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봄볕이 따사로웠던 날에 돌아본 남도여행 2박 3일(첫날 이야기) 본문
해마다 3월의 초입에 들어서면 슬슬 긴장이 되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아내와 백년가약을 맺은 날이 도래하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야 외식도 하고 영화 구경도 하면서 챙겼었지만 한해 두해 시간이 흘러갈수록 자꾸 까먹게 되고 사느라고 바빠서 미처 챙기지 못했다며 구차한 변명만 늘어 놓았다가 25주년 때 거제도로 여행을 갔었는데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렀음을 깨닫고 시위를 떠난 화살같은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게 된다.
올해로 33주년을 맞는 결혼기념일에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 따뜻한 남쪽지방으로 봄맞이 나들이를 기획해 본다.
먼저 남녘으로 달려가기 전에 들러봐야 할 곳이 있어 양산 통도사를 향해 차를 몰아가 산문 입구의 주차장에 파킹을 해놓고 통도사로 향한다. 사찰 안에 있는 주차장까지 차를 몰고 들어가도 되지만 전국 최고의 소나무 길인 '무풍한송(舞風寒松)'길을 아내에게 보여주며 걸어보게끔 해주고픈 마음이 있어 산문 입구에서 합장 반배로 예를 올리며 불보종찰 양산 통도사 안으로 들어간다.
사실 오늘 통도사를 찾은 주 목적은 통도사 경내 영산전 뒤에 있는 영각 앞에 피어난 홍매를 보러가는 걸음이다.
전국적으로 이름난 영각 앞의 매화는 일명 자장매라 불리워지는데 만개했을 때는 전국의 사진사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고 한다.
매화 찾아가는 길에 잠시 어설픈 보따리를 풀어내어 본다.
이른 봄 꽃망울이 터져 처음 피어난 매화를 찾아가는 것을 '탐매(探梅)'라 하고, 만개한 매화를 찾아 화사한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을 '관매(觀梅)'라 한다.
영축산 통도사 경내에는 수령 350여 년의 자장매, 수령 150여 년의 영취매, 수령 50여 년의 통도매가 있다.
통도사 산문까지 이어지는
통도팔경의 하나인 '무풍한송(舞風寒松)'길이 시작됩니다.
'무풍한송'길은 춤추는 바람결에 물결치는
찬 소나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 합니다.
하늘로 오를 듯 용틀임하는 소나무.
통도사로 향하는 고요하고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사박사박 걸어가는 집사람의 발걸음은 경쾌하기 이를 데 없네요.
산문(山門)
부도원을 지나서 바로 나타나는 문으로
월하스님께서 쓰신 "영축총림(靈鷲叢林)"이란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총림의 사격과 사찰의 시작을 표방한 총림문(叢林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 5대 총림은
가야총림 해인사, 조계총림 송광사, 영축총림 통도사,
덕숭총림 수덕사 그리고 고불총림 백양사입니다.
총림이란 많은 승려가 모여 수행하는 곳으로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을 갖추고 있습니다.
산문 앞에 위치한 부도원(浮屠院)
통도사의 역대 고승들의 사리탑과 탑비를 봉안한 곳입니다.
이곳에 있는 부도와 탑비들은
원래 통도사 주변과 산내암자에 흩어져 있던 것인데,
1993년 가람을 정비하면서 모두 이곳으로 이전하여
부도원(浮屠院)으로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현재 부도원에는 역대 고승들의 부도 60여기와 탑비 및 중수비ㆍ공덕비 등
석비(石碑)가 60여 기가 즐비하게 줄지어 있답니다.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과 석장승
통도사 전래 문화재를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보전, 전시하고 체계적인 연구를 통하여
일반 대중에게 불교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건립되었습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성보박물관으로
성보문화재 4만 여점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무지개다리'라고도 하는 '삼성반월교(三星半月橋)'.
다리 아래를 흐르는 물색에도
봄의 기운을 한껏 느낄 수 있네요.
일주문(一柱門)
영축총림 통도사는 삼보 가운데 가장 으뜸인 불보를 간직하고 있어
진정한 '불지종찰(佛之宗刹)'이요, '국지대찰(國之大刹)'입니다.
1305년(고려 충렬왕 31)에 창건,
"靈鷲山 通度寺(영축산 통도사)"라는 글씨는 대원군의 친필이고,
"國之大刹(국지대찰) 佛之宗家(불지종가)"는 해강 김규진의 글씨입니다.
통도사는 승려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진리를 회통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합니다.
영축산 통도사 (靈鷲山 通度寺)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의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천왕문 앞의 연등
통도사 범종루(梵鍾樓).
예전 집사람과 통도사 경내를 찾았을 때 들었던 범종의 소리가
아직도 깊은 여운으로 남아있는 듯 합니다.
대웅전(大雄殿)을 배경으로 ...
대웅전(大雄殿) - 조선(1644년), 국보 제290호
통도사 대웅전은 상로전의 주건물(主建物)이다. 대웅전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규모로 되어 모두 15칸 건물이며, 특이한 것은 두 개의 건물을 복합시킨 평면형이라 건물내부의 기둥배치가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예이다.
현재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44년(인조 22)에 중건하였지만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보이며, 내부에 불상을 모시지 않아 통도사 대웅전은 참배의 기능만을 갖고 있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불상을 모시지 않은 대신 불단 뒷편으로 부처님 진신사리가 봉안된 금강계단이 위치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불당 내부에는 동서방향으로 길게 불단만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設法床)이 있어 대덕승려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통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건물이다. 현재 국가 지정 국보 제290호로 보호받고 있다.
금강계단(金剛戒壇) 불사리탑(佛舍利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모시고 온
부처님의 정골 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하는 불사리탑입니다.
이로 인하여 통도사가
불보사찰(佛寶寺刹)의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의 신골을 봉안하였으므로
대웅전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았습니다.
세존비각(世尊碑閣), 개산조당(開山祖堂),
석등 옆에 삼십칠 조도품탑(三十七 助道品塔).
⊙ 세존비각(世尊碑閣) - 조선(1706년)
금강계단 축대 바로 아래에 있고, 적멸보궁 내력을 소개한 글귀가 있습니다.
⊙ 개산조당(開山祖堂)
개산조당은 용화전 옆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도사의 창건주 자장율사의 영정을 봉안한 아담한 전각입니다.
⊙ 37조도품(助道品)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37가지의 방법을 말합니다.
즉, 4염처(念處), 4정근(正勤), 4여의족(如意足), 5근(根), 5역(力), 7각지(覺支), 8정도(正道) 등을 모두 합한 것입니다.
37보리도법(菩提道法)이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수행 방법을 통해서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음전(觀音殿) - 경남 유형문화재 제251호.
관음보살 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용화전(龍華殿) - 경남 유형문화재 제204호.
법당 내부에는 56억 7천만 년 후에 성불한다는
미래불인 미륵불 좌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봉발탑(通度寺 奉鉢塔) - 보물 제471호.
용화전 앞에는 약 2미터 높이의 발우(鉢盂)모양의 석조봉발(石造奉鉢)이 있다. 이를 봉발탑(보물 제471호)이지만, 이는 탑이 아니고 발우이다. 석조 봉발은 “석가모니의 발우(鉢盂)를 미래세(未來世)에 출현하실 미륵불에게 드리기 위해 부처님의 상수제자(上首弟子)인 가섭존자(伽葉尊者)가 발우와 함께 가사(袈裟)를 가지고 인도의 계족산(鷄足山)에서 멸진정(滅盡定)에 들어 기다리고 있다”는 불경의 내용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장경각(藏經閣)
조선(18세기 이후), 문화재자료 제144호
장경각은 절에 내려오는 경전과 목판을 봉안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로 초창 및 중수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주변 건물들과 비교해 18세기 이후의 건물로 생각된다. 장경각은 통도사에 전해지는 혹은 외부에서 유입된 경판(經板)들을 보관하는 곳이다. 현재 박물관으로 이전된 장경각의 목판은 정시한(1625~1707)이 저술한 산중일기에도 등장하는 17세 초반 활동한 대 각수 연희가 발원하여 직접 제작한 목판들로서, 통도사에서 약 10km 떨어진 울산 운흥사(雲興寺)가 조선말기에 폐사될 때 옮겨온 중요한 경판들이 보관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목판(木版)장경을 봉안하였는데, 이들 목판 대장경을 강원(講院)의 교과과정에 들어 있는 중요 경전들로『능엄경』,『기신론현수소(起信論賢首疏)』,『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법수(法數)』,『사집(四集)』등 15종의 경판이 있다. 따라서 통도사는 사찰의 교육기관인 강원을 통해 교육에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대광명전(大光明殿) - 경남유형문화재 제94호.
통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겹치마 팔작지붕 건물로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통도사 영각 앞 분홍빛 보석 '자장매(慈藏梅)'
꽃망울을 터뜨린 홍매가 화사하게 피어있네요.
순간 정신이 아득함을 느낍니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고요히 그리고 눈을 감고
그윽히 풍기는 매화의 향을 맡아봅니다.
통도사 영각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모습으로 서있는
자장매는 수령이 무려 350년이 넘는 오래된 매실나무입니다.
자장매는 1650년경 통도사의 스님들이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를 기리기 위해
심은 매화나무로 율사의 호를 따서 '자장매'라고 부른답니다.
매화는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와 함께 절개를 상징합니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피어난 아름다운 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터져나옵니다.
자장매인 홍매화 바로 옆에는 흰매화가 한 그루 있는데,
가지치기를 심하게 해놓아 나무 전체의 모습은 볼품이 없지만
그래도 안간 힘을 쓰며 꽃망울을 터트린 모습이 대견스럽기 그지 없네요.
약사전(藥師殿) - 경남 유형문화재 제197호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습니다.
영산전(靈山殿) - 경남유형문화재 제203호
하로전(下爐殿)의 중심건물로 팔상탱화(八相幀畵)가 봉안되어 있고,
내부 벽에는 다보탑과 나한상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극락보전(極樂寶殿) - 경남유형문화재 제194호
서방 극락세계의 교주 아미타불과
그 좌우에 협시보살인 관음과 대세지 보살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통도매(일명 자장분홍색매)
역시 통도사 경내 종무소 앞에 있는
수령 50여 년생 야매계입니다.
연한 분홍색 홑꽃이 피는데
꽃잎이 다소 크고 오목합니다.
꽃받침은 적자색이랍니다.
영취매(일명 자장겹홍매)
통도매 바로 옆에 피어있는
수령 150여 년생 홍매성입니다.
진분홍 겹꽃이 피고 노란색 큰 꽃밥이 붙어 있어서 꽃이 더욱 돋보이네요.
꽃받침은 적자색입니다.
까만 나무가지에 조발조발 달린 진분홍 겹꽃이 화사합니다.
영각(影閣)
이 건물은 역대(歷代) 주지(住持) 및 큰스님들의 영정 85폭을 봉안한 건물로 정면 8칸 측면 3칸의 긴 장방형(長方形) 평면(平面)으로 된 팔작집이다. 초창연대는 분명치 않으며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지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영자각(影子閣)이라 불리다가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의 설법회상을 영산회상(靈山會上)이라 함에 비하여 이는 미래불의 용화회상을 뜻하는 법당임을 알게 한다. 즉 미륵불로서 출현하기 전까지는 미륵보살이란 칭호를 받는 석가모니의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석가모니의 출현으로부터 56억 7천만년이란 장구한 세월이 흐르고 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실 부처님이다.
영각 옆에는 산수유가 노란 꽃을 피우기 시작했네요.
남쪽에서 본 대웅전.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건물의 4면에 편액을 걸었는데,
동쪽이 대웅전(大雄殿), 서쪽이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이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명부전(冥府殿) - 경남유형문화재 제195호.
지장전이라고도 불리며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구룡지(九龍池)
통도사의 창건 신화를 담고 있는 조그만한 연못으로
구룡신지(九龍神池)라고도 부름니다.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다리의 돌기둥에는
"天藏秘界慈藏得是亦文殊付囑來
(천장비계자장득시역문수부촉래)"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응진전(應眞殿) - 경남유형문화재 제196호.
나한전이라고도 불립니다.
통도사오층석탑
매화의 기품에 눌려 그냥 말없이 지켜만 보는게 도리일 것 같네요.
오래 전부터 보고팠던 통도사의 자장매를 구경하고
기운 서늘한 소나무들이 울렁이는 바람 따라 춤추는 듯
도열해 있는 솔숲길을 따라 산문을 향해 걸음을 이어갑니다.
소나무 산책길로 이만한 곳은 전국 어디에도 없는
통도팔경 중에 가장 으뜸을 자랑하는 곳.
구도자의 길이요,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길...
바로 통도사 무풍한송(舞風寒松)길입니다.
통도사 산문을 나와 주차장에 세워둔 애마에 올라타고 경부고속도로를 달려가던 중 남도여정의 맨 처음 찾아가기로 한 지심도를 가려던 생각을 바꾸고 행선지를 변경한다. 그 이유는 통도사에 도착한 시각이 정오가 가까워 공양간에서 점심공양을 하고서 경내 구경을 한 터라 시간이 이미 오후 2시경이다.
지심도로 갈수 있는 유람선선착장이 있는 거제도 장승포까지 가는 데만 소요시간이 제법 걸리는데다 유람선 운행시간이 어떻게 될지 몰라 통영 방향으로 길을 들기로 하면서 마음은 한결 느긋해진다. 그래서 지난 번 집안 결혼식 때 가보았던 김해의 유적들을 지나치면서 언제 다시 찾아보리라는 다짐을 이번 기회에 잠시나마 풀어보고자 김수로왕릉과 수로왕비릉을 찾아가기로 한다. 네비게이션의 혜택을 톡톡히 보면서 도착한 김수로왕릉 입구의 어느 골목에 파킹을 해놓고 수로왕릉 입구의 숭화문을 들어서면서 바쁜 일정속의 자투리 시간에 찾은 수로왕릉 탐방에 들어간다.
경주 못지않은 천년고도 김해는 가야의 땅입니다.
김해는 1세기 중엽부터 4세기 말까지 전기 가야 연맹의 중심국이었던 금관가야가 있었던 곳이지요. 그래서 김해는 신화의 도시이기도 합니다.
구지가와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 그리고 수로왕의 비 허왕후의 신화가 서린 곳입니다.
수로왕은 가야의 여러 나라 중 초기에 세력을 형성했던 가락국, 금관가야의 시조이자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의 시조로서 삼국유사 가락국기 편에서는 수로왕의 탄생과 가야 건국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아직 나라가 없던 시절에 김해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각 촌락별로 나뉘어 생활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늘의 명을 받아 촌락의 지도자들인 9간(干)과 주민들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춤을 추면서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그렇지 않으면 구워 먹으리라"라고 노래하자 하늘에서 붉은 보자기에 싸인 금합이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 속에는 둥근 황금색의 알이 6개 있었고 12일이 지난 뒤 이 알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 가운데 키가 9척이며 제일 먼저 사람으로 변한 것이 수로였다고 합니다. 주민들이 가락국의 왕으로 받들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각각 5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수로왕은 나라 이름을 가락국이라 하고 관직을 정비하고 도읍을 정하여 국가의 기틀을 확립했으며 천신(天神)의 명으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아유타국(阿踰陀國:인도의 한 나라)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황당한 이야기지만 설화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 담긴 뜻을 찾아보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토착세력이 아닌 외부 세력이 새로운 문명을 전파하며 들어왔다는 뜻이며 아홉 부족장들에 의하여 추대되어 왕위에 올랐다는 것에서는 외부에서 들어온 세력이 독자적으로 나라를 건국할 만큼의 힘을 갖추지 못하여 연맹형식으로 나라를 운영했음을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마치 신라 건국설화인 혁거세의 그것처럼 말입니다. 저 역시 혁거세의 후손이긴 하지만요.
묘역의 입구인 숭화문을 지나면 '홍살문'이 높이 서 있습니다.
능묘나 궁전, 관아 앞에 세우는 붉은 물감을 칠한 나무문으로
중간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양쪽에는 화살 모양의 나무를 세워 두었네요.
경의를 표하라는 뜻으로 신성구역을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왕릉 입구의 누각(가락루)입니다.
수로왕릉 능역 전경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릉입니다.
원형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의 모습은 조선시대 왕릉과 비슷하네요. 봉분에는 둘레석이 없고 전통적인 왕릉과는 달리 봉분 앞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봉분 앞쪽으로 석재 난간이 있으며 그 안쪽에 문, 무인석이 있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199년 158세로 수로왕이 승하하자 대궐 동북쪽 평지에 높이 일장의 빈궁을 짓고 장사를 지낸 후 주위 300보를 수로왕묘라 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후 1580년(선조 13) 영남관찰사 허엽이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묘 등을 갖추었고 1647년(인조 25)에 가락국수로왕릉이라 새긴 능비가 세워졌습니다.
1963년에 사적 73호로 지정되었으며 1964년부터 1994년까지 계속적으로 보수공사가 실시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고 합니다.
'숭선전'은 김수로왕과 허왕후의 신위가 모셔져 있습니다.
가락국의 2대 도왕에 의해 최초 건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숭선전'이란 이름은 고종 21년(1884)에 고종이 하사한 것입니다.
'숭선전'에서는 춘추제례라 하여 봄, 가을로
시조 김수로왕에서 9대 숙왕까지
가락국 9왕조를 추모하는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숭선전 춘추제례는 경남 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숭안전'은 1989년 신축된 건물로
가락국왕 2대 도왕, 3대 성왕, 4대 덕왕, 5대 명왕,
6대 신왕, 7대 혜왕, 8대 장왕, 9대 숙왕과
그 왕비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놓은 전각입니다.
빠듯하게 짜여진 일정이라 이곳에서 마냥 시간을 허비할 수 없어 수로왕릉 탐방은 이것으로 마무리하고 이 기세를 몰아 수로왕의 왕비인 허왕후릉을 찾아갑니다.
수로왕비릉 입구 전경
묘역 입구에서 부정을 막아준다는 홍살문을 지나 구지봉의 남쪽 문이라는 뜻의 구남문을 들어서면 긴 계단 위에 자리한 허황후의 릉이 보입니다.
그러고보니 이곳이 언덕배기인 것에 눈길이 가는군요.
지금은 찻길이 나고 건물들도 들어선 시가지가 되었지만 본시 수로왕이 내려왔다는 구지봉 기슭인 이곳은 당시 가락국 사람들에겐 신성한 땅이었을 겁니다.
이곳에서 구지가를 부르며 수로왕을 기다렸다는 구지봉이 가까이 있으니까요.
수로왕비릉(首露王妃陵) 전경
수로왕비 허황옥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고분은 사적 제7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별다른 장식이 없는 원형 토분으로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둘렀으며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지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之陵)'이라 새겨져있는 능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파사석탑(婆娑石塔) 비각
그러나 별스런 치장이나 전각 한 채 없는 허왕후릉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파사석탑입니다.
수로왕의 비 허왕후, 黃玉이 동한 건무(東漢 建武) 24년 갑신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머나먼 바다를 건너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함께 싣고 왔다고 삼국유사 등 고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파사석탑은 옛 호계사 자리에 있던 것을 김해부사 정현석이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스님은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에는 보금씩 붉은 반점이 있고 석질이 매우 부드럽고 특이하여 이 지방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이 아니다"라고 적고 있어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가지고 왔다는 설을 뒷받침합니다.
돌에 닭벼슬의 피를 떨구면 굳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다고 하네요.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파사석탑파사석탑(婆娑石塔) - 경남 문화재자료 227호.
지금은 파손과 마멸로 인해 사면으로 모가 난 5층 석탑이었던 이 탑의 원형은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가 되었지만 그래도 이 석탑 덕분에 허왕후가 그나마 덜 외롭지 않을까 싶네요.
타향에서는 고향 쪽으로 날아가는 까마귀 조차 반가운 법이니까요. 파사석탑은 범어로는 바사석탑이라 하는데 네이버지식백과에 의하면 "파사는 유체로서 일체의 지혜가 현증한다"라는 뜻이라 합니다. 말이 어렵네요.^^*
수로왕비릉 앞의 도로 건너편에 있는 구지봉 초입입니다.
구지봉은 구수봉(龜首峰), 구봉(龜峰)이라고도 부르는데 김해시 구산동에 있는 높이 약 200m의 산으로 봉(峰)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겸연쩍을 만한 소나무 동산에 불과하지만 이곳은 역사 만이 아니라 우리 국문학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구지가'의 무대로 가야의 건국설화가 깃든 곳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입구에서 사진 한장 담는 것으로 마무리하고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통영으로 향합니다.
서마산을 거쳐 고성땅을 지나 도착한 통영. 그동안 몇번 와본 곳이지만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다녀간 곳이라 구석구석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늦은 시각에 도착한 이번 여행길에도 역시 지나치기만 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간만에 미륵산을 올라보고픈 마음이 굴뚝같으니... 어디를 가도 그 넘의 산병은 다시 도지는가 보다.
미륵산의 일출은 보았으니 이번엔 통영항의 야경을 구경하고파 7년전 친구들과 함께 처음으로 올라보았던 미륵산을 이번에는 야간산행으로 올라보는게 어떠냐고 넌지시 의중을 물어보니 아무 말이 없기에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밀어부친다.
일단 숙소부터 잡아야겠기에 운전하면서 검색해둔 숙박업소를 찾아 방을 잡아놓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산행준비를 한 상태로 가까운 중앙시장으로 차를 몰아가 시장 앞 강구안 바닷가에 있는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해놓고 시장 안을 돌아다녀 본다.
어둑해진 시간이라 불을 밝혀놓은 시장안은 파장 분위기이지만 횟감을 사러온 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호객을 하기 시작한다. 몇 군데를 돌아보며 흥정을 하다가 평소 잘 안먹었던 도다리를 사서 안내하는 초장집으로 가 맛난 저녁을 먹고 다시 차를 몰아 미륵산 들머리가 있는 용화사 입구 버스종점으로 달려간다.
어둠이 깃든 버스종점 광장 옆에 새로 생긴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이마에 불 밝히고 스틱 하나씩 들고서 관음사 방향의 시멘트도로를 따라 산행을 시작한다.
통영 미륵산 산행궤적
어둠이 깃든 도로를 따라 조심스레 진행하니
관음사를 지나고 도솔암 입구를 지나면서부터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됩니다.
줄곧 돌길이 이어지던 거친 등로를 조심스레 쉼없이 올라선 미륵산 정상입니다.
인증샷도 남기면서 어둠속에서도 군데군데 빛나고 있는
불빛으로 흩어져 있는 다도해의 섬들을 짐작하면서
정상부 데크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끝으로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우는 통영항의 야경을 담는 것으로
미륵산 산행을 마무리하기로 합니다.
밤바람이 꽤 차가워서 더는 못 있겠더라구요.
하산길 역시 띠밭등으로 곧장 내려서는 길은 가파른 급경사에 돌길인데다 질퍽거리는 등로라 진행이 쉽지 않았지만 가급적 천천히 '안전이 최우선이다'는 생각으로 2시간 남짓 소요된 미륵산 야간산행을 무사히 마치고 숙소로 향해 남도여행 첫날을 마무리한다. 거제도를 찾아갈 내일의 일정 역시 많이 걷게 될 것이기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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