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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설레는 마음으로 설악의 너른 품속에서 놀다온 1박 2일의 여정(둘째 날 이야기) 본문

◈ 산행이야기/☆ 2015년도 산행

설레는 마음으로 설악의 너른 품속에서 놀다온 1박 2일의 여정(둘째 날 이야기)

해와달^^* 2015. 6. 28. 14:46

(1편에 이어 계속)

 

잠결에 들려오는 피곤에 지친 듯 아내의 얕은 코 고는 소리에 깨어보니 아직 10시 30분이다. 다시 잠을 청해보지만 무거운 배낭을 메고 먼 길 걸어온 여파인지 어깨가 욱신거려 딱딱한 침상에 누워 있으니 쉽게 잠이 오질 않는다. 이리저리 뒤척거리다 살포시 잠이 들었는지 새벽 3시 10분에 맞춰놓은 알람소리가 어둠의 정적을 깨뜨린다. 황급히 알람을 끄고 자리에 일어나 앉아 어둠 속에서 어젯 밤 자기 전에 준비해 놓은 물건들을 주섬주섬 챙긴다. 아직 꿈나라를 헤메고 있는 집사람을 깨우지 않고 먼저 대피소 바깥으로 나가 밤하늘을 쳐다본다.

음력 오월 초라 달빛은 어둡지만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무수한 별들을 보니 일출을 볼수 있겠다 싶어 안으로 다시 들어가 아내를 깨운다. 바람막이 쟈켓을 꺼내 입고 이마엔 헤드랜턴을 장착하고 물 한병에 수건 한장, 스틱과 카메라를 챙겨 들고 갈무리해 놓은 배낭은 한쪽 구석에 세워놓고 살그머니 대피소를 빠져 나온다.

사방이 캄캄한 어둠이지만 헤드랜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 줄기 빛을 등대삼아 대청봉을 향한 걸음을 시작한다.

 

 

둘째 날 산행궤적 (소청대피소-백담사)

 

 

여름이지만 산정에는 아직도 싸늘한 기운이 감싸고 있어

밤 사이 떨어진 기온에 이슬인지 서리인지

하얗게 변한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네요.

 

 

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

너무나 가까이 다가와 있네요.

 

 

산 위에선 별들도 가까이 내려오나 봅니다.

설악의 새벽은 또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는군요.

 

 

소청대피소를 떠나 중청대피소에 들러 변화된 내부를 잠시 구경하고

대청봉에 올라서니 한 시간 가량 소요가 되는군요.

먼 동이 트고 있지만 아직은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

정상석에서 사진 몇장 담으면서 해가 뜨기를 기다립니다.

 

 

오전 4시 57분...

맨 먼저 머리를 내미는 태양을 발견하고 소리를 칩니다.

 

 

일출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밤잠 설쳐가며

새벽을 뚫고 대청봉을 올라온 보람을 느끼는 순간입니다.

 

 

 

 

동해바다 먼 곳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새로운 각오를 다짐해보고

 

 

또한 3년 전 대청봉의 일출의 기억을

아스라히 떠올리면서 마음 속 염원을 빌어봅니다

 

 

정상 부근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우리의 들꽃들을 담아봅니다.

 

맨 먼저 꽃차례의 모양이

호랑이 꼬리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 '범꼬리'입니다.

 

 

서북능선을 걷는 내내 눈을 즐겁게 해주고

향기 또한 짙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던

'꽃개회나무'가 대청봉 주변에도 산상화원을 이루고 있네요.

 

 

설악의 고산지대에
바람 맞고 살아가는 꽃...

 

대청봉 '바람꽃'입니다.

 

 

이제 해맞이도 제대로 했으니 얼른 내려가서

울려대는 배꼽시계를 멈춰야겠습니다.

 

 

둥근 해가 떴으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싶네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스스로 깨어나겠지만 말입니다.

 

 

대청봉 일출을 제대로 감상하고

소청대피소로 되돌아와

갈무리 해놓은 배낭을 들쳐메고

취사장으로 나와 아침 준비를 합니다.

 

 

왼쪽 아래의 용아와 오른쪽의 공룡이 조망되는 곳...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외 식당에 앉아 여유로이 아침을 해결합니다.

 

부리나케 아침을 해치우고

뒷정리 깔끔하게 마무리 하고서

가파른 내림길을 따라 봉정암을 향합니다.

 

 

'고광나무'

 

 

 

 

3년 전 걸터앉아 사진을 찍었던 곳...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봉정암을 감싸고 있는 병풍바위가 눈에 들어오고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봉정암(鳳頂庵)'을 다시 찾으니

병풍바위와 불두암이 맨 먼저 반겨주는군요.

 

봉정암 역시 가뭄의 영향으로 샘물 공급이 중단되었네요.

공양간에 있는 물통에서 겨우 식수를 공급받고

세면장에 들러 간단히 아침 세수를 합니다.

 

 

산신각 방향의 돌계단을 올라 윤장대를 지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원 한가지씩 안고 걸어갔을 영겁의 길...

사리탑 가는 길을 올라서면

 

 

부처님의 불뇌사리탑에(보물 제1832호) 도착을 하게 되고

경건한 마음으로 삼배를 올립니다.()()()

 

 

 

살아 생전에 꼭 한 번 참배해야 할 '불뇌사리보탑(佛腦舍利寶塔)'
 
봉정암 오층석탑은 부처님의 뇌사리를 봉안했다고 해서

'불뇌보탑' 또는 '불뇌사리보탑'이라 불린다.

바위를 뚫고 나온 형상을 한 이 불뇌사리탑 앞에 서면,
설악산 정상에 이 같은 탑을 세운 불심과

그 형상의 신묘함에 절로 감탄과 숙연함이 우러나온다.
 
석탑은 자연암석을 기단부로 삼아

그 위에 바로 오층의 몸체를 얹었으며,

일반적인 탑과 달리 기단부가 없어서

마치 바위를 뚫고 탑이 솟아 오른 듯하다.

 

이를 두고 어떤 이는 설악의 온 산이

이 탑을 받들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설악과 탑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말하기도 한다.
 
탑의 몸체가 시작되는 자연 암석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되어 있는데,
1면에 4엽씩 모두 16엽이 탑을 포개고 있어
부처님이 정좌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맨 위에는 연꽃이 핀 듯한 원뿔형 보주를
올려 놓아 영원한 불심을 향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다.

(출처 : 봉정암 홈페이지)

 

 

불뇌사리탑에서 내려다 본 봉정암

 

 

 

봉정암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로 이 절은 신라의 자장율사가 석가모니부처님의 뇌사리를 모셔와 봉안한 '불뇌보탑'이 있어 불자라면 한번은 꼭 참배하기를 희망하는 성지랍니다.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은 아니지요.

설악의 험한 준령(해발 1,244m)에 자리 잡아 많은 수고와 고행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랍니다.

 

 

불뇌사리탑을 수호하는 '곰바위'

또는 아이를 안고 있는 '모자(母子)바위'로도 불리는

기암 뒤로 대청을 지키는 수호신

용아장성릉의 암봉들이 도열해 있습니다.

 

 

우측으로는 내설악과 외설악을 가르는

공룡능선이 바로 눈 앞에 펼쳐지고,

 

 

정면으로는 공룡능선 끄트머리의 마등령 너머로

저항령, 황철봉이 하늘금을 그리고 있네요.

오세암 부근에 있는 만경대는 좌측으로 잡히는군요.

 

 

3년 전 그 자리에서 사진 한장 남겨봅니다.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봉정암'을 다시 찾아

불뇌사리탑에 엎드려 마음 속 염원을 담아 참배를 하고

 

 

공룡능선과 용아장성릉의 비경을

두루두루 감상하고서 오늘의 목적지인

오세암으로 이어지는 4km의 등로로 내려섭니다.

 

 

'참조팝나무'

 

 

상당한 급경사 구간의 초입을 내려가면

등로의 상태는 좀 나아지지만

여전히 가파른 내림길은 이어지고

 

 

몇 번의 고개를 오르락 내리락 넘어야 해서

역시 쉬운 길은 아님을 실감합니다.

 

 

급격한 내림을 멈추고 나면

조그만 계곡을 끼고 내리게 되고,

 

 

대부분 인위적으로 조성된 돌길을 따라

조망이 거의 없는 등로를 하염없이 걸어갑니다.

 

 

공룡능선의 일부분인 것 같은데 이름은 잘 모르겠네요.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공간이 큰

고사목에서 사진도 남겨봅니다.

 

 

다리 위에서의 가야동계곡 모습입니다.

다리 건너기 전 좌측으로 출입금지 팻말이 보이던데

읽을 때는 '어서오십시오'로 해석하면 될 듯...^^*

 

 

봉정암에서 다리까지 1.5km 왔네요.
여기까지는 거의 내림이나 평지라 수월합니다만

이제부터는 오름과 내림의 구간이 반복적으로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미리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을 듯 하네요.

 

 

이정표에서 조금 오르면 계단을 만나게 되지만

그리 힘든 오름은 아니거던요.

 

 

'노루오줌'

 

 

 

 

계단을 지나고도 좀 더 올라야 고개를 만납니다.

이제 거의 반을 지났네요.

하지만 바로 통과합니다.

 

 

봉정암에서 오세암으로 가는 길은

계곡산행이 아니고 산허리를 감싸는 산행이라

낮은 산을 5개 정도 넘어야 하고

계곡 또한 4~5개는 건너야 하는

초보자에겐 녹록치 않은 길입니다.

 

 

수명을 다해 쓰러졌어도

소임을 다하는 듯한 고목의 모습도...
얼기설기 엮인 뿌리 다 드러내며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저 나무들도

우리에겐 소중한 자연의 일부랍니다.

 

 

데크를 오르는 동안 줄곧 주변을 맴돌던 녀석이

어느 새 가까이 다가와서 두손을 모으고

먹을걸 달라는 듯 조르고 있네요.

 

주변에 두 마리가 더 있어 초콜릿을 하나 꺼내

골고루 분배해 줬더니 순식간에 해치우네요.

이러다 초콜릿 맛에 익숙해져

도토리는 안 먹겠다고 버티면 어쩌죠?

 

 

봉정암에서 오세암 가는 길은 멀고 험해서

가는 동안 우리의 인생길과 어찌 이리도 잘 맞는지...

 

 

마음을 비우며 온갖 잡생각을 다 지우게 되는군요.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그리 순탄한 코스는 아니랍니다.

 

 

'산꿩의다리'

 

 

그렇지만 원시의 울창한 숲이 향기를 풍기며 가는

 

 

길손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자연에 심취하게 하는 아름다운 숲길입니다.

 

 

어디선가 작업하는 기계음소리와 독경소리가

뒤섞여 들려오는 걸 보니 오세암이 가까워졌나 봅니다.

 

 

돌계단 오름을 올라 10여분 걸음을 옮기니

그제서야 마등령에서 내려오는 등로와

합류가 되는 갈림길을 만나게 되고,

 

 

오세 동자가 성불한 곳으로 알려진 '오세암'에 닿게 됩니다.

 

 

 

오세암에 얽힌 전설
 

오세암은 644년, 신라 선덕여왕 13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한 자장 율사가 절을 창건하고 관음보살이 언제나 상주하는 도량임을 알리기 위해 절 이름을 관음암(觀音庵)이라 부르니 오늘날 오세암이 시작된 것이고 합니다. 그런데 이 관음암이 오세암으로 바뀐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스님이 중건한 다음부터라고 합니다. 절 이름이 관음암에서 오세암으로 바뀐 배경에는 정말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지는데 5세 동자에 얽힌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있으며 중창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전합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관음암에서 수행 중이던 설정스님은 형님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고아가 된 조카를 암자로 데려와 기르게 되었다는 것입다. 이 아이의 나이가 5살 되던 해 겨울이 막 시작되는 10월 하순 어느 날,  스님은 산사의 월동 준비를 위하여 양양의 물치 장터를 다녀 올 작정을 하고 암자를 나설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옛날 길이 좋지 않았던 때라 오세암에서 양양의 물치 장터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다녀와도 족히 이틀은 걸리는 먼 길이였던 모양입니다. 그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다섯 살 짜리 조카를 위하여 스님은 그 기간 동안 아이가 먹을 만큼 밥을 짖고 반찬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스님은 아이를 불러 무릎에 앉히고, 법당 안의 관음보살을 가리키면서 "내가 다녀오는 동안 이 밥을 먹고 있으면서 저분을 어머니처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이라 불르라"고 일러 주면서 "그러면 저 분이 너를 보살펴 줄 것이다"라고 말을 했다고 합니다.

 

5살의 어린 조카에게 이렇게 신신당부를 한 후 설정스님은 관음암을 내려와 물치 장에 들려 겨우살이를 위하여 이 것 저것을 구입한 후 신흥사에 들려 하루를 묵게 되었다고 합니다. 스님은 다음날 조카가 기다리고 있을 관음암으로 돌아가려 일찍 아침 잠에서 깨었으나 밤사이에 폭설로 엄청나게 쌓인 눈 때문에 도저히 암자로 돌아갈 수 없었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읍니다. 스님은 어쩔 수 없이 그곳에서 머물 수 밖에 없게 되었지요. 스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야속한 눈은 그 뒤에도 그치지 않고 계속 쌓여만 갔읍니다. 눈에 생기는 발자국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혼자 있는 조카에 대한 걱정으로 스님의 애간장은 점점 녹아 내릴 듯 간절하다 못해 시커멓게 타들어 갔읍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고, 먹는 것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지만 워낙 많이 쌓인 눈 때문에 꼼짝없이 갖히고 마는 어쩔 수는 상황에 놀이고 말았읍니다. '엄동설한 폭설에 혼자 남겨둔 조카가 어떻게 됐을까'하는 걱정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읍니다. 다만 스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부처님께 조카의 무사를 서원하는 기도를 열심히 드리는 것이 전부였을 뿐이였지요.

 

이렇게 고통스런 몇 며칠을 보내다 도저히 안되겠다는 생각에 억지로라도 관음암으로 돌아 가려고 문밖을 나서니 사중의 모든 스님들이 앞을 가로 막았읍니다. '이런 폭설에 길을 나서면 죽을 게 뻔한데 왜 가려고 하느냐'며 적극 만류하여 결국 스님은 눈길이 트일 때까지 신흥사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도 무정한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 어느덧 봄이 오고 눈이 녹아 산길이 트이게 되었읍니다. 서둘러 바랑을 챙긴 스님은 뜀박질을 하듯 달려 암자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암자에 들어서니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읍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조카가 살아있다는 반가움에 스님은 어쩔 줄 몰라기쁨에 취하여 "어찌된 것이냐"고 물으니 조카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 어머니가 언제나 찾아와서 밥도 주고 재워도 주고 같이 놀아도 주었어요'라고 대답"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환한 흰 옷을 걸친 여인이 관음봉으로부터 내려와 동자의 머리를 만지면서 성불의 기별을 주고는 한 마리 푸른 새로 변하여 창공으로 날아가 버렸다고 합니다. 놀란 스님은 마음을 가다듬고 부처님 전에 큰 절을 올리고 조카를 안아 보려 하자 품에 안기지도 않은 채 조카는 그대로 사그라져 승천을 하였다 합니다.

 

나중에 살펴보니 법당 경상에 놓여 있던 책장이 스님이 집을 비운 딱 그만큼의 날짜만큼 찢겨져 나가 있었다네요. 부처님의 신통력으로 종이 한 장으로 그날 하루를 지내게 되었음을 짐작케 했나 봅니다. 그동안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알게 된 설정 스님은 다섯 살 어린 조카가 맑고 밝은 마음으로 삼촌인 스님이 시키는 대로 무념무상의 '관세음보살'을 계속하자 관음보살이 감응하고 그 가피로 영생불멸의 길로 접어든 것을 알게 되었지요.

비록 5살 밖에 안된 동자였지만 그 순진 무구한 마음이 동자를 성불케 하였으며 이 도량에 관음보살의 영험이 있음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전합니다.

 

 

공양간에 있는 밥솥 두 곳에 담긴

밥과 국을 퍼서 큰 대접에 담고

단무지 몇 조각과 함께 먹는 오세암의 점심 공양.

말로만 들었지 직접 먹어보니 꿀맛이더이다.

 

 

깨끗이 설거지까지 마무리하고서 커피 한잔 하고나니

그제서야 주변 풍광이 제대로 들어오네요.

당우 앞으로 만경대가 우뚝하고

용아장성의 처음이자 마지막 봉우리인

옥녀봉이 좌측으로 보이는군요.

산세가 참 멋지다는 느낌이 듭니다.

 

 

'천진관음보전'

 

 

오세암 범종각 앞을 지나 등산로를 따라

진행하다 만나는 고갯마루에서

 

 

비탐방구역의 만경대를 찾아듭니다.

배낭을 내려놓고 카메라만 달랑 들고서

험하기 이를 데 없는 급한 경사를 오르기 시작합니다.

 

 

3 군데의 만경대가 있는 설악산에서

오늘은 오세암 부근의 내설악 만경대를 올라봅니다.

 

참고로 설악산에 있는 세 군데의 만경대를 읊어보자면

오세암 직전의 내설악 만경대,

양폭산장 위쪽의 외설악 만경대,

오색 근처의 남설악 만경대 입니다.

 

 

건너보이는 용아장성릉 뒤로 멀리 소청, 중청봉이 올려다보이고

그 우측으로 길게 뻗은 능선 마루금은

귀때기청봉에서 대청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입니다.

 

 

겹겹이 둘러싸인 봉우리 맨 끝으로

서북능선의 맹주인 귀때기청봉(1,577m)이 보이고

 

 

발 아래로는 조금 전 들렀었던

오세암이 내려다 보이고

나한봉, 마등령이 올려다 보입니다.

 

 

이번엔 나한봉, 1275봉이 조망되는 공룡능선입니다.

이곳에 서니 정말 자신이 뭐라도 된 기분입니다.

정말 대단한 절경입니다.

 

 

백담사를 향한 걸음에 찾은 만경대(萬景臺).

만 가지 경치를 두루 볼 수 있다해서

이름 붙여진 '만경대'를 험로를 뚫고 올라보니

그야말로 천하제일경이 여기임을 느끼게 됩니다.

 

 

이곳은 용아장성, 공룡능선, 흑선동계곡, 나한봉 등의 절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숨어있는 경관 조망터인 셈이지요.

 

 

용의 이빨을 닮았다는 용아장성과 공룡군단이

지금이라도 큰걸음을 내딛는 듯한

공룡능선, 가야동계곡의 천왕문,

 

 

아름다운 기암들이 꽃을 피운 듯한 천화대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비경들이 군상을 이루고 있습니다.

 

 

바위 주변으로는 보기만 해도 아찔한 천길 낭떠러지이지만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비경 앞에 기분은 마냥 들떠서 그런지

거침없이 바위 꼭대기에 서는 용기를 내어보는군요.

 

 

나도 모르게 '내려가기 싫다'는 소리가

저절로 터져나오게 만드는군요.

 

 

내설악이 품은 아늑한 암자 오세암...

암만 봐도 그림이고 천하 명당입니다.

 

 

바라만보아도 숨이 멎을 것만 같은

설악 심장부의 비경...

 

봉정암 사리탑에서 바라보았던

환상의 용아장성과 공룡능선을

만경대에서 다시 바라볼 수 있으니

그 감동은 배가 되는군요.

 

 

가야동계곡의 천왕문

수량이 부족하지만 보기만 하여도 압권입니다.

 

 

만경대에서 한참동안 두 눈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되돌아 내려가기로 합니다.

이제야 험한 내림길이 슬슬 걱정이 되는군요.

 

 

대청봉 그늘 아래에 고요히 숨어있는

설악의 심장부를 구경하고

 

 

백담사를 향하는 걸음은 천하를 다 얻은 듯한

기분이라 발걸음 또한 그지 없네요.

 

 

장대한 나무 밑둥치를 끌어안고 폼도 잡아가면서 말입니다.

 

 

 

 

오세암에서 영시암까지 이어지는 등로는

약간의 오르내림의 굴곡이 있지만

 

 

크게 어렵지 않는데다 천하절경을 구경하고 가는 걸음이라서

 

 

에너지가 충만해져 걷는 발걸음에는 힘이 넘쳐 납니다.

 

 

수명이 다 되어 쓰러진 생명력을 잃은 아름드리 나무에는

이끼를 잔뜩 뒤집어 쓴채 지렁이 등 온갖 벌레들이

공생하면서 살아가는 소중한 생명의 터전으로서의
역할을 하면서 흙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봉정암 갈림 삼거리.

 

이곳에서 봉정암 방향으로 발길을 돌리면

설악의 용아장성과 서북능선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수렴동계곡을 따라 봉정암에 오를 수 있는 코스랍니다.

 

 

 

 

백담사의 부속 암자인 영시암(永矢庵)

 

 

영시암은 인제군 북면 용대리 백담사(百潭寺)에서 봉정암쪽으로 약 3.5km쯤 올라가다 보면 나옵니다. 이 절은 효종(孝宗)조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김수항(김壽恒)의 아들인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선생이 최초로 창건(1709년)했다고 합니다. 숙종 때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원자 책봉을 반대하던 송시열과 김수항이 사사되었는데 김수항의 아들인 김창흡은 이에 환멸을 느끼고 전국을 떠돌다가 이곳에 와서 암자를 짓고 살았는데 이것이 영시암이라 합니다. 처음에는 삼연정사(三淵精舍)라 하였다가 뒤에 영시암(永矢庵)이라 했다고 합니다. 영시(永矢)이란 세상을 영원히 떠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의 영시암은 1950년 6.25전쟁으로 인하여 소실(燒失)된 이후 폐허(廢墟)가 되었던 것을 1992년에 백담사(百潭寺) 주지로 있던 김도윤(金道允) 스님이 다시 복원하여 옛날의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영시암은 해마다 달라지고 있습니다. 이제 암자의 격을 벗어나 사격을 갖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영시암은 문수도량입니다.

 

 

 

 

비록 수량이 부족하여 예전만 못하다는 느낌은 들지만

수려한 계곡미는 여전하답니다.

 

 

청아한 물소리를 들으며 수렴동계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부지런히 발놀림을 하다보니

어느 덧 발바닥이 뜨끈해져 오는군요.

 

 

불이 난 발바닥의 화기를 맑은 계곡물에 담그며 땀을 씻어내고

 

 

울창한 숲길을 따라서 바깥 세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 것 같네요.

 

 

수렴동계곡을 내려가다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청옥빛 물 색깔에 저절로 카메라에 손이 가는군요.

 

 

일상에서 얻어지는 버거운 삶의 무게를 살짝 내려놓고

설악! 그 황홀한 비경에 감탄하며 즐긴 소중한 시간들...

 

 

그 넓은 가슴을 기꺼이 열어 보는 것만으로도

두 눈이 정화되는 것만 같은

청량하고 싱그럽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설악의 깊고 깊은 속살을 맘껏 볼 수 있게 해준 이번 산행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고 자평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백담탐방안내소 앞을 통과하게 만들어놓은 등로에는

산행을 마친 연배 지긋하신 산님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머물 수가 없어 그냥 통과해 나갑니다.

 

 

백담사 입구의 차량통제 말뚝에 당도하면서

실질적인 산행은 마침표를 찍게 되고 백담사 탐방에 들어갑니다.

 

 

백담사의 또 다른 명물.
헤아릴 수 없는 돌탑들...


수많은 소원이 모여있는 이곳에

원(願)을 담아 돌 하나 다소곳이 얹어 놓았지요.

 

 

설악산 백담사(雪嶽山 百潭寺)

 

 

내설악에 있는 대표적인 절로 전두환 전 대통령이 기거했던 곳이고

만해 한용운 선생이 10년 동안 수도생활 하면서 스님이 되시고

'님의 침묵'이란 시를 발표하는 등 일제의 민족 침탈에 항거하여

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유적지로도 유명한 곳입니다.

 

 

백담사의 큰 법당인 극락보전을 들러

이틀간의 무사산행에 대한 감사와

마음 속 염원을 담아 부처님께 예를 올리고

몇 번 와본 사찰이라 건성으로 경내를 돌아본 뒤

용대리행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합니다.

 

 

 

1인당 2,300원의 차비를 지불하고 버스에 몸을 싣고 구비구비 휘감아도는 골짝을 따라 당도한 용대리.

탁송회사가 주차해 놓은 곳을 찾아 이틀간 타지에서 외로이 주인을 기다렸을 애마와 반가운 해후를 하고서 용대리를 빠져 나와 속초 방면으로 진행해 나간다.

미시령 가기 전 이 지역의 맛난 먹거리를 맛보기 위해 맛집을 찾아 황태정식으로 이른 저녁을 해결한다.

황태구이에 담백한 황태국, 그리고 깔끔하게 차려진 갖가지 산나물이 입맛을 돌게 하더니 양이 제법 많은 밥 한 공기를 게눈 감추듯 해치우고 든든한 속을 달래며 미시령터널을 지난다. 터널을 빠져나오니 미시령을 넘을 때마다 만났던 울산바위의 웅장한 위용에 비상깜빡이를 켜고 주차할 만한 노견에 차를 세우고 카메라에 담아본다.

언제 보아도 멋진 그 모습은 볼 때마다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리고 예까지 왔으니 5년전 친구 부부들과 함께 찾았던 화암사를 다시 들러보기로 마음먹고 핸들을 과감히 꺾어본다.

 

 

미시령에서 바라본 울산바위의 위용

 

 

화암사의 상징인 수암(穗岩)입니다.

 

 

 

고성 화암사는 금강산 일만이천봉의 첫 봉우리라는 신선봉 아래 있다. 한반도의 허리가 동강났기에 남쪽에서는 건봉사와 더불어 금강산에 속해있는 유이(唯二)한 사찰이다. 그러니까 북에서 살피면 금강산 최남단에 위치한 셈이다.

화암사가 가까워지자 절 앞에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있다. 바로 절의 상징이며 역사인 수바위다. 수바위는 벼이삭 수(穗)자를 쓴다. 그래서 쌀바위라고도 부른다. 벼 낟가리처럼 생겨서 그렇게 불렀다. 수바위는 화암사를 창건한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고승들이 정진했던 수도장이기도 했다.

수바위에는 계란모양 거대한 암석에 왕관모양의 또 다른 바위가 놓여 있다. 그 위에 둘레가 5m쯤 되는 웅덩이가 있다. 이 웅덩이에는 물이 항상 고여 있어 가뭄이 들면 웅덩이 물을 떠서 주위에 뿌리고 기우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러면 하늘이 이 웅덩이를 채우려 비를 내린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바위 이름에 물 수(水)자를 써야한다는 사람도 있고, 바위의 생김이 범상치 않으니 빼어날 수(秀)자를 써야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수(穗)바위, 쌀바위라 부르게 된 설화가 버젓이 전해 내려온다.

화암사는 산이 깊고 길이 험해서 무척 양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마을로 내려가 탁발해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절집 식구들은 늘 배가 고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진하던 두 스님의 꿈에 똑같이 백발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수바위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으니 지팡이를 넣고 세 번 흔들면 끼니 때마다 2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정말 두 스님이 수바위로 올라가 구멍에 지팡이를 넣고 흔드니 딱 2인분의 쌀이 나왔다. 쌀바위는 그렇게 두 스님을 고승으로 키웠다.

그런 어느 날 객승이 찾아들었다. 객승은 바위 구멍에서 지팡이를 세 번 흔들어 2인분의 쌀이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세속의 어리석음을 버리지 못한 그는 불현듯 욕심이 생겨났다. 혼자 많이 먹고 싶었다. 300번을 흔들면 200인분의 쌀이 나올 것이라며 지팡이를 집어넣고 마구 휘저었다. 그러자 바위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후 바위는 쌀을 토해내지 않았다. 이 설화에 기인하여 수바위 아래 절을 벼화, 바위암을 써서 화암(禾巖)사라 부르게 되었다. (참조 : 법보신문)

 

 

금강산 화암사

 

 

화암사는 신라 혜공왕 5년(769년)에 진표율사가 창건했다. 처음 이름은 화엄사였다. 금강산 화엄사 사적기는 이렇게 전한다.

'옛날 진표율사께서 창건하시어 화엄(華嚴)이라 편액하셨다. 화엄이라 한 것은 화엄대교를 강론하여 인천(人天)의 여체(餘滯)를 씻어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액(題額)하셨으니 속세에서는 화암이라 칭하였다.…율사께서 화엄경으로 신도 100명을 교화하니 대낮에 하늘로 올라간 사람이 31명이요, 그 나머지 69명은 돈오무상(頓悟無上)을 얻었다. 그러므로 절 이름을 화엄사라 했다.'

진표율사는 금산사와 법주사를 창건하고 금강산에 들어 세 절을 세웠다. 동쪽에는 발연사, 서쪽에는 장안사, 남쪽에는 화암사를 두어 금강산을 미륵부처님의 정토로 삼았다.

사적기 등에 따르면 화암사는 다섯 차례나 화재로 큰 손실을 입었다. 불이 잦은 이유는 절 남쪽에 있는 수바위와 북쪽에 있는 코끼리모양의 바위가 서로 맥이 화해롭지 못하고 상충하여 그 화기가 절로 떨어졌기 때문이란다. 그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절은 창건당시 위치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기는 1623년에 일어난 화재의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부처를 모신 감실과 승료가 거듭 화재를 입어 빈터만이 남으니, 구름은 향대를 시름겨워하고, 숲 아래 시냇물은 오열하였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중창하였음을 장하게 기록하고 있다.

'아! 이 절이 여러 번 폐흥(廢興)함은 조화무수(造化無數)의 사연(使然)이 아님이 없으니, 어찌 그 사이에 인력(人力)을 용납하랴. 하늘이 길고 오래도록 이 산이 무너지지 않고, 전현(前賢)과 후철(後喆)이 서로 이어 의지하여 돌아가, 이 절의 쇠퇴와 성흥을 몇 번이나 보았는지 알지 못하니, 참으로 천지와 더불어 선후(先後)하여 시종이 없이 다하였구나.'

1863년(고종 원년)에 또 화재로 소실되어 다시 이전했는데 바로 지금의 화암사 자리이다. 그리고 1912년에 화암사로 공식 개칭했다. (참조 : 법보신문)

 

 

화암사 경내에서 바라본 수바위.

 

 

 

 

금강산 화암사(金剛山 禾巖寺)라는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빠져나와

 

 

웅장한 울산바위를 한번 더 보고싶어

속초 방향으로 가는 방향에 있는

델피노리조트에서 멋진 그 모습을 조망해 봅니다.

 

 

남쪽 방향으로는 뾰족한 암봉이 눈길을 끄는 달마봉이 건너보이고

 

 

울산바위와 달마봉 사이로 청이 삼형제와

공룡능선, 화채봉, 권금성이 정수리를 드러내고 있는 모습입니다.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최고의 산이자 세계적 명산...

남한에서 세 번째로 높은 대청봉(1,708m)을 비롯하여 수많은 봉우리와 능선, 계곡들이 어우러져 어느 능선, 어떤 계곡에 가더라도 또 어떤 계절에 찾더라도 천하절경을 만날 수 있는 곳. 이름하여 설악(雪嶽)이다.

언제나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산을 배우러 다니는 미천한 산꾼이지만 가끔씩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찾게 되면 언제나 그 높음과 넓음 그리고 깊음으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감동과 무한의 깨달음을 주곤 한다. 산을 바라보는 그 자체가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한없이 머물고만 싶은 곳. 설악!

내 언제 또 다시 설악에 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또 머리 속을 채운다.

계절은 흐르고, 세월도 흘러도 가슴엔 생생한 그리움으로 남을 그 어느 날, 사무치게 그리운 날이 오면 주섬주섬 배낭을 꾸려 달려오리라!
일상으로 향하는 산꾼의 아쉬운 마음 한자락을 달래주기 위해서라도 오늘 밤 설악의 그 능선을 또 다시 걸어 보고싶다.

이토록 아름다운 설악을 두고 떠나려 하니 마음 한구석 서운함이 가득 전해오지만 현실의 삶 속으로 돌아가야 하기에 아쉬움이 남지만 설악이 주는 크나큰 에너지를 가슴 가득 품고 돌아가는 귀로에는 정화된 깨끗한 마음만 담겨져 있는 것 같아 하늘 높이 훨훨 날아오르는 풍선처럼 자꾸만 부풀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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