의 주지번(朱之蕃)​이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이곳에 들러 남긴 글씨라고 한다.

안향은 이곳 순흥 출신으로 그 자신이 18세 까지 숙수사(宿水寺 -  소수서원 자리에 있었던 사찰)에서 학문을 닦은 것은 물론이고 아들과 손자 까지도 숙수사에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고 한다.

문성공묘를 사(祠)라 하지 않고 묘(廟)라 부른 것은 격을 높인 것이며 이는 흔치 않은 일이라 한다.

또 일반적으로 전당후묘(前堂後廟)라 하여 강학공간 뒤에 제향공간을 두는데 일찍 조성된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의 독특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결국 소수서원 건물들이 형식과 배치의 측면에서  매우 자유로운 점이나, 강학당(講學堂)을 중심으로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지도록 자연스럽게 배치한 점 등의 특징을 가지게 된 까닭은 소수서원이 처음으로 세워진 서원이라는 것이다.

문성공묘는 영귀봉(靈龜峰) 동쪽 어귀에 위치하고 있는데 풍수지리상으로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_ 신령한 거북이 엎드려 알을 품은 지세)에 해당되는 명당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한다.

이렇게 소수서원은 남북으로 나지막하게 구릉을 이룬 낙락장송(落落長松) 영귀봉에 기대어 터를 잡고 있다.

 

 

직방재, 일신재 (直方齋, 日新齋)

 


강학당의 북쪽에서 강학당을 바라보고 있는 직방재(直方齋)와 일신재(日新齋)는 원장, 교수 및 유사(有司)들의 집무실 겸 숙소로 각각 독립된 건물이 아닌 연속된 한 채로 이루어졌으며 편액으로 구분하고 있다.

직방재와 일신재는 소수서원 창건 이후 263년이 지난 1805년(순조5년)에 건축되었으며 전형적인 다른 서원의 동서재(東西齋)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먼저 서재(西齋)에 해당하는 직방재는 건물이 자리한 방향의 우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주역(周易)」의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敬以直內 義以方外)’는 말에서 각각 ‘직(直)’과 ‘방(方)’자를 취했다. 이어 동재(東齋)에 해당하는 일신재는 직방재 좌측에 있는 2칸을 말하며 ‘일신(日新)’은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日新又日新)’라는 뜻으로 대학(大學)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건물구성은 중앙의 우물마루 두 칸과 양쪽 협실 각각 두 칸으로 정면 여섯 칸, 측면 한 칸 반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툇마루가 조성되어 있다. 한편 직방재와 일신재는 강학당의 뒤편으로 2칸 정도 물러 있으면서 마루와 방의 높이도 강학당보다 한단 낮게 하였는데 이는 사람이 거처하는 숙소를 선현들의 학문을 숭상하는 강학당보다 낮추고자 해서이다.

선인들은 단순히 배움에 앞서 삶 속에서 선현의 학문을 얼마나 공경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일영대(日影臺)

 

영정각 앞 정료대 옆에 있는 일영대는

맑은 날, 윗부분 돌에 꽃은 막대기의 그림자가

아랫돌에 드리워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고 하는

일종의 해시계로 알려져 있으나,

숙수사의 유물이라는 설도 있다고 합니다.

 

 

주자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와

우리나라에 주자학을 처음 도입하여 소개한

문성공 안향(安珦) 선생과 그의 제자분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影幀閣)입니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있으며,

영정각에는 복사본을 전시하였습니다.

 

 

                                     미수 허목(眉搜 許穆)의 영정 (좌),                                                                오리 이원익(梧里 李元翼)의 영정 (우)

 

                              미수 허목(眉搜 許穆)은 조선의 문신이며                                                  이원익은 조선이 배출한 125명의 청백리(靑白吏) 가운데

                                대학자로 전서체(篆書體)의 대가이다.                                                                으뜸가는 분으로 세 임금을 섬기며

                                                                                                                                                다섯 번이나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다.

 

 

                                           주자(朱子)                                                                                                안향(安珦) - 국보 제111호

   

 

                  남송시대의 주자학자 회암 주희(晦菴 朱喜)는                                              고려 말기 불교의 관념적이며 현실 부정적 철학을 극복하기 위하여

          공자의 학문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으로 체계화한 사람이다.                                   원(元)에 유학하여 고려에 주자학(朱子學)을 도입하고 소개함으로써

                                                                                                                                                  고려 말기 유학 진흥에 크게 공헌하였다.

 

 

                                            주세붕(周世鵬) - 보물 제717호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의 초상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은

                                            사림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선조 때의 명재상으로

                                  백운동서원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한 충절의 표상으로

                                                                                                                                       병조판서, 이조판서, 영의정을 지냈다.

 

 

유생들이 공부를 하던 명륜관은

현재 공사중이어서 들어가 볼수 없어 아쉬웠지만

유생들이 기거하던 학구재(學求齋)와

지락재(至樂齋)를 돌아보며 아쉬움을 달래봅니다.

 

 

 

지락재(至樂齋)는 강학당을 오른쪽으로 돌아 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물로서 왼쪽의 한 칸은 방이며, 오른 쪽 두 칸은 마루로 되어 있다.

지락재는 '마음의 깊이를 더하면 즐거움에 이른다'는 뜻을 갖고 있으며 '앙고재(仰高齋)'라 불리기도 한다.

학구재(學求齋)는 '학문을 구한다'는 뜻으로 일명 동몽재(童夢齋) 라고도 한다. 중앙의 마루 좌우로 방이 있다.

 

 

주세붕선생이 백운동서원으로 세운 이곳을 퇴계 이황이 중건하여

조정에서 사액(임금이 사장, 서원, 누문에 이름을 지어서 편액을 내리던 일)을 받아

소수서원이 된 역사의 기록이 보전되어 있는 사료관(史料館)입니다.

 

 

 

조선시대 사림의 사상적 본거지이자 활동기반으로서 사림의 운명공동체로 강학(講學)과 선현(先賢)의 제향(祭享) 두 기능을 담당했던 서원 중에서도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진지한 마음으로 구경하고서 오늘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인 영주 땅 최고의 명승인 부석사를 향해 차를 몰아간다.

부석사는 그동안 몇 번 다녀간 곳이지만 집사람은 처음인 것 같아 우리나라 절집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부석사를 구경시켜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입구의 주차비 징수는 당연히 면제를 받고 널찍한 주차장을 지나 부석사 입구의 주차장까지 차를 몰아 올라간다. 늘 입구에서 걸어서 일주문을 지나 부석사로 올랐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많이 걸었을 집사람의 발목을 생각해서 상부주차장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역시 1,200원의 관람료를 지불하고 들어선 부석사에는 단체관광객들을 비롯한 많은 관람객들이 북적이고 있었다.

 

 

전형적인 사찰의 고즈넉함이 물씬 풍겨나는 부석사...

 

잘 보존된 건축물과 진한 역사의 향기가 풍겨나는

목조의 느낌은 다른 사찰에서는 볼수 없는 느낌이 드네요.

 

 

부석사 삼층석탑 동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30호)

 

 

이 탑은 통일신라 후기의 3층 석탑으로 쌍탑입니다.

왼편에도 똑같은 석탑이 나란히 있으며

동서로 서로 마주보고 있지요.

 

원래부터 이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고

화재 등으로 소실된 인근 절 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온 것이라고 합니다.

 

 

부석사 삼층석탑 서탑

 

 

범종루

 

범종루는 누각식 문으로 아래 층은 통로이고

위층은 법고와 목어, 운판만 있고

정작 범종은 서쪽에 있는

진짜 종각 안에 따로 보관되어 있답니다.

 

 

 

영주 부석사(榮州 浮石寺)

신라 문무왕 1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사가 나라의 시련을 극복하고 화엄의 도리를 널리 알리기 위해 세운 절이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 석등, 보물 제220호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49호 삼층석탑, 보물 제255호 당간지주가 있고, 고려시대 유물인 국보 제18호 무량수전, 국보 제19호 조사당, 국보 제45호 소조여래좌상, 국보 제46호 조사당벽화, 보물 제735호 고려각판 등 다수의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보고(寶庫)이다.

 

 

종루를 지나니 드디어 안양루와 무량수전의 일부가 눈에 들어오는군요.

안양은 극락이므로 안양문(安養門)은 극락세계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극락세계에 들어가는 문을 지나면

바로 극락인 무량수전이 위치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한국적인 미가 돋보이는 '무량수전'

자연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보이는 공간감이 아름다운 '안양루' 등의

목건축의 아름다움을 느끼는데 부족함이 없는 곳이지요.

 

 

부석사 석등(국보 제17호)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은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전형적인 팔각등으로

통일신라 때 조성된 석등을 대표하는 유물입니다.

 

화사석(火舍石)의 벽마다 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고

옥개석 아래에 절수구(切水溝)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무량수전 안에 모셔져 있는 주불인

소조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45호)

 

무량수전 안으로 들어가 지난 날의 반성과

앞으로의 수복강녕을 빌어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소조불상은 먼저 나무로 불상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진흙을 발라서 만든 불상을 말하는데 무량수전의 소조여래좌상은 높이가 2,78m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소조불상중에서는 가장 크고 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한다.

무량수전의 안으로 들어서면 부처님의 위치가 다른 절에서처럼 건물의 가운데에서 남쪽을 바라보지 않고 건물의 왼쪽 끝, 즉 서쪽에 치우쳐 동쪽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는 원융국사부도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조성하여 모셨다는 기록과 '무량수전'이란 말 그대로 이곳이 곧 극락이란 뜻이므로 극락을 주재하는 부처님이신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교리에 따라 앉힌 모습으로 여겨집니다.(인용자료 : 답사여행의 길잡이)

 

 

부석사 무량수전(浮石寺 無量壽殿)

 

 

부석사의 본전으로

고승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했으며

국보 제18호로 지정되어 있답니다.

 

무량수전의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무를 때 쓴 글씨라고 전해집니다.

한국 건축의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는

현존 최고(最古)의 목조건물이랍니다.

 

 

부석사삼층석탑(보물 제249호)

 

 

보통 탑은 법당 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원칙인데

부석사삼층석탑은 특이하게 무량수전 동쪽 언덕에 세워져 있답니다.

9세기경 부석사가 중창되면서 함께 건립된 듯한데

탑에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이 함께 있네요.

 

참고로, 화사석(火舍石) 은 석등의 중대석(中臺石) 위에 있는

등불을 밝히도록 된 부분을 말합니다.

 

 

부석사의 유래가 되었다는 부석(浮石)

 

 

의상대사가 지금의 부석사 자리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이를 방해하는 무리가 있자 선묘용이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그들을 물리쳤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입니다.

 

 

범종각

 

 

 

발길 닿는 곳마다 천년의 숨결과 귀중한 문화재가 가득하고 화려한 치장이 없어도 아름다운 목조 건물의 너그러움으로 우리를 맞아 주었던 영주 부석사...

거기에 소백산을 정원으로 들여 놓은듯한... 아름다운 절경은 머무르는 동안 끊임없이 감탄사를 내뱉게 하였고 편안한 쉼터가 되어 주었다.

돌아보면 볼수록 우리 조상님들의 안목과 솜씨에 올 때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부석사...

그렇게 소백산 깊은 자락엔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아름다운 사찰이 있었다.

불교와 유교의 전통과 문화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영주...

겨울은 절정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한없이 메마른 계절이지만 무섬마을의 내성천이 마르지 않고 흐르는 게 반갑듯 무미건조한 일상생활의 일정에 작은 쉼을 가질 수 있는 뜻깊은 여행으로 기억될 것 같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시 찾을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좀더 천천히 여유로운 마음으로 오늘 돌아보았던 곳들을 하나하나 세세히 다시금 공부하듯 찾아보고 싶다.

부석사를 빠져나와 도로변의 사과 농장에 들러 맛나 보이는 사과 한 박스를 사서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의 먼 길을 떠나기 시작하는 차창 밖으로는 산등성이에 걸쳐 있는 붉게 물든 노을이 카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문세의 '붉은노을'의 노래에 맞춰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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