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와달이 사는 집
오랜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찾은 지리산 칠암자 순례산행 본문
♧ 산행일자 : 2023년 5월 14일 (일요일) 날씨 - 맑음
♧ 산행장소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전북 남원시 산내면 일원
♧ 산행인원 : 나홀로
♧ 산행코스 :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음정마을) 입구-벽소령작전도로-도솔암-영원사-빗기재-삼정산-상무주암-문수암-삼불사-약수암-실상사-실상사 입구 임시주차장
♧ 산행시간 및 거리 : 7시간 18분, 16.06km (식사 및 휴식 포함, GPS 기준)
▣ 산행지 소개
삼정산(三丁山·1,225m)은 지리산 주능선 상의 삼각고지에서 북으로 뻗은 능선 상의 주봉우리다. 경남 하동과 산청의 경계에 솟은 삼신봉(三神峰·1,294m)이 주능선 남쪽에서 지리산 주릉을 한눈에 바라보는 망대라면, 전북 남원시와 함양군 경계에 솟은 삼정산은 북쪽에서 지리산 주릉을 마주하는 망대다. 하봉에서 천왕봉을 거쳐 노고단으로 이어지는 지리 주능선뿐만 아니라 노고단에서 만복대~고리봉~바래봉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까지 바라보여 지리산 최고의 조망대라 일컬어진다.
삼정산 자락에는 지리산에서도 유난히 사암이 많다. 맨 위쪽(남쪽) 도솔암(兜率庵)에서 영원사(靈源寺), 상무주암(上無住庵), 문수암(文殊庵), 삼불사(三佛寺), 약수암(藥水庵)이 능선을 따라 이어지다가 능선이 끝나는 널찍한 들녘에 실상사(實相寺)가 자리한다. 이 일곱개의 암자들을 잇는 산길은 고즈넉한 분위기 속에서 장쾌한 조망을 즐길 수 있어 불자들 뿐만 아니라 등산인들에게도 인기 높다.
◎ 지리산 칠암자 순례
불교 신자들이 칭하는 순례길이라고 불리는 곳이 우리나라에 세 곳이 있다. 설악산 백담사부터 출발해 영시암, 봉정암, 오세암을 돌아서 다시 백담사로 돌아 나오는 설악산 사암자 길, 오대산 월정사에서 출발해서 오대천을 따라 상원사를 거쳐 적멸보궁까지 올라가는 오대산 선재길, 그리고 지리산 음정 마을에서 출발해서 도솔암부터 3개의 사찰과 4개의 암자를 거처 실상사에서 마무리하는 지리산 칠암자 순례길이 바로 그곳이다.
그 중에서도 신도와 등산객들이 부처님 오신 날에 특정한 암자 구간을 묶어 걷는 순례길이 ′지리산 칠암자길′이다.
이 길은 지리산 마루금에서 북쪽으로 갈라진 삼정산 자락의 산허리에 점점이 박혀있는 일곱 개 절을 잇는 산길이다. 자세히 말하면 경남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의 도솔암과 전북 남원군 산내면 입석리에 있는 실상사 구간을 잇는 암자길이 그곳이다. 칠암자는 지리산 뱀사골 동쪽에 있는 삼정산(1,225m) 품에 있는 영원사, 삼불사, 실상사 등 3개의 사찰과 도솔암, 상무주암, 문수암, 약수암 4개의 암자를 말하므로 엄격하게 따지면 3사(寺) 4암(庵)이지만, 모두 깊은 산에 숨어 있는 절집 분위기여서 그냥 칠암자라 부른다.
칠암자 순례길은 지리산 안에서 또 다른 지리산을 보며 걷는 길이다. 암자와 암자를 잇는 순례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천왕봉 등 지리산 주 능선의 수려한 봉우리들을 한 눈에 담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 산행기
미국에 살고 있는 아들이 한국으로 잠시 들어와 함께 지내다보니 산행은 저절로 거르게 되고 거기에 더해 치과 임플란트 수술까지 계속 진행해야 하는 터라 산으로의 발걸음이 뜸하던 차에 온전히 쉴수 있는 주말을 맞아 벼르고 별러왔던 곳으로 산행을 떠나기로 합니다.
전날 저녁에 미리 꾸려놓은 배낭에다 냉장고를 뒤져 부드러운 먹거리를 갈무리하고서 잠들어 있는 아내가 행여 깰 새라 발뒤꿈치 들어가며 집을 나섭니다.
오늘 찾아가고자 하는 산행지는 부처님 오신 날이면 테마 형태로 찾았던 암자순례길로 늘 마음속으로 갈망해왔던 지리산 칠암자순례 산행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함양, 남원 경계에 있는 삼정산입니다.
포항에서 산행 날머리로 잡고 있는 남원 실상사까지의 거리가 거의 200km여서 자가운전으로 가기에는 다소 멀어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생각에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고 다녀오기로 마음먹고 대구-포항, 경부, 광주-대구고속도로를 거쳐 네비게이션에 입력해 놓은 실상사 입구에 도착하여 도로변에 있는 임시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주변 상가를 찾아 음정마을로 가는 버스 시간을 물으니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주차장 담벼락에 붙어있는 마천 개인택시 명함을 찾아 호출을 하게 됩니다.
10분여의 시간이 흘러 도착한 SUV개인택시에 몸을 싣고 함양군 마천면 음정마을 입구에 당도하게 됩니다. 15,000원의 택시비를 지불하고 잘 다녀오라는 인사를 받으며 신발끈을 조여 매고서 음정마을을 향한 걸음을 시작합니다.
도솔암(兜率庵)
해발 1,165m의 도솔암(兜率庵)은 해인사의 말사인 영원사의 부속 암자로 위치는 지리산 주 능선의 북쪽 삼정산 정상 아래에 있다. 뒷면에 도솔대가 형성되어 있고 아늑하고 수행하기 좋은 수행처로 도솔대의 도솔암·반야봉의 묘향대(암)·삼정산의 상무주암과 금대산의 금대암 등은 최고의 수행처로 알려져 있다.
도솔암은 영원사에 유명한 방광사리탑을 남긴 청매선사가 수행하던 유서 깊은 암자다. 서산대사 제자로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3년간 왜병과 맞섰던 청매선사는 지리산에서 가장 찾기 힘든 곳에 터를 잡아 평생을 수행했다. 그 절이 바로 도솔암이다. 많은 스님들이 도솔암을 찾아 나섰다.
현재의 화엄사를 일으킨 도광스님도 그 중 한 분이었다. 도법스님에 따르면 도광스님은 청매선사가 득도했다는 오도재를 비롯 도솔암을 찾아 온 지리산을 뒤졌다 한다.
도광스님이 청매선사를 찾아 지리산을 오르내린 까닭은 선사가 수행자의 모범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애송하고 경책으로 삼는 ‘십무익송(十無益頌)’ 게송에 선사의 풍모와 도력이 묻어난다. 청매선사가 지은 10가지 이익이 없다는 게송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마음을 돌이켜 보지 않으면 경전을 봐도 소용이 없다, 바른 법을 믿지 않으면 고행을 해도 이익이 없다. 원인을 가볍게 여기고, 결과만을 중요하게 여기면 도를 구하여도 이익이 없다. 마음이 진실하지 않으면, 교묘하게 말을 잘 해도 이익이 없다. 존재의 본질이 비어 있음을 달관하지 못하면, 좌선을 해도 이익이 없다. 야만심을 극복하지 못하면 법을 배워도 이익이 없다. 스승이 될 덕이 없으면 대중을 모아도 이익이 없다. 뱃 속에 교만이 꽉 차 있으면, 유식해도 이익이 없다. 한평생을 모나게 사는 사람은 대중과 함께 살아도 이익이 없다. 안으로 참다운 덕이 없으면, 밖으로 점잖은 행동을 해도 이익이 없다.”
신라시대 창건하고 청매선사가 수행했다는 도솔암은 한국전쟁 때 불탄 것을 1985년 무렵 정견스님이 스승 혜암스님을 모시고 수행하며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지리산 영원사(智異山 靈源寺)
영원사(靈源寺)는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지리산 중턱 해발 920m에 위치하고 있는 '영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 해인사 말사로서 신라시대의 고승이었던 영원대사께서 창건하여 영원사라고 했다는 고찰이다.
한때 내지리(內智異)에서는 제일 큰 사찰이라고 했다. 이 절 규모는 너와로 된 선방(禪房)이 9채에 100간이 넘는 방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도를 닦은 고승이 많았다고 한다.
고승들이 스쳐간 방명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실안록(祖室案錄)을 보면 부용영관(芙蓉靈觀), 서산대사, 청매(靑梅), 사명(四溟), 지안(志安), 설파 상언(雪坡 常彦), 포광(包光)스님등 당대의 쟁쟁한 고승들이 109명이나 이곳에서 도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매년 음력 9월18일 지장재일에는 109명 조사님들의 영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유명하다.
영원사가 그 위용을 잃게 된것은 여수 반란사건 때 반란군이 아군의 공격에 쫓겨 이곳까지 찾아와 절터를 아지트로 삼으면서 건물 등을 작전상 모두 불태워 없애면서 부터다.
1971년 10년 간 상무주암에 머물던 김대일(大日) 스님이 이곳으로 와서 복원했다. 1931년 경북 경주 건천읍에서 출생한 대일스님은 인곡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1947년 사미계. 1950년 구족계를 수지하고 제방선원에서 정진했으니 혜암스님과는 사형사제 지간이다.
영원사와 도솔암은 종정을 역임한 혜암스님을 빼고 말 할 수 없다. 영원사 인근 산과 능선 암자에는 혜암스님과 그 문손들의 땀과 발자취가 서려있다. 혜암스님 상좌인 해인총림 방장 원각 스님에 의하면 스님은 해인사 다음으로 지리산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1967년 해인사 유나가 된 이듬해부터 상무주암에서 정진하며 문수암 터를 찾아 복원했으며 영원사에 머물며 도솔암을 복원했다. 정견스님 능혜스님 등 제자들이 혜암스님을 모시고 수행하며 복원불사의 손발이 됐다. 영원사는 또 독립운동가이며 강백인 백초월스님의 출가사찰로 유명하다. 그 내력이 영원사 두류선원 앞 안내판에 적혀있다.
또한 이곳에는 많은 부도들이 있는데 원당형의 둥근 석탑이 5기가 있으며 대는 2층 탑신을 가진 조립형으로 되어 있다. 이들 부도들은 영원사의 유물로 추정되며 영암당탑, 설파당탑, 중봉당탑, 청계당탑, 벽허당탑, 청매탑 등 이름있는 스님들이 수도하던 곳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고승의 호를 딴 부도들이 있다.
선문염송설화(禪門念頌說話) 30권을 기록했다는 구곡각운대사의 사리를 보존했다는 상무주암의 필단사리 3층석탑이 방광(放光)했다는 이야기 등도 지난 날의 유서깊은 영원사의 선풍(禪風)을 말해주고 있다.
상무주암(上無住痷)
해발 1,162m에 위치한 상무주암은 삼정산에 있는 암자로 고려시대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수행하던 곳이다.
지금은 송광사 극람암 · 칠불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행하다가 1970년대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온 현기스님이 계신다. 40여 년간 은둔하며 정진해온 수행자다.
30여년 만인 2014년 조계사 대웅전에서 법문도 했으며 외딴 암자에서 홀로 기거하며 손수 밥을 짓고 밭을 갈면서 선농일치(禪農一致)의 정신을 수행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전당. 전각. 집)는 인법당(因法堂)만이 있으며, 절 왼편에는 작고 불완전한 삼층석탑 1기가 있다. 이 탑은 고려 말의 고승인 각운(覺雲)의 필단사리탑(筆端舍利塔)이다. 각운이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30권의 저술을 완료하였을 때 붓통 속에 떨어졌다는 사리를 봉안한 탑으로서 서광을 발하였다고 한다.
부처님도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경계(上)이고 머무름이 없는 자리(無住)라는 뜻이다. 영원사의 말사(末寺)로 알려져 있다.
스님 정신수행처로 출입금지는 물론이고, 알려지는 것을 꺼려 사진촬영 등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문수암(文殊庵)
문수암에는 도봉스님이 1984년 부터 수행하고 있는 사찰이다. 석축 위에 아담하게 세워져 있는 문수암 옆에 거대한 석굴이 있고 석간수도 흐른다. 이 석굴은 임진왜란 때 마을 사람 1,000여명이 숨었다고 전해지는 千人倔(일명 천용굴)과 늘 마르지 않고 흘러나오는 석간수로 이름난 한 폭의 그림같은 암자다.
천인굴의 크기나 전설, 유래는 정확히 조사되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문수암은 조계종 제10대 종정을 지낸 혜암(惠菴, 1920~2001)스님이 창건한 암자다. 혜암스님의 상좌 출신인 이곳 주지 도봉스님 한 분 계신다. 정면으로 삼봉산(三峯山 1197m)이 가운데 우뚝 솟아있다. 지리산에서 천왕봉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곳으로 문수암 현판도 상무주암처럼 경봉스님 글씨다.
삼불사(三佛寺)
문수암에서 삼불사까지는 0.8㎞거리 이내 거리다 . 삼불은 과거불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현세불인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미래불인 미륵불(彌勒佛)을 일컫는다. 초라한 여염집 모습을 한 삼불사는 조선시대에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비구니 참선도량이다.
약수암(藥水庵)
약수암은 실상사에서 남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지리산의 중북부능선의 삼정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1724년(경종 4년)에 천은스님이 처음으로 세웠고, 서영대사가 중수하였다. 1901년(광무 5)에 지월대사는 일당을 중수하였고, 1918년에 예암대유 스님이 개인 재산을 모아 보광전을 다시 세웠다.
1937년에는 함양의 불자 한정희의 시주금으로 중수하였으며, 1974년에 운영 비구니 스님이 두 번에 걸쳐 중수하였다. 경내에는 약수샘이 있어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나기 때문에 약수암이라 했다고 한다.
약수암에는 목조 팔작지붕으로 된 보광전과 목조 요사채가 있다. 보광전 안에는 1782년(정조 6년)에 만든 보물 제421호인 아미타목각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목각 탱화란 천이나 종이에 그리는 불화가 아니라 나무에 불상을 조각해서 만든 탱화를 말한다.
평상시 방문을 거절하는 출입금지 협조문이 붙어있다. 약수암은 현재 실상사 화엄학림의 비구니 스님을 위한 암자로 알려져 있다.
실상사(實相寺)
천년사찰, 호국사찰로 잘 알려진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 828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지장의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배운 뒤 귀국했다가 선정처(禪定處)를 찾아 2년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현재의 자리에 발길을 멈추고 창건했다.
증각대사가 구산선종(九山禪宗) 가운데 최초로 그의 고향인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절을 세운 것이다. 증각대사의 높은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이 절을 세울 수 있게 해줬고 왕은 태자선광(太子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했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禪宗)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고 그의 문하에서 제 2대가 된 수철화상과 편운(片雲)스님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이 전국에 걸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그 이후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화재로 전소됐다가 3차례에 걸쳐 중수 복원돼 오늘에 이른다.
세조 때(1468) 원인모를 화재로 전소됐다는 기록과 정유재란 때 왜구에 의해 전소됐다는 설이 동시에 전해지고 있다. 화재로 인해 실상사의 승려들은 숙종 5년(1680)까지 약 200년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했으며 절에는 철불, 석탑, 석등 등만 남아 있었다 한다.
그러다가 숙종 때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했다. 또 순조 21년(1821) 의암대사가 두번째 중건을 했으며 고종 21년(1884)에 월송대사가 세 번째 중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기서 제3중,창건을 하게 된 것은 고종 19년(1882) 어떤 사람들이 절터를 가로챌 목적으로 방화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상사는 6.25를 맞아서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공비들이 점거하는 등 또 한 차례의 수난을 겪게 됐는데 용케도 사찰만은 전화를 입지 않았다. 천년 세월을 보내오면서 호국사찰로 알려진 실상사에는 유독 일본, 즉 왜구와의 얽힌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앞서 언급한 사찰의 전소원인을 정유재란 당시의 왜구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는 부분에서도 일본과 관련된 전설을 엿볼 수 있다.
또한 약사전의 약사여래불은 천왕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천왕봉 너머에는 일본의 후지산이 일직선상으로 놓여져 있다 한다. 이 때문에 가람배치도 동쪽을 향해 대칭형을 하고 옆으로 강이 흘러 대조적이다. 이 절에는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는 구전이 있는데 이는 천왕봉 아래 법계사에서도 전해지고 있어 흥미롭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실상사 경내의 보광전 안에 있는 범종에 일본 열도의 지도가 그려져 있는데 스님들이 예불할 때마다 종에 그려진 일본열도를 두들겨 치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와 실상사가 흥하면 일본이 망한다는 구전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의 실상사는 사부대중이 함께 부처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일하며 생활하는 사부대중공동체다. 전형적인 산골 오지 마을이던 실상사 주변은 실상사로 인해 인구가 늘어났다. 귀농학교를 통해 정착한 농부와 생명평화살림을 운영하는 실무자들, 대안학교인 작은학교 교사 학부모 등 많은 도시인들이 실상사 품을 찾아 왔다. 이 모두 부처님 가르침으로 함께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을 발원한 도법스님 덕분이다.
실상사에는 백장암과 서진암, 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이곳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큰 사찰답게 신라시대의 수많은 문화재를 품고 있어 가히 문화재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백장암 3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설계를 하고 있어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공예탑이다.
문화유적은 수철화상능가보월탑(보물 제33호), 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보물 제34호), 석등(보물 제35호), 부도(보물 제36호), 삼층쌍탑(보물 제37호), 증각홍척국사응료탑(보물 제38호), 증각홍척국사응료탑비(보물 제39호), 백장암석등(보물 제40호), 철조여래좌상(보물 제41호), 청동은입사향로(보물 제420호), 약수암목조탱화(보물 제421호) 등 11점이 보존되어 있다.
지방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제45호), 위토개량성책(제88호), 보광전 범종(제138호), 백장암보살좌상(제166호), 백장암범종(제211호) 등 5점이다.
장구모양의 기둥에 8면의 창 위에 둥근 지붕을 얹고 연꽃으로 장식했고, 부처의 은총이 사방 팔방으로 뻗치기를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실상사의 주법당인 보광전은 1884년(고종 21)에 월송대사가 세운 것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건물 안에 모셔진 삼존상 중 본존불은 조선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좌우의 관음, 세지 두 보살은 원래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함께 봉안되었던 것으로 월씨국(베트남)에서 모셔왔다고도 한다.
현재는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소박한 모습으로 실상사를 찾는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조선후기의 건축양식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로써, 보광전 주변에는 83평을 추정케 하는 주춧돌이 남아 있어 굉장한 규모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91년 동국대 박물관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 의한 보광전 주변 발굴에서 이미 증명된 적이 있다.
불상 뒤에는 아미타여래도가 있고, 불단 오른편에는 1981년에 만든 신중불화와 산신불화가 있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 - 국가민속문화재 제15호.
장승은 마을 입구 또는 절 입구에 세운 사람 머리 모양의 기둥으로 예로부터 사찰이나 지역간의 경계를 나타내거나 이정표 또는 수호신 역할을 했다.
남원 실상사 석장승은 실상사 가는 길목에 있는 시내를 건너기 전 2기, 시내를 건너 2기가 있었으나, 시내를 건너기 전 2기중 1기는 1936년 홍수에 쓸려 내려가 현재는 1기가 남아 있다.
장승들의 크기는 높이 2,5~2,9m 너비 40~50cm 가량이다.
모두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으며, 큼지막한 주먹 코와 튀어나온 둥근 눈, 커다란 귀가 특징적이다.
몸체는 각각 상원주장군과 하원당장군 이라는 글자와 옹전 3년 을사삼월입 이라는 명문을 새겨 놓아 조선 영조 1년에 세운 것임을 알수 있다.
장승은 보통 남 녀로 배치해 음향의 조화를 꾀하는데 이곳 장승은 모두 남자 형태이다.
장승들의 표정이 험상 굿기는 커녕 오히려 익살스럽고 해학적이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숲내음과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가 너무도 상쾌하고 감사했었고, 오르락내리락 돌길에 그 경사가 만만치 않았지만 오가는 이들이 없어 완전한 자유를 누리며 걸었던 행복한 칠암자길이기에 마음은 더없이 상쾌했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즈음해서 좋은 날씨속에 지리산과 부처님이 내어준 칠암자 순례길은 나를 채우고 또 내려놓는 은은한 감동의 감사함이 넘치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 행복한 마음 가득 안고서 해탈교를 건너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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