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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와달이 사는 집

부처님 오신 날에 다시 걸어본 은해사 5암자 순례 산행 본문

◈ 산행이야기/☆ 2023년도 산행

부처님 오신 날에 다시 걸어본 은해사 5암자 순례 산행

해와달^^* 2023. 5. 28. 10:05

♧ 산행일자 : 2023. 5. 27 (토)   날씨 - 흐리고 이따금 비
♧ 산행장소 : 경산시 와촌면, 영천시 청통면 일원
♧ 산행인원 : 오늘도 변함없이 홀로...
♧ 산행코스 : 경산갓바위주차장 입구 감나무집식당-은해능선-묘봉암-중암암-삼인암,만년송-운부곡-운부암-운부고개-백흥암-560.3봉(폐헬기장)-기기암-629.2봉(삼각점)-은해능선-전망바위-감나무집식당 (원점회귀)
♧ 산행시간 및 거리 : 5시간15분, 11.77km(식사 및 사찰 구경 포함. GPS 기준)

 

 

 

◈ 산행기

불기 2567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일찌감치 봉축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오어사로 가버린 집사람이 차려놓은 아침을 먹으면서 곰곰히 생각을 해 봅니다.

사실 생각하고 있었던 오늘의 계획은 통도사를 함께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하루 종일 행사가 잡혀있다는 아내의 말에 계획은 다 틀어져버리고 홀로 집에 있으려니 무료함을 달랠 길이 없어 서둘러 배낭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기해 매년 해오던 암자순례 산행은 지리산 7암자를 다녀온 것으로 마무리를 한 상태지만 다른 곳으로 한번 더 다녀오자는 생각에 오래 전 걸어보았던 은해사 산내 암자들을 떠올리며 차를 몰아 경산 갓바위주차장으로 달려갑니다.

은해사가 품고 있는 8암자 중 따로 떨어져 있는 거조암을 제외하고 7암자를 오래 전에 둘러 보았지만 오늘은 은해사 입구의 혼잡함을 피하기 위해 경산갓바위주차장에서 시작하여 은해능선을 올라 은해사 경내 가까이에 있는 서운암과 백련암은 건너뛰고 묘봉암, 중암암, 운부암, 백흥암, 기기암 다섯 암자를 차례로 찾아볼까 합니다.

이미 몇 차례 찾아본 곳들이긴 하지만 부처님 오신 날에만 개방하는 백흥암을 한번 더 구경하기 위한 마음이 더해져 갓바위주차장을 향해 달려가니 너른 주차장은 이미 만차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네요.

하는 수없이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변에 줄지어 서있는 차량 뒤꽁무니를 따라 주차를 해놓고 출발 포인트로 잡은 감나무집식당을 향한 걸음을 시작합니다.

 

산행궤적
갓바위주차장에서 멀지 않은 오늘 산행의 시작포인트인 감나무집식당입니다.
산불감시초소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들어갑니다.
그동안 은해능선을 올라붙기 위해 가파르지만 짧은 첫 번째 등로를 이용했었는데 오늘은 편안한 길을 따라 가기로 합니다.
삼거리갈림길. 산행을 마치고 내려올 때 다시 만나게 됩니다.
'때죽나무'
산행을 시작한지 25분 가량 지나 올라선 은해능선. 맞은편 묘봉암 이정표를 따라 내려갑니다.
묘봉암에는 법회를 마치고 이어질 산사음악회 준비가 한창이네요.
예전 즙을 짜서 복용했던 '컴프리'
건물 뒤쪽의 바위가 건물을 치고 있는데 원통전을 지을 때 이 바위를 비껴 짓지 않고 껴안아 지은 탓에 원통전 내부에는 이렇게 커다란 바위가 법당 안에 턱 하니 자리하고 있답니다.

 

 

묘봉암(妙峰庵)
묘봉암은 833년(흥덕왕 8)에 심지(心地)왕사께서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오랫동안 관음기도처와 수행처로 전승되어 오다가 1485년(성종 16)에 죽청(竹淸)과 의찬(義贊)이 중창하였고 1780년(정조 4)에 다시 중창하였으며, 최근에 6·25사변 당시 폐사된 것을 법운(法雲)스님께서 중수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관음기도와 신신기도처로 유명하고 과거에는 나라에 큰일이 있거나 큰 절에 행사가 있을 때에는 은해사 대중스님들이 모두 올라오셔서 산신기도를 올렸다고 전해지며, 산령각 옆 석간수는 불치의 병도 낳게한다는 신비의 약수로 유명하다.

원통전은 과거 석굴에서 기도를 해왔던 곳으로 석굴 위에 건물을 지은 것이다. 높이가 매우 높아 정사각형의 모양에 가까운데 이는 내부에 큰 돌이 뻗어 있어 그 아래에 관세음보살상을 안치하고, 왼쪽 위에 2층을 만들어 석가모니불을 봉안하였기 때문이다. 은해사의 산내 암자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기도 하다.

 

법회가 진행중이어서 조용히 빠져나와 중암암으로 향하며 담아봅니다.
함박꽃(산목련).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자리잡은 중암암의 원경입니다. 우리나라 3대 기암(奇庵) 중의 하나인 곳이죠.
참고로 3대 기암은 관악산 연주대, 금오산 약사암, 팔공산 중암암입니다.
운부능선 너머로 신령면 소재지가 보이네요.
예전에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선방이었는데 지금은 삼성각(三聖閣), 관음전(觀音殿)으로 바뀐 모습입니다.
사람 하나 드나들기에 딱 좋은 돌구멍이 보이는데 어둡고 캄캄한 석굴이 아니고 맑은 햇살이 들어오는 대문 같은 돌구멍이 중암암(돌구멍절)으로 들어가는 입구입니다. 자연석이 서로 맞대고 있는 아주 멋진 일주문이라 할수 있지요.
돌구멍으로 들어서면 감추었다 내놓은 듯 작은 암자가 벼랑에 서 있는데 바로 중암암 법당입니다.

 

 

중암암(中巖庵)
산사를 찾다 보면 정말 기상천외한 곳에 자리한 산사에 입이 벌어지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대구의 진산인 팔공산에 있는, 일명 돌구멍 절로 알려진 중암암(中巖庵)이 그런 산사 중의 하나다. 돌구멍을 통하여 절을 드나들게 되어있고, 우리 나라에서는 제일 깊다는 해우소(화장실)와 보일러실도 돌구멍 속에 있다. 뿐만 아니라 돌구멍 구멍들이 이런 저런 용도로 활용되고 있으니 제격에 딱 어울리는 절 이름이다. 이런 절, 보는 것만으로도 입을 벌리게 하는 절들은 그 규모가 어찌 되었건 찾아가 보는 것만으로도 산사 찾는 맛을 더해 준다.

중암암은 은해사 산내 말사다. 은해사 일주문을 통하여 4Km쯤 들어가야 갈 수 있는 중암암은 은해사의 산내암자로서 신라시대 화쟁국사 원효(元曉)스님 (617~686)께서 토굴을 짓고 정진한 곳으로 널리 전해진 곳에 신라 광덕왕 (光德王) 9년 (서기 834년)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하였다. '중암암'이라는 이름보다는 한문을 풀어 말하는, 일명 돌구멍절로 더 알려진 조그만 암자다.

 

중암암의 오래된 뒷간... 그 사이에 좌측 문짝은 달아나고 없네요.

 

 

이곳의 해우소에는 재밌는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옛날 해인사, 통도사, 중암암에서 수행하던 세 도반 스님이 한자리에 모여 자기가 있는 절 자랑을 했다고 합니다.

먼저 통도사 스님이 '우리 절은 법당 문이 얼마나 큰지 한 번 열고 닫으면 쇳가루가 한 말 석 되나 떨어진다.'라고 절의 규모를 자랑하였답니다.

이어 해인사 스님이 '우리 절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가마솥이 하도 커서 동짓날 팥죽을 쑬 때는 배를 띄워야 저을 수 있다.'라고 자랑했다는군요.

두 스님의 자랑을 듣던 중암암 스님은 절의 규모로는 자랑할 게 없자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 절 뒷간은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정월 초하룻날 볼 일을 보면 섣달 그믐날이라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라고 자랑을 하여 세 스님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고 합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332호인 은해사중암암삼층석탑 (銀海寺中巖庵三層石塔)

 

 

은해사 중암암 삼층석탑은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조계종 제10교구 본사 은해사 내 암자인 중암암에 위치하고 있다. 암벽 아래에 암석 틈에 붙어서 불당이 있어서 암자 이름이 중암암(돌구멍절)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 전한다. 불당지 한켠에는 불당 창건 때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의 전형적인 어골문(魚骨文) 기와 조각이 쌓여 있다.


이 석탑은 높이가 약 3m로, 석탑의 양식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되어 있다. 잘 다듬은 장대석 4개를 결합하여 지대석으로 깔고, 그 위에 2층 기단과 3층의 탑신부를 올렸다.


지대석은 규격을 달리하고 있으나 잘 다듬은 4개의 장대석을 정사각형으로 결합시켜 깔았다. 기단은 2층으로 상·하기단의 각 면석에는 각 면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고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은 모두 정육면체로서 층위가 올라갈수록 높이가 낮아지는 것 외에는 동일한 양식이다. 옥개석은 모두 낙수면의 경사가 심하고 우동과 전각(轉角)의 반전이 심한 편인데, 옥개받침은 4단에서 3단으로 줄어들었다. 보륜석은 노반 위에 얹혀 있는데 반구 모양이며, 가운데에는 찰주공(擦柱孔)이 노반에 이어서 관통하고 있다.


탑의 양식은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가 약화되었고, 옥개석 낙수면의 경사가 심해지고 전각의 반전도 많아진 편이다. 또한 전체 규모가 작아져 장식성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석탑의 조성시기는 이곳 암자의 창건시기와 같이 고려초기로 추정된다. 손상을 입지 않았고 보존이 깨끗하여 가치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중암암 극락굴.

 

화엄굴이라고도 하며 김유신 장군의 설화가 깃든 곳입니다.
암튼 일단 들어가면 앞쪽의 좁은 틈으로 빠져 나가야 하는 불안감이 확.. 드는데 다행히 중간쯤에서 우측으로 바위틈이 있고 몸 하나는 빠질만한 공간이 있는데 이곳을 나오면 바로 중암암 위 석탑을 만나게 됩니다.

 

삼인암(三印岩)

 

중암암 법당 위쪽으로 커다란 바위 세 개가 멋지게 이어져 있는 곳에 닿게 되는데, 첫 번째 바위에 음각으로 커다랗게 삼인암(三印岩)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시집간 새댁이 아이를 못낳다가 이곳에서 기도를 하여 삼형제를 낳았다는데...

 

배낭을 내려놓고 사람 하나 겨우 지나갈 정도로 딱 붙어있는 커다란 바위 틈새를 만세를 부르며 통과해 나가면 두 개의 바위 틈 사이로 내린 뿌리가 엄청나고 상당한 수령이 있어 보이면서 기품이 넘치는 만년송(萬年松)을 만나게 됩니다.
흙 한줌 없는 바위 틈에서 인고의 세월을 버텨온 나무를 보고 있노라니 모진 생명력이 보이는 듯하고 그런 모짐을 헤치며 생존하였기에 더없이 숭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만년송을 구경하고 바로 아래로 나있는 장군수 방향으로 내려서니 길의 흔적이 보여 무작정 내려섭니다. 다행히 간간이 나타나는 시그널을 등대삼아 운부암으로 향합니다. 사실 만들어간 궤적과 어긋나긴 하지만 다닌 흔적이 남아 있어 도전해보는 중입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거의 없는 심산유곡이지만 아마도 7암자 순례를 하는 산꾼들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희미한 족적을 따라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지만 긴장의 끈은 놓을 수가 없네요.
가끔씩 나부끼던 시그널도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GPS의 지도에 있는 궤적을 보아가면서 숲을 헤쳐나가니
운부곡의 맑은 물소리가 더없이 청아하게 들려오는 계류를 건너게 되고
팔공산둘레길임을 알리는 이정목을 만나게 되니 더없이 반갑네요. 망망대해를 빠져 나온 기분입니다.
잠시 후 또 하나의 이정목을 만나게 되는데 운부암을 가려면 이정표에 없는 좌측길로 가야합니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 더없이 멋진 등로를 따라 진행하니 운부암으로 들어서게 되고 공양간 앞을 지나 찾아온 길손에게 내어주는 맛난 떡과 차를 대접받고 진행중인 법회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조심스레 법당으로 향합니다'
중앙 원통전(圎通殿), 좌 요사채 우의당(禹儀堂), 우 선방 운부난야(雲浮蘭若)

 

 

운부암(雲浮庵)
조계종 은해사의 산내 암자인 운부암은 711년(신라 성덕왕 10)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절을 지을 때 상서러운 구름이 일어났다 하여 운부암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몇 차례의 화재로 인해 전소와 중건을 거듭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마당에 들어서자 이미 '문자'를 떠난 지 오래인 편액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운부난야(雲浮蘭若)', 문자로는 읽어낼 수 없는 공간이다. 운부암 선방의 당호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준말로 적정처(寂靜處), 무쟁처(無諍處)를 뜻하며, 수행하기 적합한 곳을 말한다.
그래서일까 이곳 운부암은 많은 선지식이 거쳐 갔다. 경허, 만공 스님으로부터 용산, 운봉, 경봉, 향곡, 한암, 팔봉, 청담, 성철 스님 등 많은 선지식들이 정진했다.
특히 성철(性徹;1912~1993) 스님과 향곡(香谷;1912~1978) 스님은 이곳에서 만나 평생 도반이 됐다.

 

운부암의 누각인 보화루(寶華樓).

 

 

보화루(寶華樓)
금은 보화를 품고 있는듯한 이름이지만 색바랜 옛모습 뿐이다. 화려한 단청은 사라지고 처마엔 세월이 들러붙어 있다.
어느 사찰에서나 처럼 누각이 부처님의 터를 호위무사처럼 가로막고 있다.
누각인 보화루는 1862년 원통전과 함께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운부암중건기'와 <조선사찰사료>에 나와 있는데 현존하는 건물은 1900년에 중건된 것이다. 보화루라는 이름은 화엄학(華嚴學) 또는 화엄경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은해사와 말사 암자인 백흥암과 군위 지보사에도 보화루라는 누각이 있다.

 

 

북마하 남운부(北摩訶 南雲浮)
운부암은 근세 한국의 조사 스님들의 근본 수행처로 전해지고 있고, 남한의 2대 중심선원으로 구미 태조산 도리사와 팔공산 운부암을, 북한에는 내금강 마하연과 묘향산 상원암을 꼽았다고 하는데 남,북 각각 하나씩만 꼽으라 하면 북한에는 마하연을 남한에는 운부암을 꼽았다고 하여 북마하 남운부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운부암을 거쳐 간 조사스님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운부암 불이문 앞 연못 위에는 따뜻하고 오래된 눈동자의 달마 스님이 서 있습니다.

 

형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원하지 못한게 구름...
인간의 욕망도 구름과 같습니다.

"구름이 비가되어 내리듯
덧없는 욕망을 쫓는데 허비하지 말고
스스로 불성을 깨치라"고
말없이 가르침을 전하는 암자.

운부암(雲浮庵)...

팔공산 자락에 운부암이 내려앉아 있습니다.

 

'참조팝나무'
운부암을 나와 도로를 따르다 문득 지도를 비교해보니 길이 있겠다 싶어 우측 임도로 들어섭니다. 지난 7암자 산행 때는 좀더 나아가서 개울을 건너 산길을 따랐었는데 새로운 길에 대한 궁금증이 발동되어 무작정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의외로 길은 뚜렷한데다 운치가 있네요. 폭닥한 산길따라 걷노라면 차가 다닐 수 있는 작은 임도를 만나게 되는데 좌측은 조금전 운부암에서 은해사로 가는 찻길을 만나게 되니 반대쪽인 우측 방향으로 예전의 궤적과 비교를 하며 진행하다 시그널 하나를 발견하고 계류를 건너 다시 숲으로 들어서니 운부곡에서 만났었던 선답자들의 시그널이 달려 있네요.
선답자들의 흔적을 따라 나오니 예전 운부암에서 백흥암으로 진행했던 산길과 다시 만나게 되고 새로이 조성된 팔공산둘레길을 가로질러 맞은편 등로를 따라 진행해 나갑니다.
약 5분 가량 오름을 극복하고 도착한 태실봉 갈림길인 운부고개. 좌측의 철조망 아래로 내려가면 백흥암으로 가는 길입니다.
고즈넉한 산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백흥암의 뒷담으로 내려서게 되지만 전에 없던 휀스가 둘러쳐져 있어 출입을 막아놓았네요.
하는 수없이 우측 산길로 들어서 허리길을 따라 잔가지들의 성가심을 헤쳐가면 농장 앞을 지나게 되고 다시 건너편 산으로 올라서면 중암암에서 이어져오는 등로에 접속하게 됩니다.
백흥암 뒤쪽의 대숲을 지나 잠시 길을 벗어나 백흥암 방향으로 다가서면 철망 너머로 백흥암의 전체 전경을 담을 수 있답니다.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은 극락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활짝 열려 있는 보화루입니다.

 

 

보화루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것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 '山海崇心(산해숭심)'이라는 현판으로 원본은 성보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산해숭심'은 청나라의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이 제자인 추사에게 학문 태도를 격려하며 보낸 편지에 적힌, '옛 것을 고찰하여 오늘을 증명하니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攷古證今山海崇深)'는 잠언 구절의 일부다. 추사는 스승의 편지를 읽고 이 구절을 인용해〈실사구시잠(實事求是箴)〉을 지었다고 한다. '산해숭심'은 또 "부처님의 자비와 지혜가 한없이 높고 깊은 산과 바다와 같다"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출처 : 불교저널)

 

백흥암은 연중 초파일과 백중날에만 산문을 개방하는 비구니 선방이며 계율과 수행이 엄격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암자입니다.

 

 

백흥암(百興庵)
사기(史記)에 의하면 이 절은 혜철(惠徹)국사께서 861년(경문왕 1년)에 착공하여 873년에 완공하였으며 지금은 은해사에 소속된 절이지만 절이 지어질 당시에는 별개의 사찰로 주변에 잣나무가 무성하여 백지사라 하였다고 한다.
조선 중종 16년(1521) 인근 팔공산 태실봉 기슭에 아들 인종의 태를 보관하면서 중요한 것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막중수호지소'로 지정되어 국가의 지원을 받아 번성하였고 명종 1년(1546)에 낡은 건물을 새로 고쳐 지으면서 백흥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주요 전각으로는 극락전, 명부전, 영산전, 산신각, 심검당, 보화루 등이 있어 암자라고 하기엔 상당히 규모가 크다. 극락전은 보물 제790호, 극락전 수미단은 보물 제486호, 극락전 감로왕도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9호로 지정되어 있다.

 

백흥암 극락전 아미타 삼존불과 아미타 삼존도

 

 

백흥암 수미단(百興庵 須彌壇)

수미단이란 상상의 산인 수미산 형태의 단을 만들고 그 위에 불상을 모시는 불단를 말한다.
영천 은해사 백흥암 수미단(永川 銀海寺 百興庵 須彌壇)은 극락전에 있는 높이 125㎝, 너비 413㎝의 조선 후기에 만든 불단이다. 앞쪽 면은 5단으로 되어 있으며, 각 단도 5등분 되어 각각 직사각형 모양이다. 가장 위에 있는 단은 안상문을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제2단은 봉황·공작·학·꿩 등을, 제3단은 용·어린아이·물고기·개구리 등을 매우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제4단은 꽃잎 속에 있는 코끼리·사자·사슴 등을 조각하였고, 가장 아래단의 양쪽 끝에는 도깨비 얼굴을, 가운데 부분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각 단에 있는 새나 동물의 배열이 특색 있고, 조각기법도 매우 우수하다. 이런 특징이 있는 불단은 조선 후기 작품으로 더러 남아 있지만, 이 불단은 그 중에서도 대표되는 작품으로 가치가 있다. (출처: 문화재청)

 

평소에는 고요속에 묻혀 있을 명부전과 무이당이 오늘은 찾아온 신도들로 북적입니다.

 

無二堂이란 말은 법화경 ‘무이역무삼(無二亦無三)'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로, '성불(成佛)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하나요. 이도(二道), 삼도(三道)가 없다.'라는 뜻입니다. 오직 하나뿐인 깨달음을 향해 매진하는 수행자의 굳은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백흥암 가장 윗쪽 돌계단과 축대 위에는 영산전과 산신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단청도 없이 가장 수수하고 소박한 모습이 오히려 더 멋스럽네요.
'끈끈이대나물'
'금낭화'
백흥암을 빠져나와 중암암으로 가는 차도를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면 뚜렷한 등로를 만나게 됩니다.
그동안 한번도 걸어보지 못한 백흥암에서 기기암으로 가는 길은 오래 전부터 있었던 걷기 좋은 산길인것 같네요.
백흥암 입구 삼거리에서 20분 가량 걸어 도착한 능선 삼거리.
곧이어 만나게 되는 기기암갈림길. 먼저 560.3봉을 다녀올까 합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되는 바위군락에 올라 막힘없는 멋진 조망이 펼쳐지는 풍경을 맛보게 됩니다.
묘봉암과 중암암이 시야에 들어오고 가운데 멀리 은해봉이 우뚝하고 멀리 삿갓봉과 코끼리바위능선이 길게 뻗어있는 모습도 볼수 있네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폐헬기장이 있는 560.3봉. 이곳에서 중암암에서 얻은 떡과 준비해간 바나나와 아이스커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합니다.
기기암으로 내려갈 수 있는 지름길이 있을까 싶어 유심히 살피며 걷다가 바위군락이 있어 올라가 담아본 기기암 전경. 건너편으로 하산길에 만나게 될 은해능선과 삼각점이 있는 629봉(우측)이 보이는군요.
지나왔던 기기암 삼거리에서 허리길을 따라 내려오면
근 7년 만에 다시 만나는 기기암 표석을 사진에 담고서 기기암으로 들어섭니다.
'자주달개비'
비구스님들의 참선도량으로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담장이 둘러쳐진 선방을 카메라에 담고 기기암 법당으로 향합니다.
기기암을 찾는 불자들을 맞는 기기암 소속 신도분들이 내어주는 도시락을 감사히 받아들고 잠시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다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법당 뒤쪽의 산신각으로 나있는 산길을 따라 산행을 이어갑니다.

 

 

 

기기암(寄寄庵)
은해사골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이 암자는 팔공산에 많은 절이 창건되고 마애불상이 집중되어 불교 성지로 변하는 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절 가운데 창건 연대가 가장 빠르고 실제 기록도 남아있는 사찰입니다.
이 사찰은 애장왕때 국사로 봉안된 정수(正秀)스님이 816년(헌덕왕 8)에 국왕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하면서 안덕사(안덕사) 또는 안흥사(安興寺)라고 하였으나, 고려 명종 16년(1186년) 기성(기성)대사가 머물면서 사찰 이름을 '기기암'으로 바꿔 불렀다고 하는데 당시 이 사찰에는 60여 명의 승려가 살았다고 합니다.
1546년에는 쾌선스님이 중건하였고 다시 1823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당우로는 요사와 법당을 겸한 건물 1동이 있으며 선방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에 팔작지붕 건물로 근래에 조성되었습니다.
이 암자는 '신기사바 심기극락(身寄娑婆 心寄極樂)'이라 하여 '몸은 비록 사바세계에 있으나 마음은 극락에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편안한 수행처인데 현재 선방에는 비구스님들이 참선 정진 중입니다.

 

오래 전 거꾸로 내려왔던 길을 오늘은 되짚어 오르니 기억에도 가물거리고 흔한 시그널도 없어 그저 감으로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그나마 예전 걸었었던 궤적을 비교해가며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애를 써가며 20여분을 오르니
기기암삼거리에서 이어져 온 등로와 합류를 하게 되고 눈길을 끄는 커다란 소나무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후에
곧이어 만나게 되는 삼거리에서 삼각점이 있는 629봉을 다녀오기로 합니다.
삼각점 하나 덩그러니 앉아있는 629봉을 찍고 다시 삼거리로 되돌아 갑니다.
예전 7암자 순례산행 때도 찾았던 전망바위입니다.
갓바위부처님이 계신 관봉(우측)과 그 좌측으로 용주사가 시야에 들어오네요.
그리고 정면으로 바라본 환성산(우측)과 무학산 능선. 앞쪽으로는 명마산 능선입니다.
이정표가 서있는 오늘의 하산루트입니다.
아침 나절 만났었던 갈림길과 재회를 하고 부드러운 산길따라 내려가면
산불감시초소가 있는 도로변으로 내려서게 되고 오른쪽의 감나무집식당 입구에서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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