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땜방으로 10년 만에 다시 찾은 의성 금성산-비봉산 본문
♣ 산행일자 : 2016. 03. 13 (일) 날씨 - 흐림
♣ 산행장소 : 경북 의성군 금성면, 가음면, 춘산면, 사곡면 일원
♣ 산행인원 : 집사람과 함께...
♣ 산행코스 : 주차장-금성산성-병마훈련장-금성산-건들바위-봉수대유지-노적봉갈림길-비봉산갈림길-비봉산-여인의 턱-수정사갈림길-606봉- 산불감시초소-주차장
♣ 산행시간 및 거리 : 5시간 40분, 9.03km (느긋하게 식사 및 휴식 포함, GPS 기준)
▣ 산행지 소개
경북 의성의 명산인 금성산(金城山ㆍ530.1m)과 비봉산(飛鳳山ㆍ671.8m). 중앙고속도로 또는 국도 28호선을 따라 의성 방면으로 향하며, 차창 밖으로 한눈에 바라 뵈는 이 두 산은 웅장하게 다가온다. 전국 어느 명산에 견주어도 손색없는 의성의 대표 명산으로, 다양한 코스에 육산과 골산으로서의 품성을 모두 갖춘 산행지이다.
금성산은 숱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국내 최초 사화산으로 태백산맥 남쪽 일부이다. 옛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시대에 조성한 길이 2천730m, 높이 4m의 금성산성을 배경으로 등산로가 개설돼 있으며 산성을 따라가면서 흔들바위, 조문전망암, 아들딸바위, 동굴, 솟대바위 등이 자리하고 있다. 신라시대 의상이 창건한 유서깊은 고찰 수정사와 산운 대감마을 등 산행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금성산은 무엇이든 품에 안을 것 같은 넉넉하고 부드러운 능선과 호젓한 송림 사이 이뤄진 후덕한 길이라면, 비봉산은 수백 길 단애를 이룬 절벽 위를 걷는 암릉 길로 솟대바위 등 수직의 절벽과 기암괴석들이 장관이다.
◈ 산행기
새로운 직장을 찾아 일을 시작한지는 2개월이 되었지만 아들을 만나러 미국을 다녀온 2주간의 일정을 빼고나면 제대로 근무한게 얼마되지 않는다. 아직 배워야 할 업무가 산더미같이 많은데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쌓여야 하는 일이라 느긋하게 마음을 먹고 있지만 마음은 자꾸 조바심이 이는게 사실이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렇겠지만 자신이 먼저 손 내밀고 다가가 진심어린 마음으로 대한다면 충분히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오늘은 함께 하는 현장의 지인이 회장으로 있는 신생 산악회에 얼굴이라도 내밀어 보려고 산행준비를 마치고 부리나케 포항공설운동장으로 달려간다.
도착한 운동장에는 버스가 몇대 정차해 있어 찾아보니 보이질 않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 같아 전화를 넣어보니 아뿔싸!...
오늘이 아니고 다음 주 일요일이라고 하는게 아닌가... 태무심하고 생각없이 나왔는데... 어이가 없어 그냥 헛웃음만 지으며 집사람이랑 이왕 나온거 둘이 산행이나 가자며 차를 몰아 대구-포항 고속도로를 달려나간다.
영남알프스나 팔공산을 생각하다가 흐린 날씨에 조망은 별로일 것 같아 오랜만에 다시 가보자는 마음으로 네비게이션에 의성 수정사를 입력하고 부지런히 달음박질을 한다. 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하고 28번 국도로 갈아타고 달리다 의성군 금성면 소재지인 탑리 입구에서 수정사를 알리는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하여 진행하면 나오는 산운리 산운초등교 앞 "수정사 2.5km"를 알리는 이정표에서 좌회전, 마을길을 따라 끝까지 진행하면 금성산 등산로가 있는 정자골에 닿게 되는데 주차장의 규모로 보아 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흐린데다 약간 쌀쌀한 기운의 날씨라 주차장에는 차가 몇대 보이질 않아 조용한 산행이 되겠구나 싶어 느긋하게 산행준비를 마치고 주차장 좌측 뒤로 나있는 등로를 따라 오늘의 산행을 시작한다.
산행궤적
널찍한 주차장에서 금성산 방향은
좌측 뒤로 난 길이고 맞은 편 도로를 따라
수정사 방향으로 300m 가량 진행하면
우측으로 비봉산 들머리가 나옵니다.
오늘 산행 코스는 금성산을 먼저 오른 다음
비봉산을 거쳐 내려오는 것으로 정했기에
왼편 넓은 길로 접어 들어서게 되면 얼마지 않아
우측으로 철문이 설치된 용문정 진입로를 지나게 되고,
널찍한 솔숲길로 접어들어 서서히 경사도를 높여가던 등로는
초반부터 제법 숨이 가쁠만큼 거친 편입니다.
근 10년 만에 다시 찾은 금성산-비봉산.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그때의 기억은 희미해져 버렸지만
금성산성을 이루고 있던 돌더미는 유구한 세월이 흘렀어도 그대로인 것 같네요.
삼한시대 조문국 때 세워져 조문산성으로도 불리는 이 성은
신라 문무왕 때 보수, 신라가 당군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하는데 한 몫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지금의 산성은 높이가 채 1m도 안돼 초라하기 그지 없지만
무너진 돌이 인근에 널려있어 과거 성의 형태와 규모를 가늠해 볼 수 있답니다.
용문삼거리 갈림길.
오늘 산행에 있어 가장 아쉬운 부분이 용문을 다녀오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 먼거리도 아니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그냥 지나쳐 버렸으니...
머리를 풀어 헤치고 누워있는 여인의 모습이 드디어 시야에 들어오는군요.
이후 산길은 산성을 따라 이어지며 전에 없던 철사다리를 올라
가파름을 극복해 가다보면 의성군이 설치한 관망대를 만나게 됩니다.
조문국 망루가 있던 곳으로 적의 침입을 감시하던 장소라 합니다.
이쯤에 서게 되니 의성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오는 확 트인 조망이 일품이네요.
흐린 날씨에 아쉬운 마음이 조금은 들지만 이만큼이라도 볼수 있으니 다행이지요.
이름 그대로 봉황이 날개를 편 양 건너로 비봉산이 우뚝하고
골짜기 안쪽으로 수정사도 모습을 드러냅니다.
시작되는 바위길을 따라 10여분 바짝 땀을 내고 오르면
산 중턱은 뜻밖의 평지를 보여주는데
과거 조문국이 최후를 맞아 성안에 갇혀 있을 동안
병마를 훈련시키던 병마훈련장이었다고 합니다.
송림이 좋아 잠시 쉬어가기 적합한 곳이지요.
경사가 심해 과거에는 밧줄을 잡고 올랐던 기억이 있는데
지금은 새로 단장된 철계단을 타고 오르면 곧 금성산 고스락에 닿게 됩니다.
이정표에서 가리키는 대로 먼저 좌측의 조문조망암부터 다녀오기로 합니다.
역시 의성군에서 망원경까지 설치해놓은 전망대에 서니
금성면 탑리 일대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시원스런 조망이 펼쳐집니다.
조망암에서 다시 삼각점이 있는 헬기장으로 돌아와
건너편 비봉산을 한번 바라봐주고
송림 입구에 서있는 금성산 정상석에서
10년 만의 해후를 사진으로 남겨보고서
금성산(金城山. 531m)
높이는 531m이다. 가마와 비슷하다고 하여 가마산이라고도 부른다. 내륙분지에 솟아 있는 조그마한 산으로, 의성군의 명산으로 꼽힌다. 사화산으로, 한반도 최초의 화산이다. 백악기에 화산이 폭발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때문에 정상에 1,000여 평의 평지가 남아 있다.
마주보고 있는 비봉산(飛鳳山:672m)과 함께 절경을 이루고, 울창하게 우거진 숲은 소나무·갈참나무·신갈나무 등의 수목이 주를 이룬다. 화산 폭발의 흔적인 정상의 평지는 천하 제일의 명당자리로서 이곳에 조상묘를 쓰면 당대의 만석꾼이 되지만 주변 지역은 3년 동안 가뭄이 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지금도 주민들이 남몰래 땅을 파헤친 흔적이 곳곳에 있다.
금성면이 삼한시대 부족국가인 조문국의 도읍지였던 탓에 산 속과 인근에는 석탑을 비롯한 귀중한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정상 북쪽에는 조문국 시절에 세운 것이라고 추정되는 높이 4m, 넓이 2∼4m의 금성산성(金城山城)이 있는데, 조선시대에 유정(惟政)이 왜군과 싸우던 곳이기도 하다. 산 속에 흩어져 있는 삼국시대의 고분 200여 기는 경상북도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등산로는 금성산 단독 코스와 비봉산과 연계하는 코스가 개설되어 있고, 산행 후에는 '옥색 빛깔의 신비한 온천수'로 이름난 빙계온천과 새로이 개발된 탑산약수온천에서 온천욕을 즐길 수 있다. 인근에는 조문국의 마지막 왕인 경덕왕의 사적지와 1935년에 세운 문익점 면작기념비가 남아 있고, 군립공원인 빙계계곡(氷溪溪谷)은 여름철 피서지로서 유명하다.
정상 표석을 뒤로 하고 북동능선을 따라
솔향기에 취해 능선에 자리한 입석 몇 개를 지나 걷다보면
건들바위 갈림길을 알리는 이정표를 만나게 됩니다.
건들바위(흔들바위)는 주등산로를 벗어나
왼편 사면 아래 90m 지점에 위치해 있는데
급비탈을 내려서자 이내 사면에 우뚝 솟아오른 건들바위입니다.
바위 오른쪽 아래로 배나무골로 내려서는 뚜렷한 내림길과
금성면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라 하는데
오늘은 흐린 날씨 탓에 먼곳까지의 조망을 볼수 없음이 아쉬울 뿐이네요.
급비탈을 되올라와 계속되는 능선길을 이어가게 되고,
솔숲사이로 의성 일대가 내려다보이는 오붓한 길이 이어집니다.
완만하던 능선길을 따라 잠시 내려서면
용문정갈림길이 있는 첫 번째 잘록이에 닿게 됩니다.
4거리 안부를 지키고 있는 이정표는
왼편은 샘터를 거쳐 기도원 가는 길,
오른편은 용문정로 가는 길이며
봉수대는 직진방향을 알리고 있습니다.
금성산의 실질적인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550봉을 지나 내려서면
"영니산 봉수대유지" 란 팻말과
석축의 흔적이 있는 봉수대터에 닿게 됩니다.
영니산은 금성산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하는군요.
봉수대를 지나 걷기 편한 등로를 따라 진행하면
좌우로 내림길이 있는 4거리 안부를 지나치게 되고,
등로는 바로 앞으로 나타나는 산봉 우측 허리길을 타고 이어집니다.
계속되던 등로는 고스락에 올라서면서
우측으로 급하게 꺽어들며 내리막으로 치닫게 되는데
기나긴 철계단길이 부담스러워 옛길의 흔적을 따라 내려섭니다.
부드러운 솔가리가 쌓인 오솔길을 마냥 걸어갑니다.
비록 아름드리 소나무는 보이지 않지만
계속되는 솔숲길에선 마음마저 평온해지는 것 같습니다.
바위봉에서 20여분 후 노적봉을 향하는
지능선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지나게 되고,
바로 앞 봉우리 하나를 왼편으로 트래버스 하게되면
나무 간판 이정표가 서 있는 수정사 갈림길에 이르게 됩니다.
오른쪽 아래로 내려서는 길이 수정사 방향이고
비봉산은 직진방향입니다.
천년고찰 수정사는 하산 후에 따로 들러보기로 하고
꾸준한 오르막을 부지런히 올라서게 되면
헬기장이 있는 비봉산 정상(671.8m)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비봉산(飛鳳山, 671m)
비봉산은 대동여지도와 1872년 지방지도에서 금성산(金城山)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산 이름을 현재의 금성산에 내어 놓으면서 병풍을 둘러놓은 듯 깎아지른 절벽 위에 우뚝 솟은 형상이 마치 봉황이 날아가는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고려시대부터 비봉산이라 불려왔고 금성산과는 달리 이름만큼이나 날렵한 9개의 봉우리를 따라 춤추듯 흘러내리는 암릉미가 압권이랍니다.
기암들과 밧줄구간이 다소 아찔한 능선길로 확 트인 조망을 자랑하는 곳이지요.
또한 비봉산 남쪽 구릉지대에는 봉황이 날아와 아름다운 울음소리를 세 번이나 사방에 울렸다 하여 가음(佳音)면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정상석 뒤쪽에 있는 삼각점을 사진에 담고
집사람과 인증샷을 남겨가며 사진놀이를 잠시하다가
준비해간 먹거리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합니다.
느긋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따끈한 커피 한잔 나누어가며
마냥 늑장을 부린 끝에 남쪽 건너로 보이는
두 번째 봉우리에 올라서게 됩니다.
서너 평 정도되는 공터를 이룬 이 두 번째 봉우리에는
별다른 표석도 없어 그냥 지나쳐 내려옵니다.
왼쪽 아래로 단애를 이룬 절벽지대를 이룬 암릉길이 이어지는데,
틈만 나면 포즈를 잡는 아지매 때문에 발걸음은 자꾸 느려만 갑니다.
가음면 일대 부채살처럼 펼쳐진 구릉과
그 사이사이 빠짐없이 들어서 있는
수많은 저수지도 이색 볼거리입니다.
암벽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소나무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잠시 걸음을 옮겨나가면
'여인의 턱'이라 씌어진 갈림길 앞에 서게 되는데
이정표 뒤로 나있는 암릉 앞에 서면
갑자기 뚝 떨어지는 수직절벽으로 변하게 됩니다.
'여인의 턱' 상단부에 서게되는 셈이지요.
잠시 주변 조망을 관망하고
이정표가 가리키는 우측 방향으로 내려섭니다.
밧줄을 붙잡고 유격훈련 하듯
암벽타기로 내려와 '여인의 턱'이라 불리는
3봉 아래의 20m 로프구간을 무사히 내려와
예전에 없던 '남근석전망대'를 찾아 바위 끝으로 다가가 봅니다.
비봉산 남근석(飛鳳山 南根石).
자연이 만든 것이라지만 참 오묘하네요.
더구나 예로부터 남근숭배사상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탓에
남근은 무속과 민속신앙의 대상이 되어 생식과 풍요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남근석전망대에서 가야할 606봉과 우측의 지나온 금성산을 담아보고
남근석을 배경으로 사진도 한장 담아보면서 잠시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남근석전망대를 빠져나와 아래로 내려오면
안부 우측으로 수정사로 내려서는 갈림길과 만나게 되니
10년전 이곳을 찾았을 때 수정사로 내려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곧장 나있는 가풀막을 힘차게 올라섭니다.
제법 가파른 오름이지만 뒤돌아 본 '여인의 턱'
암벽지대의 경관에 힘든 줄 모르고 올라서게 되는군요.
가풀막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오르면
봉우리 오른쪽으로 금성산의 속내가 훤히 내려다 보이네요.
가까이 당겨본 수정사를 사진에 담고
가슴 후련한 풍광은 등로를 따라 계속되니
가는 곳곳마다 기기묘묘한 기암들을 얹고
화려함에 멋들어진 조망을 보여주고 있네요.
지나온 금성산을 건너다 보기도 하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시야에 들어오는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바윗길도 재미가 쏠쏠하지만
수백m 직벽으로 솟구쳐 오른
단애를 바라본다는 것은 짜릿한 전율 그 자체입니다.
지나온 발걸음의 흔적을 돌아보면서 멋진 풍광으로 보상받고
압권인 암름미를 맘껏 즐기며 진행하니
이정표가 있는 606봉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가야할 등로는 우측으로 이어지지만
멋진 조망을 놓칠 수 없어 이정표 뒤로 발걸음을 옮겨갑니다.
606에서 바라보는 가야할 등로와 건너편의 금성산 능선,
그리고 금성면 들녘의 시원함까지 그야말로 여느 명산이 부럽지 않네요.
아기자기한 암릉길은 606봉을 넘어서도
가슴 후련한 풍광으로 등로를 따라 계속됩니다.
특히 너른 의성벌판 한가운데 유독 뾰족하게 솟아올라
10년 만의 발걸음에 들뜬 산꾼에게 더없는 감동을 주고 있네요.
606봉 내림길에서 바라본 금성산과 능선의 풍경입니다.
바위 벼랑마다 가득하게 자라고 있는 부처손.
하지만 채취는 엄두도 내지 못하겠네요.
전국 최초의 사화산답게 주상절리도 발견이 되는군요.
비록 흐린 날씨에 먼곳 까지의 조망은 볼수 없지만
춘산면, 가음면 일대가 넓게 펼쳐져 보이고
왼편으로 가음지(양지못)가 지척이며
그 뒤로 의성군 최고봉인 선암산(878.7m)도 건너다 보이네요.
어느 해 가을 날 밤버섯 한 배낭 가득 채취했던 그때가 새롭네요.
하산길에 잡아본 노적봉 아래의 대슬랩.
길게 띠를 이룬 화산지형 암벽이 또 한번 시선을 잡아 끄는군요.
뒤돌아 본 606봉과 대슬랩지대.
노적봉 아래의 그것과는 또다른 느낌이네요.
606봉에서 30여분을 느긋하게 진행하며 만난 산불감시초소봉.
멀리서 보았을 때는 누군가 있을 줄 알았는데 텅 비어 있네요.
산불감시초소봉을 스치듯 내려와 솔향내가 물씬 풍기는 등로를 내려가니
암릉길이 주는 묘미는 끝나고 등로는 다시 부드러운 숲길로 변하게 됩니다.
가파른 내림길엔 어김없이 철제사다리가 기다리고 있네요.
사다리의 간격이 어중간해서 걷기가 좀 불편해 예전 산길로 내려섭니다.
지그재그로 난 가파른 내림길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한발한발 내딛으니
주차장에서 수정사를 향한 도로에 닿게 되면서 실질적인 산행은 끝을 맺게 됩니다.
주차장 건너편에 조성된 공원에는 운동시설을 비롯한
옛날 조문국의 근거지였던 이곳 금성벌을 만천하에 알리듯
늠름한 기상의 장군상과 조문국 금동관을 모형으로 세워 놓았네요.
출발지였던 주차장에 도착하니 아침 나절 보이지 않던
단체 산객들이 하산 후 뒤풀이에 여념이 없네요.
아마도 금성산만 한바퀴 돈 모양입니다.
주차장 주변의 수목에서 담아온 봄의 향기 '매화'입니다.
산행을 마치고 차를 몰아 천년고찰 수정사를 찾아갑니다.
수정사(水淨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의 말사이다. 신라 신문왕(재위:681∼691) 때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1481년(조선 성종 12)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수량사(修量寺)라고 나와 있으며,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지은 《가람고(伽藍考)》에는 수정사라고 적혀 있다. 1592년(선조 25) 유정(惟政)이 이 절에 머물며 왜군을 격퇴한 바 있다. 1835년(헌종 1) 불이 나서 대광전만 남기고 모두 불에 탄 것을 뒤에 전홍(展鴻)이 옛 절터 약간 위쪽에 중창하였다. 1965년부터 1970년까지 월산(月山)이 요사와 월영루·격외선원·사명영당·영지·축대 등을 세웠으며, 1973년에는 정부의 보조를 받아 성견(性見)이 대광전을 중수하고 향각(香閣)을 중건하였다. 1993년에는 주지 총혜(聰惠)가 명부전과 범종각을 새로 짓고 산신각과 설선당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른다.(참조 : 두산백과)
법당을 찾아 부처님께 무사산행의 감사함과 아이들의 무탈함을 기원해 봅니다.
수정사의 법당인 '대광전'입니다.
대광전이면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곳인데
수정사에는 석가모니를 모셔 놓았네요.
집사람에게 은해사 암자를 전부 구경시켜 주었지만
딱 한 군데 빠져있던 거조암을 귀로에 다시 찾아봅니다.
거조암(居祖庵)
영천시 청통면 신원리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거조암은 은해사의 말사로 알려져 있지만 은해사보다 먼저 창건이 되었다고 한다. (은해사 809년, 거조암 738년) 그래서 원래 암자가 아니었다고 하여 최근에는 '거조사'라는 표기를 병행하고 있으며 곧 이름이 바뀔 것 같기도 하다. (거조암이라는 이름 이전에 거조사였다고 한다) 입장료, 주차료 같은 것은 없다.
거조암은 중심 건물이 일반 사찰과 달리 대웅전이 아닌 '영산전'이다. 일반적으로 영산전은 석가모니의 생애를 그린 팔상탱화나 석가모니가 설법을 하는 모습을 담은 영산회상도를 봉안한 건물이다. 거조암의 영산전에도 영산회상도가 석가모니불 뒤쪽에 펼쳐져 있다. 7x3칸 맞배지붕 양식으로 지어진 영산전은 무려 국보 제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놀랍게도 고려 시대의 건물이기 때문이다. 현재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 시대의 목조건물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그러기에 거조암의 영산전은 안동 봉정사의 극락전(국보 제15호), 영주 부석사의 무량수전(국보 제18호)과 조사당(국보 제19호), 예산 수덕사의 대웅전(국보 제49호)과 같이 이름만 들어도 알 것 같은 주요 문화유산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수 있다. 영산전에서도 부석사의 무량수전처럼 배흘림 기둥을 관찰할 수 있다.
영산전은 건물 자체로의 가치도 있지만, 건물 안에 봉안된 526기의 나한상도 볼만하다. 오백나한들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들 때 모여든 526명의 제자들이다. 거조암 영산전의 나한상은 석조나한상으로 화려한 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500여 개의 나한상은 제각각 이름도 갖고 있으며 같은 모양, 같은 표정이 하나도 없다. 때로는 다른 지역의 행사 및 전시회에 출장을 다녀오기도 한다.
국보 제14호인 '거조암(居祖庵) 영산전(靈山殿)'
거조암 영산전은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춘 건물이다. 군더더기가 없는 간결을 극한 구성과 짜임새는 필요미의 극치이다. 나뭇결의 천연스러움이 그대로 살아나고 흙벽의 질감이 부드럽고 따스하게 전해오는 백골단청은 그 어떤 화려하고 정치한 단청보다 장엄하고 감동적이다. ‘단순 소박하고 큰 맛’을 지닌 건물로 국보의 수준이 어떤 것인지를 넌지시 가르치고 있다. 영산전 앞에 서면 고요한 감동의 물결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서서히 차오른다.
거조암 오백나한상
거조암 입새에 재미있는 이정표가 하나 있다. '오백나한절 거조암', 절에서 이런 안내판을 내다 걸 만큼 부근의 민간에서는 거조암보다는 오백나한절이라고 더 많이 부른다. 이렇듯 거조암의 대명사가 된 오백나한상이 영산전에 안치되어 있다. 영산전을 짓던 비슷한 시기에 만들었으리라는 추측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그러나 운부암의 영파스님이 오백나한 하나하나의 이름을 적은 사실이 있다 하니 적어도 19세기 이전에 이미 나한상들이 조성되었음은 분명하다. 오백나한이라고 몰밀어 부르지만 정확히는 526구이다.
화강암을 깎아 만든 뒤 호분을 입히고 얼굴과 머리에 칠을 한 나한상들의 자세와 표정은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무릎에 올린 양 손으로 점잖게 염주를 돌리기도 하고, 팔짱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하며, 혹은 고요히 명상에 잠기기도 하고, 혹은 한쪽 어깨를 기울여 옆사람에게 무슨 말을 수군거리기도 하며, 어떤 것은 크게 웃는가 하면 어떤 것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도 하고······. 인간의 희로애락과 우비고뇌와 어묵동정이 천변만화한다. 그대로 인간세상의 한 축도다.
조각솜씨가 빼어난 것도, 칠을 올린 재주가 남다른 것도 아니지만 거친 듯 무심한 조각과 졸렬한 듯 천진한 채색이 빚어내는 푸짐한 명랑성이 보는 눈을 즐겁게 한다. 종교가 갖는 명랑성이란 얼마나 필요하고 귀한 것인가. 영산전의 오백나한상은 거기에 값하는 보배로운 유산이다.
거조암 영산탱
너무 멋지게 생겨서 오가는 이들이 모두 만져보고 싶어하고
사진도 같이 찍고 싶어하는 거조암의 스타... 삽살개입니다.
하지만 그냥 삽살개가 아니고 큰 직책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문화재지킴이'랍니다.
한번 들었던 것은 잘 안 잊고 제대로 일처리하던 예전의 기억력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조금씩 퇴화가 되는지 둔해지는 느낌이 오늘따라 피부에 와닿았던 것 같다. 상주 갑장산으로 산행을 간다고 준비를 마치고 신나게 왔건만... 다음 주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는 실소를 금치 못했고 황당하기까지 했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꿩 대신 닭이라고 생각하고 10년 만에 다시 찾은 의성의 명산인 금성산과 비봉산을 한꺼번에 엮어서 종주라는 이름으로 걸어보니 오랜만에 찾아온 보람을 한껏 느끼고 돌아온 멋진 산행이었다. 닭이 아니라 봉황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을 만큼 시원스럼 조망에 아기자기한 암릉길... 그리고 '여인의 턱'에서 내려서는 20미터의 짜릿한 밧줄구간... 그리고 남근석까지... 산행의 재미를 두루두루 갖추고 있는 의성 금성산과 비봉산을 모처럼 재미나게 한바퀴 돌고서 귀로에 올라 안강의 맛집에 들러 고디탕으로 저녁을 일찌감치 해결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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