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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2년 만에 다시 찾은 마비정벽화마을과 남평문씨 세거지 본문

★ 여행이야기

2년 만에 다시 찾은 마비정벽화마을과 남평문씨 세거지

해와달^^* 2015. 7. 21. 23:45

대구 용문산 주변의 산길을 엮어 반나절 산행으로 돌아보고 시간이 남아 아내에게 구경시켜줄 요량으로 마비정벽화마을을 찾아간다.

차 한대 겨우 지날 수 있는 시멘트도로를 따라 구비구비 달려간 마비정엔 그동안 인터넷이나 언론 매체를 통해 많이 소개가 된듯 주말을 맞아 찾아온 관광객들이 많이 눈에 띈다. 좁은 마을 도로를 빠져나와 버스 종점이 있는 마을 입구의 도로변 한귀퉁이에 어렵사리 주차를 해놓고 마을 탐방에 들어간다.

이미 한번 다녀간 걸음이기에 그리 급하지 않은 오르막길을 따라 마을을 한 바퀴 돌면서 아내에게 뜻깊은 추억을 만들어 주고싶은 마음에 열심히 설명을 시작한다.

 

 

광역시인 대구에 있다고 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자그마한 농촌마을...

 

어쩌면 깊은 산자락 아래에 자리잡고 있어

산골마을이라고 하는게 더 맞을런지도 모르겠네요.

 

불과 3,40여 가구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있는 아주 조요한 마을.

이 마을이 요즘 시끌벅적하게 찾아오는

관광객들로 붐비는 유명한 마을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유일의 연리목 + 연리지 사랑나무.

 

돌배나무와 느티나무의 사랑이야기를

연리목을 통해서 알 수 있답니다.

 

 

대구 '마비정벽화마을'

 

집과 집을 이어주고 있는 담장은 화폭이 되어 온통 그림이 그려져 있고,

 

 

그 골목길을 따라 걷는 호젓한 돌담길은 아련한 추억 속의 길이 됩니다.

 

 

 

♥ 마비정마을의 유래 ♥

먼 옛날 이 마을에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비무'라는 숫말과 '백희'라는 아름다운 암말이 대나무 숲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백희'라는 암말은 꽃과 약초를 먹고 살아 몸에는 늘 향기로운 냄새와 빛이 났고 '비무'는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백희가 먹을 꽃과 약초를 찾아 '백희'에게 가져다 주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 날 비무가 꽃과 약초를 구하러 멀리 떠나고 '백희'만 남아 대나무밭에 혼자 있을때 전장터로 떠나는 '마고담' 이라는 장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천리마가 있으면 전쟁을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대나무밭에 '백희'를 '비무'로 착각하여 전쟁터로 나갈 것을 제안하며 천리마 '비무'의 실력을 보길 원했다.

이 말을 들은 '백희'는 '비무'가 전쟁터에 나가 고생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비무' 인척 고개를 끄덕였다.

'마고담'은 "천리마는 화살보다 빨리 달린다 하니 너의 실력을 봐야 되겠다"하고 바위에 올라 건너편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백희'는 힘껏 달렸지만 화살을 따라 잡을 수가 없었다. 화가 난 마고담은 '백희'를 단숨에 베어 버렸다.

그곳에는 하얀 백마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어 있었다.

이때 '백희'의 먹이를 구하러간 '비무'가 돌아와 '백희'의 주검을 보고 슬픔에 겨워 구슬피 울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비무'를 보지 못하였고 '비무'의 울음소리만 들을 수 있었고, '백희'의 무덤에 꽃과 약초가 끊임없이 놓여져 있는 것으로 '비무'가 다녀간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온 나라에 역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 이 마을은 '백희'의 무덤에 놓인 약초로 역병도 돌지 않았다고 전해 내려온다.

마을에서는 '비무'의 흔적을 알기 위해 마을길과 나무에는 대나무 풍경을 달아 '비무'가 온 것을 알 수 있었고, '비무'가 온 것을 알리고자 나무 나팔을 불었으며 '비무'를 기리고자 말솟대를 만들어 세웠다. 그리고 '마고담'은 잘못을 빌고자 정자를 짓고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그 정자가 바로 마비정(馬飛亭)이다. 이후 이 마을을 마비정이라 불리워졌다고 한다.

또 다른 유래로는 한양을 말을 타고 가던 주민들이 쉬면서 우물물을 마신 뒤 원기를 회복해 날쌔게 달렸다하여 마비정(馬飛井)이라고도 불린다.

 

 

 

 

한적한 시골 정취도 느끼고 산책도 할겸

골목 담벼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노라니 문득 느껴지는게 있네요.

 

 

 

 

마비정마을의 그림들은 주제가 있다고나 할까요?

 

 

모든 그림들이 우리의 옛 정취가 물씬 풍겨나기 때문이겠지요.

 

 

'줄사철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는 6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옻나무'.

 

 

 

 

대나무 숲 터널.
 
명마인 '비무'와 '백희'가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남근갓바위'와 '거북바위'

 

 

양쪽 2개의 바위가 '거북바위'입니다.

거북바위 앞에서 소원을 빌면

건강하게 오래 살수 있다 하여

마을주민들은 '장수바위'리 부르고 있답니다.

 

그리고 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것이

'남근 갓바위'입니다.

 

오래 전부터 마비정마을 입구에 놓여져 있던 것으로

생긴 모양이 남근을 닮았다 하여 남근바위라 하고

그 위에 갓을 씌워 남근을 보호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바위를 만지면 부부 사이가 좋아지고

자식을 갖지 못하는 부부사이에

자식이 생긴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마비정과 삼필봉을 오르는 등산로입니다.

언젠가 이곳에서 시작해서 한바퀴 돌아보고픈 마음이 드는군요.

 

 

마비정(馬飛井)

 

우물 위 지붕과 물을 긷기 위한

두레박을 원래의 형태로 복원해 놓았네요.

 

 

강아지 데리고 마실나왔나 봅니다.

그런데 아무데서나 실례를 하는걸 보니 변견인듯...^^*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어 옛추억을 떠올리며

사진으로 남길 수도 있게 만들어 놓았네요.

 

 

그림 하나하나마다 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오롯이 생각나게 만드는 마비정벽화마을을 둘러보고

남평문씨 세거지를 향해 길을 떠납니다.

 

 

 

달성군 화원읍 본리 인흥마을은 고려 말 중국으로부터 목화씨를 들여왔던 문익점 선생의 후손인 남평문씨의 세거지 입니다.

인흥마을은 고려 때가지만 해도 절이 있었던 곳으로서 삼국유사를 쓴 일연스님이 이곳에 있던 절을 중창하면서 인흥사(仁興寺)라 이름했고 지금의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군요.

그 인흥사가 언제 없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마을 어귀 한 모퉁이에 석탑 한 기가 남아 있답니다. 그 절 자리에 문익점의 18대손 문경호가 종택을 짓고 터전을 닦아 문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곳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수봉정사와 광거당, 인수문고를 들수 있는데, 수봉정사는 세거지의 입구에 있는 정자로 정원을 매우 아름답게 꾸민 곳이랍니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족의 모임을 열때 사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이었지요.

광거당은 문중의 자제들이 학문과 교양을 쌓던 수양장소였다고 합니다. 또 인수문고는 문중의 서고로 규장각 도서를 포함한 책 1만여 권을 소장하고 있는 개인문고로는 전국 최고로 평가받는 곳이랍니다.

 

 

안내문이 붙어있는 대문안으로 들어가면

정원이 아름다운 '수백당'입니다.

 

세거지 내의 대표적인 건물 중 하나인 수백당은

주로 손님을 맞이하거나 문중의 모임 장소로

이용하던 큰 규모의 건물입니다.

 

 

수백당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우물.

 

 

수봉정사와 담을 사이에 두고 있는

남평문씨 문중의 서고(書庫)인 인수문고(仁壽文庫)입니다.

 

 

세월의 연륜을 몸으로 말해주는 듯 보기만 하여도 느낄 수가 있네요.

 

 

'수봉정사(壽峯精舍)'

 

지금은 '수백당(守白堂)'이라는 글씨가

씌어진 현판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네요.

 

 

'수봉정사(壽峯精舍)'는 인흥마을 초입에 있는데 인공미가 절제된 정원과 함께 근대 한옥건축의 정수로 평가받는 건물입니다.

1936년 지어진 이 수봉정사는 인흥마을 중흥조인 수봉 문영박을 기린 재실이자 종회당으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참고로 수봉정사와 광거당에는 명나라 4대가 중 한 명인 문징명(文徵明), 청나라 문인 장건(張건), 추사 김정희의 편액도 게시되어 있다고 하는데 지난번에도 그랬고 이번 또한 그냥 지나쳤으니 무지함을 어찌해야 할지...

다음 기회에는 꼭 잊어버리지 않고 수봉정사와 함께 이곳 남평문씨 세거지의 랜드마크인 광거당(廣居堂)을 포함해서 둘러볼 것을 다짐해 본답니다.

 

 

달성 인흥마을 남평 문씨 세거지는

가문의 위풍당당함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소 아홉 가구와 두 재실로 이루어진 마을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고 담장 하나 문짝 하나에도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음이 없으니

그 정연함이 외려 위압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담장 너머 능소화가 활짝 피어있는 모습에 내부가 참 궁금했었는데

다행히 대문이 열려 있어 잠시 안을 기웃거려 보기로 합니다.

 

 

안으로 들어선 내부에는 사람이 살고 있네요.

굵직한 남자분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데 나중에야 알고보니

이 집이 바로 대구광역시장, 국회의원까지 지냈던

문희갑 님이 살고 계시는 곳이더군요.

 

 

건물 뒤쪽으로 들어가 본 소박하지만 잘 가꾸어진 정원입니다.

문득 이런 곳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저절로 드는군요.

 

보존이 잘 되고 관리 또한 잘되는 것을 보면서

남평 문씨 후손들이 대단하다는걸 새삼 느낍니다.

 

 

'문경호 나무'라고 이름 붙은 회화나무.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인흥마을 남평문씨 세거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수봉정사 한쪽에는 수백년 된 노거수 한 그루가 우뚝 서 있다.

'문경호 나무'라고 이름 붙은 회화나무다. 이 회화나무의 나이는 300살 정도로  높이는 25m, 둘레는 1.5m에 이르는 거목이다. 인흥마을 초입에 들어서자마자 한눈에 들어올 만큼 웅장한 자태로 방문객을 맞는다.

문익점 선생의 후손으로 인흥마을에 터전을 마련한 문경호가 남평문씨의 세거지임을 알리는 표지로 삼은 나무다.

마치 고려시대 중국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후예임을 자랑이라도 하듯 나무의 기세가 대단하다. 회화나무는 자라는 모습이 학식높은 선비의 기개를 닮았다 해서 선비나무 혹은 학자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하며 벼슬을 얻어 출세한 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할 때도 왕이 회화나무를 선물했다고도 전해진다.

또 민가에서 심으면 큰 학자나 출중한 인물이 나오는 등 가문이 번창하고, 잡신도 범접하지 못한다고 여겼다. 이뿐만 아니라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힘이 있다고 해서 재판관은 회화나무를 들고 송사에 임했다.

특히 길흉을 예고한다고 해서 위정자는 나무의 변화를 항상 살폈다. 문경호가 숱하게 많은 나무들 가운데 마을의 상징으로 회화나무를 심은 이유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인흥마을의 회화나무는 수봉정사의 돌담과 붙어 있다. 나무의 자람을 방해하지 않고 나무의 생육 공간을 넉넉히 하기 위해 수봉정사는 담장을 기역자로 쌓았다. 사람과 나무가 더불어 살 수 있도록 배려한 남평문씨 일가의 여유와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출처 : 매일신문)

 

 

두꺼운 진흙으로 한층, 그 위에 돌을 쌓은

전형적인 흙돌담길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함을 주네요.

 

흐드러져 담을 넘어오는 나뭇가지들이 돌담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루는 모습이 참으로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언제 또 찾을 기회가 있다면 그때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필 때쯤 다시 찾고 싶네요.

 

 

담들은 모두 돌과 진흙으로 쌓았고

그 위에 기와를 가지런히 얹어 놓았는데,
골목들은 모두 자로 잰듯 반듯하게 열려있습니다.


기와지붕의 곡선과 골목과 담의 직선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내는 듯 하여

새삼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이 드는 순간입니다.

 

 

인흥사지(仁興寺址) 삼층석탑.

 

시커멓게 색이 변하고 제대로 보수가 되지 않은 채

버려지다시피 서있는 석탑을 보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되는군요.

 

조선시대에 불교가 핍박을 받던 시절

폐사가 되었으리라 생각이 들고

그 자리에 유교를 숭상하는

선비집안이 자리를 잡은게 아닌가 싶네요.

 

 

 

 

삭막하고 답답한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한적함과 여유로움이 있던 그곳... 따사로운 햇살은 없었지만 흐리면 흐린대로 시골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거닐기 좋았던 흙길...

유유자적의 의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던 '남평문씨 세거지' 탐방을 마치고 집사람의 저녁 모임에 늦지 않기 위해 서둘러 길을 나서지만 마음 속엔 아직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청아한 빛깔의 산과 그 선명한 산봉우리... 그리고 전통 한옥이 주는 멋에 신선하고도 상쾌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 같다.

비록 짧은 시간속에 제대로 다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은 남지만 바삐 돌아가는 도심에서 벗어나 다소 느린 걸음으로 선조들의 삶을 엿보고 옛 것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었으니 앞으로도 그냥 일상을 벗어나 머리속에 그려놓았던 그 풍경을 만나진 못한다 할지라도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 속 열망이 자꾸 스멀스멀 올라온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면 더욱 좋을거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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