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코스 : 경주시 암곡동 왕산마을버스정류장-암곡4길-임도 진입-옛 도투락목장-루나엑스골프장-시경계길 합류-대골갈림길-안항사갈림길-옛 오리온목장-무장산갈림길-무장사지삼층석탑-암곡탐방지원센터-왕산마을버스정류장
♤ 산행시간 및 거리 : 4시간 50분, 18.58km (식사 및 휴식 포함. GPS 기준)
◈ 산행기
지난 주에 이어 3일간의 황금같은 주말을 맞았지만 하루 종일 내리는 비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다 휴일 근무를 조기에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와 전날 베이커리에서 구입을 해둔 빵 몇 개와 물 한병 챙겨넣고 7번 국도를 달려 경주로 차를 몰아갑니다.
오늘의 산행지는 가을이 오면 전국 각지에서 찾아드는 등산객들로 몸살을 앓는 경주시 암곡동 왕산마을로 잡았습니다. 억새 산행지로 이름난 동대봉산 무장봉의 일반적인 들머리인 곳이지요. 하지만 무장산은 2주 전 주말에 다녀왔기에 오늘은 다른 코스로 걸어볼 생각으로 찾아가는 길입니다.
경주 강동면 왕신리를 지나 천북 화산불고기단지를 통과해 물천리, 손곡동을 잇달아 지나고 암곡동의 첫 마을인 대성마을을 거쳐 한적한 도로를 달려가니 통제요원들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며 도로 가장자리에 주차를 해놓고 셔틀버스를 이용하라고 하는군요. 하는 수없이 차를 세워놓고 배낭을 들쳐메고 때마침 도착한 버스에 올라 요금을 지불하려고 지갑을 찾는 순간... 아뿔싸~ 집에 지갑을 두고 와버렸지 뭡니까... 휴대폰의 페이로 결재하려고 하니 사용할 수 없다는 멘트에 그만 당황이 되더군요. 수 km의 거리를 걸어 가야겠다는 생각에 버스에서 내리려고 하니 버스기사가 그냥 타고 가라는 친절을 베푸시는군요. 고맙고 황망한 마음으로 도착한 왕산마을버스정류장에서 다시금 감사하다는 인사를 남기고 버스에서 내려 산행준비를 합니다.
산행 후에 차량회수를 할 생각을 하니 슬슬 걱정도 되지만 그때 가서 생각하자며 무장산을 찾는 각양각색의 등산객들과 함께 걷다가 만원사례가 따로 없는 주차장 입구에서 등산객들과 떨어져 홀로 좌측의 시멘트도로를 따라 도투락목장 방향으로 진행해 나갑니다.
신라 제 39대 소성왕(재위 799∼800)의 왕비인 계화부인(桂花夫人)이 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을 만들면서 그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비이다. 1915년 주변에서 발견된 세 조각의 비석 파편에 새겨진 글을 통해 ‘무장사아미타조상사적비’임이 밝혀져 이곳에 무장사가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무장사는 신라 제 38대 원성왕의 부친인 효양이 그의 숙부를 추모하여 창건하였다고 한다.
비는 전체적으로 파손되어 비몸돌은 다른 곳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 절터에는 부서진 비받침과 비의 머릿돌만이 떨어진 채로 남아 있다. 비받침은 얼굴형상을 알 수 없으나 2좌로 구성된 점이 특이하다. 등 중앙에 마련된 잘려진 비좌(碑座)는 비몸을 직접 끼워두는 곳으로 사각형이며, 네 면에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조각하였다.
잘려진 머릿돌에는 용이 구름속에서 앞발로 여의주를 잡고 있는 조각이 있고, 왼쪽 면에는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의 조사기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다. 이 석비는 통일신라 전기에 만들어진 경주 태종무열왕릉비(국보)를 제외하고 그 이후 머릿돌이 남아 있는 예가 드문 상황에서 당시 머릿돌의 변화과정을 살필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다.
경주 무장사지 삼층석탑 (慶州 鍪藏寺址 三層石塔) - 보물 제126호
무장사터는 경주시에서 상당히 먼 거리에 있는 깊은 산골에 있으며,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매장한 곳이라는 뜻으로 ‘무장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즉 병기가 필요없는 평화스러운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결연한 의지가 이 절을 창건하는데 큰 힘이 되었고, 또한 절 안에 3층석탑을 세우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석탑의 양식이다. 아래층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기둥과 가운데기둥 2개를 새겼고, 윗층 기단은 동그란 안상(眼象)을 각 면에 2개씩 조각하였다.
탑의 중심부분인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1층 몸돌은 조금 높은 편이다. 몸돌의 각 모서리에는 층마다 기둥 모양이 조각되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각 층의 지붕돌은 크기의 줄어든 정도가 적당하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5단이며, 처마는 직선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부드럽게 살짝 들려있다.
1층 몸돌이 조금 높지만 간략화가 심하지 않고, 기단부에 새겨둔 안상은 양식상 시대가 내려옴을 의미하므로 9세기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무너진 채 깨어져 있었던 것을 1963년 일부를 보충하여 다시 세웠다.