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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옆지기와 함께 강원도로 떠난 1박 2일의 겨울여행 본문

★ 여행이야기

옆지기와 함께 강원도로 떠난 1박 2일의 겨울여행

해와달^^* 2015. 2. 14. 23:11

지난 번 경북 북부지역의 나들이 이후에 다시 떠나본 아내와의 여행...

오늘은 강원도로 떠나볼까 싶어 그동안 못 가본 곳이나 설사 다녀온 곳이라 해도 오래 전 기억을 다시 되새겨보고자 볼거리가 많은 영월 땅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또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5대 적멸보궁 중에 아내가 가보지 못한 두 곳을 구경시켜 주고픈 마음도 포함시키고...

당직근무 마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채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 집사람과 함께 강원도를 향해 달려간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 강원도 영월...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한번 들어가면 다시 나온다는 기약도 없어 '편안하게 고개를 잘 넘으시라'는 뜻에서 영월(寧越)로 이름하였다 하는데...

영월군에는 특이한 이름으로 개명한 마을이 두 군데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포항의 대보면이 호미곶명으로 개명되었듯이...

그 중 하나는 영월군 서면의 한반도지형을 닮은 선암마을이 있어서 마을의 이름을 '한반도면'으로 개명하였다. 또 하나의 마을은 바로' 김삿갓면'이다.

원래는 영월군 하동면이지만 방랑시인 깃삿갓의 생가와 묘역이 있어서 2009년 10월에 이르러 마을 이름을 '김삿갓면'으로 개명하였다.

마을 이름을 김삿갓면으로 바꾸자 발길이 뚝 끊겼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으며 김삿갓문학관을 비롯한 김삿갓유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3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숨결이 남아 있는 곳...

KBS 예능프로그램인 1박 2일 여배우 특집에서 레이스미션의 최종목적지로 소개되기도 했던 영월 김삿갓 유적지를 맨 먼저 찾는 것으로 영월탐방을 시작한다.

 

 

난고 김삿갓 문학관과 김삿갓 묘,

그리고 시비동산으로 이루어진 김삿갓 유적지는

강원도·충북·경북의 접경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태백산이 끝나고 소백산이 시작되는 이곳의 지형은

노루가 엎드려 있는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으로 불리는 곳이라 합니다.

 

 

김삿갓문학관으로 연결되는 섶다리를 사진에 담고 유적지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김삿갓 연혁 안내문

 

 

 

김병연 (金炳淵, 1807 - 1863)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이다. 조선 후기 시인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성심(性深), 호 난고(蘭皐)이다. 속칭 김삿갓 혹은 김립(金笠)이라고도 부른다. 아버지는 김안근(金安根)이며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였다.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던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하였다. 당시 6세였던 그는 하인 김성수(金聖洙)의 구원을 받아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김익순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스스로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전국을 방랑하면서 각지에 즉흥시를 남겼는데 그 시 중에는 권력자와 부자를 풍자하고 조롱한 것이 많아 민중시인으로도 불린다.

아들 익균(翼均)이 여러 차례 귀가를 권유했으나 계속 방랑하다가 전라도 동복(同福:전남 화순)에서 객사하였다. 유해는 영월군 태백산 기슭에 있으며, 1978년 그의 후손들이 광주 무등산에 시비를 세우고, 1987년에는 영월에 시비가 세워졌다. 작품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 있다.

 

 

잘 꾸며져있는 공원같은 분위기가 풍기는

김삿갓유적지에는 돌에 한시를 새겨 놓고

그 아래 친절하게 설명문을 세워놓아

찾아온 탐방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작은 봉분을 갖춘 묘 앞으로는

자연석으로 만든 상석과

시선 난고 김병연지묘(詩仙蘭皐金炳淵之墓)이라

새겨져 있는 비석이 서있는 김삿갓의 묘소입니다.

 

 

 

철종 14년에 전남 화순에서 세상을 떠난 김삿갓의 유해는 3년 뒤 그의 아들에 의해 영월로 옮겨졌는데 묘소는 1982년 정암 박영국 선생에 의해 발견되었고, 1984년에 안동 김씨 대종회에 의해서 잔디를 입힌 것이라고 합니다.

번듯한 비석과 잘 차려진 상석 대신에 초라한 묘소가 김삿갓의 외로웠던 인생 여정을 잘 대변해주는 것 같고 다듬지 않은 돌에 새겨진 묘비와 상석에서는 방랑시인 김삿갓의 자유로움을 보는 것 같아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네요.

 

 

고사목을 이용한 음수대... 특이하네요.

안내판 뒤로는 김삿갓 생가로 가는 길인데

1.8km나 떨어져 있어 포기를 해야만 했답니다.

 

 

시비(詩碑)동산에는 여러 형태의 조형물들이 있는데

그중 '환갑'이라는 조형물이 가장 눈길을 끄는군요.

 

 

환갑(還甲)

 

彼坐老人 不似人 (피좌노인 불사인)  저기 앉은 저 노인네 사람 같지 아니하고

疑是天上 降神仙 (의시천상 강신선)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인가 하노라

膝下七子 皆爲盜 (슬하칠자 개위도)  슬하에 일곱 자식이 모두 도둑 놈인 것이

偸得天桃 獻壽宴 (투득천도 헌수연)  하늘에서 복숭아를 훔쳐다가 잔치를 빛내누나

 

 

 

 

조유관자(嘲幼冠者)

 

갓 쓴 어린아이 즉, 꼬마신랑을 조롱하는 시입니다.

 

 

외연신세은관개 (畏鳶身勢隱冠蓋)  솔개 보고도 무서워할 놈이 갓 아래 숨었는데

하인해수토조인 (何人咳嗽吐棗仁)  누군가 기침하다가 토해낸 대추씨 같구나.

약사매인개여차 (若似每人皆如此)  사람마다 모두들 이렇게 작다면

일복가생오륙인 (一腹可生五六人)  한 배에서 대여섯 명은 나올 수 있을 테지.

 

 

꼬마신랑 뒤에는 시선 김삿갓난고선생유적비가 세워져 있구요.

 

 

 

 

난고 김병연의 삶과 역사에 대해서 잘 설명해 놓은 문학관을 구경하고 갔어야 했는데 짧은 시간속에 여러 곳을 돌아보고자 계획한 탓에 발길을 돌려 조금은 아쉽지만 마대산 등산을 계획하고 올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꼭 찾아보리라 생각하면서 그동안 역사시간에서 접했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소를 직접 찾아보니 그의 생애에 좀더 다가설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것 같아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영월 여행에서 빠뜨지리 않고 둘러보아야 할 곳, 바로 한평생을 유랑하며 살았던 방랑시인 김삿갓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다음 행선지인 청령포를 향해 달려간다.

 

 

비수기인 겨울철이라 찾는 이가 별로 없어

스산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청령포에는

어쩌다 찾아오는 몇 명의 관광객을

건너 주고 있는 나룻배 만이 지키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찾아온 청령포.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건 없지만 이곳에 들어서니

권력의 야욕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사실이

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군요.

 

 

초가집은 단종을 모시던 하인들이 거처하던 집입니다.

초가집 안에는 하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밀랍인형으로 재현해 놓았구요.

바느질하는 모습, 부엌에서 일하는 모습 등을 볼수 있습니다.

 

 

초가집 앞에는 기와집이 있는데 단종이 머물던 곳입니다.

실제로 당시에 있던 집은 아닌 듯 합니다.

1999년에 강원도에서 재현해 놓은 것이라 합니다.

1457년(세조 3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길에 오릅니다.

청령포에서 2개월 정도 머물게 되는데 이곳이 홍수로 물에 잠기에 됩니다.

그래서 지금의 영월읍에 있는 관풍헌으로 처소를 옮기게 되지요.

관풍헌에서 2개월 정도 살다가 세조의 사약을 받고 짧은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단종어소 안에는 단종의 모습, 단종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는 선비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왕을 정면으로 보고 인사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지라 문 밖에서 인사를 올리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는 관음송(觀音松).

 

왕위를 빼앗긴 단종이 청령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둘로 갈라진 이 나무의 줄기에 걸터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관음송'(觀音松)이라는 이름은

이 소나무가 단종의 비참한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해서 '볼 관'(觀)자를,

단종의 슬픈 목소리를 들었다 하여

'소리 음'(音)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고 전합니다.

 

 

청령포 안쪽 소나무 우거진 숲을 지나 목재데크를 따라 올라가면 망향탑이 나옵니다.

 

 

한양에 있는 정순왕후를 생각하며 쌓은 탑이 망향탑인데,

이곳 망향탑에서 바라보는 서강의 물줄기가 멋있습니다.

 

 

지금의 우리는 멋진 절경이라 말하지만 삼면이 강으로 에워싸여 있고

험준한 육육봉이 뒤를 막고 있는 이곳이 감옥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어린 단종의 외롭고 무서움은 어땠을까... 짐작이 가는군요.

 

 

단종(노산군)이 무료할 때나 석양 무렵에

이곳에 올라 시름을 달랬다고 전해오는 노산대(魯山臺)입니다.

 

 

찬기운이 청령포를 휘감고 있어 오래 머물 수 없는데다

또다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청령포를 떠나기로 합니다.

 

 

금표비는 영조 때 일반 백성들의 출입을 제한하기 위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단종어소를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겠지요.

역으로 생각해보면 세조 또한

이같이 일반 백성의 접근을 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쩌면 이 금표 덕분에 사람들의 출입이 어려워졌고

청령포가 더 잘 보존될 수 있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더불어 이렇게 울창한 소나무 숲도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관음송과 소나무 군락지가 멋있고 역사를 배울 수도 있는 청령포.

나이 어린 조카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 땅으로 유배되어 내려온 슬픈 역사지만 이것을 통해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약간의 무거운 마음으로 다음 행선지를 향해 차를 몰아간다.

 

 

해발 320m의 소나기재 정상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영월 선돌을 만날 수 있는데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하는 선돌은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있어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옵니다.

 

 

기암괴석의 비경으로 층암절벽과 서강의 푸른 물이 어우러져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하는 선돌은 말 그대로 서있는 돌이라는 뜻입니다.

 

 

 

★ 영월 선돌의 유래

위치 : 강원도 영월군 방절리 산 122번지

 

전망시설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두갈래의 우뚝 솟아있는 바위.

높이 (약 70m)를 선돌(立石)이라 불리어 오고 있으며 서강(西江)의 푸른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국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여 일명 신선암 (神仙岩)이라고도 한다.

선돌 아래 깊은 소(沼)에는 자라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선돌 아래 동네 남애(南涯) 마을에 장수가 태어나 적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이곳에서 투신, 자라바위가 되었다고 하며 선돌을 바라보며 소원을 빌면 한가지씩 꼭 이루어진다는 설화가 전하여 오고 있다.

현재의 38국도가 개통되기 전에는 선돌 밑으로 옛길(신작로)이 있었으며 1905년(고종 42년)에 목탄차가 다닐수 있도록 석축을 쌓아 이 공사를 기념하기 위해 "광무9년이춘화배로수칙을사2월1일" 라고 자연석에 새겨진 비석이 남아 있다.

특히 조선시대인 1920년(순조)에 영월부사를 지낸 홍이간(洪履簡, 1753-1827)과 뛰어난 문장가로서 풍류생활을 즐기던 오희상(吳熙常, 1763-1833), 홍직필(洪直弼, 1776-1852) 등 세 사람이 구름에 쌓인 선돌의 경관에 반하여 시를 읊으면서 선돌의 암벽에다 운장벽(雲裝壁)이라는 글씨를 새겨놓고 붉은 주색을 칠한 것이 아직도 남아 있다.

 

 

 

영월 선돌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면서 잠시 비경을 구경하고 다음 목적지인 '한반도지형'을 찾아가기 위해 네비게이션에 선암마을을 입력하고 차를 몰아간다.

널찍한 주차장에는 차가운 날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타고온 차량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고 한반도지형을 찾아온 관광객들이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도 서둘러 목재계단을 따라 얼음이 얼어있는 탐방로를 조심스레 진행하면서 한반도지형을 찾아 떠난다.

 

 

명승 제75호로 지정된 한반도 지형을 마주하게 됩니다.

서강을 돌아 흐르는 선암마을의 모습은 정말 멋지네요.

어쩌면 이렇게 우리 한반도와 닮아있는지...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우측으로 보이는 마을이 선암마을로 한적한 강변마을로 인기있는 곳인데

선암이라는 이름은 고려 때 선암사라는 사찰이 있었던데 기인한다 합니다.

 

 

주차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아본 돌탑들...

 

 

 

한반도지형을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돌아온 시각이 16시 30분경.

아직 한 군데를 더 돌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요선정으로 기수를 잡아가기로 한다. 그 다음 찾아갈 예정인 법흥사가는 길목이라 요선정 부근에서 숙소를 잡고 한우로 유명한 영월다하누촌도 가까우니 안성맞춤이겠다 싶어 망설임없이 차를 몰아간다.

 

 

요선정 입구의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미륵암입니다.

 

 

먼저 요선정 가는 길 좌측 아래로 내려서면

수 많은 세월 동안 물이 만들어낸

부드러운 곡선의 암석 전시장을 만나게 되는데

 

 

 

영월 요선암(寧越 邀仙岩)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의 요선정 앞에 있는 바위이다.

백덕산(白德山, 1,350m)과 태기산(泰岐山, 1,261m)에서 흘러내린 물이 합쳐져 주천강 상류를 이루는 지점의 강 속에 있는 커다란 반석으로 요선암(邀仙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조선 전기의 문장가이자 서예가인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평창군수를 지낼 때 이곳의 경관을 즐기다 새긴 글씨라 전해지고 있다.

요선암 뒤쪽으로는 1913년에 지은 정자인 요선정(邀僊亭, 강원도문화재자료 제41호)이 자리 잡고 있다.

'요선(邀仙)'이란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바위뿐 아니라 바위 주변을 통틀어 요선암이라고 부르는데 맑은 강 속에 커다란 바위들이 넓게 깔려 있어 경치가 아주 뛰어나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것을 실감할 수있는

이곳은 어떠한 강함도 오랜 시간의 부드러움에게

함께 동화되어가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곳입니다.

 

 

강원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에 위치한  요선정(邀仙亭).

 

요선정이라는 이름은

조선 중기 풍류가인 봉래 양사언이 이곳의 경치에 반해

선녀탕 바위에 요선정이라는 글씨를 새긴 것에서 유래된 이름인데

정자의 앞면 오른쪽에는 이응호가 쓴 '요선정',

왼쪽에는 '모성헌'이라 적힌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인 무릉리마애여래좌상.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거주하는 원ㆍ곽ㆍ이씨 세 성씨의 요선계 계원들이 주측이 되어 1915년 정자를 지어 숙종대왕, 영조대왕, 정조대왕 세 임금님의 어제시(御製詩) 편액을 봉안하고 있어 역사적 사료가 깊은 곳입니다.

숙종대왕이 단종에 대한 조사를 하시다가 시 한수 지어 강원 감사에게 어찰을 내려 보내어 청허루에 봉안된 것인데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청허루가 붕괴되고 숙종의 어제시 현판은 일본인 주천경찰서장의 소유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이 숙종의 어제시를 소유하고 있다는데 거부감을 느낀 요선계 회원들은 많은 돈을 지불하여 어제시를 매입하였고 이를 봉안하기 위해서 요선정을 건립하였다 합니다.

 

 

 

비록 역사가 짧고 규모도 작지만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해 수주면의 원씨, 이씨, 곽씨 세 성이 조직한 요선계원들의 역사의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수 있다. 이제 밝게 빛나던 햇살도 힘을 잃어가는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시간이라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저녁을 먹기 위해 요선정을 빠져나와 주천면소재지에 있는 '다하누촌'을 찾아간다. 한반도지형이 있는 선암마을에서 이곳 요선정을 올때 지나쳐왔던 곳이라 찾아가는데는 별 문제가 없어 천천히 차를 몰고 가던 중 모텔이 하나 눈에 띄어 안으로 들어가 객실 내부를 확인해보고 예약을 하고 다시 나와 주천면으로 찾아들어 가니 어느 새 깜깜해진 저녁시간이다.

다하누촌 본점을 찾아 한우로 근사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되돌아와 하루종일 구경다니느라 피곤했을 육신을 쉬게 하며 잠자리에 든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눈을 떠 이튿날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숙소를 빠져나와 적멸보궁이 있는 법흥사를 찾아간다.

 

 

법흥사의 종각을 겸하고 있는 금강문

 

 

 

사자산은 횡성과 평창, 영월의 경계가 만나는 지점에 있는데 사자산을 중심으로 동쪽에 백덕산(1,350m), 서쪽에 삿갓봉, 남쪽에 연화봉이 둘러 서 있습니다.

네가지 재물이 있는 산이란 뜻으로 사재산(四財山)이라고도 불렀는데, 이 네 가지 재물은 산삼, 옻나무, 흰 진흙, 꿀입니다.

법흥사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하자면, 통일신라 말기 선문 9산 중 사자산문의 중심 도량인 흥령선원지의 옛 터입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로써 우리 나라 5대 적멸보궁(寂滅寶宮) 중의 한 곳으로서 대표적인 불교성지이기도 합니다. 신라 때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친견하고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裟)를 전수받아 643년에 귀국하였는데, 그 뒤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태백산 정암사(淨岩寺), 영축산 통도사(通度寺),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등에 사리를 봉안하고 마지막으로 이 절을 창건하여 진신사리를 봉안하였으며, 사찰 이름을 흥녕사(興寧寺)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도윤국사와 징효국사 때 크게 산문이 번성하였으나 진성여왕 때 병화로 소실되었고, 고려 초 혜종 1년(944년)에 중건하였으나 그 뒤 또다시 소실된 채 그 명맥만 이어오다가 1902년 비구니 대원각이 중건하고 법흥사로 개칭하였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이곳을 찾았던 지난 날과 비교했을 때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여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드는군요.

 

 

새로 지은 극락전과 종각

 

 

징효국사 부도와 징효대사 보인탑비

그 뒤로 200년 된 밤나무가 보입니다.

 

 

발걸음을 떼어 적멸보궁을 향해 걸어갑니다.

 

 

적멸보궁으로 오르는 길에는

미끈하게 뻗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적멸보궁을 찾아가는 즐거움은 배가 됩니다.

 

 

다시 찾은 법흥사 적멸보궁입니다.

 

 

 

법흥사 적멸보궁 기둥에 쓰여진 글은 '주련'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확인해보면

 

萬代輪王三界主(만대윤왕삼계주)  만대의 왕이며 삼계의 주인이신 부처님
雙林示滅幾千秋(쌍림시멸기천추)  사라쌍수 열반 이래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가
眞身舍利今猶在(진신사리금유재)  부처님 진신 사리를 지금 여기에 모셨으니
普使群生禮不休(보사군생예불휴)  뭇 중생으로 하여금 예배를 쉬게 하지 않으리.

 

 

사리탑과 자장굴

 

 

자장율사가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수도하던 토굴이 자장굴입니다.

토굴 주변에 석축을 올리고 흙으로 위를 덮었습니다.

이 토굴 안을 들어가 보지 못하지만 내부는

높이 160cm, 길이 150cm, 너비 190cm의 넉넉한 공간으로

바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바람에 나부끼며 산사의 정적을 깨는

풍경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적멸보궁 법당의 처마 끝에 달려있는 장식이

물고기 문양이었는데 지금은 연꽃문양으로 바뀌었네요.

 

 

제 2보궁인 약사전 앞에서 바라본 구봉대산의 부처님.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인 영월 사자산 법흥사. 오래 전 친구들과 구본대산과 법흥사를 찾았던 그때의 기억이 너무 좋아 집사람에게도 구경시켜 주고파 이번 여행 코스에 집어 넣었는데 키 크고 미끈한 소나무 숲길을 걸어 적멸보궁으로 올라가면서 이런저런 잡생각이 저절로 사라지게 만드는 조용한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곳이어서 너무 좋았고 비워버린 마음으로 적멸보궁을 참배할 수 있었으니 소위 말하는 '기도빨'이 잘 받았으리라는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컸던 시간이었다.

이제 마지막 찾아갈 곳인 오대산 월정사와 상원사 그리고 적멸보궁을 향해 평창 땅으로 달려간다.

오대산을 향해 가던 중 차장 밖으로 멀리 섶다리가 보여 들러보기로 하고 가까운 곳 공터에 차를 세워놓고 섶다리를 찾아간다.

 

 

영월군 주천면 판운리의 섶다리

 

 

섶다리는 역사가 깊은 다리입니다.

섶다리는 통나무, 소나무가지, 진흙으로 놓여진 임시 다리를 말하는데,

강을 사이에 둔 마을 주민들의 왕래를 위해

매년 물이 줄어든 겨울 초입에 놓았다가

여름철 불어난 물에 의해 떠내려갈 때까지 사용된다고 합니다.

 

 

Y자 모양의 참나무로 다리발을 만들고

낙엽송 장대로 엮은 다음에 소나무가지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어 사람들이 여울을 건널 수 있게 만든 것인데


작은 두 마을을 이어주는 영월의 섶다리는

마을사람들의 왕래를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섶다리는 다른 마을 사람들과 정도 나누고

소통도 하는 소중한 수단이었답니다.

 

 

 

 

뜻하지 않게 예정에 없었던 섶다리를 오대산을 찾아가는 도중에 만나게 되어 다리를 건너가 얼음이 꽁꽁 얼어있는 강에서 사진도 찍으며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시 월정사를 향해 달려간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려 진부IC를 빠져나와 월정사 입구의 매표소에 도착하여 입장료와 주차비 포함 만원이라는 거금을 지불하고 적멸보궁을 먼저 찾아가기로 하고 상원사를 향해 달려가니 예전 친구들과 걸었던 비포장도로에는 겨울철 낮은 기온으로 길바닥이 꽁꽁 얼어있어 운전이 조심스러워진다.

다시 만나는 상원사 주차장에 주차를 해놓고 적멸보궁을 알리는 커다란 빗돌을 사진에 담으면서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탐방을 시작한다.

오대산은 동서남북과 중앙에 오류성중(동대 관세음보살, 서대 아미타불, 남대 지장보살, 북대 석가모니불, 중대 문수보살)이 상주 한다는 믿음에서 산명이 비롯됐으며 이로부터 오대산은 거대한 불국을 이루었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은 이 오대산에 들어 초암을 짓고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중대 사자암 뒤편 봉우리에 중국 오대산에서 모셔온 석가모니 정골사리를 봉안 하였으니 여기에서 적멸보궁이 유래했다고 한다.

 

 

불자라면 누구나 생시에 한번은 순례하고 싶어하는 적멸보궁입니다.

오대산은 월정사.상원사 같은 천년고찰과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이 비로봉 아래 있기에 불자들에겐 선망의 산이기도 합니다.

 

 

관대걸이

(조선 세조가 목욕할 때 의관을 걸어둔 곳)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 신라의 보천태자와 효명왕자 두 왕자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말 나옹스님의 제자라고 알려진 영로암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을 유람하다가 터만 남은 상원사를 중창하였다는 기록도 있다고 한다.

고려 말부터 시작된 억불 정책으로 인해 쇠락의 길을 거듭하다가 조선 태종 말년 상원사 사자암을 중건하고 자신의 원찰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조카인 단종을 죽이고 7대 임금으로 즉위한 세조는 그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다가 불교에 귀의하여 그 잘못을 참회하고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두 번이나 친견하고 나서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와 고양이로 인해 자객의 위협에서 목숨을 건진 일 등을 통해 상원사와 깊은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으로부터 6년전인 2009년 여름 처음 이곳을 찾았던

그때는 못 보았던 새로운 것들이 눈에 띄는군요.

눈 앞에 펼쳐진 108 돌계단과 웅장한 건축물이 바로 그것입니다.

 

 

천고의 지혜, 깨어 있는 마음...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불사를 한 모양입니다.

상원사는 신라 성덕왕 4년(705)에 세워 처음에는 진여원으로 불렸으며

자장율사가 당나라의 문수신앙을 수용한 이후로 문수도량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역시 처음보는 오층석탑이 문수전 한가운데 자리를 잡고 있네요.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은

조선 세조 12년(1466) 둘째 딸 의숙공주 부부가

세조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고자 만들었다고 합니다.

 

 

 

세조 12년(1466) 조성된 이 문수동자상에는 세조와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세조는 즉위기간 내내 조카인 단종을 죽인 죄책감에 시달렸는데,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가 자신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고 나서부터 몸쓸 피부병에 걸렸다고 한다. 명의와 명약으로도 낫지를 않아 오대산 상원사에서 기도를 드리던 어느날, 오대천의 맑은 물에서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동자승(童子僧)이 있어 등을 좀 밀어달라고 하여 동자승이 등을 밀어주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졌단다.

목욕을 마친 세조가 그 동자승에게 임금의 옥체를 씻어주었다는 이야기를 함구해달라고 하니 동자승은 미소를 지으며 "대왕께서도 어디 가든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고 하지 마십시오" 하고는 사라져버렸다고 한다. 깜짝 놀란 세조가 주위를 살피니 동자승은 사라지고 자신의 몸에 피부병이 다 나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문수보살의 도움으로 불치병을 치료한 세조는 크게 감격하여 화공을 불러 그때 만난 동자의 모습을 설명하며 그림으로 그려내라고 하였으나 화공들이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하루는 누더기를 걸친 노스님이 와서 자신이 그려보겠다고 하며 설명도 제대로 듣지 않고 알아서 그려냈는데, 문수동자승의 모습이 너무나 똑같아 세조가 깜짝 놀라 어디에서 오셨는지를 물으니 영산회상에서 왔다고 답하고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버렸다고...

그 그림을 가지고 목각으로 조각을 한 것이 바로 이 문수동자상 이라고 한다. 그림은 남아있지 않고 목조각만 남아있다.

 

 

문수전을 나와 바로 옆 방으로 들어가면

한암, 탄허 스님의 영정을 모셔놓은 방이 마련되어 있는데

벽에 걸려있는 그림이 인상적이어서 담아보았답니다.

 

 

문수전(文殊殿)

 

문수전 안에는 세조때 조성한

목조 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과 문수보살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문수전 오르는 계단 옆에는 고양이 석상이 자리잡고 있는데 세조 임금과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하루는 세조가 기도하러 상원사 법당에 들어가려 하자 고양이가 나타나 세조의 옷깃을 물고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고 하네요. 이를 괴이하게 여긴 세조는 법당 안밖을 샅샅이 뒤진 끝에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서 세조를 죽이려는 자객을 찾아네게 됩니다. 고양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세조는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상원사 고양이를 잘 기르라는 뜻에서 묘전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요즘에는 고양이의 석상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많은 분들이 고양이 석상을 만지며 소원을 빌고 있다고 하네요.

 

 

상원사가 유독 평화로워 보이고... 경건해 보이는 것은

아마도 상원사에 청량선원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선원(禪院)이란 스님들이 선을 배우고 실제로 수행하는 교육기관으로,

이곳 청량선원에서는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과 수얼, 운봉, 동산 스님이 수행하였다 합니다.

 

특히, 1982년 이후에는 한암스님을 비롯해 탄허, 석주, 효봉 등

스님들의 수행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북방제일선원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동종각(銅鐘閣)

 

 

상원사의 가장 큰 보배, 국보 제36호 동종.

 

 

 

현존하는 종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우며 청아한 소리 또한 이루 비길데 없는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신라 성덕왕 24년(725)에 주조된 것으로 조선 태종 때 불교가 박해를 받을 때 안동으로 옮겨졌는데 관풍루에 걸려 있던 것을 예종 원년 1469년에 상원사로 옮겼다고 하는데 한국 종 고유의 특색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표적 범종입니다. 경주의 봉덕사종(에밀레종)과 더불어 2개 밖에 남지않은 신라의 범종으로 동종의 표면에는 구름 위로 하늘을 날면서 옷깃을 흩날리며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 조각과 함께 종소리가 멀리 울려퍼지는 최고의 명작이랍니다. 에밀레종이 장중한 소리를 내는 것에 비해 상원사 종소리는 맑고 청량하다고 합니다.

 

 

전에 없던 달마대사 조각상도 보게 되는군요.

 

 

수곽(水廓)

 

아픈 이에게 약수를...

목마른 이에게는 감로수를...

사랑이 필요한 이에게는 자비수를...

 

 

 

 

적멸보궁으로 향하는 길은 채 녹지 않은 눈이 빙판을 이루고 있어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아 잔뜩 긴장을 한채 조심스럽게 진행을 해야만 했네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오대산에 있는 중대 사자암(中臺 獅子庵)은

월정사(月精寺)의 산내암자로, 적멸보궁(寂滅寶宮)의 수호 암자입니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는 좌우로 서있는 석등 역시 전에는 못보던 것이었네요.

 

 

불사가 많이 이루어진 것을 보니

그 사이 시간이 제법 흘렀음을 느끼게 되는군요.

적멸보궁을 오르는 계단 옆으로 나있는 길은

오대산의 최고봉인 비로봉을 오르는 등산로랍니다.

 

 

적멸보궁은 간소하고 조촐합니다.

적멸보궁 내부에는 부처님이 앉아 계심을 상징하는

붉은 방석만이 수미단 위에 놓여 있을 뿐입니다.

 

 

적멸이란 모든 번뇌의 불이 꺼진 곳...

본래의 마음자리인 고요의 상징 상태로 돌아감을 이르는데

한마디로 열반을 뜻하는 것입니다.

 

 

 

 

중대(中臺) 사자암은 적멸보궁의 불사리를 공양하는

분수승(焚修僧:부처님 앞에 향불을 피우고

불도를 닦는 중을 말함)이 머물고 있는 곳입니다.

절 이름이 사자암인 건 문수보살이 사자를 타고 다니기 때문이지요.

 

 

비로자나부처님을 주불로 모셔놓은 비로전입니다.

예전엔 원목의 느낌 상태였는데 지금은 화려한 단청을 입혔네요.

 

 

중대사자암을 나와 월정사를 향한 걸음은

보궁으로 올라갈 때의 길이 아닌

아래로 나있는 돌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를 따라 가기로 합니다.

 

 

 

계곡 아래에 쌓인 눈을 보면서 널찍한 도로를 따라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며 상원사를 지나 도착한 주차장에서 월정사를 향해 차를 몰아 금강교 입구의 주차장에서 삶은 계란과 과일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월정사 탐방에 나선다. 먼저 아내에게 하늘을 향해 시원하게 뻗은 전나무가 인상적이고 산림청이 뽑은 '2011년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된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보여주고 싶어 금강교를 건너면서 방향을 우측으로 꺾어 진행한다.

 

 

국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로 꼽히는

오대산 월정사 전나무숲은

월정사 입구에 형성된 약 1km의 숲길로

 

 

수령 100년 안팎의 전나무 1,700여 그루가

길 양쪽으로 도열해 있어

피톤치드가 많아 산림욕 장소로도 인기가 많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심신 단련과

월정사 스님들의 참선 장소로도 이용되는 등

이 길에 서면 사위에서 풍겨오는 신비스러운 기운에

걷는 이의 마음은 저절로 숙연해지게 마련입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 소담스런 눈이 내려

하얀 눈을 밟으며 걷고 싶다는 바램을 가졌었는데

 

 

불행히도 그런 바램은 기우에 지나지 않아

다음 기회에는 하얀 융단을 깔아놓은

숲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염원을 가져봅니다.

 

 

이 전나무는 2006년 10월 23일 밤

수(壽)를 다해 부러져 쓰러졌는데

전나무숲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였으며

수령이 무려 600년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이 숲속에서 터줏대감처럼 지켜온 나무...

 

월정사 전나무숲길을 걸을 때 이 나무의 주검을 발견하게 되면

누구라도 한번쯤 이제는 편히 쉬라고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이라도 남겨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을 가져봅니다.

 

 

곧은 성품을 지닌 스님의 마음처럼

전나무는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자라고 있으며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은

천년의 숲이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한 곳이랍니다.

 

 

햇살이 좋은 날이면

전나무 사이로 은은하게 쏟아지는 햇빛이 근사한 곳이며

바람이 부는 날이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청량하게 들려오고

겨울철 눈이 오는 날이면

하얀 구름 위를 걷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길입니다.

 

 

월정사 일주문

 

 

전나무 숲길을 따라 쭈욱 걷다보면

월정사의 입구를 알리는 일주문을 만나게 됩니다.

절 어귀에 서 있어 월정사의 위용을 한 눈에 느끼게 해주는 일주문은

중생이 자유롭게 드나들라는 의미에서 문을 달지 않았고,

월정사 일주문은 화려한 단청에 다포계의 공포로

상부의 하중을 분산시키는 시각효과를 나타냈다고 하는데

현판의 '월정대가람'이라는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사시사철 푸르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띠며 맑은 물이 사시사철 흘러내리는

금강연의 빼어난 경관을 담아보려고 두껍게 얼어붙은 하천으로 내려섭니다.

 

 

자, 이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이자

문수성지인 대가람 월정사 탐방을 시작해볼까 합니다.

 

 

금강교를 지나 제일 먼저 만나는 문이 천왕문입니다.

 

 

 

일명 사천왕문(四天王門)이라고도 하며 대개 일주문 다음에 천왕문(天王門)이 있다.

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수미산 중턱에 살고 있는 불법을 외호(外護)하는 신장(神將)을 모신 전각이다. 이 천왕들은 수미산 중턱의 동, 서, 남, 북에서 그들 무리와 살면서 인간의 선악을 관찰하며 불법을 수호한다.

 

 

월정사의 금강루(金剛樓)

 

 

 

월정사의 금강루(金剛樓)는 사천왕문을 지난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일주문, 사천왕문, 불이문으로 이어지는 한국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월정사는 불이문의 자리에 금강문을 두고 있다.

금강문의 오른쪽에는 움금강역사상이라고도 하는 나라연금강이, 왼쪽에는 흠금강역사상이라고도 불리우는 밀적금강이 있으며 특히 밀적 금강역사는 지혜의 무기인 금강저를 들고 부처님을 호위한다.

 

 

종무소가 있는 설선당(說禪堂)

 

 

 

월정사(月精寺)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珍富面) 동산리 오대산(五臺山) 동쪽 계곡의 울창한 수림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 월정사는 동대 만월산을 뒤로 하고, 그 만월산의 정기가 모인 곳에 고요하게 들어앉아 사철 푸른 침엽수림에 둘러싸여 고즈넉한 아름다움을 띤다.

그 앞으로는 맑고 시린 물에서 열목어가 헤엄치는 금강연이 또한 빼어난 경관을 그리며 흐르고 있다. 월정사를 품고 있는 오대산은 자연 조건이며 풍광이 빼어날 뿐더러 예로부터 오만 보살이 상주하는 불교성지로서 신성시 되어 왔다. 그 오대산의 중심사찰로서 신라 때부터 지금까지 1400여 년 동안, 개산조 자장율사에서부터 근대의 한암, 탄허스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름난 선지식들이 머물던 곳이려니와, 월정사는 오늘날에도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이곳 전나무 숲의 그 곧음과 푸름으로 승가(僧伽)의 얼을 오롯이 지키고 있는 한국 불교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한국불교연구원이 발행한 월정사에서는 월정사라는 명칭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승(寺僧)의 말에 따르면 오대산 동대에 해당하는 만월산 아래 세운 수정암이 훗날 월정사가 되었다.

사명(寺名)은 월정사(月精寺)의 월자와 만월산(滿月山)의 월자를 연관시킨 이러한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 강릉 불우(佛宇)조에는 월정사와 수정암이 별개의 사찰로 기록되어 있어 사승의 이 같은 이야기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자장율사는 636년에 중국 오대산으로 유학을 가고 그곳 문수사에서 기도하던 중에 문수보살을 친견한다. 자장율사는 너희 나라 동북방에는 일만의 내가 상주하고 있으니 그곳에서 다시 나를 친견하라는 게송을 문수로부터 듣고 신라에 돌아오자마자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오대산에 들어가 임시로 초가를 짓고 머물면서 다시 문수보살을 만나기를 고대하며 정진하였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창건 유래에는,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온 643년(신라 선덕여왕 12)에 오대산이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무는 성지라고 생각하여 지금의 절터에 초암(草庵)을 짓고 머물면서 문수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또한 민지(閔漬)가 쓴 봉안사리 개건사암 제일조사 전기(奉安舍利開建寺庵第一祖師傳記)에 인용한 대산본기(臺山本記)에는 이때 그가 머물던 곳이 바로 현재의 월정사 터이며, 훗날 다시 8척(尺)의 방(房)을 짓고 7일 동안 머물렀다고도 전하고 있어 이 절은 643년 자장이 건립했다고 볼 수 있다. 자장은 이곳에서 초가집을 짓고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백산 정암사에서 입적하였다.

비록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하는 뜻은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이로부터 월정사는 오대산 깊은 계곡에 터를 잡게 되었다.

그 후 유동보살(석가모니가 전생에 보살로서 수행할 때 연등불(燃燈佛)에게 공양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 당시의 이름)의 화신이라고 전해지는 신효거사와 또 범일국사의 제자였던 두타 승 신의스님이 자장율사가 초가를 지었던 터에 다시 암자를 짓고 살았다. 신의스님 이후로 오랫동안 황폐한 채로 남아 있던 이 암자는 수다사(水多寺)의 장로 유연스님이 새로 암자를 짓고 살면서 비로소 절의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고 그 뒤로 차츰 규모가 커졌다.

그 무렵의 월정사는 금당 뒤쪽이 바로 산인 특수한 산지가람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금당 앞에 탑이 있고 그 옆에 강당 등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는데 이는 남북자오선(南北子午線) 위에 일직선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 등을 세운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가람 배치와는 다르다.

130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이일(而一)이 중창하였고 1833년에 또다시 불이나 전소되었다. 1844년 영담(瀛潭), 정암(淨庵)이 사찰을 중건하였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1.4후퇴 때 사찰의 대부분이 전소되었으나 1964년 이후 탄허(呑虛), 만화(萬和), 현해(玄海) 등이 중건하였다.

문수보살이 머무는 성스러운 땅으로 신앙되고 있는 이 절은 조선왕조실록 등 귀중한 사서(史書)를 보관하던 오대산 사고(史庫)가 있었고, 1464년(세조 10)에 말사인 상원사(上院寺)를 중수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돕고자 시주물(施主物)과 함께 보내 온 오대산 상원사 중창권선문(五臺山上院寺重祠勸善文)이 보관되어 있다.

주요 문화재로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건립한 8각 9층석탑과 일명 약왕보살상(藥王菩薩像)이라고도 하는 보물 제139호인 석조 보살좌상(菩薩坐像)이 있다.

 

 

적광전(寂光殿)

 

 

 

팔각구층석탑 뒤에 만월산 자락의 한 기운이 엉긴 곳에 자리한 적광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매우 큰 법당으로, 팔작지붕에 다포계 양식으로 세워졌으며 갖가지 문양이 어우러진 단청은 매우 화려하다.

1930년대의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과거 7불을 보신 칠불보전이 자리하고 있었으나 6.25 전쟁 때 아군에 의해 소실되었다가 1968년에 만화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다시 중건되었다.

적광전 외부 기둥 18개 중 16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소나무이고 2개는 괴목이며, 내부기둥 10개는 오대산에서 자생하는 전나무로 만들었다. 적광전이 소실되기 전에는 칠불보전(七佛寶殿)이라 했다.

대체로 적광전에는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통례인데 이곳 적광전은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의 불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이는 1964년 만화스님 법당 중창 당시에는 현판이 대웅전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탄허스님의 오대산수도원을 기념하기 위해 결사의 주(主) 경전이었던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다는 의미로 적광전으로 고쳐 현판을 달았다.

적광전 뒷면 벽화는 10개의 소를 찾아 다니는 이야기를 그린 심우도가 그려져 있다. 적광전 현판과 주련(柱聯) 글씨는 탄허스님의 친필이다.

 

 

종고루(鐘鼓樓)

 

 

 

종고루(鐘鼓樓)는 적광전 정면에 있는 앞면 3칸, 측면2칸의 2층누각이다. 범종, 목어 운판, 법고 등의 불전사물을 봉안하여 새벽예불과 저녁예불 때 사용한다. 이 사물은 모두 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진리를 중생에게 전하고, 해탈성불을 이루게 한다는 교화의 의미를 가진다.

즉 법고를 두드려 부처님의 법으로 축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한다. 목어는 잠잘 때에도 눈을 뜨고 자는 물고기와 같이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의미를 지녔고, 물속 중생의 제도를 기원한다. 운판을 치는 것은 날짐승을 위한 기원이며, 범종을 치는 것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사람 등 일체 중생의 구제를 기원하는 의미이다. 목어와 법고는 나무와 가죽으로 만들며 범종과 운판은 금속으로 만든다. 나무와 가죽은 땅의 소리를, 금속은 하늘의 소리를 의미하며 온 세상에 진리의 소리를 전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마음을 담고 있다.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경의 작품이며 국보 제 48호인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북쪽 지방에서 유행했던 석탑의 양식으로 고려 초기의 석탑을 대표하는 석탑입니다.

8층이나 되는 그 늘씬한 몸매가 보여주는 그 균형미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층층의 모서리마다 달려 있는 청동 풍경과 금동장식으로 장식한 상륜부... 기단 위의 조각이나 모서리의 휘어진 모양새의 화려함에 그저 한동안 넋을 잃습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과 그 앞의 석조보살좌상

 

월정사 구층팔각석탑은 국보 제 48호로 지정되어 있고,

그 앞에 있는 석조보살좌상은 보물 제 139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습니다.

 

 

적광전 안에 모셔져 있는 석가모니불

 

 

적광전에는 대개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것이 통례지만 여기서는 그 통례를 깨고 석굴암 불상의 형태를 따른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법당은 원래 대웅전이라 불리는데... 적광전이라 부르는 까닭은 오대산이 화엄, 문수도량이며, 한암, 탄허 선사께서 주석하시면서 불교 최고 경전인 화엄사상을 널리 퍼뜨리셨는데, 화엄경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함께 모신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

 

 

수광전(壽光殿) /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수전은 서방 극락정토의 교주 아미타불을 모신 곳으로 수광전, 극락전 이라고도 불리운다.

아(阿)란<아미타(바)Amitabha 무량광無量光·무량수無量壽> 한량없다(無)의 뜻이며 미타는 수명을 뜻하니 목숨이 없는 수명의 다함이 없는 부처님이란 뜻이다. 월정사 무량수전은 상단에는 아미타부처님과 협시보살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좌우에 모시고 뒤쪽으로 극락의 법회 장면을 묘사한 목각탱화 극락회상도(極樂會上圖)를 모시고 있다.

중단에는 지장보살님을 모시고 지장시왕(地藏十王) 목각탱화를 봉안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지옥의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보살님을 금선묘(金線描)의 탱화로 봉안하고 있다. 지금 무량수전은 1989년 도명스님 때 시작해 1992년 현해스님이 완공(廻向)했다.

 

 

이처럼 추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매화나무에도 연한 붉은 꽃이 피어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서

월정사 겨울 산사에서  다가올 봄을 기다려 봅니다.

 

 

 

다섯 봉우리가 연꽃무늬를 만든다는 오대산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월정사를 찾아가는 길은 하늘로 곧게 뻗은 전나무 숲이 원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멋진 걸음이었다.

일주문에서 시작되는 1㎞의 전나무 숲을 걸어본 것만으로도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가치를 충분히 뽑은 것 같다.

자비로운 부처님을 호위하듯 부드럽게 우거진 전나무 숲의 터널을 지나고, 천왕문과 누각 아래를 지나면 오대산의 푸른 기운을 한 곳으로 모으는 듯한 사찰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은 품위와 기개를 느꼈고, 조카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여 얻은 온갖 질병들이 마치 하늘의 벌인 양 그 죄를 씻어내기 위함인지 불교에 귀의하고 월정사를 수시로 찾아 몸과 마음의 병을 치유하였던 조선의 임금 세조를 받아준 오대산의 자연과 사찰의 넉넉함은 인륜을 넘어서는 넉넉함이 가득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번째의 월정사 방문이지만 새삼 경이로움으로 다가왔고 여느 사찰에서는 쉽게 느끼고 볼수 없는 장엄함이 묻어나는 대찰임을 새삼 느끼게 된것 같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 보았던 6시에 시작하는 종고루의 타종행사를 보려고 했지만 기다리는 시간이 많이 남아있고 또한 귀로의 여정이 너무 멀기에 아쉬운 마음으로 월정사를 빠져나온다.

산문을 나서며 합장으로 인사를 하고서 차를 몰아 영동고속도로를 거쳐 동해시 방향으로 달리던 중 '정동진' 이정표를 보고는 가보고 싶다는 말을 건네는게 아닌가.

조금은 늦은 시각이지만 예까지 왔는데 또 언제 올수 있을지 생각하며 핸들을 꺾어 남강릉IC를 빠져나와 정동진을 향해 달려간다.

 

 

모래시계나무(일명:고현정소나무)

 

 

정동진역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모래시계소나무 때문이지요.

TV드라마 '모래시계' 촬영장소로 '고현정소나무'로 불리다가

결혼한 이후로 모래시계소나무로 이름지어 불리고 있습니다.

 

 

레일바이크 선로가 생기면서 정동진역에서

바로 해변으로 들어가는 길은 사라져 버렸네요.

 

 

세계에서 바다와 가장 가까운 철도역인 정동진역.

철길과 해변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아름다운 간이역으로 정동진의 명소 중 한곳입니다.

 

 

오랜만에 찾은 거대한 모래시계 조형물.

 

모래시계의 모래는 정확히 1년 동안 떨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곳 정동진 역시 오랜만에 찾은터라

전에 없던 시설물들이 많이 생겼네요.

시간박물관이라는데 이미 문을 닫아버렸군요.

 

 

파도가 넘실대는 정동진의 겨울바다를 보고 있으니

가슴이 탁 트이는 쾌감을 맛보게 되는군요.

 

 

야산 뒤로 선크루즈리조트가 보이는데

오늘은 그냥 눈요기만 해야만 했답니다.

예전 차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던

바다 끝 카페까지 앵글에 넣어 카메라에 담고서

 

 

어둠이 내려앉은 모래시계공원의 야경을 담는 것으로

오늘 일정의 마지막을 장식할까 합니다.

집으로 가야할 거리가 만만찮기 때문이지요.

 

 

 

 

그동안 제대로 구경시켜 준게 없어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모처럼 함께 1박2일의 여정으로 강원도를 찾아 돌아본 여행길이 마음에 흡족했는지 오가는 내내 기분이 좋은걸 보니 내심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다소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여러 곳을 다니며 역사와 문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적멸보궁을 두 군데나 들렀으니 그 어느 때보다 알찬 나들이가 아니었나 싶어 내심 스스로에게 흡족한 마음을 가져본다. 함께 한 집사람의 마음은 또 어더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곧 우리에게 다가올 따뜻한 봄날에는 남녘으로 눈을 돌려 코스를 잡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한층 어두워진 도로를 달려 집으로의 먼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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